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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그것’이 문 앞에 서서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좀 유별났다. 당시는 외고나 과고가 흔치 않을 때라, 일반고 중 명문으로 이름난 학교들이 있었는데 우리 학교가 그랬다. 강북 한 귀퉁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즈음 격년으로 학력고사(현재의 수능) 수석을 배출했고 한 반에선 80퍼센트 이상,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했다. 왕관의 무게라고나 할까. 학교가 유명해질수록 재학생들은 빡빡한 학업 스케줄에 시달려야 했다. 야간자율학습이나 각종 특별반은 그렇다 치겠는데, 문제는 등교시간이었다. 새벽 다섯 시 반!

가까운 친구들은 걸어서 가면 되지만,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던 대부분의 나 같은 학생들은 등교 수단을 구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어머니와 우리 동네 학부모 세분은 고심 끝에 봉고차를 운행하기로 결정했다. 운전은 그 중 한 친구의 삼촌이 해주시기로 했다. 결국 우리 셋은 아침마다 서로의 부스스한 머리와 졸린 눈을 바라보며 봉고차로 함께 학교에 갔다. 그런데 가끔 운전해주시는 분 사정으로 봉고차를 탈 수 없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와 나는 택시를 잡기 위해 차 다니는 길까지 함께 걸어오곤 했다. 어슴푸레한 길엔 다니는 차도 거의 없지만, 가물에 콩 나듯 보이는 택시는 우리를 본 척도 않고 쌩쌩 지나쳤다.

“안경 벗어.”

처음엔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안경을 왜?”

“아침부터 택시 첫 손님으로 여자 태우는 것 재수 없다고 할 텐데, 안경까지 쓰고 있으면 더 그렇지. 빨리 벗어.”

학교에 빨리 가야하니 안경을 벗긴 했지만, 황당했다. 이후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난, 죄인 아닌 죄인처럼 숨죽이고 있었다. 안경 쓴 여자는 새벽에 택시도 못 타는 걸까.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는 억울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머니는 교회 권사다. 그러나 아직도 꿈에 여자들이 많이 나오면 ‘오늘 재수가 없을라나’ 혼잣말을 하신다. 어디 그뿐이랴. 가족 중 생일 맞은 사람에겐 ‘오늘 낮에 꼭 국수를 먹으라.’고 당부하신다. 그래야 명이 길다나.

나 역시 크리스찬이지만, 어머니의 그런 당부엔 “예.” 하고 순종하는 편이다. 그저 미신처럼 보이는 금기나 터부에도 나름의 깊은 뜻이 담겨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고로 어른 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니.

하지만 ‘아침 첫손님으로 여자는 재수 없다’는 식의 터부엔 마음이 불편할 뿐 아니라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여성들이 사회활동 하거나 공부를 많이 하는 것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랜 불편한 시각과 억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안경 벗고 택시 잡으란 말에도 이토록 불쾌한데 덕만이는 어땠을까.


MBC 드라마 <선덕여왕> 2009



드라마 <선덕여왕>의 덕만공주는 자신이 신라의 공주인지도 모른 채 부모로부터 버려져 북쪽 사막에서 들짐승처럼 자란다. 후에 자신이 왕실로부터 버려진 이유가 ‘어출쌍생(御出雙生) 성골남진(聖骨男盡)’이라는 예언 때문임을 알게 된다. 즉, 왕이 쌍둥이를 낳으면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다는 예언이 두려웠던 왕이, 쌍둥이 중 큰 딸인 천명만을 남기고 덕만을 버린 것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그런 만큼 ‘성골남진’의 해석도 드라마와 실제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많은 이야기 속에서 ‘여성’ 혹은 ‘쌍둥이’를 터부시하는 것은 클리셰라 할 만큼 자주 쓰이고 있다.

2000년 영화 <배니싱 트윈>에서도 불길한 쌍둥이가 등장하며, 2019년 영화 <사바하>에서는 아예 쌍둥이 자매 중 하나가 악마 혹은 짐승을 상징하는 ‘그것’이 되어 인류의 재앙을 가져온다.

혹 이런 류의 영화 중 쌍둥이 자매가 아닌 형제에 대한 것이 있나 찾아봤지만 좀처럼 찾기 힘들었고, 기껏해야 2010년, 유지태 배우가 1인2역을 한 <비밀애>에서, 한 여자를 두고 갈등하는 쌍둥이 형제 이야기를 찾았을 뿐이다.


KBS2 드라마 <7일의 왕비> 2017



드라마 <7일의 왕비>의 여주인공 채경 역시 억울한 입장이다. 중종비인 단경왕후의 이야기를 극화한 이 드라마에서, 채경은 왕실 사람과 얽히면 불행하게 된다는 예언으로 인해 사랑하는 대군을 밀어낸다. 후에 밝혀질 일이지만, 대군에게는 채경의 존재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줄 ‘부적’이자 ‘증거’ 그 자체였으니... 한쪽은 밀어야 하고, 한쪽은 당겨야 하는 아이러니한 관계다. 결국 대군이 이기고, 채경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시작부터가 어딘지 불평등한 이 관계는 결코 해피엔딩이라 할 수 없는 가슴 저릿한 결말로 끝이 난다.

몇 번, 납량특집호에서도 다룬 적 있는 한국의 귀신이나 요괴들은 주로 평소 억눌려 있거나 학대를 받았던 이들이다. 그래서 늘 여자, 천민, 굶어죽은 이들이 단골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터부시 되는 것 역시, 그들을 억눌러놓고 누린 것이 많은 이들의 신경쇠약에서 비롯된 건 아닐는지.

나는 모든 종류의 금기나 미신, 터부를 믿지 않는다. 누군가 풍수지리상, 현관의 신발을 집 쪽으로 돌려놓아야 복이 들어온다는 말을 하길래, 일부러 신발을 모두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정리해놓기도 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이런 행동 역시 미신을 무시하겠다는 데서 비롯된 강박행동이 아닐까 싶어, 이후엔 가족들에게 각자, 깨끗이 정리하자고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귀신을 믿지 않는 건 아니다.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실을 초월한 영적인 뭔가를 믿는다는 것이 아닌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무엇, 사람들 간에 흐르는 영적인 교감과 이 우주를 오차 없이 진행시키는 절대선을 믿는다. 그래서 더욱 미신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한다. 우리 고유의 요괴인 어둑시니만 보아도 그렇다. 어둑시니는 두렵게 보기 시작하면 단숨에 내 키를 넘어 집채만큼 커진다.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는 순간, 줄어들어 개미만큼 작아진다. 그러니까 어둑시니를 키우는 에너지는 바로 보는 사람의 두려움 그 자체다. 무섭다, 두렵다, 이것이 불길하다, 저것이 화를 불러온다.. 두려워하며 도망치려는 순간, 나는 그것에 이미 얽매인다. 작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나 자신을 큰 두려움에 속박된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영화 <렛 미 인> 2008



서양의 뱀파이어들을 보면, 그들이 사람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드라큘라 백작을 비롯한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현관에 서서 매너있게 묻는 이유는 하나다. 그들은 ‘예스’란 답을 듣지 않으면 결코 집안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사실 귀신은 그리 강하지 않다. 사람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란 뜻이다.

<선덕여왕>의 미실은 하늘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천녀, 신관으로 행세하며 백성과 정치판을 쥐락펴락한다. 덕만공주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해 판을 뒤집어버린다.


개양귀천(開陽歸天) 일유식지(日有蝕之)
개양 하나가 하늘도 올라가면 일식이 있으리라

개양자립(開陽者立) 계림천명(鷄林天明)
개양이 서야 계림의 하늘은 다시 밝아지고

신천도래(新天到來)하리라
새로운 하늘이 열릴 것이다.


덕만은 일식을 계산한 뒤 거짓정보를 흘려 미실로 하여금 잘못된 정보를 사람들에게 선포하도록 한다. 일식이 없다고 선포한 미실이 미처 말을 거두기도 전에, 일식이 벌어진다. 이윽고 다시 밝아진 하늘 아래 덕만이 당당히 선다. 하늘이 내려 보낸 사람처럼 빛을 받으며 말이다. 천녀로서 미실의 명예가 한순간에 나락에 떨어진 건 물론이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 2009_일식이 진행되는 장면



MBC 드라마 <선덕여왕> 2009_일식이 진행되는 계림의 하늘,
그 하늘 아래 새로운 빛을 받으며 선 덕만공주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곧잘 속는다. 유한한 인간의 존재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조상을 위하는 마음, 내 자손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들을 기리고, 그들을 위해 노력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두려움으로 속박하고, 가족과 이웃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금기와 터부는 타파하는 것도 좋을 일이다. 누가 아는가. 내가 덕만처럼 하늘이 보낸 사람일지.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기둥과 들보를 올린 늦은 봄 밤, 조용히 상량제를 지내다”

1805년 4월 24일에 예정된 대로 기둥과 들보를 올렸다. 기둥은 사시(巳時, 9~11시)에 세웠는데 손방(巽方, 동남쪽)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기둥을 세우기 시작한 지 12시간이 지난 해시(亥時, 21~23시)가 되서야 들보를 올렸다. 이어서 상량제를 지냈지만, 밤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인근의 사림이 와서 볼 수 없었다. 비로소 대장장이[冶匠] 2명에게 사당 건립에 필요한 철물을 만들게 하였다. 전후로 10여 일이 되어 철물 만드는 일을 마쳤다.

“역질이 돌아 능동 재사에서 제사를 합설하여 지내다”

1603년 2월 23일, 향시를 보러 현풍에 다녀온 김광계는 도착한 다음날 아침을 먹자마자 재종숙인 김기(金圻)를 뵙기 위해 찾아 갔다. 그런데 동네의 여러 친족들이 모두 애당(崖堂)에 모여 있었다. 김광계는 재종숙을 모시고 동네 친족들과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향시를 보러 갔다 온 이야기와 갑자기 퍼진 역질을 걱정 하다 보니 밤이 다 되어갔다. 내성(奈城) 재종숙 김령(金坽)과 숙항인 금발도 밤에 함께 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 밤이 늦어서야 흩어졌다.
다음날 김광계는 증조모 및 조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능동재사(陵洞齋舍)로 갔다. 원래 선대의 묘는 거인(居仁) 마을에 모셔져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서 지내야 했지만, 얼마 전부터 기세를 부리기 시작한 역질 때문에 거인 마을로 갈 수가 없었다. 김광계는 어쩔 수 없이 능동 재사로 가서 재사의 마루에서 증조모와 조부의 제사를 합설하여 지내고 다음날 내려와서 다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고나서 김광계는 서둘러 서원으로 향했다. 춘기제사를 준비하는 입재(入齋)를 하기 위해서였다. 입재 의식은 제사 3일 전에 시작하는데, 올해 제사는 2월 29일이라서 26일에는 서원에 들어가야 했다.
3일 동안 서원 경내에 머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여러 절차에 따라 예를 올리고, 29일엔 본 의식을 올리고 제사를 마쳤다. 제사를 마친 후 참여했던 사람들은 음복상을 받았다. 3일간의 제사 예식이 모두 끝나자 모든 유생들은 상하유사에게 절을 하고 서원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김광계는 음복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역질이 돌아 설날 제사 대신 참배만 올리다”

향1610년 1월 1일, 경술년 새해가 시작됐지만, 김광계의 집안은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집안에 역질이 돌아 설날 제사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김광계는 아우들인 광실, 광보, 광악과 함께 대문 안에서 사당을 바라보며 참배만 하였을 뿐이다.
참배를 마친 사형제는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처음 찾아간 김호 재종숙 댁에서 김광계와 형제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좌수 재종숙 댁의 노비들이 안에 알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참 동안 문 밖에서 서 있다가 겨우 사당문 밖에서 참배만 하고 돌아 나왔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김령 재종숙 댁이었는데, 내성 댁에는 광재, 광업 형제와 광하 형 등 동네 친족 몇 사람이 와 있었다. 곧이어 김지 재종숙도 찾아와서 함께 설술 몇 잔을 나누고 일어나 나왔다.
김광계는 동생들과 광찬 형의 아들인 김확을 만나러 갔다가 아침에 인사를 못 드린 좌수 댁에 다시 찾아갔는데, 그제야 마침내 들어가 세배를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김광계는 아우들과 함께 노산 재종조부 집을 들렀는데, 동네 친족들이 모두 함께 오고 오직 두세 사람만 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성 재종숙이 김광계의 집으로 가자고 하여 김광계 형제들과 김령 재종숙은 함께 나와 집으로 가던 길에 참봉 댁에 들렀더니 충주 사람 김극방(金克邦)이 김령 재종숙을 만나보려고 와 있었다. 그래서 다 함께 김광계의 집으로 가고, 동네 친족들도 모였지만, 역시 참배만 마치고 모두 모여 앉아 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공은 너무 취해 내성 재종숙과 함께 김광계의 집에서 자게 되었다.

“조선시대 망년 의례”

‘망년(忘年)'이라는 말은 “나이(歲)를 잊는다” 또는 “나이 차이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고려사』 권102 「열전」15 ‘이인로’조에는 ‘망년우(忘年友)’와 ‘망년교(忘年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인로·이규보·오세재·임춘 등 무신쿠테타 때 살아남은 젊은 문인들은 ‘망년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망년회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죽림칠현을 본받았다고 하여 ‘죽림고회(竹林高會)’라고 불리기도 했고, 강남 쪽에 산다고 하여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도 하였다. 망년회 회원들은 이의민·최충헌 등 무신들이 권세를 누릴 때, 술과 시로 세월을 한탄했다.
또한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은 자신의 문집인 『사가집(四佳集)』에 망년회에 관한 두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권14 제12의 「한강루 망년회 석상(漢江樓忘年會席上)」이라는 제목의 시와 권22 제15의 「여섯번째 답장 2수(六和 二首)」라는 제목의 시에서 ‘제천정 위의 망년회(濟川亭上忘年會)’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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