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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거짓말은 거짓말답게

영화 <기생충>, 2019



영화 <기생충>은 허구와 진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인, 그래서 결국 모두가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가 된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송강호 배우가 분한 기택네 가족은 박사장의 집에 한 명씩 한 명씩 ‘기생’하기 시작하는데, 그 비결이 바로 거짓말이었다. 그 거짓말이 뿌리내릴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준 박사장의 아내 연교가 늘 강조한 것이 ‘믿음의 벨트’라는 사실이 더욱 아이러니하다.


허구와 진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인,
결국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비극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는 장면에서, 너무 심하다는 생각과 함께 박사장 가족이 그리 악하게 그려지지 않았음이 아쉬웠다. 카타르시스를 얻기 위한, 혹은 처절한 동정과 씁쓸한 풍자를 위한 전제조건으론, 기택은 분명 선이고 박사장은 악이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런 선과 악의 경계 없이 모든 게 혼돈이었기 때문이다. 기택은 그리 착하지 않았고, 박사장은 그리 악하지 않았다. 기택 가족만 박사장 가족에게 기생한 것이 아니라, 박사장 가족 역시 기택 가족에 철저히 기생했다. 대체 누가 기생충이고 누가 숙주란 말인가. 그러다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어쩌면 감독이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의도치 않았을지라도, 그저 무심하게 살았을 뿐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존재로부터 칼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알고 보니 내가 그 존재에 기생하고 있었고, 그 존재는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나는 그와 선을 긋고 싶었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무관하지 않았던 것, 아니, 서로에게 기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해서 진실과 거짓이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기택과, 지하실에 숨어 살던 문광네 모두 ‘대만 카스테라’ 사업을 하다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 ‘대만카스테라’ 사건 역시, 가짜뉴스의 희생양이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만카스테라(출처: 이데일리. 2020.04.18.)



빵을 좋아하는 나는 오래전부터 여러 레시피를 보면서 혼자 다양한 빵과 케이크들을 만들곤 하는데, 실제로 카스테라나 케이크류엔 식용유(포도씨유나 올리브유 등, 모든 종류의 오일류)와 설탕이 무지막지하게 많이 들어간다. 버터를 넣어도 되지만, 식감이나 결을 위해 반드시 식용유를 사용하는 레시피도 있다. 그런데 ‘대만카스테라’ 반죽에 엄청난 양의 식용유를 들이붓는 장면이 TV에 나간 뒤, 그게 사실 적당량이란 걸 모르는 대부분의 시청자들과 여론이 ‘대만카스테라’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게 그 TV프로그램의 목적이었을 테지만, 빵 제조의 과정에 대해 무지한 실수였음이 분명하다. 사실 ‘빵순이’를 자처하는 내가 경험한 바론, 대만카스테라의 맛은 별로였다. 보기완 달리 퍽퍽했고 특색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이 사업이 좀 된다고 하니 여기저기 우후죽순으로 생겨버린 점포들 때문에 과다경쟁이 벌어져서, 조금씩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쇠락을 순식간의 몰락으로 만든 건 확실히 그 TV 프로그램 영향이었다.


1인 미디어의 발달,
가장 어려운 것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후에 그게 실수였다거나, 오해가 있었음을 인정한대도,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말 한마디, 기사 한 줄이 무섭다. 요즘처럼 1인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에서, 이를 보는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주관적 진실이 객관적 거짓으로 둔갑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부디 억울한 사람이 없길 바라지만... 글쎄...,


억울한 사람, 모함의 아이콘.
가짜뉴스의 피해자 이순신 장군



억울한 사람, 모함의 아이콘이라 하면 이순신 장군을 빼놓을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원균의 모함과 선조의 오판으로 백의종군’했던 장군에 대해 귀 따갑게 들었다. 이순신을 소재로 한 많은 콘텐츠에서도 이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만큼 이순신(뿐 아니라 많은 영웅)의 일생에 있어 거짓과 모함은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 이순신의 고난의 원인이 된 것이 바로 가짜뉴스라 하면 어떨까.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2004~2005. (출처: KBS1)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꽤 얄미운 인물이 등장한다. ‘요시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책사로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사신 역할을 수행했다. 고니시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꼬리아에 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전쟁이 확산되지 않게 하려고 나름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책사인 요시라를 통해, 일본군의 공격 루트를 조선에 흘리기도 한다. 이순신은 오랜 수군으로서의 경험으로 왜군이 부산으로 쳐들어올 리 없다며 가짜뉴스로 판단하지만, 선조와 조정은 달랐다. 결국 진격 명령을 거부한 이순신은 갇히고, 정말 부산으로 쳐들어온 왜군을 막기 위해 선조가 급파한 원균의 군대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대패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뉴스는 진짜다. 그런데 만약 ‘가짜뉴스’의 속성을 이용한 거라면? 다시 말해, 부하들의 희생을 막고, 쓸모없는 소모전을 펴지 않겠다는 평소 이순신의 특성을 파악하고 역으로 뉴스를 흘린 거라면?

어쨌든 상식적이지 않은 이 공격이 성공하면서 이순신은 고초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에도 고니시는 요시라를 활용해 명과 조선을 오가며 협상을 시도한다. 이순신과 고니시의 관계가 이후 어떻게 되는지는 영화 <노량>을 기다려보기로 하자.


가짜뉴스의 집약체가 만들어낸 소문.
‘우리 임금님은 하늘이 내리셨다.’



영화 <광대들 : 풍문조작단>, 2019



가짜뉴스의 집약체를 다룬 영화라 하면 <광대들 : 풍문조작단>을 들 수 있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에 명(命)하여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근일에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巖寺)에서 원각 법회(圓覺法會)를 베푸니, 여래(如來)가 현상(現相)하고 감로(甘露)가 내렸다. 황가사(黃袈娑)의 중[僧] 3인이 탑(塔)을 둘러싸고 정근(精勤)하는데 그 빛이 번개와 같고, 또 빚이 대낮과 같이 환하였고 채색(彩色) 안개가 공중에 가득 찼다. 사리 분신(舍利分身)이 수백 개였는데, 곧 그 사리(舍利)를 함원전(含元殿)에 공양(供養)하였고, 또 분신(分身)이 수십 매(枚)였다. 이와 같이 기이(奇異)한 상서(祥瑞)는 실로 만나기가 어려운 일이므로, 다시 흥복사(興福寺)를 세워서 원각사(圓覺寺)로 삼고자 한다." 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세조실록 33권, 세조 10년 5월 2일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가 아뢰기를,
"이 달 13일에 원각사(圓覺寺) 위에 황운(黃雲)이 둘러쌌고, 천우(天雨)가 사방에서 꽃피어 이상한 향기가 공중에 가득 찼습니다. 또 서기(瑞氣)가 회암사(檜巖寺)에서부터 경도사(京都寺)까지 잇달아 뻗쳤는데, 절의 역사(役事)하던 사람과 도성(都城) 사람, 사녀(士女)들이 이 광경을 보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세조실록 33권, 세조 10년 6월 19일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세조 연간, 특히 세조 10년 즈음해 왕이 행차하는 곳마다 유난히 이적 현상이 많이 등장한다. 어딘지 의심스럽지 않은가. 스스로 정통성 없는 왕이라 생각한 세조가, 자신이 하늘이 내린 임금임을 백성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일부러 이적을 조작했다는 그럴듯한 상상력에서 출발한 것이 <광대들 : 풍문조작단>이다. 광대들이 만들어낸 이적은 백성들에게 부풀리고 키워져 결국 ‘우리 임금님은 하늘이 내리셨다.’는 감탄이 터져 나오게 한다.


거짓과 의심은 사람도 죽인다.



사실 왕의 정통성이란 엄중한 문제였다. 적장자라는 정통성을 가진 왕보다 그렇지 않은 왕이 많았던 조선. 수많은 왕들이 자신의 정통성 문제를 고민하며 스스로와 타인을 괴롭혔다.


영화 <사도>, 2015



영화 <사도>는 평생을 ‘왕의 핏줄이 아니다.’, ‘형을 죽였다.’는 풍문에 시달리던 영조의 괴로움이,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을 향해 어떻게 폭발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거짓과 의심은 사람을 죽인다. <택시운전사>에서 보이는 80년대의 광주, 관동대학살에서 보이는 일본인들의 광기 역시 ‘거짓’으로 폭발했다.


영화 <택시운전사>, 2017



가짜뉴스로 유쾌한 맹진사댁.
미언도 좋고, 맹진사도 좋고, 입분인 말할 것도 없고!



우울한 분위기를 다소나마 전환하기 위해, 가짜뉴스로 벌어진 유쾌한 소극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한국인이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와 연극, 뮤지컬, 마당놀이 등으로 재탄생한 <시집가는 날>이다. 오영진의 시나리오 <맹진사댁 경사>를 1956년, 이병일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 <시집가는 날>, 1956



이 영화에서 맹진사(김승호 분)는 당대 세도가의 아들인 미언을 사위로 맞게 되었지만, 미언이 절름발이라는 말에 자신의 딸인 갑분이가 절대 시집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자, 몸종 입분이를 대신 시집 보냈다. 결말은 예상하듯이, 멀쩡하다 못해 훤칠한 신랑 미언의 출현. 맹진사와 갑분은 아뿔싸, 후회했지만, 사실 이 거짓말로 크게 다친 사람은 없다. 미언은 외모에 연연하지 않는 진실한 신부(게다가 예쁘다, 전설적인 배우 조미령이라니!)를 맞이해 좋고, 맹진사는 세도가와 사돈 되어 좋고, 입분인 말할 것도 없이 좋고!

가짜뉴스보다 더 가짜 같은 엽기적이고 독한 요즘의 뉴스를 보다 보면, 차라리 누구도 다치지 않는 유쾌한 가짜뉴스라도 보고 싶어진다. 진실이 거짓말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울러 거짓말은 진실처럼 말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은 누가 봐도 거짓말 같아야 하고, 웃음이 나야 한다. 허언증 갤러리의 다음 글들처럼 말이다.



(출처: 허언증 갤러리)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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