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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소장유물에 나타난
전통 배냇저고리의 미학

배냇저고리는 ‘배내옷을 입지 못한 사람은 이승에서의 첫 관문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하여 저승에 가서도 사람 축에 끼워주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옷으로 여겨졌다. 왕실에서도 배냇저고리는 침선장을 시키지 않고 왕비가 직접 만들며 건강과 성장의 기원을 담았고, 행운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풍습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배냇저고리를 보공의(補空衣)로 관에 넣어주기도 했다. 가장 오래된 배냇저고리는 16세기 중반의 유물로 추정되는데, 대전 금고동 나부 부인 용인이씨 부인의 묘에서 출토되었다. 아동의 묘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경기도 양주 해평 윤씨 남아의 묘에서 5~6세 정도의 소년 미라와 함께 출토되었고, 17세기 유물로 추정된다. 배냇저고리는 영혼이 있는 옷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관련된 미신도 많았다. 배냇저고리를 마구 굴리면 아기가 하찮은 인물이 된다고 생각하여 다 쓰고 나서도 걸레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용인이씨 부인의 묘에서 출토된 배냇저고리, 16세기(출처: 대전시립박물관)



배냇저고리에는 깃을 달지 않았다. 옷에는 반드시 깃이 있으므로 깃을 뜻하는 한자 영(領)을 옷을 세는 단위로 사용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신생아는 목이 짧고 피부가 연약하여 깃이 목둘레에 스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깃을 달지 않았다. 깃이 없는 불완전한 옷을 입히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악령으로부터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름은 실로 만들었다. 전통사회에서 실은 수명을 상징하여 백일에는 실타래를 선물하였고 돌잡이에도 사용된다. 실고름은 홀수 가닥을 꼬아서 달거나 실타래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굵은 실타래는 아이 낳은 집에 치는 금줄을 연상케 한다. 고름은 길게 하여 옷이 풀리지 않게 몸을 돌려 감았는데, 긴 고름처럼 장수하기를 기대하며 천을 이어 붙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는 ‘배꼽 줄’ 또는 ‘뒷줄’로 끈을 하나 더 달아주기도 했다.


배냇저고리, 1900~ 1920년대 (출처: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전통사회에서는 어른의 상의나 겉옷으로 아기의 옷을 지어 입히며 장수와 성공을 기원했다. 이 풍습은 오래 입어서 통기성, 흡수성이 좋고 부드러워진 소재를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의 유물로 추정되는 배냇저고리 중에 목선이나 소매, 섶의 안쪽에 천 조각을 이은 봉제선이 있는 것들이 있는데 옷이나 천을 재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에서도 이 같은 풍습이 지켜져, 고종은 순종 탄생 때에 철종의 무명옷을 먼저 쓰고 그다음에 장수하는 신하의 옷으로 강보를 만들었다고 한다.

돌 이전에 유색 옷을 입히면 ‘삼신할머니가 해코지한다’ 하여 배냇저고리는 반드시 흰색으로 만들었다. 흰색은 목화나 누에에서 채취한 천연 그대로의 소색(素色)을 의미하며 염색하지 않은 삼베나 모시의 담갈색까지 포함한다. 흰색을 고집한 이유는 가공하지 않아 위생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신성하고 영험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백호(白虎)나 백사(白蛇)를 영물로 생각한 것처럼 흰색을 길조로 여겼고 오방색(白·黑·靑·赤·黃) 중 흰색은 선(善)과 고결한 정신을 표상하며 해, 하늘, 하느님을 상징하기에 그러한 신성하고 영험함을 이용해 신생아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피부에 자극을 줄 수 있는 시접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로 겹저고리로 만들었고 홑저고리 중에는 시접이 모두 겉으로 나와 옷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같이 보이는 유물도 있다. 옆선은 겉에서 시침해서 성장에 맞춰 품을 늘여 입히기 쉽게 만들었다. 옷감을 절약하기 위한 마름질 방법도 동원되었다. 품과 소매는 신체 크기와 상관없이 옷감의 한 폭을 그대로 써서 가장자리 식서(飾緖)가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하고, 옷감을 절약하기 위해서 삼베 결을 반대로 마름질해서 옆선과 솔기가 일반 저고리와는 반대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다 입고 나서 다른 용도로 재사용하기 위해서 진동과 목선의 시접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접어 넣어 만들기도 했다. 한편, 배냇저고리를 입는 기간은 아직 온전한 인간이 아니므로 바느질을 곱게 하지 않는 풍속 때문에 유물 중에는 시접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올이 풀려있는 것도 있다.


시접이 겉으로 나온 배냇저고리, 광복 이후(출처: 제주자연사박물관)




보육을 위한 기능과 실용의 추구


의술과 위생 수준이 낮았던 전통사회에서는 ‘잘 키워야 반타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육아는 건강을 보살펴 주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다. 배냇저고리도 이러한 목적에 부합되도록 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여 배냇저고리는 위생적이고 효율적인 보육을 위한 기능성과 실용성이 가장 고려되었다. 17세기 소년의 배냇저고리는 뒷길이 짧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기저귀를 갈기 편하고 배변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엄격한 복제(服制)가 적용되던 양반가에서 이러한 융통성을 발휘한 것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따라 격식보다는 신생아의 건강을 최우선시한 선조들의 실용적인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뒷길이 짧은 배냇저고리, 17세기(출처: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벽사(辟邪)와 장수의 기원


조선시대 주류사회는 엄격한 생활 규범적 성격의 유교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현세의 복락을 추구하는 것이 시급했던 서민들에게 유교의 고차원적 이상과 윤리기준은 따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민들은 생사화복(生死禍福)을 민간신앙에 의존하여 해결하고자 일상의 다양한 분야에서 주술 행위를 하였다.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백일이 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배냇저고리의 허술한 형태와 바느질, 접근금지의 신호와 보호색으로 신생아를 은닉하며 벽사와 장수를 기원하였다.

배냇저고리는 위험한 과정을 이겨내고 무사히 살아남은 신생아에게 입히는 옷인 만큼 행운을 불러오는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잘 보관하였다가 성장 후 중요한 시험을 치르러 갈 때나 송사가 있을 때 옷의 조각을 등 뒤에 몰래 꿰매어 주며 부적(符籍)처럼 이용하였다. 유물 중에는 섶이 손상된 것이 다수 있고 뜯었다가 다시 ‘╋’자로 시침질해 놓은 것도 있다. 앞뒤에 검정 펜으로 선명하게 ‘3번’, ‘관태’라고 쓴 것도 있는데 성장한 후에 시험이나 송사에서 희망하는 내용을 적어서 주술적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섶이 손상된 배냇저고리, 1910~1945(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시침질로 고정된 안섶, 1945년 이후(출처:국립민속박물관)


글씨가 적힌 배냇저고리, 1977(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인격체로서의 존중


인간 평등과 존엄의 사고가 확립되기 이전의 전통사회에서도 신생아는 인격이 있으며 존엄한 존재로 여겨졌다. 배냇저고리 중에는 성인의 의례복과 유사한 것이 있는데, 16세기 부인의 배냇저고리는 옆선에 삼각형의 무를 달아서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품과 도련의 곡선이 만들어 내는 실루엣이 ‘장 저고리’와 유사하다. 장 저고리는 조선 왕실의 예복으로 착용했던 ‘당의(唐衣)’의 기원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이 배냇저고리는 의례복 형태로 제작된 것이다. 남아용 배냇저고리 중에서는 사대부에서부터 상민들까지 예의를 차리기 위해 입었던 두루마기와 유사한 것도 있다. 어린이들도 까치두루마기나 오방장두루마기를 예복으로 입었는데 특히 이 유물은 외가에서 직접 지어서 보낸 것이어서 첫 예복으로 생각하고 제작한 것이다. 이처럼 전통 배냇저고리는 생애 첫 예복으로 여겨졌고, 그 속에는 신생아를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치관이 담겨있다.


두루마기와 유사한 배냇저고리, 1937(출처: 경운박물관)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


삼칠일 이전의 신생아는 온전히 인간계에 정착되지 않은 존재로 여겨졌고, 그 자연성을 지키는 것을 순리로 생각하였다. 우리 민족의 자연주의는 가공과 장식을 배제하고 꾸미지 않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는데, 전통 배냇저고리에서도 이러한 미의식이 엿보인다. 특히 흰색을 고집한 것은 자연 순응의 사고가 작용한 것으로 우리 민족이 첫 옷을 흰색 옷으로 입고 평생 흰옷을 입는 것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사상과 일치하는 자연에 동화됨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배냇저고리의 검소한 소재와 제작 방법에도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가 깃들어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사치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고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 화랑정신에서는 검소·겸손·근면을 미덕으로 삼았고, 선비의 청빈사상(淸貧思想)은 가난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왕실도 솔선수범하여 원자의 옷과 용품을 검소하게 할 것을 권고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검소함은 국민적인 가치관으로 실천되었고 물 한 바가지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생각하였다. 우리 전통에서 어른이 입던 옷으로 아이의 옷을 만들고 작아서 못 입게 되는 옷은 친척이나 이웃과 나눠 입던 의복 문화는 자연을 아끼고 보존해야 하는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가치관이 담긴 것이다.


장식과 색상이 절제된 배냇저고리, 19세기 말(출처: 경운박물관)




애정이 담긴 반어와 해학


전통사회에서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문화가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입던 옷으로 싸두고는 ‘돼지 태어났다’ 고 하고, 이름을 ‘개똥이’라고 부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하고, 애정과 속마음을 반대로 표현한 것이다. 현대에도 아기에게 ‘그놈 참 밉게도 생겼지’라고 하며 반어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반어법에는 임이 떠난 슬픔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고 반대로 말하며 강조한 것과 같이 오히려 무한한 애정이 들어있으며, 이러한 정서는 전통 배냇저고리에서도 나타났다.

깃과 섶이 없는 배냇저고리를 ‘눈, 코 없는 옷’이라며 비약해서 부르고, 이것을 입히면 잡귀들이 못 알아본다고 생각한 것에는 불안을 희화하려는 의도가 있다. 딸은 ‘반쪽짜리’라며 반소매로 만들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처사에는 실소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 속에 해학(諧謔)이 묻어있다. 해학은 대상을 왜곡하고 비꼬아서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 웃음으로 놀부전에서 흥부를 어수룩하게 표현하여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며, 상대를 적대시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준다. 또한 현실을 초월한 이데아의 경지에서 내려다보며, 불건전하고 불합리한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높은 긍정을 발견하려는 태도이기 때문에, 우리 문화에서 해학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를 한국인이 어려운 현실을 대할 때 회심의 미소, 즉 해학으로 극복하는 정서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어처구니없는 배냇저고리에서 해학이 전해지는 것은 어렵게 아이를 낳아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은 인간의 정성과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현실의 애환과 번뇌를 공감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사회는 임신과 태교는 물론 출산과 출생 의례의 전 과정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축복하고 공동으로 아이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리 전통 배냇저고리는 숭고한 자연으로부터 선물 받은 소중한 생명을 잘 지켜서 사회를 위한 중요한 존재로 성장시키기 위한 공동의 정성과 노력이 담겨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스꽝스러운 외양의 배냇저고리, 1900년대 중반(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집필자 소개

안귀주
안귀주
홍익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전통 배냇저고리의 미학적 연구』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박사학위논문은 2019년도 한국복식학회 우수논문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백석대학교, 경성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27년간의 국내외 유아동복 브랜드 실무경력과 전통 신생아복식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국적 유아동복 브랜드 ‘배내지음’과 ‘아이안’을 운영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출산 풍속”


[출산 준비]

출산은 아내의 친정에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내방(주부의 거실) 바닥에 짚을 깔고, 아이를 낳을 방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른다. 임산부는 검은 치마를 입고 출산을 준비하였으며 시중은 시어머니나 경험이 풍부한 아주머니에게 부탁한다. 산실에는 <삼신상(산신)>을 설치하고, 짚을 깔은 위에 상을 바쳐서 밥과 미역국을 세 그릇씩 바치는데 임산부가 출산 후 처음으로 먹는 식사는 이를 내려서 만든다.
배내옷, 포대기, 기저귀, 솜 등을 마련한다. 배내옷은 바늘로 꿰매며 단추를 달지 않고, 긴 끈을 붙여 가슴에 한 바퀴 돌려 맨다. 단추 대신 긴 끈을 쓰는 것은 아기의 수명이 길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농촌의 남편은 아내의 산달이 가까워오면 삼으로 왼새끼를 꼬아둔다. 이것을 밧줄처럼 산실에 매어놓아 임산부가 아이를 낳을 때 이것을 잡고 힘을 쓴다.

[탯줄 자르기]

탯줄을 자를 때는 탯줄을 잡고 아기 쪽으로 훑은 다음 배꼽에서 한 뼘쯤 되는 부분을 자르고 그 끝 부분을 실로 잡아매어 깨끗한 솜에 싸서 아기 배 위에 올려놓는다. 태는 흔히 가위로 자르지만 여아가 태어났을 때는 동생이 남아이길 바라는 뜻으로 소독한 낫이나 식칼을 쓴다. 태는 짚이나 종이에 싸서 삼신상 아래에 두지만, 이를 귀하게 여기는 집에서는 일진에 맞추어 좋은 방위에 놓아둔다. 태는 보통 사흘이 지나기 전이나 사흘째 되는 날 태우거나 항아리에 담아 명당자리에 묻는다.

[금줄 치기]

아기가 태어나면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기 위해 1주일 또는 3주일 동안 집의 대문이나 산실, 부엌 입구 등에 금줄을 친다. 남아일 때는 금줄에 붉은 고추와 숯덩이를 끼워두며, 여아일 때는 미역, 솔잎, 종이 따위를 달아준다. 금줄은 반드시 왼새끼로 꼬며 양 끝을 자르지 않는다. 왼새끼는 잡귀를 쫓기 위해서이며, 양 끝을 그대로 두는 것은 아기와 산모의 수명이 끝없이 길기를 바라서다. 도 붉은 고추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붉은 기운도 잡귀를 물리친다고 여겼다. 한편 숯에는 독을 제거한다는 뜻이 담겨있고 여성을 나타내는 빛인 솔잎의 녹색에는 여아가 성장하여 바느질을 잘하라는 기대가 들어 있다.
금줄은 7일, 21일 또는 49일간 걸어 두는데, 이 사이 외부 사람의 출입은 금지되며, 또한 산실에서 물건을 내오는 것도 금지된다. 금줄을 떼고 산실이 개방된 후에 비로소 친척이나 이웃사람들이 축하하러 온다.

“큰 딸이 사내아이를 출산하다”

오희문, 쇄미록, 1596-01-26 ~

1596년 1월 26일, 시집간 큰 딸아이가 어젯밤부터 기운이 불편하고, 출산의 기미가 있어서 즉시 고모 방으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종일 머물다가 오늘 밤이 깊은 해시 무렵에 출산을 하였다. 방안에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몹시 기뻐하였다.

오희문은 그 무렵 정계번, 이기수 등과 한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해산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 방에서 나와 하늘을 우러러보니, 시간은 밤 12시경이었고, 정확하게는 해시였다. 사위인 신응구는 한질을 앓아 오래 누워있고 일어나질 못하였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기뻐해 마지않았다. 오희문은 딸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사위의 집은 사내가 귀하였는데, 이렇듯 아들을 낳았으니 앞으로 딸도 시댁에서 더욱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감초를 달인 이후 아이에게 먹였다. 딸아이 역시 다른 곳은 무탈하였고, 다만 힘을 너무 쓴 나머지 미역국이 입에 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무사하게 출산한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오희문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란의 와중에도 무사히 아들을 출산한 큰 딸이 무척 기특하였다.

“조선시대의 산후조리”


전근대에는 산후의 산모와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생과 의약 공급 환경이 낙후되어 있었던 탓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산모와 영아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방책은 외부와의 격리였다. 지역과 집안, 그리고 상황마다 달랐지만 대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삼칠일(3·7)간 금줄을 드리우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였는데, 산모도 물론 바깥출입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최소 21일이 지나야 늘어났던 자궁이 제자리를 찾고 몸이 회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모는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처음으로 목욕을 하는데, 더운물을 수건에 묻혀 몸을 닦아내는 것으로 산후풍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몸에 직접 물을 묻히는 일은 출산 후에 한 달이 지나야 했다. 산후풍을 방지하고자 하는 조치에는 또한 문을 닫고 병풍을 쳐서 바깥바람이 몸에 닿지 않도록 하고, 여름철에도 방에 불을 때는 방법들이 있었다. 산모는 또한 여름에도 두껍고 긴 옷을 입고 버선을 신으며, 부채질하지 않아야 했다. 그 외에도 약쑥 삶은 물로 좌욕을 하고 무거운 것을 들지 않도록 하여 회복을 도왔다.

산모의 몸을 보하기 위해 특별히 탕약을 지어 먹이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향신료를 넣지 않은 뜨거운 국과 밥을 먹도록 했다. 그리고 성질이 차다고 여겨지는 메밀 등의 식재료나,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육류 역시 금해졌다. 또한, 산모의 치아를 위해 딱딱하고 차가운 음식도 피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민간 풍습에 따라 금하는 음식 재료들이 있었다.

산모가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가족들도 싸움, 살생 등의 부정한 행위를 피하고, 부정한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를 피하는 등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아들을 잃었던 달부, 다시 득남하다”

배냇저고리(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김령, 계암일록, 1620-10-13 ~

1620년 10월 13일, 이실의 집에 한달부와 배원선이 찾아왔다. 그 소식을 듣고 김령 또한 이실의 집으로 찾아가 그들을 만났다. 이날의 만남은 한달부의 득남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는 올해 아들을 한 명 잃었는데, 다행히도 다시 득남하였다. 주인이 술을 따랐고, 김령은 밤이 되어 술에 취한 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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