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가짜뉴스, 장난에서 정략까지

중세 유럽에서는 새해를 4월 초 부활절부터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것이 혼란스러워지자 프랑스 샤를 9세가 새해의 시작을 1월 1일로 바꾸었다. 4월 초 이것을 미처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해라고 인사를 보내며 장난을 치던 것이 만우절의 유래라고 한다. 가벼운 거짓말 장난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심과 재미를 준다. 양치기 목동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 ‘따분하고 재미없어서’ 그랬다지 않는가. 현대에서 최신 정보를 숱하게 접하며 살고 있는 우리도 인터넷의 가짜뉴스 문제를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잘 낚인다. 제목만 보고 클릭했다가 낚인 고등어(잘 속는 사람)가 한둘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새로운 소식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만우절(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_네이버)



지금보다 낭만적이었던 옛날 거짓말



그래도 옛날 거짓말은 낭만스러웠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낭만적인 거짓말만 남아서 전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동요를 지어 가짜뉴스로 스캔들을 만들고 선화공주를 뺏은 백제 무왕은 요즘으로 치면 엄벌해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당시에 마동이 타국의 궁궐 안에 사는 공주에게 연모하는 마음을 전할 방법이 그거 말고 뭐가 있었을까? 선화공주도 나중에 남편은 왕이 되고 자신은 왕비가 되었으니 이야기는 해피엔딩처럼 전해져 온다. 세종 즉위년 10월 27일자(양력 1418년 11월 24일자) 『세종실록』에 나오는 태종의 눈장난 이야기도 정겹다. 아들 세종에게 왕을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이 첫눈[新雪]이 오자 형님인 노상왕(老上王, 정종)에게 눈을 담아 약이(藥餌)라고 하며 상자를 보냈다. 고려 시대부터 국속(國俗)이 있었는데 첫눈 오는 날 눈을 담아 사람을 시켜 보낸 뒤 상대방이 속으면 한턱내고, 장난을 눈치채고 전달해준 사람을 붙잡으면 보낸 사람이 한턱내는 게임을 한 것이다. 그런데 상자를 전하러 온 내신 최유(崔游)를 붙잡으려 했으나 달아나 버렸다. 장난을 눈치는 챘지만 전달하러 온 사람을 붙잡지 못했으니 게임은 무승부가 됐다. 엄중한 국정 책임에서 물러나 은퇴한 왕이 형제와 장난을 치는 이야기는 태평성대가 열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눈이 온 경복궁 경회루의 모습(출처: 경복궁관리소)



백성이 정보를 접하는 방식은 결국 나라에서 내리는 윤언(綸言)이나 관청의 공보에만 의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글이 만들어진 뒤에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역할을 시작했다. 그래서 정부 고위 공무원을 탓하는 일도 있었다. 『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0월 5일자에는 “하연(河演)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으로 벽 위에다 쓰기를, ‘하 정승(河政丞)아, 또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인 하연이 일을 똑바로 못했다며 불만을 가진 사람이 벽에다 글을 쓴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대자보가 붙은 셈인데 역시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가 첫 번째 조건이다. 특히 당시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세종의 통치가 안정적으로 이뤄지면서 개명된 백성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되었으니 이때야말로 이상적인 왕조시대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남을 비방하거나 민심을 선동하기 위하여
익명으로 몰래 붙이는 벽서 또는 괘서(掛書)



이처럼 남을 비방하거나 민심을 선동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 익명으로 몰래 붙이는 게시물을 벽서 또는 괘서(掛書)라고 하였다. 조정에 대하여 불만과 불평을 가진 백성들에 의해 민심을 선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익명으로 유언비어를 쓴 괘서는 가장 적합한 짝이었다. 그런데 이런 익명의 글은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현실을 널리 알리고 계몽시키는 역할도 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반대파들에 의해 권력투쟁의 하나로 악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가짜뉴스 사례인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 외에도 이런 괘서 사건은 조선 시대 여러 기록에서 아주 흔하게 등장한다.

조선 중기 문신인 김령(金坽)이 38년간 쓴 일기인 『계암일록(溪巖日錄)』에는 경오년(1630, 인조 8) 9월 3일 서울에 익명서(匿名書)가 남대문에 나붙었는데, ‘짐승을 잡자는 방: 금독방(擒犢榜)’이라는 제목으로 이조 판서 등이 거론되었다고 적고 있다. 또 14일에는 대궐 문에 익명서(匿名書)가 붙었는데, 오직 이조 판서인 한 사람만 거론하면서 “정(鄭) 아무개는 나라를 저버리고, 불충·불효하며, 무도하니 사형에 처하라.”라고 하였다며 놀라워하고 있다.

1547년(명종 2) 9월 18일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경기 광주의 양재역까지 배웅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 당시 권세가 당당한 윤 대비와 이기(李芑)를 비방하는 붉은 글씨로 쓰인 벽서를 보고 놀라 임금에게 아뢴다. 정미년(丁未年) 9월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곧 붕당싸움에 이용되어 무고한 사람까지 희생시키는 정미사화(丁未士禍, 양재역벽서사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유배가는 양반의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1606년(선조 39) 6월 8일에도 성균관 유생들이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벽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선조실록』에는 “성묘(聖廟)는 지엄한 곳이어서 진실로 잡인(雜人)이 근접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난달 25일 밤, 동무(東廡)의 벽에다 무뢰배들이 촛불을 밝히고서 조신(朝臣)과 궁인(宮人)·내관(內官)의 이름을 난잡하게 쓴 다음 주(註)를 달아 열거하고 논평을 가하여 품제(品題)한 것이 무려 1천여 자에 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구경하고 자자하게 전파하였는데 이는 익명서에 관계된 것으로 진실로 논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복(守僕)들이 항상 거처하면서 주야간에 떠나지 않고 수호(守護)하였는데도 성묘에 이런 변괴가 발생하였으니, 그간의 정상(情狀)에 헤아릴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엄히 다스리게 하소서.”라는 사간원의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자신이 확인한 가짜뉴스를 직접 기록한 공무원 권상일



공무원 중에 자신이 확인한 이런 가짜뉴스를 직접 기록한 경우도 보인다.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은 영조 때 만경 현령이 되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해 보고하고 공을 세운 공무원이다. 그는 스무 살 때부터 무려 57년간 일기를 썼는데, 그 『청대일기(淸臺日記)』에는 공무원의 감찰을 담당하는 조직이 가짜뉴스를 보고하고 무고한 사람을 모함한 기록이 있다. 일기에 따르면 1736년 8월 13일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임명돼 부임지로 가는 길이었는데 높은 벼슬을 받았으니 지나가는 곳곳마다 환대했다. 이후 경주에 당도해 14일에 비 때문에 잠시 머물고 15일이 되어서야 빠져나갔는데 갑자기 대간(臺諫)에서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머무른 날이 국기일(國忌日)임에도 불구하고 연악(宴樂)을 베풀었으니 파직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개인 숙소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인근에 있었던 권상일(權相一)은 그때 어떠한 연회도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간의 상소가 거짓임을 적고 있다. 이 일기가 후대에 알려졌기에 망정이지 그때 공개되었으면 대간의 거짓 상소 처벌을 놓고 피비린내 나는 정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조선시대 부임행차(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언론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당시에는, 익명의 괘서를 통해 국정에 대한 비판이나 억울한 일을 하소연하기도 하거나 민심을 흔들어 정쟁에 주도권을 잡기도 했다, 한편, 그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거짓말은 흉년이나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흉년과 전쟁 등으로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거나 지배층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심해지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해 불안해진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두려워하며 살았는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왜적에 대한 헛소문에 헛걸음을 하고 헛 놀란 피난민 도세순



도세순 일가의 피란 경로(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용사일기(龍蛇日記)』는 조선 중기 문인인 암곡(巖谷) 도세순(都世純)이 쓴 임진왜란 당시의 피난 생활이 기록된 일기다. 여기에는 도세군 일가가 자신들이 살던 개터(介台)를 떠나 증산(甑山)으로 가다가 다시 중봉(中峰), 갈마산(乫麻山), 나부산(羅浮山) 등으로 사람만 보면 왜적인줄 알고 도망치고 숨는 것을 반복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이틀 동안 쫓겨 다녔는데 당시 형은 학질까지 걸려 앓고 있었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동생, 누이 등과 숨어다녔는데 나중에서야 정작 살던 마을에는 왜적이 다녀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마디로 전란 동안 정부로부터 아무런 재난 정보를 듣지 못했고 사람들의 소문에만 의지해 방화와 겁탈을 겁내며 도망 다녔던 것이다.


거짓말로 양반 행세한 평민을 이해한 선비 최흥원



대구 달성에 살았던 학자로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었던 최흥원(崔興遠)이 지은 『역중일기(曆中日記)』에는 굶주리는 백성들 사이의 거짓말 사건이 기록돼 있다. 1755년 12월 8일 손님이 찾아와 성은 배씨이고, 윤화의 사촌 친족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윤화에게 물어보니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온 집안 식구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그의 행동을 엿보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침에 돌아갈 때까지 별일은 없었고 그제야 최흥원은 아마도 배가 고파 하룻밤의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하고자 그런 거짓말을 했을지 모른다며 자신의 생각이 각박했음을 깨닫는다. 손님이 거짓말로 양반행세를 하고 무전취식과 숙박을 했지만 제대로 따져 묻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이 또한 굶주리던 세상의 탓이라며 이해하는 선비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참 순하고 어질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3대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송하비결(松下秘訣)』·『격암유록(格菴遺錄)』



『정감록(鄭鑑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전쟁으로 불안한 사회가 되면 온갖 가짜뉴스가 세상에 출현하게 된다. 그 가운데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위험을 예언하는 것들이 있다. 『정감록(鄭鑑錄)』, 『송하비결(松下秘訣)』, 『격암유록(格菴遺錄)』 등은 조선 시대 3대 예언서로 불리는데 대부분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양대 전란을 겪으며 민생이 피폐해지고 국정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민중의 분노와 각박한 삶을 달래려고 이상사회 또는 새로 도래할 세상을 제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송하비결(松下秘訣)』이나 『격암유록(格菴遺錄)』 이 20세기 들어와서야 알려진 것을 보면 사실 이런 예언서들은 어느 시대나 잠재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세조 3년(1457) 5월 26일자 『세조실록』에는 팔도관찰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등(이하생략)의 문서는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라는 내용이다. 조선 초기에도 예언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필요할 때 제대로 된 정보를 제때 제공하고 누구나 자기의 생각과 정보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라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실의 시대가 오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가 인터넷이라는 환경으로 거의 완전하게 가능해진 오늘날에도 선조들의 기록을 통해 배울 것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자극과 이야기에 끌리는 인간의 감정을 즐겁게 하는 것은 놀이가 되지만 불안하고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해 악용하면 범죄가 된다는 것이다. 불안과 탐욕의 심리는 언제나 가짜뉴스가 먹고 사는 식량이게 마련이다.


가짜뉴스가 만들어지는 핸드폰과 컴퓨터(출처: pixabay)






집필자 : 임문영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