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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소리를 듣다

어느 날 문득, 가을


최근 한 유명 미술품 수장가의 기증과 연계전시로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추성부도(秋聲賦圖)〉가 다시금 학계와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 작품은 「추성부(秋聲賦)」의 시의(詩意)를 옮긴 조선시대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예이면서, 동시에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국민화가’ 김홍도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기년작이다. 그렇다면 「추성부」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옛사람들은 이를 그림으로도 그려 그 뜻을 되새기고자 했던 것일까.


김홍도, 〈추성부도〉, 1805년, 종이에 수묵담채, 56×214㎝(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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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부」는 구양수(歐陽脩, 1007~1072)가 가을밤의 정경을 읊고 인생의 쓸쓸함에 대하여 기록한 부(賦)형식의 문학작품이다. 송대(宋代) 문단의 정점(頂点)에 자리매김 되어 있던 구양수는 「추성부」에서 가을 바람소리를 듣고 일어난 감흥을 동자와의 대화 형식을 빌려 서술하고 있다.

어느 가을날, 구양수는 책을 읽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처음에는 바스락바스락 낙엽 지고 쓸쓸한 바람 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했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또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했다. 구양수는 동자를 불러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묻는다. 동자는 멀리 나가보더니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비로소 구양수는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만하더니,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이에 자연 현상의 변화와 인간의 삶을 연관시켜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는데, 나이 마흔에 쓴 「취옹정기(醉翁亭記)」에서 늙음을 벌써 한탄하였으니,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훌쩍 넘긴 구양수가 만물이 쇠잔하는 쓸쓸한 계절을 노래하는 이 작품 속에서 어떤 감회에 사로잡혀 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인생의 가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구양수의 글이 숭앙되고 또 애호되었던 만큼, 이를 이미지로 옮겨내고자 했던 것은 당연한 시도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학적 소재가 회화로서 시각화될 때, 한적한 밤의 정적을 깨는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바람의 소리, 뒤이은 구양수와 동자 간의 대화와 교감에 이르는 서사적 경험을 조형적 언어로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가는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국내에 현전하는 추성부도 가운데 초기의 작품으로 이해되고 있는 예는 서화합벽집인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에 수록되어 있다.


필자미상, 〈추성부〉, 《천고최성첩》, 삼베에 담채, 25.8×32.7㎝(출처: 국립중앙박물관)


1606년 주지번의 조선 방문 시 함께 유입되어 부본이 다수 제작되면서 화제(畫題)로 널리 공유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시간이 흘러 19세기 규장각 화원들의 시험인 녹취재(祿取才)에 인물화계의 화제로 ‘추성부방야독서(秋聲賦方夜讀書)’가 제시되었다는 점은, 이제 추성부도가 조선시대 시의도의 한 장르로 온전히 자리 잡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홍도의 1805년 〈추성부도〉는 원전의 내용을 고스란히 화폭에 그려냄은 물론, 화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구양수의 시의에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김홍도는 좌우로 긴 횡폭 화면의 가운데에 외로운 집 한 채를 그려 넣었다. 풀을 얹은 초가지붕의 검소한 가옥이지만, 마당 구석에는 가산(假山)이라 하여 문인들이 애호했던 괴석이 곳곳에 놓여있고, 두 마리의 학은 고아한 선비의 인격과 삶의 자세를 드러내는 듯하다. 질화로 위에는 다관이 놓여 언제든 차를 마실 준비가 갖추어졌다.

주위로는 인가가 드물고 황량한 바위산과 나무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잎이 성근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거친데, 담홍색으로 작은 점들을 찍은 나뭇잎에서 가을이라는 계절은 정체를 드러낸다. 산 너머로는 달이 밝고, 구양수는 둥글게 큰 창을 낸 서옥(書屋)에서 늦도록 책을 읽는 모습이다. 창 너머로 동자에게 무슨 소리가 나는지 물으니, 동자는 저 멀리 나무숲을 가리키며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聲在樹間]”라고 대답한다.

김홍도는 화면의 왼쪽 상단에 추성부 전문(全文)을 옮겨 적어, 시서화 일치를 시각적으로 표방했다. 구양수가 처절하고 울부짖고 외치는 듯하다 읊었던 가을의 소리는 화면 전체에 어려있는데, 메말라 갈라진 붓끝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려낸 빠른 필치에서는 격한 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이 머금은 쓸쓸하고 헛헛한 감정에 대해 연구자들은 〈추성부도〉가 그려졌을 시기 이미 노년에 접어들은 김홍도의 심적인 상태를 지적하기도 한다.

김홍도를 너무나도 아꼈던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그림에 대한 것이라면 모두 김홍도에게 물어보라며 생전 무한한 신뢰를 내비치곤 했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 김홍도에게 주어진 특권은 빠르게 거두어졌다. 60세의 김홍도는 제자뻘의 새파란 화원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녹취재에 응시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었다. 귀하게 얻은, 아직은 어린 외아들 김양익의 월사금을 걱정해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는 곤궁했으며, 몸과 마음은 노쇠했다.

구양수가 느꼈던 가을날의 탄식,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 맺는 계절이라는 세상의 순리를 김홍도는 이 그림을 그리며 다시 한번 되새겼다. 구양수가 얘기했듯이, 불그스레하던 얼굴이 시든 나무처럼 되어버리고, 새까맣던 머리칼도 허옇게 되는 것은 자연의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김홍도는 이를 온몸으로 체현했고, 이 작품을 그린 뒤 오래지 않아 어려움 속에서 사망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이르면, 추성부도는 우리 화단에서 더욱 굳건한 화제로 정착했다. 가을을 대표하는 산수화제로 그려지게 되는데, 이 경우 산거형(山居形)으로 표현되는 추림독서도(秋林讀書圖) 계열의 오랜 전통을 따른다. 주로 19세기 이후 제작되면서 시대적 양식에 따라 주로 축형의 좁고 긴 화면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더욱 산중 깊이 은거하고 있는 느낌을 주며, 수목표현이 증가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보여주는 가을의 쇠잔한 모습이 강조되었다. 대개 산수형 추성부도는 원경의 주봉과 근경의 가옥,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시간적 배경을 드러내는 보름달과 가옥 내 촛불, 집안에서 독서에 열중하는 구양수와 가을의 감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동자의 2인 구도로 정형화된다. 또한 근대기에는 사시팔경(四時八景) 이래 산수도병의 오랜 형식인 계절경이 선호되면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봄 정경으로 표현되거나, 매화서옥(梅花書屋)이 겨울, 산수가 강조된 산수형의 추성부가 가을의 계절경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안중식, 〈사계산수6폭병〉 중 한 폭, 1910년, 비단에 수묵담채, 145×49㎝ (출처: 개인소장)


동시에 추성부도가 고사인물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음에 주목해 볼 수도 있다. 대한제국기 고문(古文) 교육을 위한 중등교육용 한문 교과서인 『고문약선(古文約選)』에는 구양수의 「취옹정기」, 「추성부」, 「육일거사집서(六一居士集序)」, 「붕당론(朋黨論)」이 수록되었다. 이처럼 구양수의 영향력이 국내에 지대하게 미치고 있는 가운데, 이태백, 미불, 예찬 등과 함께 고사인물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때 국내에서 가장 애호되었던 「취옹정기」, 「추성부」 두 작품 가운데, 「취옹정기」에 나타난 ‘여민동락(與民同樂)’의 태수 구양수가 아니라, 가을을 감상하고 그 쓸쓸함을 느끼는 구양수의 모습으로 고사인물도에 출현하게 된 것은, 시의화로 구성되곤 하던 전통적 추성부도의 전통과 가을을 배경으로 하는 계절경으로서의 의미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안중식(安中植, 1861~1919), 조석진(趙錫晉, 1853~1920)을 비롯한 근대기 화가들의 작품에서 인물형의 추성부도는 점차 정형화된 모습을 갖춰간다. 가옥은 한 방향으로 비스듬히 배치되었으며, 건물의 창은 때로는 사각형이고 때로는 둥글지만 인물의 전신을 보여줄 만큼 커다랗다. 벽돌과 섬돌의 표현은 화보식 가옥과 동일하며, 가옥 뒤로는 나부끼는 나무 한두 그루가 배치되고 밝은 가을 달을 묘사해 밤이라는 시간을 드러낸다. 구양수의 복장은 작품마다 동일하며 도식화되었고, 책상 위에 책과 함께 놓인 기물들도 촛대, 찻잔, 벼루 등으로 한정된다. 한편, 동자는 고사인물형의 추성부도에서는 그 위상이 현격히 축소된다. 구양수와 시선이 비끼며 뒷모습만 등장하며 두발이나 복장 표현에서 바람 부는 바깥 정경 경도를 표현해 줄 뿐,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조석진, 〈중국고사도8폭병〉 중 한 폭, 1897년, 종이에 설채, 128×33.5㎝(출처: 개인소장)


주인공 구양수의 묘사에서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한 손으로는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막고, 다른 한 손으로 읽고 있던 책의 책장이 넘어가지 않도록 누르며 강한 독서 의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즉, 고사인물로 부각된 근대기 인물형의 추성부도에서 구양수는 가을의 쓸쓸함을 느끼며 「추성부」의 전체적인 감상을 대표하는 구양수의 모습이 아닌, 독서상으로 초점이 맞추어지며 도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의화로 구성된 추성부도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고, 문인 독서도 계절의 영향, ‘가을=독서’는 독서상의 의미까지 모두 결합된 시대적 결과물이라 생각된다. 때로는 조석진의 작품에서처럼 구양수가 신선 갈홍(葛洪), 유해(劉海)와 함께 함께 고사·도석인물병의 한 소재로 구성됨으로써, 축수의 의미를 지닌 신선의 반열에서 길상화되고 있음을 목도할 수도 있다. 즉, 인물형 추성부도의 주인공은 조금 과감하게 얘기하자면 구양수라기보다는 독서인물이며, 때로는 도석인물로서의 성격까지도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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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추성부」와 추성부도는 가을을 묘사한 대표적인 문학, 예술 작품이었다. 구양수가 느꼈던 가을, 김홍도가 생애 마지막 자락에서 묘사한 가을, 그리고 안중식과 조석진이 고사인물형 추성부도에서 읽어내고 싶었던 가을의 의미는 모두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들이 모두 사계절과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 대자연의 질서와 변화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자연을 인간의 삶에 투영해 볼 때 젊음과 늙음의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섭리를 전달하는 「추성부」, 그리고 이를 체현하면서 시의를 화폭에 옮겼던 추성부도를 통해 지금 이 순간 우리 삶의 자리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계절이 되기를 바래본다.




집필자 소개

김소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한국회화사, 근대미술사를 연구하고 있다. 최근 저서 및 논문으로는 (공저)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 (공저) 『예술의 주체』를 비롯해, 「남성적 외금강과 여성적 내금강-근대기 금강산의 젠더 표상」, 「1920년대 미술교육과 근대화단의 재편」 등이 있다.
“가을 풍경에 술 생각이 간절해지다”

추수한 작물을 타작하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오희문, 쇄미록, 1599-08-27

1599년 8월 27일, 오늘 오희문은 계집종 중금의 밭보리를 타작하는 일로 인아와 덕노를 데리고 옥동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하루 종일 종들이 일을 하는 모습을 감독하고 늦은 오후께 아들 윤해와 함께 걸어서 말지산 뒷산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서는 계집종들이 거둔 보리를 묶고 있었고, 한켠에서는 인아의 밭에서 조를 수확하고 있었다. 오희문은 인아와 함께 종들이 일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한참 일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이켜 사방을 바라보니 가을산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단풍이 들어 비단 같은 풍경을 이루어 술 마시기에 안성맞춤인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는 한 병 소주도 없고, 함께 술잔을 기울일만한 이웃도 없으며, 아우도 먼 곳에 있으니 마시려 해도 마실 수가 없었다.

비록 간절한 술 생각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높은데 오르니 기분이 몹시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이웃 사람들과 아우를 데리고 이곳에 올라 거나하게 술을 한잔 하며 이 정취를 즐기리라. 오희문은 이렇게 다짐하며 일을 마친 종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강가에서 가을 풍경을 즐기다”

지리산 천왕봉의 가을(출처: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 김광계, 매원일기,
1638-08-19 ~ 1638-08-22

1638년 8월 19일, 가을이 깊어 풍경도 크게 변하였다. 김광계는 재종숙 김령(金坽)의 집에 갔다. 김령의 집에 가니 사종질 김확(金確)의 사돈인 김응조(金應祖)가 있기에 앉아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기분이 났는지, 김응조과 김확, 그리고 금발(琴撥)까지 함께 말을 타고 다정하게 강가로 유람을 하러 나갔다. 말고삐는 나란하고, 강바람은 시원했다.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회까지 쳐서 술에 곁들여 먹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외유를 하고,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잠도 함께 잤다.

다음날에는 김광계의 셋째 동생 김광보(金光輔)와 넷째 동생 김광악(金光岳)까지 합세하여 다시금 말을 타고 강을 따라 갔다. 강 양쪽으로 단풍잎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어 그 광경이 과연 사랑할 만 하였다. 이번에는 오담(鼇潭)에 머물러 배를 띄웠다. 배 위에서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고, 배가 강물에 흘러가면 다시금 노를 저어 올라오고 하며 뱃놀이를 즐겼다. 이 날은 오담과 가까이 있는 역동서원에 가서 잤다.

다음날에도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며 질리지도 않고 날이 저물 때 까지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저물 때 쯤 애일당(愛日堂)에 올라서 또 술독을 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기고 있자니 달이 이미 고개 위로 넘어와 강물에 비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시고 여러 벗들과 도산서원으로 가서 잤다.

다음 날인 22일에는 시를 지으며 놀았다. 그러다가 김광악이 먼저 떠났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 저녁에 단사협(丹砂峽)에 갔다. 단사협의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 듯했고, 그 절벽의 둘레는 몇 리나 되니 거대한 절벽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절벽의 아래에는 맑은 물이 흘러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였다. 물 위로 단풍나무가 거꾸로 비추어 보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흘간 벗들과 함께 강을 따라 가을 풍경을 즐기자니 이번 가을은 더욱 풍성하게 느껴졌다.

“산이 유명해질수록 승려들이 더 고달파진다고?”

승려가 멘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08-07 ~ 1587-08-08

1587년 8월 7일, 황여일과 그 숙부 황응청는 이 날 내영산을 구경하고 돌아와 보경사(寶鏡寺)에서 잤다. 조매당[趙梅堂, 조정간(趙廷幹)]은 대두(大豆)를 보내어 연포탕(軟泡湯)을 끓이게 하니 이는 우리들과 배부르게 먹고자 함이고, 김명숙(金明叔)이 소설책과 오래된 술을 남겨두었으니 이는 우리들과 취하고자 함이다. 배부르게 먹고 또 취하면서 승려들과도 더불어 우도(友道)를 함께 하였다.

8월 8일, 학연(學衍)이 세수를 하고 황여일에게 문안하며 말하였다.

“이 산(내영산)은 예전에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선동(仙童)이라는 승려가 굴집을 만들어 살았었는데, 근래 몇 년 사이에 수령으로 부임한 성(姓)이 옹(邕)이라는 사람이 은사(隱士)인 체 하면서 이곳을 찾아와 도원(桃源)을 구경하고 돌아가면서 동경부윤(東京府尹)인 이구암[李龜巖, 이정(李楨)] 선생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이구암 선생은 곧장 사령운(謝靈運)의 여행을 본받아 이곳을 여행하였고, 여름에 재차 유람하였습니다. 이구암 선생은 선비들이 우러러 보는 분이기에, 여행하는 자들은 구암(龜巖)이 다닌 곳과 그 자취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므로 구암(龜巖)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고, 이 산과 함께 이름이 오래가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영남에서 유람하는 선비로서 산을 말하는 자는 봄에는 진달래가 볼 만하고, 가을에는 단풍 숲이 아름답다며, 내영산을 앞 다투어 칭찬하였습니다, 공무를 띠고 지나가던 중앙 관료와 지방에 부임한 관리에 이르기까지 또한 계절마다 묵어갔습니다. 이에 승려는 가마꾼이 되고 절은 밥을 지어 나르는 여관이 되었습니다. 이 산이 유명해진 것은 우리 승려들에게는 심한 재앙입니다.”

“산을 오르기 전에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다”

『근사록』(출처: 문화재청) 권상일, 청대일기,
1719-04-16 ~ 1719-04-18

정구(鄭逑)는 이인개(李仁愷),이인제(李仁悌) 형제와 함께 사촌(沙村)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느 날 곽준(郭䞭)이 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며칠을 즐겁게 보냈다. 정구는 이들과 함께 가야산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가야산은 이 고을과 접해있는데 마치 신선이 사는 곳과 같은 절경을 자랑한다네. 나는 한번 유람한 적이 있지만 자네들은 그렇지 않으니 아쉽지 않은가? 이맘때라면 단풍과 국화꽃이 한창일 것이고, 구름이나 안개도 끼지 않는 시절이니 우리 함께 가야산을 두루 돌아보고 정상에 올라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고 “그리고 보니 마침 정인홍(鄭仁弘)도 지금 막 영천(永川)에서 군수직을 하다가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 있다고 하니, 마침 함께 할 좋은 때 일세”라고 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그렇게 하세”라며 동조해주었다 그 때부터 가야산 여행을 위한 여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9월 10일의 일이었다. 정구는 쌀 한 주머니, 술 한 병, 반찬 한 상자, 과일 한 바구니를 여행 중에 먹을 것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책을 준비했는데 「근사록(近思錄)」과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만을 넣었다. 정말이지 단출한 짐이었기에 중국 송나라 때 심괄(沈括)이 산을 유람할 때 갖춘 짐보다 간단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다음날 이인개가 먼저 출발하였는데 내일(12일)에 송사이(宋師頤)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김면(金沔)으로부터도 15일쯤에 성사(城寺)라는 절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정구 일행은 이날 출발하게 되었으므로 조금 더 빨리 만나자고 답신을 보냈다. 정구는 이인제, 곽준과 길을 늦게 떠났다. 여우 고개(狐嶺)를 넘을 때가 되자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당시 해가 진 산길을 걷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마침 같은 길을 가는 무인(武人)이 있어 같이 가기로 했다. 분명 힘이 되는 일이었다. 마침 선영(先塋 : 조상의 무덤)을 지나게 되었다.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묘소 쪽으로 절을 올렸다. 한강(寒岡) 지역에 도착하자 어시헌(於是軒)이라는 건물에 올라 옷고름을 느슨하게 하게 잠시 쉬었다. 경치를 내려다보니 밤하늘에 달빛은 맑았고 그 빛에 소나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달빛에 희게 빛나는 바위는 더 희게 보였고 소리로만 들리는 개울물은 차가운 기운을 전해왔다. 여행의 첫날이었지만 잠시나마 자연을 느끼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더니 가슴 속이 편해지고 세상의 복잡한 일이 사라진 듯 했다. 그러나 아직 오늘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촛불을 잡고 그날의 숙소에 돌아와 숙소에 소장되어있던 「주자연보(朱子年譜)」 중에서 「운곡기(雲谷記)」 부분을 한 번 읽은 뒤에 짐 속에 넣었다. 이 날은 매우 피곤하였기에 깨지 않고 곤히 잘 잤다.

“가야산에서 옛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다”

송민고 《나귀를 탄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만운, 가야동유기, 1786-08-22 ~

1786년 중추(仲秋:음력 8월) 이만운(李萬運)과 친척, 동료들이 성주의 가야산 아래에 모였다. 곳곳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모인 것이었다. 이만운으로서는 1772년 가야산을 유람한 이래 15년 만의 여행이었다. 그래서 감회가 깊었다.

8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말을 타고 회연(檜淵)에 도착했다. 다음날에는 이성민(李聖民), 정휘조(鄭輝祖)와 함께 길을 나서서 환선도(喚仙島)에서 밥을 먹고서 날이 저물어 쌍계(雙溪)에서 묶었다. 밥을 먹은 뒤에 정구(鄭逑)가 머물던 수도산(修道山) 무흘정사(武屹精舍)에 도착했다. 여기는 정구가 모은 책들이 소장된 무흘서재(武屹書齋)가 있었다. 정구의 지팡이와 신발, 책을 공경한 마음으로 살펴보고 무흘정사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해인사에 들러 하루를 머문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만운은 15년 전의 여행 경험을 떠올렸다. 풍경은 많이 바뀐 것이 사실이었다. 그의 인상에 남았던 멋진 폭포의 전경은 물살에 깎여 이전의 모습을 잃었다. 이만운은 이를 아쉬워했다. 다만 무흘정사는 몇 년 사이에 위치를 옮겼는데 도리어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이전의 자태를 잃지 않은 듯 했다. 월연(月淵)이라는 연못의 경치는 일찍이 보지 못한 경치였으며 해인사의 단풍의 붉은 비단 같은 모습에 감탄했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좋은 벗들과 함께 한 것이었다.

이만운은 이 즐거운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한 사람들의 성과 자와 이름을 종이에 써서 한 사람씩 나누어가졌다. 기념사진을 남길 수 없었던 시절, 집으로 돌아가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질 때 이 종이를 펴보고 위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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