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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일기, 한 편의 영화를 만나다

하원준

스토리 테마파크 웹진 ‘담談’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선인의 일기, 한 편의 영화를 만나다>를 연재하게 된 하원준 작가입니다. 저는 지난 3월 창간호에서 <조선시대 스승과 제자, 한편의 영화를 만나다>라는 제목 하에 구스 반 산트 감독의 <굿 윌 헌팅>을 첫 번째 영화로 소개했었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기고문을 읽어주셨던 지인들께서, 과거 일기와 현대 영화의 접목이 비교적 흥미롭다는 격려를 해주셨기에 마음의 안도감이 듭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더 흥미로운 만남을 이끌고 싶다는 의욕이 봄날 새싹처럼 새록새록 해집니다. 그럼, 이제 <선인의 일기, 한 편의 영화를 만나다>의 두 번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양반과 광대, 한 편의 영화를 만나다-<일 포스티노>

올해는 유독 봄이 빨리 찾아왔습니다. 뉴스에서는 벚꽃의 개화시기가 예상보다 빨라져 개나리, 진달래와 동시에 개화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각종 꽃들의 개화시기가 맞물려 더 화려한 봄꽃 향연의 기대감이 생기면서도, 그렇게 빨리 찾아온 봄은 우리 곁을 빨리 떠날 것이란 생각에 미리부터 섭섭하기까지 합니다. 변문팔대가로 불리는 중국 청나라의 문학가 오석기(吳錫麒)가 쓴 <봄을 보내며>라는 시에 구십춘광거여사(九十春光去如梭)라는 싯구가 있습니다. 대게 이 싯구에선 석 달 동안의 화창한 봄 날씨를 일컫는 말이면서도 노인(老人)의 마음이 청년(靑年)처럼 젊음을 이른다는 구십춘광(九十春光)에 의미의 초점을 맞춥니다만,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깨달음을 주는 것은 거여사(去如梭)일 겁니다. 사(梭)는 베를 짤 때 날실의 틈으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며 씨실을 풀어 주는 구실을 하는 배(舟)처럼 생긴 나무통(북)을 일컫는 말입니다. 결국, 90일에 이르는 봄이 얼마나 빨리 지나는 느낌이면, 베틀 북 같다고 표현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긍정적인 성격이라 그런지 몰라도, 구십춘광거여사(九十春光去如梭)라는 싯구를 통해 인생무상이 아닌 현재에 충실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을 도리가 없다면, 흘러가는 세월을 충만한 마음으로 즐겨야겠지요. 그런 점에서 화사한 햇살과 포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봄의 풍류를 즐기는 것도 우리들에겐 매우 중요한 태도일 것입니다.

옛 조선의 선비들도 봄날이 되면 좋은 벗들을 모아 산과 강으로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강에 배를 띄우고 시와 노래를 부르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이러한 선비의 풍류는 조선시대의 화가, 신윤복은 <주유청강>이라는 그림에서 잘 표현되어 있고, 이재용 감독의 우리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년>의 영화 속에서도 뱃놀이를 즐기는 선비의 풍류를 담은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영화 스캔들 주유청강

그 외에도 달빛에 취해 대문 밖에서 술을 마시는 선비, 아픈 몸을 이끌고 강물에 흩날리는 꽃잎을 감상을 위해 길을 떠나는 선비, 노천에서 회와 어탕을 즐겼던 낚시 모임을 가진 선비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운치 넘치게 봄날을 즐기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테마파크에도 봄날의 풍류를 즐긴 선비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인물 캐릭터 내엔 ‘천민 승려’의 이야기가 분류되어있는데요, 그 중, 쌍피리 부는 광대 그룹에 관한 이야기 소재를 살펴보면 <음악과 시로 어울렸던 광대와 양반, 눈물로 헤어지다>는 이야기가 유독 특별하게 눈을 사로잡습니다.

이 이야기는 서찬규가 쓴 <임재일기> 93페이지에서 127페이지까지 적힌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생원과에 합격하고 서울에 머무르던 서찬규가 전라도 출신의 출중한 창부(唱夫:광대) 조신성(趙新聲), 재인(才人:줄타기) 강계술(姜啓述), 무동(舞童:가무 천민) 엄달운(嚴達運)을 만나게 되었고, 젊은 날의 풍취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찬규를 따라 서울에서 대구로 온 그들은 서찬규의 집에서 반년동안 숙식을 하게 되었고, 이후 대과를 준비해야 했던 서찬규는 이목이 염려되고, 가솔이 늘어나는 데 부담이 있어 봄에 잠시 그들을 내보냈답니다. 하지만, 초여름이 되자 창부들이 찾아와 어려운 처지를 의탁하길 청해와 서찬규는 그들을 다시 자신의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였고, 창부들은 서찬규의 절구를 노래하기도 하고, 그가 공부하다 휴식 겸 산에 올라 경치를 노래할 때면 가락을 띄워 흥을 돋워주기도 했지요. 그 후, 9월이 되어 서찬규는 자신의 집에서 반년동안 숙식하던 창부(倡夫:남자 광대)들을 내보내며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을 크게 느꼈다고 합니다. 창부 일행들 역시 자신들을 배려한 서찬규의 집에서 쉽게 발길을 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신분을 뛰어넘어 서찬규와 세 명의 광대는 눈물로 이별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창간호에서도 언급이 되었던 서찬규라는 인물은 도천(道薦: 감사가 자기 도내(道內)의 학식이 높고 유능한 사람을 임금에게 추천하던 일)에 다섯 번 오르고 암행어사의 추천도 받았던 고고한 인물입니다. 그런 격조 있는 인물이 천민이라 일컫던 광대와의 이별을 애틋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서찬규가 신분을 넘어 광대들이 펼치는 예술을 진심으로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학문에 힘 써야할 선비가 광대들을 집안에 들였을 때, 분명 주변 사람들은 섣부른 오해를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서찬규가 학문을 접고, 놀이에 빠져 지낸다고 걱정을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서찬규에게 그것은 기우일 뿐이었지요. 선비로써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이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던 그는 배고픈 광대들이 온전히 그들의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에도 소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서찬규의 예를 통해 볼 때 우리는 조선의 선비들은 예술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스스로 정신수양을 위해 거문고를 배우고 익히면서 자연과 합일되어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정가(正歌)를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정가라는 이름 속에 바른 마음을 가지기 위해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 담겨있을 정도였으니, 예술을 대하는 선비의 태도가 무엇인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조선시대에 이처럼 애틋한 선비와 광대의 만남이 있었다면, 존경받는 시인과 평범한 우체부의 만남을 그린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일 포스티노>입니다.

일 포스티노 일 포스티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이탈리아 작은 섬마을로 망명한 칠레의 사회주의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필립 느아레 분)가 옵니다. 이 섬의 우체국장은 네루다의 도착으로 엄청나게 불어난 우편물량을 소화하지 못해 고민에 빠집니다. 이에 어부의 아들인 마리오 로뽈로(Mario Ruoppolo: 마시모 트로이시 분)를 고용합니다. 네루다의 삶을 동경하던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온 많은 편지들의 대부분은 여성들이 보낸 편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리오는 여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다는 마음에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시의 아름다운 은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이에 마리오는 시의 진심을 다가가며 점점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커져갑니다. 시를 알아가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 포스티노 일 포스티노

자신과 주변, 그리고 사회와 자연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면의 영혼에 눈뜨게 되고,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름답지만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베아트리체 루쏘(Beatrice Russo: 마리아 그라지아 쿠시노타 분)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일 포스티노 일 포스티노

이후, 네루다는 체포영장이 기각되어 다시 칠레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에 이별이 가슴 아팠던 마리오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네루다를 위해 마이크를 직접 들고 다니면서 섬과 자연의 소리를 녹음합니다. 파도소리, 베아트리체의 뱃속 아기의 심장소리, 그리고 별의 노래까지...

옛 선인의 일기 속 주인공인 서찬규와 광대의 이야기가 실화인 것처럼 영화 <일 포스티노>의 이 이야기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네루다는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외교관이며, 대표적인 사회주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반공주의 정권과의 정치대립으로 이탈리아의 한적한 어촌에 머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매한 인물인 마리오를 만났고, 그는 마리오에게 두 개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하나는 마리오가 어떻게 인간이 성장하고 바뀌어 가는가? 에 대한 인물 변화의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마리오에게 시란 무엇이며, 은유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서적 탐구의 이야기입니다. 간신히 문맹을 벗어난 마리오에게 은유라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숙제입니다. 마리오가 우연히 메타포우(metaphor)라는 단어를 알기 시작하고, 중요한 것은 자신의 느낌이고 경험을 솔직하게 언어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네루다의 이야기에 진심이라는 감정을 담기 시작하면서 그는 비로소 변화합니다. 그 변화의 핵심이 바로 사랑을 느끼는 것이지요. 당대 최고의 시인인 네루다는 한낱 편지 전달자에 불과한 마리오를 시인으로 인정하고, 그의 형편없는 시를 인정해줌으로써 그가 최고의 감정이라는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상대의 신분과 지위를 떠나 인정하는 것... 그것이 선비이며, 시인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광대들이 재능을 발휘하게 했던 서찬규의 배려심과 마리오에게 잠자고 있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일깨워준 네루다의 배려심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고 봅니다. 또한, 서찬규와 이별해야했던 광대들의 안타까움과 네루다와 작별하는 마리오의 아쉬움도 역시나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고 봅니다. 결국, 온전한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잊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가장 우리들에게 순수한 감정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별은 동서고금을 떠나 애틋함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도 우리들의 순수한 감정 때문일 것입니다. 문뜩,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지금의 만남에 온전히 기뻐해야 하는 것은 곧 우리에게 이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해변 풍광이 돋보이는 <일 포스티노>에는 안타까운 사연 하나가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마리오 역할을 했던 배우 마시모 트로이시는 영화 촬영을 끝낸 다음날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배우가 생명을 걸고 연기에 도전한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영화 속에서 그는 아픈 얼굴을 드러낸 채, 연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마리오가 베아트리체에게 표현한 시의 마지막 한 줄을 소개하며 조선시대 양반과 광대, 한 편의 영화를 만나다- <일 포스티노>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베아트리체. 당신의 미소는 나비 날개 짓처럼 퍼진다. 일 포스티노 고(故) 마시모 트로이시(Massimo Troisi)
1953년 2월 19일(이탈리아)-1994년 6월 4일

스토리테마파크 참고스토리

작가소개

하원준
하원준
서울예술대학교와 추계예술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영화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그리고 대학에서 겸임교원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두사부일체> <그녀를 모르면 간첩> <뜨거운 안녕> <렛미 아웃> <들개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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