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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미운 토끼,
요설을 펴 용왕을 우롱하다

꾀 많은 동물


토끼는 꾀가 많다. ‘교토삼굴(狡免三窟-교활한 토끼는 퇴로(退路)를 확보하기 위하여 세 개의 굴을 미리 뚫어 놓는다)’의 고사에서 알 수 있듯 동아시아에서 토끼는 꾀 많은 동물이라 인식되어 왔다. 우리의 고전소설 〈토끼전〉에 등장하는 ‘토끼’ 역시 기지를 발휘해 목숨 잃을 위기에서 벗어난다.

〈토끼전〉은 판소리계 소설 특유의 위트와 생생한 현실감각, 공감 폭이 넓은 스토리로 조선후기 널리 향유된 작품이다. 120여 종의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며 〈수궁가〉, 〈별토가〉, 〈별주부전〉, 〈토생전〉 등 버전에 따라 여러 가지 제명으로 불렸다. 오늘날 역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원전이 아니더라도 동화나 만화, 혹은 교과서에 실린 발췌본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작품이다. 최근에는 이날치 밴드가 판소리 〈수궁가〉를 얼터너티브 팝(alternative pop)으로 재해석하며 글로벌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은 바 있다.


〈토끼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날치 밴드가 힙한 음악과 춤으로 〈수궁가〉의 위트와 흥을 새롭게 풀어냈다면 여기서는 그 ‘이야기’에 주목해보려 한다. 〈토끼전〉의 이야기가 어째서 당대의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교과서에 나오기 때문에 알아둬야 할 ‘지식’이나 ‘상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공감하며 음미할 만한 ‘문학작품’으로서 향유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인지 말이다.




각자도생의 세상


〈토끼전〉이 인기리에 향유되던 19세기 조선은 봉건체제의 부조리와 지배층의 부패가 극심해지며 당대의 변화하는 현실 문제를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하는 상황에 들어서 있었다. 〈토끼전〉은 조선의 지배이념과 체제가 ‘윤리성’을 잃어가는 상황, 즉 유교 윤리가 선(善)에서 멀어져 그저 행위 규칙인 ‘관습’으로서의 역할로 굳어져 가는 현실에서, 개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배층의 횡포를 조명하고, 새로운 윤리를 대두시키는 이야기이다.

지배이념이 윤리성을 잃어가는 현실은 구성원들이 더 이상 기댈 곳 없이 각자도생해야 하는 세계를 만든다. 사건이 발생하는 수궁은 왕과 신하의 위계와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중세이념이 작동하는 사회이지만 ‘의(義)로움’은 점차 찾아보기 힘든 세계가 되어 간다. 병이 든 용왕은 토끼의 간을 먹어야 산다고 진단받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국가 전체의 위기인 것 마냥 신하들을 전부 소집하고, 왕명에 불려온 신하들은 토끼를 잡으러 육지에 가야 한다는 말에 선뜻 나서지 않고 쭈뼛쭈뼛 눈치만 본다. 보다 못한 용왕이 “우리 수국(水國) 온갖 수생(水生) 중 충신이 없으니 이 아니 원통한가! 내가 죽을 수밖에 없군.” 한탄을 해서야 정언(正言)이 나서 말문을 열지만, “세상이라 하는 곳은 인심이 영악하여 물고기를 보면 얼른 잡기만 하니 보내기가 어렵소이다”하며 목숨 걸어 충신 되는 일에 곤란함을 표한다.

용왕이나 신하나 자신의 생존을 우선하는 것은 매한가지인바, 왕은 왕답고 신하는 신하답게 명분에 상응해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사회였으나 이제는 왕은 왕다움을 잃어가고 신하는 신하다움을 잃어가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오로지 자라만이 기울어져 가는 이념을 추종하며 왕답지 못한 용왕을 위해 나서지만, 그 “장한 충성”으로 기껏 하려는 것은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이다.


〈용왕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토끼의 삶은 어떠한가. 토끼는 자라의 꾐에 빠져 목숨 잃을 위기에 봉착하기 전부터 이미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자라가 자신을 수궁(水宮)의 ‘좌랑 별주부’라 소개하며 산속 삶이 어떠냐 질문하자, 토끼는 한가로움이 천지간 으뜸이라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잔뜩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기실 토끼의 삶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울이면 굶주리고, 산속 어디를 다니든 호시탐탐 그를 노리는 포식자로 가득한데다 언제 어디서 사냥총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산속 다른 동물들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산속을 호령하며 산군(山君)이라 불리던 호랑이조차 이제는 소총과 사냥개를 동반한 사냥꾼의 위협에 안전하지 않고, 그런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산속 동물들을 모아 회의를 열지만 회의에서도 뚜렷한 대책을 찾지 못한다. 동물들이 서로 다툼만 벌이는 사이, 약삭빠른 여우는 호랑이 곁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고, 호랑이 역시 별다른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여우의 부추김에 공연히 멧돼지 자식을 잡아먹는다.

수궁은 비록 왕의 권위가 실추되고 군신 간의 명분론이 약해져 가고 있으나 왕권은 여전히 서슬 퍼렇고 신료 간에도 지위 고하가 있어 중세적 지배체계가 작동하는 사회이다. 반면, 육지는 힘센 호랑이가 호령하고 있지만 소총과 사냥개를 동반한 사냥꾼의 등장이 호랑이마저 위협하는, 정연한 체계나 질서 없이 언제든 새롭게 도래할 위협에 각자 대처하며 살아야 하는 곳이다. 수궁은 유교적 지배질서에 의해 운용되는 지배층의 공간이라면 육지는 야(野)의 공간, 세상 팔난(八難)이 존재하는데도 중앙에서 소외되어 지배이념도 공적 시스템도 잘 작동하지 않는 서민들 삶의 터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문화로 구성된 이질적 공간인 수궁과 육지는 그러나 각자도생의 공간이 되어 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왕답고 신하다움의 명분론에 의한 정치 시스템이 붕괴되어 가는 수궁이나, 생존을 위협하는 일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나 의지할 만한 공적 시스템이 부재하여 더욱 고단한 육지나, 이제는 각자가 자신의 생존에 몰두해야만 하는 세계인 것이다. 봉건적 지배질서가 폐단을 양산하며 총체적 난국에 들어서는 상황에서 질서를 재건해야 할 지배층조차 개인적 삶에만 몰두하며 생존 자체에 급급한 세상이다.




토끼에 대한 다양한 시각


여기서 〈토끼전〉의 인물들을 살펴보자. 자신의 수명 연장을 위해 남의 목숨을 노리는 용왕과 그것에 봉사하는 자라, 이에 맞서 삶의 권리를 주장하는 토끼의 대립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회 전형들 사이의 대립을 의미하며, 용왕과 별주부에 대한 토끼의 승리에는 낡은 질서와 윤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삶을 이룩하자는 주제가 담겨 있다. 그런데 〈토끼전〉이 더욱 흥미로운 점은 여러 버전들이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공유하면서도 구체적 장면과 인물 형상이 저마다 다르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경판(京板) 〈토생전〉에서는 토끼가 도망간 뒤 망연자실한 자라가 곧바로 자결하고 용왕은 충성을 기리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가 하면, 신재효본 〈퇴별가〉에서는 토끼를 놓친 자라가 토끼 똥을 얻어 용왕을 살리고, 가람본 〈별토가〉에서는 돌아갈 면목 없는 자라가 소상강에 은거했다가 이후 아내와 용왕의 사망소식을 듣고 자결한다.(이 버전에서 자라의 아내는 대외적으로는 떠난 자라를 그리워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며 열녀문이 세워지지만, 사실은 하룻밤 잠자리를 했던 토끼에 대한 상사병으로 사망한다.) 이 밖에도 용왕이 노욕을 버리지 못해 기어코 토끼를 다시 잡아 토끼 간을 먹고 회복하거나, 자라가 수궁으로 돌아가지는 못하나 자결하지 않고 타지에서 계속 살아가는 버전도 있다. 이처럼 단일하지 않은 인물의 향방은, 이야기의 전말과 인물을 바라보는 당대인의 시각이 동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토생전〉(출처: 국립한글박물관)


특히 자라와 토끼에 대한 시각은 그리 간단하거나 단선적이지 않다. 자라가 지배 질서에 맹목적으로 복무하며 약자를 희생시키는 부조리한 지배층으로, 토끼가 희생될 위기에서 각성하여 저항하는 민중의식의 대변자로만 읽히지 않는 것이다. 자라는 맹목적이지만 어쨌건 충성을 다해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이행한다. 그의 충성스럽고 성실한 긍정적 면모는 당대 향유자의 연민과 공감을 받으며, 훌륭한 충신으로 기려지거나 토끼를 놓치고도 용왕의 약을 구해 임무를 완수하는 결말의 버전이 널리 읽혔다.

한편 토끼 역시 각성하여 저항하는, 긍정적 이미지의 선량한 서민이기만 하지 않다. 토끼는 분명 민중의 재기발랄함, 기층의 지혜를 갖추고 있지만 경망하여 자라의 감언이설에 혹하고 허세를 부리며 허욕에 사로잡힌 인물이기도 하다. 토‘생원(生員)’이란 존칭에 못 견디게 좋아라 하며 자라에게 깡총깡총 뛰어가서는 수궁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허황된 말에 홀랑 넘어간 이었다. 가람본 〈별토가〉 계열에서 토끼는 용왕의 신뢰를 얻게 되자 자라탕으로 몸보신하기를 아뢰며 자라에게 복수하려 하고, 목숨을 구하는 자라에게 하룻밤 상대로 그의 아내를 요구하기도 한다.(이때 자라의 아내는 남편의 명에 따라 원치 않은 잠자리를 하지만 토끼를 잊지 못해 사망하고, 앞서 언급했듯 대외적으로는 열녀가 된다.) 토끼는 지배체제의 부당한 위협에 대항하였지만 용왕의 헤게모니 자체를 바꾼 것이 아니라 그 헤게모니 안에서 권력을 추구하고 용왕의 욕망을 욕망하기도 했던 것이다.


토끼와 자라 목각인형(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그러한 까닭에 토끼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조선후기 문인 송만재는 판소리를 소재로 한 시에서 “얄미운 토끼 요설을 펴 간을 두고 왔다고 용왕을 우롱했네”라 하였고, 이해조는 〈토끼전〉을 개작하며 “토끼 무단히 허욕을 발하여 자라를 좇아왔다가 수국 원혼이 되게 되었으니, 이는 스스로 취한 것이라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한하리오. 세상의 아무 재덕도 없이 명예와 이익 탐하는 자 이를 보아 징계할지로다.”라는 평설을 더했다. 과연 토끼는 자라를 만나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허욕에 사로잡혀 어리석게 자라를 따라나서며, 용왕에게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하는 데다 그 말이 통하자 호가호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토끼가 자라나 용왕을 위해 죽어 마땅하다 할 수는 없다. 더욱이 끊임없이 생존경쟁에 시달리며 고단하게 살았던 그의 삶을 고려해보면 안온하고 풍족한 삶을 제안하는 자라의 말에 솔깃했다 하여 비난만 할 일은 아닌 듯하다. 비난은 애초에 미천한 처지의 고단한 삶을 이용해서 엄연히 소중한 생명을 착취하려 요설을 편 “장한 충성”의 성실한 자라와 그 모든 부조리의 시발인 용왕의 몫이어야 할 터이다.




모두의 생명은 소중하다


〈토끼전〉은 부조리한 봉건체제와 부패한 지배층을 풍자하고 서민의 발랄한 생명력과 기지를 그려내어 성장하는 민중의식을 고취시킨 작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런데 당위의 문제에 현실을 사장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인간과 사회를 인식하며 실체적 삶을 포착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라가 생명을 착취하면서도 성실하고 반듯한 이미지를 고수할 수 있는 지배층의 세련과 기만을 보여주었다면, 토끼는 긍정적이거나 선량하기만 할 수 없는 서민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도처에 도사린 위협 속에서 먹고사느라 고단하고 그래서 유혹에 쉬이 솔깃하며, 일관된 신념이나 지향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주한 일상을 바쁘게 살아내면서 때론 허욕을 품기도 하는, 서민의 평범한 삶을 묘출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토도(兎圖)〉(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이런 점을 주목할 때,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될 훌륭하고 영웅적인, 선량하기만 한 ‘이상적 민중’이 아니라, 각자도생의 고단한 현실을 살아내는 미천한 처지의 ‘결함 많은 범상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자신의 ‘생명의 무게’도 용왕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당연하지만 소중한 이치를 스스로의 강한 의지와 뛰어난 기지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토끼전〉을 다시금 음미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집필자 소개

고은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하였고, 현재 아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토끼전〉에 대한 21세기 시좌, 영화 〈소리도 없이〉」, 「부녀관계를 중심으로 읽는 〈심청전〉」, 「한글장편소설의 아동 서사와 애착 관계 연구」, 「한글장편소설의 동성애적 감성 형상화 장면」 등이 있다.
“을미년 새해가 밝다”

오희문, 쇄미록, 1595-01-01 ~

1595년 1월 1일, 날이 밝자 일어나서 어머님을 찾아뵙고, 다락 위에 올라가 아버님 신주 앞에 절을 하였다. 아울러 차례를 올렸는데, 겨우 만두를 넣은 떡국, 군고기 한 그릇, 탕 한 그릇에 잔을 올린 게 전부였다. 가난해서 제대로 차례상도 차리지 못하였으니, 탄식한들 무엇하겠는가. 이곳 임천 고을에 와 있은지가 이제 3년인데, 달리 갈 곳이 없고 궁색함은 날로 심해지니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과연 내년 설에도 궁색하게나마 무사히 차례를 올릴 수 있을지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해를 만났건만 아우와 두 아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니, 슬픈 감회가 밀려들었다. 또 큰 아들 윤해가 선조들의 묘를 찾아뵙기 위해 지난해 말 길을 나섰는데, 오늘 늦지 않게 도착하여 술이라도 한 잔 올리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변변히 노자도 챙기지 못하고, 한겨울에도 얇은 옷 한 벌이 전부였는데, 아들이 떠난 이후 왜 그리 눈은 많이 오는지... 오희문은 눈 밭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큰아들이 보이는 듯하여 심란한 새해 아침을 보내었다.

“환갑 새해를 맞이하다”

최흥원, 역중일기, 1765-01-01~

1765년 1월 1일. 날이 바뀌는 자시부터 바람이 그치고 춥지 않으면서 구름이 없어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길한 날씨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어지럼증을 호소하셨으나, 다행히 일어나 앉아 말씀을 나누실 정도는 되시니 매우 다행이었다. 날이 바뀌는 자시 무렵 어머니께 선성벽온단을 올렸다. 돌림병을 막아주는 약이었는데, 올해도 부디 평온하게 한 해를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오늘은 최흥원의 60세 회갑을 맞이하는 해의 설날 아침이었다. 사촌 일초가 와서 밤새 최흥원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수세하였다. 회갑을 맞이하는 해의 설날이 되니, 문득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게 되고 그 감회가 백배나 새로웠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후에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고, 얼마 전에는 아들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천지사방에 의탁할 곳이라고는 없는 궁색하고 외로운 신세였다. 살아오면서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고, 친척들의 질병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육십 해를 보내왔으니, 그간 쌓인 감회가 오늘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나마 동생들과 조카들, 그리고 인근에 사는 친지들이 잊지 않고 최흥원의 회갑을 축하해 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어머니를 비롯한 동생과 친지들을 보살피며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었다. 최흥원은 이런 생각으로 설날 하루를 보냈다.

“형제끼리 의지하는 쓸쓸한 객지의 새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6-01-01 ~ 1786-01-06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노상추 곁에 있는 가족이라고는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온 동생 노억 뿐이었다. 고단한 관직살이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도성에서 쓸쓸한 새해를 맞는 것은 비단 노상추 형제뿐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병마절도사 조학신(曺學臣)은 청교(淸橋)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영남 출신 무관들을 불러 모아 술과 떡, 안주를 대접하였다. 비록 가족들은 만나지 못하지만 익숙한 말씨의 고향 사람들끼리 새해 첫날을 보내니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술기운에 고향집 생각을 하자, 어른 없이 홀로 차례를 지냈을 큰조카가 떠올라 안쓰럽고 서글퍼졌다. 노상추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동생과 함께 여관에서 묵으며 이러한 쓸쓸한 심사를 나누었다. 노억은 그러한 형님을 위로하며 설 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방문하며 새로운 기분을 내 보자고 제안했다. 노상추도 이에 응하여 며칠 동안 이리저리 많은 친지를 방문하였다. 매일같이 새해를 기념하는 술자리가 이어졌고, 우울했던 마음도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며칠만 더 지나면 휴가를 써서 고향에 내려가 그리운 가족들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친지들과 새해인사를 나누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6-01-01 ~ 1596-01-05

1596년 1월 1일, 금난수는 풍기 숙모를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 금난수의 삼촌 금희(琴憙)가 돌아가시고 나서 숙모가 10년간 혼자 계셨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찾아뵈어 적적함을 달래드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후 금난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해라 그런지 낮부터 새해 인사를 하러 찾아온 사람들로 금난수의 집이 붐볐다. 금응각(琴應角), 구백수(具伯綏), 손행원(孫行源), 류의(柳誼)가 찾아온 것이다. 금난수는 여러 친척들과 세 아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더없이 기뻤다.

1월 4일에는 조금 뒤늦게 금난수의 외조카인 권산기(權山起)와 금난수의 사위인 이광욱(李光郁)이 와서 새해 인사를 하였다. 새해 초이니 올해는 서로 건강하고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덕담을 나눈 것이었다.

1월 5일에는 금난수는 이미 일정을 정해놓은 대로 사람들과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역동서원(易東書院) 두 곳의 사당에서 참배하였다. 그 수는 20여 명으로 모두 모여 사당에 참배하였다. 참배를 끝마칠 무렵에서야 이시(李蒔), 이립(李苙), 이강(李茳) 삼형제가 사당에 왔다. 금난수는 가까운 사람들과 새해인사 및 덕담을 나누고 사당에 새해를 맞아 참배하니 올해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해 첫날, 아내의 건강과 행복한 여생을 바라다”

오희문, 쇄미록, 1599-01-01

1599년 1월 1일, 동녘이 틀 무렵 다례를 지냈다. 왜적이 모두 물러가고 맞는 새해였다. 지난 임진년부터 작년까지 꼬박 여덟 해 동안 왜적에게 시달린 생각을 하니, 올해의 첫 날이 새삼 감격스러웠다. 올해는 왜적들을 피해 다닐 일도 없으니, 식구들이 모두 정착할 만한 곳을 알아보고 집을 옮길 생각이었다.

새해 첫날인데, 집사람이 지난밤부터 병이 있어 새벽까지 신음하고, 정신이 혼미한 것이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니 보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며칠 전에는 점차 차도가 있어서 온 집안이 기뻐했더니, 오늘은 또 이와 같으니 더욱 걱정스러웠다. 이 때문에 간단히 다례만 지내고, 이웃 마을에서 온 사람들을 도로 돌려보내고 술도 대접하지 못하였다.

올해는 기해년이니 오희문의 환갑이 되는 해였다.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 보니, 앞길이 얼마 남지 않아 슬프고 탄식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거기에 집사람의 병세가 위태로워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어 40년 동안 같이 늙은 내외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다니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오희문은 새해 첫날 앓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부디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동안 아프거나 고생하지 않고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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