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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의 가정상비약 아편은
어떻게 ‘마약’이 되었나?

‘마약’의 의미


현재 우리는 ‘마약’을 사회적 ‘금기’의 대표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약’은 의학적 정의가 아닌, 법률상의 정의를 담고 있는 용어이다. 따라서 ‘마약’은 그 생산과 사용에 있어 국가의 통제가 반드시 필요한 모든 약품을 지칭하며, ‘마약’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미 ‘잠재적 위법성’이 내포되어있다. 하지만 마약은 인류의 질병 치료와 외과적 의료 행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고, 의학 발전에 엄청난 공헌을 해온 도구이기도 하다. 사실 사회에서 마약이 빚는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은 마약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약은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 도구라 할 수 있다. ‘마약’이라는 용어와 그 정의가 존재하지 않던 전통사회에서는 그것을 재배하고 사용하는 일 자체가 모두 민간의 자연스러운 권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그 권리를 차츰 잃어갔다.


〈양귀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약류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양귀비에서 채취되는 아편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농가에서 가정상비약으로서 양귀비를 재배하고, 아편을 채취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이러한 민간의 권리는 보건·후생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의 권한으로 재설정되었다. 국민국가의 형성과 함께 ‘국민’이 탄생하면서 이 같은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농가의 아편 채취와 사용은 국가의 통제 대상이 되었고, 필요에 따라 양귀비를 재배하는 행위 역시 개인의 권리를 넘어선 ‘범죄’로 인식되어 갔다. 우리는 왜, 어떤 과정을 거치며 그것을 금기시하게 되었을까?




약재로 사용되던 양귀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편은 일명 ‘앵속(罌粟)’이라고 하는 양귀비의 과피(果皮)에 상처를 낸 후 분비되는 유액을 모아 자연 건조해 굳힌 덩어리를 말하는데, 이것을 ‘생아편’이라고 한다. 아편의 재료가 되는 양귀비의 재배에 대한 기록은 조선 초기 기록인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이미 그 이전부터 앵속이 약재로 인식되어 사용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 『세종실록』 제148~155권의 「지리지」에 ‘앵속’이 약재로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조선 각 고을의 풍토에 따라 경기도와 경상도, 황해도의 경우 양귀비를 약재로 사용했고, 충청도와 강원도에서는 ‘앵속각(罌粟殼)’이라고 부르는 양귀비 열매껍질을 약재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또한 세종 15년(1433년) 조선에서 산출되는 약재로 그 약재 명과 향명(鄕名), 약의 맛과 성질, 효능 등과 채취 시기 등을 정리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제76~85권 「향약본초(鄕藥本草)」에 정리된 총 623가지 품종의 약재 중에도 개론과 각론에 앵속각과 앵자속(罌子粟)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 이같은 조선 초기 양귀비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통해 이미 양귀비는 그 이전 시기부터 중요한 약재 중 하나로 민간에 자리 잡아 왔음을 엿볼 수 있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와 함께 『성종실록』에는 성종 5년(1474년) 조선이 일본에 양귀비씨를 보낸 기록이 등장한다. 1474년 조선은 일본 사절에게 답서와 더불어 예물을 보냈는데, 그 예물 항목에 각종 면포, 인삼 100근, 집비둘기 암수 2쌍, 꿩 암수 1쌍, 해바라기씨 1봉, 복숭아씨 1봉 등과 더불어 양귀비씨 1봉이 포함되어 있다. 당대 양귀비는 국가 간 예물에 포함될 정도로 그 효능이 입증된 귀한 상품 중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아편’에 대한 최초의 기록


조선시대 문헌 중 ‘아편(阿片·鴉片)’이라는 용어가 처음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광해군 2년(1610년)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진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篇)」을 통해서이다. 이 책은 ‘아편’의 약효와 제법에 대해 “양귀비꽃이 피기 전에 씨방을 대나무침으로 찔러 10여 곳에 구멍을 뚫어놓으면 진이 저절로 흘러나오며, 다음날 진이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나무 칼로 긁어내 사기그릇에 담아 14일 정도 볕에 말린다.”, “매번 팥알만 한 것 한 알을 빈속에 따뜻한 물에 풀어 복용한다. 이 약은 성질이 급하기 때문에 많이 쓰지는 말아야 한다.”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아편’을 직접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최초의 한국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전통사회에서 아편과 그 원료가 되는 앵속은 주로 농가에서 재배하는 약재로 여겨졌다.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篇)」 (출처: 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


약재 이외의 목적으로 아편을 흡연해 피해가 발생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우리나라 정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헌종 대부터였다. 『헌종실록』 헌종 6년(1840년) 3월 25일의 기사에서는 청국 연경(燕京)에 간 사신의 보고가 있는데, 당시 청국이 혼란을 겪는 원인을 서양인들이 들여온 아편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이 무렵부터 아편이 청국의 주민들에게 유입되면서 피해가 발생하는 모습을 목격한 조선 정부는 청국의 사정을 관망하면서 점차 아편에 대한 경계 의식을 가져나갔다. 이런 분위기는 국내에 아편 흡연이 전파될 우려가 있는 사건이 발생하자 강력한 조치로 대응했던 조선 정부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헌종실록』 헌종 14년(1848년) 5월 9일의 기사는 청국에 다녀오면서 아편 흡연 기구를 국내에 들여오다 발각된 박희영이라는 사람의 처벌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당시 조선에는 이에 대한 단속 조항이 없었으나, 조정은 아편 흡연에 대한 경계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그를 특별히 처벌하고자 했고, 결국 추자도로 유배해 평생 종으로 살도록 하는 형벌을 내렸다. 아편 흡연 전파에 대한 조선 정부의 경계 의식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헌종 14년(1848년) 5월 9일 기사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처럼 조선은 아편을 천주교의 전파를 금지하던 국가정책과 결부해 내부적으로 엄중히 경계해 나갔다. 이후 점차 외국과의 통상 등 국제관계가 강제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그 경계 의식은 안팎으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개항기 청국으로부터의 아편 유입과 사회적 인식


아편은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해외 통상이 활발해지면서 국제적으로 상업화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마카오 등 항구를 통해 청국에 아편을 유통시키면서 거액의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고, 미국 또한 터키, 이란 등으로부터 구입한 아편을 청국에 유통시켜 큰 이득을 챙겨나갔다. 그 결과 청국의 아편 흡연으로 인한 중독 피해는 급증해갔다. 1835년 청국의 아편 흡연 인구는 약 2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였다. 결국 청국 정부는 1839년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불태워버리고 그들의 퇴거를 명령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보호무역을 내세워 청국에 함대를 파견하면서 아편전쟁이 벌어졌다. 아편전쟁 패배 이후 청국은 해외로부터의 아편 수입뿐 아니라 청국 내 양귀비 재배 또한 제한 없이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청국의 모습을 관망하며 외지에서의 아편 유입을 경계하던 조선 정부는 1876년 개항 이후 세계 각국과 무역조약을 체결하면서 천주교와 같은 ‘서교(西敎)’의 전래와 함께 아편 수입을 엄히 금지하는 조항을 삽입하고자 했고,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와 그해 8월 체결된 ‘무역규칙’,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제7관 등에 양국 간 아편 거래를 엄격히 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아편 수입 금지 조항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국과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제6조 등에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조선과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고, 이미 국내적으로 아편이 만연한 청국과의 조약에서 이러한 조항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청국 상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체결된 이 조약에 삽입된 영사재판권 조항은 청국 상인들로 하여금 조선에서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게 했고, 조선 내 아편의 유입과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정부 역시 이들의 아편 매매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없었다.

당대 언론 역시 국내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아편 매매와 흡연으로 인한 문제들이 청국인에게서 비롯되거나 관계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1901년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따르면 한성 시내에 40여 곳의 아편 판매소가 성업 중이었고, 『제국신문(帝國新聞)』은 1902년 6월 14일자 1면과 2면 전면을 할애해 청국인들로부터 유입되는 아편으로 인한 대한제국 사회의 병폐를 상세히 보도할 정도였다. 대한제국에서 아편과 그 흡연 문제는 날이 갈수록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제국신문(帝國新聞)』1902년 6월 14일 1면(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신문아카이브)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아편 흡연이 빠르게 번져나간 데에는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가진 아편에 대한 관대한 인식도 원인을 제공했다. 전통사회 농가에서 양귀비를 재배해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생아편은 대부분 가정에서 가정상비약으로 사용되는 등 당시 국내에서 아편은 가정상비약으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관리들도 이를 단속했을 때 일어날 주민들의 항의를 두려워해 단속을 등한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1894년 10월 법무아문 고시를 통해 「아편연금계조례(鴉片烟禁戒條例)」를 제정해 아편 금지를 공식화했다. 국내 최초의 아편 금지 규정이었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법률로 전환되어 1898년 「아편금지법」 제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아편에 대한 사회적 경계를 더욱 강화시켰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아편금지법」이 제정된 그해 9월 벌어진 고종 독살 미수 사건, 이른바 ‘독차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왕을 시해할 목적으로 고종과 순종이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몰래 투입해 발각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05년 『형법대전(刑法大全)』에 그간 2년 이상 3년 이하의 감금에 처했던 아편 규정 위반자에 대한 처벌 수준을 징역 15년으로 크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한제국 정부의 아편에 대한 공포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당대 아편 흡연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같은 기간 생산된 언론자료 등을 통해 아편의 해독을 ‘망국(亡國)’과 연결해 지적하거나 아편중독으로 인한 피해 사례들을 조망하는 기사가 연일 등장하는 것을 본다면, 아편에 대한 경계 의식과 부정적인 인식이 사회에 깊숙이 자리하기 시작했음은 충분히 짐작된다.




집필자 소개

조석연 (신한대학교 리나시타교양대학 부교수)
조석연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신한대학교 리나시타교양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마약의 사회사: 가정상비약에서 사회악까지, 마약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논문으로는 「해방 이후의 마약문제와 사회적 인식」, 「마약법 제정 이후 한국의 마약문제와 국가통제」, 「1970년대 한국의 대마초문제와 정부 대응」, 「1980년대 한국의 마약소비와 확산」, 「한국 마약문제 연구의 활용 기록과 자료」 외 다수가 있다.
“어느 땅에나 도박의 폐단이 존재하다”

미상, 계산기정,
1803-12-12 ~ 1803-12-13

1803년 12월 12일, 대릉하보(大凌河堡) 30리를 가서 말에 풀을 먹이고 쌍양점(雙陽店) 20리를 가서 묵었다.

대릉하(大陵河)는 퍽 넓고 크다. 바다에서 80리 떨어져 있고 삼면이 다 큰 들판이다. 곧 명말(明末)의 전쟁터이다.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군중을 거느리고 적군과 항거하는데, 하루는 큰바람이 급작스럽게 일어나 나는 모래가 하늘에 가득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병이 진지 앞에 닥쳐와 채 대오를 정비하기도 전에 단숨에 붕괴되었다. 그래서 유정은 마침내 그 일로 죽었고 그의 휘하 수십 만의 무리들이 뒤이어 죽었는데, 언제나 구름 끼고 흐린 때가 되면 답답하고 억울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대릉하보의 마을은 대릉하에서 5리가 떨어진 곳으로, 민가와 점포의 번성함이 신민참(新民站)과 맞먹을 정도다. 이곳에는 식품으로 어차과(魚鹺苽)가 있어 별미로 친다.

대릉하보(大凌河堡)에서 앞으로 10여 리를 가면 길 왼쪽 평원에 사동비(四同碑)가 있다. 명 나라의 도독 첨사(都督僉事) 왕평(王平)과 왕종성(王宗盛)의 묘비이다. 만력(萬曆) 연간에 왕씨의 부자 형제가 충절을 세워 마침내 비석을 건립하여 일문(一門)의 충렬을 포창하였는데, 무덤 네 모퉁이에 각각 비석 하나씩을 세웠기 때문에 사동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뒤쪽의 두 비석은 뽑아가 버리고 단지 귀부(龜趺)만 남아 있는데, 앞쪽의 두 비석에는 각각 명도독 첨사 왕공휘모지묘(明都督僉事王公諱某之墓)라고 씌어져 있다.

비석에는 자획을 긁어 버린 흔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틀림없이 본래 공적을 기술한 글이 있었으나, 그 어구가 당시의 기휘에 저촉되었기 때문에 혹 뽑아 긁어 버린 것이리라.

서북쪽으로 금주위(錦州衛)까지 20리 사이에는 지나온 여관이나 관청에 ‘금지도박(禁止賭博)’ 네 글자가 많이 씌어져 있다. 도박의 폐단이 우리나라와 똑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송산보(松山堡)는 소릉하(小凌河)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옛 성터가 있는데 적루(敵樓)를 두었던 곳이다. 《심양일기(瀋陽日記)》, ‘신사년(1641, 인조 19) 중추 보름에 세자(世子)와 대군(大君)이 심양에서 출발하여 무릇 6일 만에 가로놓여진 한 언덕에 이르러 금주성(錦州城)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호행인(護行人)이 말하기를 ‘한족(漢族)의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이 성을 굳게 지켜 성 밖에 화포(火砲)를 많이 묻었으며, 유림(柳琳)도 그 동쪽 모퉁이에 있었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몽고병과 함께 전진(戰陣)을 치고 불을 놓았으며 성안에서도 그것에 맞서 포를 쏘아 포탄이 여러 차례 세자막에 떨어졌는데, 포탄이 거위알 크기만 하므로 흙담을 쌓아 가리우다가 후에는 또 송산(松山) 서쪽 10리 가량에다 막차(幕次)를 옮겼다.’고 하였다.

산마루부터 평지까지 다 참호를 판 것이 토성(土城)의 형상 같았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포위 진지를 쌓았던 자리다. 조대락(祖大樂)이 총병(摠兵)으로 성을 지켜 2년 동안 포위되었다가, 임오년(1642, 인조 20) 2월, 총병 왕정신(王廷臣)의 내응으로 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성안의 사람들은 다 도륙되었는데 오직 친절한 장관(將官) 13인만이 죽지 않았다. 조대락과 군문(軍門) 홍승주(洪承疇)는 다 잡혔는데 조대락은 곧 항복하였고 홍승주는 처음에는 굽히지 않다가 심양에 이르러서 역시 항복했다고 한다. 보루 위에는 봉화대가 있고 연기와 불을 피우던 곳이 아직도 뚜렷하게 보인다.

관마산(官馬山) 아래에 큰 무덤 둘이 있는데, 이것은 경관(京觀)이다. 옛날의 싸움터였는데 지금은 목장이 되었다. 산 뒤에는 본래 몽고 부락이 있었는데, 몽고 족속들은 거처하는 가옥이 없고 좋은 물과 풀이 있는 데로 가서 머물러 살곤 한다. 명대 말기에 한번은 이들이 비바람같이 급작스레 닥쳐와 남의 부녀자를 약탈해 가 버려서 주민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여 다른 데로 이전해 버렸다.

행산보(杏山堡)는 역시 명대 말기에 백전을 거듭한 싸움터다. 관군(官軍)이 이곳에서 크게 패전하여 마을 집들이 아직도 쓸쓸하고 들판의 기색은 황량하다. 그래서 자연 보는 것마다 처참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다.

이곳에서부터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는데, 넘쳐흐를 듯하게 높다. 바다 남쪽이 곧 산동(山東)의 여러 읍들로 옛날의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의 땅이다. 동쪽은 우리나라 황해도 연안과 서로 통하니 숭정(崇禎) 이후에 명 나라로 들어가던 길이다. 고교보(高橋堡)의 마을도 역시 번화하여 송산보(松山堡)와 서로 맞설 정도다. 병신년(1776)에 사신 일행이 왕씨(王氏) 성을 가진 점사에 투숙했는데, 밤중에 뜻밖에 은 1000냥을 잃어버려 형부(刑部)에다 일러 왕씨 일가를 체포 심문했다.

왕씨의 처는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사실 은을 훔치지는 않았고, 다만 처녀[室女] 때에 한 사나이와 간통했으니, 죄를 감히 모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자백하였다. 건륭 황제(乾隆皇帝)가 그 말을 듣고 그녀가 숨김이 없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왕씨의 식구를 전부 풀어 주고 그 처에게 옷 한 벌을 내리고 역(驛)의 수레에 태워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그 일이 지금까지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마을에는 관제묘(關帝廟)가 있는데, 꽤 현저하게 영이(靈異)하여 밤중의 음산한 기가 내릴 때에는 번번이 병마의 치닫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수투전으로 악명이 자자한 자, 감옥에 갇히다”

투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김령, 계암일록,
1607-06-05 (윤) ~ 1607-06-10 (윤)

1607년 윤6월 5일, 권경흥(權景興)의 사건을 듣고 섬뜩했다.

윤 6월 10일, 몹시 더웠다. 심부름꾼이 영천에서 돌아왔다. 그가 전해준 전 형의 편지를 보았다. 편지에 권경흥이 팔목(수투전)으로 악명이 자자하여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살인으로 이어진 동전 던지기 놀이”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02-26 ~ 1794-03-12

산창(山倉), 대관창(大館倉), 남창(南倉)을 돌며 환곡을 나눠주고 있을 때였다. 파발꾼이 헐레벌떡 달려와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노상추에게 바쳤다. 고목에는 “어제 본창(本倉)에서 환곡을 나눠줄 때 북면(北面) 송정리(松亭里)의 아동 김세황(金世况)과 읍내의 향교 남자종 장삼득(張三得)의 아들 장천항(張天恒)이 함께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때 장천항이 기왓장 돌로 김세황을 때렸습니다. 김세황은 한나절이 지난 신시(오후 3~5시)에 죽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경악한 노상추는 바로 검안소로 나아갔다. 김세황의 시신을 직접 조사하니, 얼굴 전체에 특별한 상처는 없으나 머리 살갗과 귓바퀴 근처 뺨에 오목하게 함몰된 부분이 있었다. 상처의 길이는 손가락이 두 개 들어갈 정도였고, 넓이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노상추는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冤錄)』을 뒤져 비슷한 상처의 모양을 찾아보았다. 책에는 구타를 당해서 즉시 죽었을 때 이런 상처 구멍이 난다고 적혀 있었다.

노상추가 검시를 끝내고 관아로 돌아오자 죽은 김세황의 부모가 공초를 올렸다. 기타 여러 사람에게도 이와 관련한 공초를 받았는데, 김세황을 때려서 죽게 한 범인은 장천항이라고 증언한 것이 모두 일치했다. 노상추는 이를 참고하여 옥안(獄案)을 작성하고 파발로 이웃 고을인 창성부(昌城府)로 보내 창성부사의 복검(覆檢)을 요청했다.

다음날 오후에 창성부사가 삭주부로 와서 복검을 하였다. 전례대로 두 부사는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하였다. 그런데 하인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온 창성부사가 거만하게 구는 꼴이 같잖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번 옥사는 함께 처리해야 하긴 했으니, 싫어도 싫은 티를 다 낼 수는 없었다. 그저 요즘 새기고 있는, 화내면 더 곤란해진다는 뜻인 ‘분사난(憤思難)’이라는 글자만을 떠올리며 참아보았다.

노상추는 복검 결과까지 종합하여 옥안을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보름 만에 돌아온 처분 내용은, “이 옥사만큼 잔인한 것이 없지만 처형할 나이에 차지 않았으니 1등을 감해 차율(次律)을 적용해서 장(杖) 1백으로 죄를 결정하여 희천군(熙川郡)에서 3천 리 떨어진 곳에 정배하라.”라는 것이었다. 범인인 장천항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터라 처벌을 1등 감하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장 1백 대를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장을 맞은 몸으로 3천 리나 유배 가면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바둑과 장기에 이성을 잃은 사람”

장기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808-05-09 ~ 1808-05-24

요즘 노상추가 묵고 있는 여관 사람들 사이에서는 바둑과 장기가 대유행이었다. 같은 여관에 묵는 사람 중에는 바둑에 넋을 잃고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빠진 사람도 있었다. 비단 이 집에서만 유행인 것은 아니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바둑과 장기에 푹 빠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여 앉으면 바둑판과 장기판을 펴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며 훈수를 두곤 했다.

이렇게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건만, 노상추는 바둑알과 장기말에 손도 대질 않았다. 잡기는 군자가 익힐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노상추 집안이 3대가 무업에 종사하는 집안이니 노상추도 으레 바둑 등의 잡기를 즐길 것이라 여기지만 노상추는 바둑과 장기가 저포(杼浦)나 다름없는 못된 습속이라 여겼다. 오늘도 장동원(張東源) 령(令) 등 여러 사람이 모여서 바둑을 온종일 두었다. 장동원 령이 노상추에게도 같이 바둑을 두자고 권했으나 노상추가 거절하자 사람들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재미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어찌 바둑에서 재미를 찾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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