“오늘 밤 잠 못 드는 건 해지킴을 위함이 아니니
올봄에 별 탈이 없어야 꽃구경을 할 수 있으리”
- 『무명자집(無名子集)』 중에서 -
기미년(己未年) 첫 새벽. 동트기 전인 터라 밖은 아직도 칠흑 같이 캄캄하건만, 숭릉(崇陵) 전사청(典祀廳)을 나서는 백발의 사내가 있다. 한밤중에 도성 서쪽으로 말을 몰아가노라니 ‘먼 숲에서는 첫닭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늘여 세운 횃불에 까마귀들이 흩어진다’. 다시 생각해봐도 지난밤은 참으로 분주했다. 수세(守歲)를 하는 밤이자 절기가 바뀌는 신령한 밤이었으므로. 다가올 새해에 대한 불안과 기대는 잠시 접어두고, ‘재계를 정갈히 해서 정성을 다해’ 예를 올려야 했다.
숭릉 전경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디 전사관(典祀官)이란 제사용품을 관장하는 궁내부(宮內府)의 임시관직 중 하나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에 큰 제례(祭禮)가 있을 때면 청소부터 물건 조달 및 설치, 제기(祭器) 세척까지 여러 일을 관장해야 했다. 58세라는 노년기의 제야(除夜)를, 그러한 말단관직으로 마무리해야 했던 처연한 감정을 이루 말할 수 있으랴. 하지만 ‘뭇 영령들이 지켜주는’ 전사청에서 새해맞이 의식을 치르고 나니, 마음속에는 공경이 가득하다. 한참을 달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말단관직의 고단함을 시로 남기며 익살스럽게 극복해본다. ‘새봄을 맞으니 눈길이 가물가물하다’고. 그리고 ‘올해는 수세(守歲)를 잘했노라’고.
삼조삼삭(三朝三朔), 한 해와 한 달, 하루가 바뀌는 시간. 그 시간을 시로 남긴 전사관의 호(號)는 무명자(無名子), 이름은 윤기(尹愭, 1741~1826)였다. 18~19세기의 문인으로 활동한 그는 뛰어난 글재주로 촉망받던 영재였다. 스물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4)의 제자가 되어서 서른셋의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가 남긴 여러 시 가운데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무오년(戊午年, 1798)에 유행한 독감(毒感) 현상을 관찰하고 쓴 시다. 필자가 73호 원고에서도 한 차례 소개한 바 있다.
돌림감기라 이름 붙였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네
열흘 만에 천하에 퍼져 풍우 같은 기세로 몰아쳤네
… (중략) …
듣자니 중국에서 시작하여 처음엔 더 많이 죽었다지
여파가 조선에 미쳐 곳곳마다 맹위를 떨쳤네
- 『무명자집(無名子集)』 제4책 중에서
정조 22년 겨울부터 23년 봄까지 조선에는 큰 독감이 유행했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사망자가 12만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진휼청(賑恤廳)의 구활(救活) 지시를 내렸고, 팔도(八道)의 봄철 군사 훈련을 정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구호 및치료, 매장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이들에게 2품 또는 3품 정도의 품계를 내리기도 했다[정약용(丁若鏞, 1762~1836), 『목민심서(牧民心書)』]. 어찌보면 요즘의 코로나19 상황과 유사한, 중국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민심을 불안케 하고 대혼란을 초래한 국가 차원의 재난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상을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시로 남겼다.
무명자집 (출처: 서울특별시 홈페이지 정보소통광장)
남다른 관찰력과 빼어난 문장력을 지닌 문인답게 절기를 맞이하는 민간(民間)의 풍경을 관찰하고 그 소회를 시로 남기기도 했다. 섣달그믐과 정월 초하루에 쓴 시만 해도 12세 무렵부터 30여 편에 이를 정도다. 한 해 한 해를 맞이하면서 느꼈던 소회를 시로 담아냈다. 각 작품을 곱씹어보고 공감해가다 보면, 그의 성장과정과 더불어 조선의 새해맞이 풍경까지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밤새도록 즐겁게 놀이하고, 곳곳마다 담소 소리 시끄럽네
굿을 하여 귀신을 쫓고, 해 바뀌는 건 말달리듯 빠르네
횃불 늘어놓고 백주(栢酒)와 초주(椒酒)를 마시니,
설날 상차림엔 부추와 감귤주가 올랐네
…(중략)…
윷놀이를 하며 남미주 들이키길 재촉하네
- 『무명자집(無名子集)』 제4책 중에서
수세(守歲)란 우리말로 ‘해지킴’이라고 일컫는데, 섣달그믐날 밤에 방과 마루, 곳간, 뒷간, 장독대 등 집안 곳곳의 불을 밝혀 밤을 지키는 풍속이다. 조왕신(竈王神)이 천신(天神)께 그 집의 일 년 대소사를 낱낱이 보고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부엌에도 불을 밝혀두었다.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속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잠든 사람의 눈썹에 밀가루를 발라두었다가 잠에서 깼을 때 “눈썹이 세었다”고 놀리기도 했다. 이날 잠을 자는 것은 영원히 자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묵은해의 마지막 밤을 지켜야 새해 아침에도 깨어 있어서 잡귀를 쫓을 수 있고, 복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감주나 과줄, 엿 등을 주전부리로 삼아 윷놀이를 하면서 밤을 새웠다.
섣달그믐날의 풍속은 대개 묵은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설계하는 의미가 크다. 저녁밥도 남기지 않은 채 말끔히 다 먹어치웠고, 바느질하던 것도 마무리를 지어 해를 넘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해가 바뀌어도 정월 초하루에는 바느질을 하지 않는데, 바느질을 하거나 치마 주름을 잡으면 근심이 많아지고, 한 해 내내 바느질을 해야 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나갔던 빗자루도 집 찾아온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밀린 빚을 모두 갚고 빌린 연장도 되돌려 줘야 하는 날이 섣달그믐이었다.
재앙 쫓고 복 맞이하는 민간 풍속 많아라
도삭산에서 호랑이를 기르는 신도와 울루를 만들어 세우고
집집마다 복숭아 부적 만들어 꽂고 닭을 그려 대문에 붙였네
산조는 폭죽 소리에 놀라 자취 감추고
등잔은 밤새 꺼지지 않아 허모를 비추네
- 『무명자집(無名子集)』 제3책 중에서
위의 시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섣달그믐이면 재앙을 쫓고 새해를 맞는 행사가 곳곳에서 치러졌다. 궁중에서는 잡귀를 쫓아내는 나례(儺禮)를 펼쳤고, 연종포(年終砲)를 터뜨렸다. 민간(民間)에서는 대나무를 태워 요란한 소리를 내는 폭죽이나 대총, 딱총을 놓았다. 집 안에 숨은 잡귀들이 놀라 도망가게 하고 새해의 안녕을 위함이었다. 이러한 풍속은, 섣달그믐날 밤의 수세(守歲)가 요즘의 망년(忘年)과 달랐음을 짐작케 한다.
매해 절기마다 되풀이되는 세시풍속과 금기 가운데 다수는 새해를 맞이한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 사이에 전승되었던 편이다. 새로 시작되는 한 해를 무탈하게 맞이하려는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12살의 어린 선비는 어느덧 예순네 번째 새해를 맞이하여 이른 아침부터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정제했다.
새해의 첫날 아침이기에 닭이 울자 일어나 의관 정제했네
심상한 천년 세월 뒤 예순넷의 늙은이 되었네
- 『무명자집(無名子集)』 제4책 중에서
새벽닭이 울고 점괘를 뽑아 새해 운세를 헤아려본다. 예상만큼 길한 운세가 아니었던 터라 불안하고 복잡한 심경을 도소주(屠蘇酒)로 달래본다. 도소주란 도라지와 방풍, 산초 등을 넣고 빚은 술이다.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음식에 곁들여 마시면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날에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행위를 하는가 하면, 복을 지키기 위한 행위도 한다. 복이 달아난다고 해서 손톱과 발톱을 깎지 않고, 부엌의 재를 치지 않으며, 타인의 집에 방문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그 예다. 조선시대에는 설날부터 입춘축을 붙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등잔에 불똥 지고 북두칠성 이을 무렵, 새벽닭 울음소리가 새해를 알리누나
앞으로 어찌 될지 점괘 뽑아 헤아린 후, 스스로 놀라며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노라
아이들은 한 살 더 먹는다고 기뻐하고 마을의 집들은 입춘축을 써 붙이네
- 『무명자집(無名子集)』 제2책 중에서
그밖에도 민간에서는 정월 12간지 날 가운데 특정일에 유독 금기시되는 행위가 전해졌다. 이를테면, 쥐날에 구멍을 뚫으면 복이 샌다고 해서 집안 어느 곳에도 구멍을 뚫지 않는다거나 소날에 연장을 다루면 소가 병을 앓기 때문에 도마질이나 방아찧기,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는 등의 금기다. 범날에는 타인의 집에 방문해서 소변을 보면 우환을 당한다거나 닭날에 지붕을 이으면 닭이 지붕 위에 자주 오른다는 속설도 있다.
너를 날려 보내니 천 산 만 강 다 지나 바람 타고 날아가 천상 세계 들어가서
올 한해 당하게 될 여러 가지 액운들을 나를 위해 모조리 사라지게 해주기를
- 『무명자집(無名子集)』 제1책 중에서
이러한 금기는 대개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함으로써 재액(災厄)을 물리치고 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마치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 사이에 액(厄)연을 띄워 송액영복(送厄迎福)하듯이. 보름날이 지나면 연을 날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보름날이면 ‘액(厄)’, ‘송액(送厄)’,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의 글자를 새긴 연을 띄우고 얼레의 실을 모두 푼 뒤, 이를 끊어 멀리 날려 보냈다고 한다. 액막이의 뜻을 담아 달을 향해 날려 보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코로나19로 지치고 우울했던 한 해였다. 2020년이 끝나가는 지금, 다가올 새해에는 모든 액운을 멀리 날려버리고서 ‘바람 솔솔 불고 양기 넘치며, 얼음 녹아 물결이 찰랑거리고 매화꽃 향기가 날리는’ 봄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명자 시고에 담긴 새해 소망처럼.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