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마약’을 사회적 ‘금기’의 대표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약’은 의학적 정의가 아닌, 법률상의 정의를 담고 있는 용어이다. 따라서 ‘마약’은 그 생산과 사용에 있어 국가의 통제가 반드시 필요한 모든 약품을 지칭하며, ‘마약’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미 ‘잠재적 위법성’이 내포되어있다. 하지만 마약은 인류의 질병 치료와 외과적 의료 행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고, 의학 발전에 엄청난 공헌을 해온 도구이기도 하다. 사실 사회에서 마약이 빚는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은 마약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약은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 도구라 할 수 있다. ‘마약’이라는 용어와 그 정의가 존재하지 않던 전통사회에서는 그것을 재배하고 사용하는 일 자체가 모두 민간의 자연스러운 권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그 권리를 차츰 잃어갔다.
〈양귀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약류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양귀비에서 채취되는 아편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농가에서 가정상비약으로서 양귀비를 재배하고, 아편을 채취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이러한 민간의 권리는 보건·후생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의 권한으로 재설정되었다. 국민국가의 형성과 함께 ‘국민’이 탄생하면서 이 같은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농가의 아편 채취와 사용은 국가의 통제 대상이 되었고, 필요에 따라 양귀비를 재배하는 행위 역시 개인의 권리를 넘어선 ‘범죄’로 인식되어 갔다. 우리는 왜, 어떤 과정을 거치며 그것을 금기시하게 되었을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편은 일명 ‘앵속(罌粟)’이라고 하는 양귀비의 과피(果皮)에 상처를 낸 후 분비되는 유액을 모아 자연 건조해 굳힌 덩어리를 말하는데, 이것을 ‘생아편’이라고 한다. 아편의 재료가 되는 양귀비의 재배에 대한 기록은 조선 초기 기록인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이미 그 이전부터 앵속이 약재로 인식되어 사용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 『세종실록』 제148~155권의 「지리지」에 ‘앵속’이 약재로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조선 각 고을의 풍토에 따라 경기도와 경상도, 황해도의 경우 양귀비를 약재로 사용했고, 충청도와 강원도에서는 ‘앵속각(罌粟殼)’이라고 부르는 양귀비 열매껍질을 약재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또한 세종 15년(1433년) 조선에서 산출되는 약재로 그 약재 명과 향명(鄕名), 약의 맛과 성질, 효능 등과 채취 시기 등을 정리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제76~85권 「향약본초(鄕藥本草)」에 정리된 총 623가지 품종의 약재 중에도 개론과 각론에 앵속각과 앵자속(罌子粟)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 이같은 조선 초기 양귀비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통해 이미 양귀비는 그 이전 시기부터 중요한 약재 중 하나로 민간에 자리 잡아 왔음을 엿볼 수 있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와 함께 『성종실록』에는 성종 5년(1474년) 조선이 일본에 양귀비씨를 보낸 기록이 등장한다. 1474년 조선은 일본 사절에게 답서와 더불어 예물을 보냈는데, 그 예물 항목에 각종 면포, 인삼 100근, 집비둘기 암수 2쌍, 꿩 암수 1쌍, 해바라기씨 1봉, 복숭아씨 1봉 등과 더불어 양귀비씨 1봉이 포함되어 있다. 당대 양귀비는 국가 간 예물에 포함될 정도로 그 효능이 입증된 귀한 상품 중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문헌 중 ‘아편(阿片·鴉片)’이라는 용어가 처음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광해군 2년(1610년)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진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篇)」을 통해서이다. 이 책은 ‘아편’의 약효와 제법에 대해 “양귀비꽃이 피기 전에 씨방을 대나무침으로 찔러 10여 곳에 구멍을 뚫어놓으면 진이 저절로 흘러나오며, 다음날 진이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나무 칼로 긁어내 사기그릇에 담아 14일 정도 볕에 말린다.”, “매번 팥알만 한 것 한 알을 빈속에 따뜻한 물에 풀어 복용한다. 이 약은 성질이 급하기 때문에 많이 쓰지는 말아야 한다.”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아편’을 직접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최초의 한국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전통사회에서 아편과 그 원료가 되는 앵속은 주로 농가에서 재배하는 약재로 여겨졌다.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篇)」 (출처: 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
약재 이외의 목적으로 아편을 흡연해 피해가 발생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우리나라 정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헌종 대부터였다. 『헌종실록』 헌종 6년(1840년) 3월 25일의 기사에서는 청국 연경(燕京)에 간 사신의 보고가 있는데, 당시 청국이 혼란을 겪는 원인을 서양인들이 들여온 아편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이 무렵부터 아편이 청국의 주민들에게 유입되면서 피해가 발생하는 모습을 목격한 조선 정부는 청국의 사정을 관망하면서 점차 아편에 대한 경계 의식을 가져나갔다. 이런 분위기는 국내에 아편 흡연이 전파될 우려가 있는 사건이 발생하자 강력한 조치로 대응했던 조선 정부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헌종실록』 헌종 14년(1848년) 5월 9일의 기사는 청국에 다녀오면서 아편 흡연 기구를 국내에 들여오다 발각된 박희영이라는 사람의 처벌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당시 조선에는 이에 대한 단속 조항이 없었으나, 조정은 아편 흡연에 대한 경계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그를 특별히 처벌하고자 했고, 결국 추자도로 유배해 평생 종으로 살도록 하는 형벌을 내렸다. 아편 흡연 전파에 대한 조선 정부의 경계 의식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헌종 14년(1848년) 5월 9일 기사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처럼 조선은 아편을 천주교의 전파를 금지하던 국가정책과 결부해 내부적으로 엄중히 경계해 나갔다. 이후 점차 외국과의 통상 등 국제관계가 강제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그 경계 의식은 안팎으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아편은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해외 통상이 활발해지면서 국제적으로 상업화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마카오 등 항구를 통해 청국에 아편을 유통시키면서 거액의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고, 미국 또한 터키, 이란 등으로부터 구입한 아편을 청국에 유통시켜 큰 이득을 챙겨나갔다. 그 결과 청국의 아편 흡연으로 인한 중독 피해는 급증해갔다. 1835년 청국의 아편 흡연 인구는 약 2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였다. 결국 청국 정부는 1839년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불태워버리고 그들의 퇴거를 명령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보호무역을 내세워 청국에 함대를 파견하면서 아편전쟁이 벌어졌다. 아편전쟁 패배 이후 청국은 해외로부터의 아편 수입뿐 아니라 청국 내 양귀비 재배 또한 제한 없이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청국의 모습을 관망하며 외지에서의 아편 유입을 경계하던 조선 정부는 1876년 개항 이후 세계 각국과 무역조약을 체결하면서 천주교와 같은 ‘서교(西敎)’의 전래와 함께 아편 수입을 엄히 금지하는 조항을 삽입하고자 했고,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와 그해 8월 체결된 ‘무역규칙’,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제7관 등에 양국 간 아편 거래를 엄격히 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아편 수입 금지 조항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국과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제6조 등에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조선과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고, 이미 국내적으로 아편이 만연한 청국과의 조약에서 이러한 조항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청국 상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체결된 이 조약에 삽입된 영사재판권 조항은 청국 상인들로 하여금 조선에서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게 했고, 조선 내 아편의 유입과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정부 역시 이들의 아편 매매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없었다.
당대 언론 역시 국내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아편 매매와 흡연으로 인한 문제들이 청국인에게서 비롯되거나 관계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1901년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따르면 한성 시내에 40여 곳의 아편 판매소가 성업 중이었고, 『제국신문(帝國新聞)』은 1902년 6월 14일자 1면과 2면 전면을 할애해 청국인들로부터 유입되는 아편으로 인한 대한제국 사회의 병폐를 상세히 보도할 정도였다. 대한제국에서 아편과 그 흡연 문제는 날이 갈수록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제국신문(帝國新聞)』1902년 6월 14일 1면(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신문아카이브)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아편 흡연이 빠르게 번져나간 데에는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가진 아편에 대한 관대한 인식도 원인을 제공했다. 전통사회 농가에서 양귀비를 재배해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생아편은 대부분 가정에서 가정상비약으로 사용되는 등 당시 국내에서 아편은 가정상비약으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관리들도 이를 단속했을 때 일어날 주민들의 항의를 두려워해 단속을 등한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1894년 10월 법무아문 고시를 통해 「아편연금계조례(鴉片烟禁戒條例)」를 제정해 아편 금지를 공식화했다. 국내 최초의 아편 금지 규정이었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법률로 전환되어 1898년 「아편금지법」 제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아편에 대한 사회적 경계를 더욱 강화시켰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아편금지법」이 제정된 그해 9월 벌어진 고종 독살 미수 사건, 이른바 ‘독차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왕을 시해할 목적으로 고종과 순종이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몰래 투입해 발각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05년 『형법대전(刑法大全)』에 그간 2년 이상 3년 이하의 감금에 처했던 아편 규정 위반자에 대한 처벌 수준을 징역 15년으로 크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한제국 정부의 아편에 대한 공포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당대 아편 흡연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같은 기간 생산된 언론자료 등을 통해 아편의 해독을 ‘망국(亡國)’과 연결해 지적하거나 아편중독으로 인한 피해 사례들을 조망하는 기사가 연일 등장하는 것을 본다면, 아편에 대한 경계 의식과 부정적인 인식이 사회에 깊숙이 자리하기 시작했음은 충분히 짐작된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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