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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황혼육아 손자를 가르치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일하는 만큼 대우받았다


조선 시대에는 효(孝)사상이 있어서 노인은 무조건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조선시대 노인도 집안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럼 조선시대 노인은 집안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조선시대 노인은 조부모로서 집안을 총괄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손자 양육과 교육을 책임졌다. 먼저 여성 노인인 할머니는 주로 손자 양육, 곧 아이의 생활을 책임졌다. 대표적인 예로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첩』 중 〈길쌈〉에서 볼 수 있듯이, 딸이나 며느리가 길쌈 같은 가내노동을 하는 동안 할머니는 아이를 등에 업거나 곁에 세워두고 돌보았던 것이다.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중 〈길쌈〉(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반면에 남성 노인인 할아버지는 보통 손자가 여섯 살이 되면 데려다가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켰다. 할아버지의 손자교육은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졌는데, 기본적인 글공부만이 아니라 올바른 몸가짐이나 예의범절, 생활습관 등 인성교육도 시켰다. 특히 그들은 과거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후회를 만회하고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손자교육에 더욱 신경을 썼다. 하지만 손자교육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조선중기 양반들인 묵재 이문건, 퇴계 이황, 미암 유희춘의 손자교육에 대해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손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잔한 기록, 『양아록』


묵재 이문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육아일기인 『양아록』을 남길 정도로 손자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던 인물이다. 그는 51세인 1545년에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성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엔 부인도 아들을 데리고 유배지로 내려와 함께 살았다. 이문건은 처음에 외아들 이온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이온은 어린 시절 심한 열병에 걸렸다가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지적장애를 앓게 된다. 이문건은 그런 아들이 못내 원망스럽고 답답했는지 평소 심한 체벌을 가했고, 결국 아들은 조현병까지 겪다가 40세인 1557년에 사망하고 말았다.

다행히 아들 이온은 숙희, 숙복, 숙길, 숙녀 등 1남 3녀를 남겼다. 그중 이문건은 손자 숙길의 탄생을 애타게 기다렸고, 그의 양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조선 최초의 육아일기인 『양아록』을 남겼던 것이다.


『양아록』(출처: 문화재청)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아이가 6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켰는데, 이문건도 손자 숙길이 6살이 되자 자신의 방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하며 가르쳤다. 이문건은 손자에게 『천자문』을 조금씩 가르쳐 보지만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런 손자를 보며 “혀가 짧아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고, 심란하여 잘 잊어버리고, 제대로 외우지 못하네”라고 『양아록』에 기록했다.

이듬해인 7살이 되어서도 손자는 밖에 나가 놀기만 할 뿐 좀처럼 공부에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럴수록 손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분노와 체벌도 점점 늘어만 갔다. 이러한 손자와 할아버지의 갈등은 『양아록』보다 이문건의 유배일기인 『묵재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1557년 3월 2일. 손자가 성품이 미련하고 둔해서 쉽게 글씨 쓰기에 습관을 들이지 못하고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며 공부는 하지 않는다. 내가 오후에 화가 나서 손으로 벽지를 찢어 버렸다.”

“1557년 10월 7일. 손자를 돌보았다. 손자 역시 『천자문』 공부에 마음을 두지 않고 딴눈 팔기를 멈추지 않으며, 이전에 배웠던 것도 모두 모르겠다고 했다. 손가락을 굽혀 꿀밤을 세게 때렸더니, 눈물을 흘렸다.”


〈KBS 역사추적 24회 – 조선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출처: KBS)


이문건의 손자 숙길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이문건의 염원과 달리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외가인 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비교적 젊은 나이인 44세에 사망하고 말았다.




퇴계 이황의 극성스런 교육열


퇴계는 큰아들 이준을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가르쳤지만, 이준은 결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퇴계는 다시 큰손자 이안도에게 희망을 걸고 어릴 때부터 온갖 관심을 쏟아부었다. 그는 손자의 생활과 교육, 과거 시험에까지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자신의 뒤를 이어 과거에도 급제하고 학문에도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퇴계 이황 초상(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퇴계는 손자를 지극히 사랑하여 안도가 3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가죽신이나 귀걸이 같은 선물을 구해 보내주고, 안도가 5세 때는 『천자문』을 직접 써서 가르쳤으며, 8세 때부터는 벌써 『소학』이나 『효경』 같은 유교 경전을 가르칠 정도였다.

이후로도 퇴계는 안도의 교육에 지속적으로 신경을 썼는데, 서로 떨어져 있으면 편지를 보내서라도 항상 열심히 공부하도록 독려했다. 심지어 퇴계는 혼인해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 안도에게 편지를 보내 열심히 공부하라고 다그쳤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극성스런 교육열 때문이지 안도는 29세인 1569년 서울에서 실시한 과거 시험(소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69세의 퇴계는 몹시 기뻐하며 안도에게 축하 편지를 써서 보냈다.

“네 매부가 내려오는 길에 가지고 온 편지를 받아 보고 그간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달 8일에 명복이(노비)가 와서 네 편지와 서울에서 실시된 과거 시험 합격자 명단을 받아 보고 비로소 너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합격했음을 알게 되니 너무너무 기쁘다. (중략) 네가 과거 시험에 응시했을 때 제출했던 논문, 과부, 책문은 모두 다 살펴보았다. 논문과 책문은 합당한 점수를 받았지만, 과부는 이보다 못한 점수를 받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안도의 합격 소식에 퇴계는 “너무너무 기쁘다”라고 강조해서 말한다. 하지만 곧 안도가 제출한 과거 시험의 답안지를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자만하지 말고 대과 시험을 잘 준비하라고 당부한다.

그럼 이후에 안도는 과연 대과 시험에 합격했을까? 아쉽게도 퇴계의 염원과 달리 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570년 퇴계가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안도는 더 이상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퇴계의 연보 편찬과 도산서원 건립에 매진하다가 1584년 44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그릇된 육아, 미암 유희춘의 손자 체벌기


미암 유희춘도 아들 유경렴이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김인후의 셋째 딸과 혼인하여 줄곧 처가살이를 했으며, 32세인 1570년에야 미암의 도움으로 영릉 참봉(종9품)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미암은 둘째 손자인 흥문에게 기대를 걸고 장차 커서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 주기를 바랐다. 흥문은 큰 손자 광선보다도 총명했기 때문이다.


『미암일기』 및 『미암집』 목판(출처: 문화재청)


미암은 1575년(선조 8)에 퇴임한 후 창평 수국리로 내려오자마자 인근 문수사의 승려 청진을 불러 흥문을 데리고 절에 올라가 『신증유합』(한자 학습서)을 비롯한 글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하지만 흥문은 여전히 놀기를 좋아하는 11세의 어린아이였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집으로 돌아와 공부했는데, 날마다 글공부를 게을리 하여 조부모에게 계속 매를 맞았다.

얼마 뒤 미암은 또다시 흥문을 절로 보냈다. 아무래도 집에서는 공부를 게을리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흥문은 절에 가서도 글 읽기를 게을리 하다가 청진 스님이 종아리를 때리려 하자 즉시 도망쳐 왔다. 게다가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과 함께 약초밭에 불을 지르는 사고까지 저질렀다. 다행히 문수사 승려들이 일찍 발견하여 불을 끄긴 했지만, 흥문은 매 맞을 것이 두려워 도망쳐 내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미암은 그 죄를 꾸짖으며 또다시 매를 때렸다.

이후 미암은 흥문을 직접 단속하며 가르쳤다. 『신증유합』을 가르쳤더니 워낙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은 아이라 곧 익숙해졌다. 하지만 흥문은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말을 듣지 않고 글공부를 게을리 했으며, 화가 난 미암은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체벌했다.

“1576년 4월 6일. 저녁에 흥문이 너무나도 글공부에 게으르기에 내가 그 머리채를 잡고 단단히 나무랐다.”

“1576년 4월 18일. 흥문이 교만 방자하고 불순하여 내가 크게 화를 내어 묶어 놓고 매를 때렸다.”

그만큼 손자 흥문에 대한 미암의 기대가 컸던 것이다. 급기야 온 동네가 떠들썩할 정도로 큰 사건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참다못한 미암이 점잖은 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심하게 흥문을 때렸다.

“1576년 4월 19일. 흥문이 너무나도 거만하고 사나워 불러도 오지 않으므로, 내가 화를 견디지 못해 그 머리채를 잡고 주먹으로 볼기를 쳐서 똥을 싸기까지 했다. 부인과 며느리가 달려와서 말리므로 나는 놔줬다. 광선이 자기 동생이 자꾸만 나를 화나게 만들어서 미안하게 여긴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할아버지가 손자교육에 직접 관여하였다. 특히 아들의 자질이 부족해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손자교육에 더욱 열성을 다했다. 하지만 손자를 양육하고 가르치기가 예나 지금이나 어디 쉬운 일이던가.

“너 때문에 산다. 아이고 너 때문에 못살겟다.”라며 어느 날은 즐겁게, 또 어느 날은 괴로운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은 과거와 매우 닮았다. 절대로 손자를 봐주지 않겠다는 우리네 부모님들은 과거의 그들처럼 결국 손자인데 모른 척할 순 없어 오늘도 기꺼이 굽은 등을 내어주고 만다.




집필자 소개

정창권
정창권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조교수. 서울시청, 문화체육관광부 평가 및 자문위원. 서울시교육청 고전인문아카데미(‘고인돌’),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길 위의 인문학 등의 강의를 진행했다. 2010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2019년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2019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2015년~2019년 고려대학교 석탑강의상 등을 수상했다. 주로 역사 속의 소외 계층인 여성, 장애인, 하층민 관련 인문서, 어린이책을 집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근대 장애인사』, 『정조처럼 소통하라』,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되어 날아가리』, 『조선의 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기이한 책장수 조신선』,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한쪽 눈의 괴짜화가 최북』등이 있다.
“양로연(養老宴)을 열고 비둘기 지팡이를 선물하다”

낙남헌양로연도(落南軒養老宴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문해, 초간일기, 1588-11-10 ~

1588년 11월 10일, 봄날같이 화창하고 따뜻한 날이다. 이 지역의 어른 70여 명의 노인을 모시고 잔치를 여는 뜻깊은 날, 날씨까지 포근하고 화사하니 이를 준비한 권문해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관아의 앞뜰에 마련된 양로연(養老宴)에 참여한 남자들은 오른편에 자리하고, 여자들은 왼편에 자리하여 종일 취하고 배불리 먹으면서 춤도 추며 흥겨운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권문해는 비둘기 모양이 새겨진 지팡이 구장(鳩杖)과 수건을 만들어 양로연에 참석한 노인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장수를 비는 잔치들”

이원기로회계첩(梨園耆老會契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장석영, 흑산일록, 1919-08-22

1577년 9월, 금난수의 고모와 고모부 이징(李澄)의 사위 박세현(朴世賢)이 그의 장인과 장모를 위해 온계에서 잔치를 열었다. 금난수로서는 두 해 전 돌아가신 부친이 떠올랐기 때문에 고모, 고모부의 장수를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서글픈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장수를 비는 날인만큼 모두가 받은 상마다 꽃이 꽂혀 있었고, 술동이에는 향기로운 술이 찰랑였다. 잔치에서 여러 자손들이 돌아가며 노부부에게 잔을 올리는 헌수(獻壽)를 하였고, 악사들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다음 달에는 금난수의 숙부인 금희가 노인회를 열었다. 원래는 봄과 가을마다 나라에서 퇴직한 노 관료들을 위해 베풀어 주는 것이 기로연의 원형이었으나, 사적으로도 노인들이 한데 모여 자신들의 장수를 자축하였다. 노인들의 행사인 만큼 금난수는 이곳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근처에 머물며 물심양면으로 행사를 도왔다. 숙부를 모시는 것이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갑자년에 태어나 갑자년을 맞이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24-12-04 ~

1624년 12월 4일, 장흥효는 명종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선조를 거쳐 광해군을 지나 인조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는 일기에 스스로 “갑자년에 태어나 다시 갑자년을 맞이하고 12월 4일에 태어나 다시 12월 4일을 맞이했다”고 기록했다. 어찌 보면 환갑이라는 나이가 마냥 신기했던 모양이다. 갑자년에 태어나 다시 갑자년을 맞이했다는 것은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다른 생명체로 거듭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이는 들어가지만 오히려 덕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덥수룩해졌으며 사람의 됨됨이는 더욱 볼품이 없었다. 다시 살아가는 갑자년이라고 하지만 어린아이로서의 갑자년과는 사뭇 달랐던 셈이다.

여러 지역 인사들이 그를 찾아왔다. 무려 3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의 환갑을 맞아 술을 대접하고 각기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자신이 보잘것없는 노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런 자신에게 이렇게 성대하게 맞아주는 것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부끄러움만 더해갔다.

자신이 읽은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60세에 60년만큼 교화되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60세에 60년만큼 잘못된다고 하면서 차라리 자신을 버리고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지만 도리어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과 정성을 주고 있으니 더욱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은 오늘로 그만두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었다.

“기로소 대신에게 연회를 베풀다”

권상일, 청대일기,
1719-04-16 ~ 1719-04-18

1719년 4월 16일, 숙종은 기로소(耆老所) 대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로소 대신으로 당연히 참여해야 할 영중추부사 이유(李濡)가 대간의 논박을 받아서 궐에 출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회에 이유가 빠질 난처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동궁은 여러 번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타이르고 승지와 함께 출사하기를 권하였다. 결국 동궁의 조처로 숙종이 진행하고자 했던 연회가 개최되었다.

연회는 오전 경현당에서 진행되었다. 숙종은 건강상의 이유로 나오지 못했고 세자만 참석했다. 이날 참석한 기로소 대신은 영중추부사 이유(李濡),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판중추부사 김우항(金宇杭), 공조 판서 신임(申銋), 형조 판서 황흠(黃欽) 등이었다. 본래는 전 판서 최규서(崔奎瑞)도 참석해야 했으나 고향인 용인으로 내려간지 오래라 관직을 사양한 상태였다. 다른 승지들이나 시위하는 신하들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여 오로지 장악원 악공등만 참여했다.

오후에 연회가 끝나고 기로소 신하들은 궁궐의 꽃을 가득 꽂고 크게 취하여 부축을 받으면서 나왔다. 연회가 성대하기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기로소 본청에서 다시 한번 연회의 자리를 마련하자는 명령이 내려왔다. 한번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권상일은 여태껏 있지도 않았던 성대한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숙종은 기로소 신하들에게 ‘경들은 모두 이미 칠십 팔십이 되었으나 다들 변이 없이 건강한데 나는 이제 겨우 육순이나 몸은 병들고 눈은 어두우니 이제 이와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기로소 대신들보다 숙종이 10여 세 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암시였을까 숙종은 기로소 대신보다 먼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문중 모임을 주관하다”

최흥원 역중일기, 1752-03-17 ~

1752년 3월 17일. 최흥원은 어제부터 문중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기거하는 칠곡 마을을 비롯하여 인근 지묘 마을, 해안 마을 등 최씨 일족이 거주하는 동네마다 모두 사람을 보내어 참여하기로 한 모임이었다. 본래 모임을 개최하기로 한 것은 어제였는데, 어제 해안 마을의 일족들이 도착하지 않아 개회가 하루 늦어졌다.

오늘 아침 일찍 해안 마을의 일족 노인이 비로소 도착하였다. 모두 모여 자리에 앉은 이후, 남산에 사는 일족의 아재를 문중의 어른으로 추대하였다. 추대한 어른을 특석에 앉도록 요청한 이후, 임신(壬申)생 이후에 출생한 환갑이 되지 못한 일족들이 모두 어른에게 공경히 절을 올렸다. 앞으로 문중 모임에서는 이 어른이 모든 일을 결정할 어른이었다.

아울러 앞으로 문중 일을 도맡아 할 실무자인 유사도 뽑았다. 성주에 사는 일족의 어른을 유사로 선발하였다. 유사로 선발된 어른은 첫 업무로 문중에 관한 절목을 수정하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하필이면 그 일을 최흥원에게 부탁하였다. 지난 신해년에 만든 완의를 수정하고, 새로 결정된 일을 보충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최흥원은 거듭 사양하였으나 유사 어른의 의사가 공고하여 결국 일을 맡고 말았다. 최흥원은 일을 맡은 이상 문중의 일이니만큼 온 힘을 다하겠노라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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