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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조선의 젠더 질서를 초월한 기호품

최근 40대 초반 어느 여성 코미디언이 흡연 사실을 (의도치 않게) ‘아웃팅’ 당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이어진 그녀의 ‘노담 커밍아웃.’ 금연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인터넷 라디오 청취자들은 그때에야 비로소 그녀가 수년간 (대체로 여성들의) 담배 고민 사연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노담 홍보대사를 꿈꾸고 있다고 한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흡연은 건강에 해롭다. 그러므로 여기서 젠더를 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담배 피는 여자’를 창작의 고통을 앓고 있는 작가의 모습으로 떠올리지 않는다. 섹시한 여성이면 모를까… 어쩌다가 이 여성 코미디언은 흡연 경험을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일까. 한국의 흡연문화에서 여성은 왜 ‘타자화’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남성의 흡연문화 전유 노력


담배는 한국 기호시장에 전례 없는 대란을 일으킨 ‘신물질’이었다. 17세기 초 약초로서 도입된 담배는 삽시간에 조선을 사로잡았다. 남녀노소, 신분을 막론하고… 풍랑으로 조선 땅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보기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 모두가 흡연의 중독적 쾌락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조선 양반 남성들이 남긴 글을 살펴보면 담배를 남성들의 전유물인 양 묘사하고 있다. 초동목수의 어린아이부터 양반 어른들까지 피우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담배에 여성 이미지를 투영한 각종 전설을 공유하고 이를 발전시켜 담배를 비구니로 의인화한 글을 남기거나 담배와 음란한 여성을 동일시하는 등 여성을 대상화하기까지 하였다.


이옥(李鈺, 1760~1815), 『연경(煙經)』(출처: 매일신문 [대학 도서관을 가다-영남대] 〈11〉 2021.10.14.)




흡연 여성 비판


신분제 사회이자 예를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남녀노소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공유되고 있었던 담배에 대한 비판은 예견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중엽 이후 사회윤리 및 사회 질서가 무너진다며 양반 남성들 간의 흡연 예절 담론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양반 남성들은 여성의 흡연을 경계하였다. 그들은 여성의 흡연을 내외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 요소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기생과는 담배를 공유하면서도 남녀가 하나의 담뱃대를 빨아대며 공유하는 사이에 정(情)을 도발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강조하였다. 탕자의 봄나들이, 음부의 사통과 같은 사회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담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신윤복(申潤福),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연소답청(年少踏靑)〉 (출처: 간송미술관)




그렇다면 남녀가 서로 대면하지 않고 행하는 흡연은 용인되지 않을까 예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성은 기본적으로 금연 권장 대상이었다. 집안 음식을 관장하는 여성의 성역할 때문이었다. 담배를 오래 피우면 침이 많이 고여 입 밖으로 떨어지고 담뱃재가 요리에 날리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계집종이 담배 도구를 가지고 가마 뒤에 따르는 것을 볼 때마다 밉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여자 노비들은 부뚜막 옆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상전의 담배 시중을 드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김홍도(金弘道),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 〈시주〉(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정작 양반 여성에게 흡연은 자신의 기호에 맞추어 즐기는 일상의 소일거리일 뿐이었다. 흡연을 비판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들만의 기준을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 여성 지성사의 맥을 이었던 지식인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은 종손 윤근진의 딸에게 부녀의 덕목 가운데 흡연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가 4살짜리 손녀에게 말하는 양반 여성으로서 경계해야 할 행동은 낮잠, 말이 많은 것, 과음, 흡연을 많이 하는 것 등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녀가 손녀에게 금연을 명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담배는 그저 기호품이었다. 즉, 양반 여성들에게 담배는 금지해야 할 것이 아니라 ‘많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강정일당에게 여성의 흡연은 근면함을 해칠 수 있는 개인의 기호나 취향에 따라 즐기는 취미의 일환이었다. 다만 흡연을 많이 하면 정신에 손상을 끼치고 오만함이 커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양반 남성들처럼 금연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예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함을 지키라는 당부만 할 뿐이었다.




아랑곳하지 않는 여성들


양반 여성들은 17세기를 거치며 생활양식의 변화를 맞게 되는데, 시가 쪽으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시집살이 속 감당해야 할 다양한 역할들은 보다 많아지고 자세해졌다.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 등의 성별 역할은 가계 경영을 책임진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시부모를 봉양하는 일과 자녀 양육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했고 시가 측 인간관계에도 신경을 써야만 하였다. 여성들은 주어진 가사 경영이나 확장된 인간관계 등으로 인하여 고단함과 피로를 느꼈다. 그로 인해 그들은 피폐해진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해소법을 탐색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담배가 때마침 등장하였다. 다음은 조선 후기 대표적 여성 지식인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가 남긴 시이다.

전해 들으니 새 풀이 남방에서 났다고 하네
돈으로 바꿔 온 보배스런 잎은 노랗구나
향기로운 칼로 써니 천오라기 어지럽고
말아서 금화로에 담아 불 붙여 맛보네
연기 피우니 신기한 맛이 온갖 염려를 사라지게 해
서왕모의 연환도 상서롭지가 않네
인간 세상 시름에 막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이 약을 가져다 걱정스런 창자를 풀리라(『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

김호연재는 평생 원만한 가정생활을 누리지 못하였다. 남편 송요화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었으며 자녀들도 일찍 사망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지 못하였다. 경제적 여러움도 컸는데 친정 오빠에게 쌀을 빌리면서 그녀가 느끼는 마음의 고통은 컸다. 이러한 현실에 호연재는 흡연뿐 아니라 음주를 즐기고 사찰을 자주 찾았다.


엘린 다니엘손 감보기(Elin Danielson-Gambogi), 〈아침식사 후(After Breakfast)〉.
1890년 핀란드 출신 작가가 그린 아침 식사를 끝내고 담배 한 대를 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다. 몸을 쓰는 가사노동을 하였던 여자 노비뿐만 아니라 한 집안을 경영하였던
양반 여성들의 고단한 일상 속 휴식처가 되었을 흡연의 시간이 닮아있는 듯하다
(참고: 이라영, 〈담배 피우는 여자〉 《오마이뉴스》, 2021.9.7.)



그녀에게 담배는 일상의 근심을 풀어주는, 심리 치유라는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 심지어 영생을 가져다준다는 서왕모(西王母)의 팔찌조차도 부럽지 않다고 하였다. 이는 양반 남성들이 여성을 담배로 대상화하여 공유했던 여러 유형의 담바고 설화나 이를 응용하여 비구니, 음란한 여성, 미인을 담배에 견준 글들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호연재에게 담배는 그저 물건일 뿐이었고 소중한 기호품이었던 것이다.

정조의 큰외숙모 여흥 민씨는 애연가로 조카로부터 다양한 세찬 물품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항상 담배 관련 선물이 있었다. 정조는 새해를 맞이하여 흡연을 즐기는 큰외숙모의 마음에 들 만한 선물을 보내었다. 그들은 기호라는 공통적인 인간의 욕구를 기반으로 하여 내외의 구별을 없애고 흡연을 향유하였다.


김홍도, 《행려풍속도 8폭병풍(行旅風俗圖 八幅屛風)》(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여성들이 흡연을 즐긴 예는 이처럼 파편적이지만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창대(崔昌大, 1669~1720)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놀기 좋아하는 아들에게 자주 매를 댔는데 언젠가는 화가 나서 손에 쥐고 있던 담뱃대로 아들의 머리를 쳐서 다치게 하였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유배 중에도 집 마당에 담배를 심어 키울 만큼 애연가였는데 실은 그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배지 경상도 기장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주 기록으로 남겼는데, 어느 날은 고향 집에 있을 가족들의 모습을 눈에 선한 듯 묘사하였다. “내당으로 들어가자 어머님은 담뱃대를 물고 베개를 베고 누워 계신다.” 며 늘 보아오던 애연가 어머니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19세기에도 양반 여성은 담배를 계속해서 피워댔다. 그리하여 흡연하지 않는 것이 칭송받는 일이 되기까지 하였다. 임헌회(任憲晦, 1811~1876)는 자신의 문하생 전우(田愚, 1841~1922)의 어머니 양은옥(1805~1867) 의 묘지명을 지었는데, 그는 양은옥이 살아 있을 때 행했던 여러 일 중 흡연하지 않았던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양반 여성들의 흡연이 만연한 가운데에 양은옥은 올곧게 흡연하지 않았으므로 모범적인 사례로서 기록하였던 것이다. 또 그는 곧 혼인할 딸에게 금연하라며 훈계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의 훈계는 혼인 후 대부분의 사대부 여성들이 흡연을 시작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조선에 담배가 유입된 이후 양반 남성들은 가부장적 흡연 예절을 만들면서 여성의 공개적 흡연을 비판하였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여성 흡연이 보편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정작 양반 여성들은 흡연을 즐기며 휴식 시간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였다. 젠더 분별에 대한 균열의 틈새는 양반층에서부터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집필자 소개

하여주
하여주
부산대학교에서 조선 시대 여성사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부산여성사회교육원의 여성학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논문 및 저서로는 「조선 후기 여성의 기호(嗜好)에 따른 흡연문화 발생과 ‘몸’의 욕구 발현」, 「17세기 조선판 마녀사냥 ‘신숙녀 옥사’의 실상」, 「『계녀서』의 탄생과 ‘조선식’ 유교 젠더 규범의 성립」, 「조선 후기 양반 여성의 ‘친정살이’와 새로운 생활환경의 모색-진주하씨 묘 출토 한글 편지를 중심으로-」 , 『강의실 한국사』(공저) 등이 있다. 유교 젠더 규범이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린 과정과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충돌하였던 지점, 여성들의 다양한 대응 양상들을 찾아내며 한국여성사, 더 나아가서는 한국젠더사 복원에 매진하고 있다.
“조선시대 담배의 보급”

조선에 담배가 보급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 담배가 처음 전래될 때는 약재로 인식되어 보급되었다. 술을 깨게 한다든지, 소화가 잘 된다는 말과 함게 담배는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1614)에서 사람들이 밭에 담배를 많이 심는다고 기록했다. 담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약초보다는 기호품으로 애용되었다. 손님을 대접할 때 담배를 권하는 풍습도 생겨났다. 담배의 수요는 급격히 증가하여 남녀노소와 양반, 백성을 가리지 않고 소비하였다.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표류하였던 하멜은 조선인들이 4, 5세 때부터 담배를 핀다고 기록했다. 담배는 점차 상품작물로 변해갔다. 한성(서울)에서는 담배만을 파는 엽초전이라는 시전이 생겼고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담배가 매매되었다. 그러나 담배 보급이 늘어나면서 폐단도 늘었다. 먼저 비옥한 토지에 담배를 많이 심어 다른 작물의 생산량이 떨어졌다. 다음으로는 담배 예절이었다. 남녀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긴 담뱃대를 물고 서로 담배를 피우게 되자, 예의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은 이를 용납하기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담배를 피울 때 지키는 규율을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연장자 앞에서는 피우지 말 것이라든지 양반 앞에서 평민은 피우면 안 된다든지, 평민이나 천민의 담뱃대는 양반의 것보다 길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유가야산록」에는 여행지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온다. 담배는 여행의 준비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담배를 피울 때 많은 준비물이 필요했다. 담뱃대를 비롯하여 담배를 넣어 둘 담배 주머니, 재떨이 등이 필요했다. 물론 양반들이 여행을 할 때는 노비들에게 이를 대신 들고 오게 하였을 것이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 보았다.

“담배와 미숫가루, 꿀과 돈 - 상소 준비 과정에 받은 다양한 부조품”

권문해, 초간일기,
1584-03-09 ~ 1584-03-15

1792년 5월 11일, 부조를 받는 길이 한 번 열린 뒤에는 폐단을 막기가 어렵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었다. 포천 현감 홍약호(洪若浩)가 편지로 문안을 하고 남초(南草: 담배) 2근, 미식(米食: 미싯가루) 2되, 꿀 1항아리를 보내주었다. 1792년 5월 20일, 좌의정이 돈 50냥을 보내오고, 채홍리(蔡弘履)가 남초(南草: 담배) 40근을 보내왔다. 5월 24일 안악(安岳)의 이익운(李益運)이 편지로 문안을 하고 돈 20냥과 향초(香草: 담배) 5근을 또 보내왔다.

“양반들은 산수유람 때 무엇을 준비했을까?”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08-06 ~

1587년 8월 6일, 산수유람 중이던 황여일(黃汝一)은 식후에 숙부[황응청(黃應淸)]와 잠시 낮잠을 잤다. 얼마 되지 않아 이 고을의 학자인 김득경(金得鏡)이 달려와 이르니, 이 곳 태수 조정간(趙廷幹)이 가서 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흰 밥에 푸른나물로 식사를 하였는데, 산에서 먹는 맛이라 더욱 좋았다. 술도 서너 잔 했다. 이윽고 노승(老僧)이 짚신을 가지고 나와서 말하였다.

“절의 서쪽 편으로 가면 구름 사이로 돌길이 나 있는데 매우 가파르고 끊어질 듯합니다. 그러나 이 길이 아니면 건너갈 방법이 없습니다.”

곧이어 함께 갈 일행을 선발했다. 이야기를 나눌 승려는 ‘학연(學衍)’이라 하고, 시문(詩文)을 챙기는 이는 ‘덕룡(德龍)’이라 하며, 벼루를 들고 갈 이는 ‘홍원(洪源)’이고, 술시중할 이는 ‘매운(梅雲)’이며, 옷과 양식을 들고 갈 이는 ‘억동(億童)’이었다. 또한 한 승려로 하여금 걸음을 예측해서 날이 저물면 어떤 암자에 이르러 잠잘 수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그리고 함께 출발하여, 쉬엄쉬엄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합격과 낙방,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탁족과 술로 마음을 달래다”

김령, 계암일록,
1623-05-05 ~ 1624-01-20

1845년 7월 3일, 낙육재의 여러 벗들이 함께 바람이나 쐬고 오자 하여, 서찬규 일행은 십여 이 술을 가지고 남암(南菴)에 올랐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7월 10일에는 예닐곱 관동들과 함께 신천에서 목욕하고 거북굴에서 바람을 쐬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덕우는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돌아갔다.

1846년 5월 18일, 국오 족숙을 모시고 여러 친족들과 함께 앞산으로 회포를 풀러 갔다. 동네 어귀에 도착해 자리를 펴고 밥을 내오는 사이에, 서찬규와 태곤(자는 노첨)·재곤(자는 자후), 그리고 몇몇 서당 아이들은 탁족할 곳을 찾아 가파른 바위로 등나무 넝쿨을 잡고 올라가 굽이굽이 물길을 찾아갔다. 마침 한 승려가 갈포 적삼에 송납을 쓰고 인사를 하는데 은암의 중이었다. 어디서 오는지 물으니, 약초를 캐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물을 따라 걸어가다가 목이 마르면 손으로 떠서 마시고, 더우면 손으로 끼얹어 씻었다. 이렇게 몇 리를 가니 예계암에 이르렀다. 술기운이 막 깨니 배고프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는데, 우연히 나무하는 사람을 만나 그의 도시락으로 쾌히 빈 배를 채웠다.

산림에 회포를 붙여 일어났다 누웠다 하다 보니 돌아가는 것을 잊고 있어서, 어느덧 해가 한낮을 지났다. 친구들이 돌아가자 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시 내려왔다. 하루 종일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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