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브로드웨이에 올라와 작품상, 음악상 등 8개 부분을 휩쓸어간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오래된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한국에서도 라이선스로 공연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시대와 장소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경제 대공황기의 미국 남부 지역인 듯한 세트와 의상으로 분위기를 꾸몄다. 주인공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신화 속의 왕과 뮤즈인 칼리오페의 아들에서 천애 고아로 내려앉았다. 그가 종업원으로는 일하는 클럽에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 땅끝까지 밀려온 듯 단단한 여성 유리디스가 들어서고 그 둘은 사랑에 빠진다. 새롭게 쓰인 듯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를 몇 천 년 동안이나 셀 수도 없을 만치 되풀이해왔고 결말도 알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지옥문 앞에서 믿음을 잃고 돌아볼 것이고, 유리디스는 영원한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뻔히 알고 있는 작품을 때로는 원작 그대로 때로는 글룩의 오페라로 때로는 오펜바흐의 오페레타로, 아나이스 미첼의 뮤지컬로 되풀이하며 본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출처: 에스앤코)
좋은 이야기는 세월을 뛰어넘는다. 가장 최근에 변주된 이 작품에는 특이한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클럽의 MC이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인 헤르메스다. 극을 열고 극을 닫는 이 매혹적인 인물을 맡은 사람은 미국 흑인 배우 커뮤니티의 지주와도 같은 앙드레 드 쉴즈(André De Shields)로 1946년생, 76세의 배우다. 이 작품으로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토니상 뮤지컬 부문 남우조연상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73살이었다. 코로나가 세상을 휩쓰는 동안 뮤지컬 〈하데스타운〉으로 가는 길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코로나가 끝난 후 다시 무대에 돌아왔고, 그가 무대를 떠나자 그 자리를 메운 사람은 1951년생 릴리어스 화이트(Lillias White)이다. 릴리아스 화이트는 1997년에 개막한 뮤지컬 〈The Life〉로 일찌감치 토니상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던 대표적인 배우다. 극 중 유일한 노역을 뉴욕 출신의 노배우가 남녀를 번갈아 가며 맡아서 단단하게 버티고 서서 극의 중심을 잡고 이끌어 간다.
앙드레 드 쉴즈(헤르메스 역)의 뮤지컬 〈하데스타운〉 마지막 공연(출처: 유튜브_theatermania, 2022.05.30.)
반면, 라이선스로 공연된 한국 프로덕션의 헤르메스 역은 모두 젊은 남자배우들의 몫이었다. 1985년생인 최재림과 1986년생인 강홍석이 번갈아 헤르메스 역을 연기하면서 브로드웨이의 헤르메스와는 또 다른 매력을 뽐냈다. 그들의 헤르메스는 그들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궁금함이 남았다. 한국에는 그 배역을 연기할 만한 노배우가 정말 없었을까? 상업 뮤지컬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지 길게 잡아도 삼십 년 정도라고는 해도 그때 장년 역을 했던 배우가 하나도 남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유독 공연계 중에서도 뮤지컬 무대에서는 노년의 배역을 노년의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뮤지컬은 무대 공연 가운데 가장 상업적인 장르다. 작품의 완성도는 흥행으로 보장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뮤지컬 제작자들은 누구보다도 티켓파워가 있는 배우들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놀랍게도 한국의 티켓파워를 지닌 배우들은 심지어 브로드웨이의 유명 배우들보다 더 많은 출연료를 받기도 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라이브로 공연되는 공연장은 아무리 넓다 해도 좌석의 숫자가 정해져 있어서 한 번 공연할 때마다 들어올 수 있는 최대 수입은 정해져 있다. 때문에 브로드웨이에서도 아무리 영화나 TV에서 유명한 배우라고 해도 자신들이 받을 수 있는 출연료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영화 〈엑스맨〉으로 유명한 휴 잭맨이나 〈대부〉의 알 파치노,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도 주급으로 이천만 원 이상을 받지 못한다. 최근 가장 비싼 출연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핼로 돌리!〉의 베트 미들러도 회당 이천만 원을 간신히 넘겼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평균 제작비가 작품 당 천만 불 내외인 것을 미루어 보면 이 엄청난 배우들이 챙겨가는 출연료는 어쩌면 소소한 편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소소’한 출연료로 만족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브로드웨이와 한국은 뮤지컬 제작비의 셈법이 완전히 다르다. 한국의 경우는 일단 티켓파워가 큰 배우를 섭외하면 그 배우에게 출연료를 몰아준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다른 배우들의 출연료는 물론, 그 외의 제작비를 산정해 내려간다. 가장 많은 돈을 받는 인물을 중심으로 제작비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셈이다.
반면 브로드웨이는 다르다. 브로드웨이에는 1913년에 조직된 배우 노조(Actor's Equity Association) 가 있다. 노조가 성립되기 전, ‘보더빌’이라는 형식의 공연이 전국에서 수천 개의 프로덕션이 올라갈 때, 유명하지 않은 코러스들은 제작자와 출연하는 분량에 관해서만 계약을 맺었다. 90분짜리 공연을 위해 내내 대기해야 하지만 본인이 등장하지 않는 시간 동안의 출연료를 받지 못했다. 공연을 위해 연습하는 시간에 대한 대가는 물론, 그들이 공연을 위해 입는 온갖 화려한 옷들도 자신들이 구입해서 자신들이 수선해서 입어야만 했다. 노조의 성립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제작자들의 반발은 거셌지만 결국 노조는 이겼고, 제작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공연이든 노조원을 반드시 80퍼센트 이상 출연시킬 것과 최저 임금을 정했다. 때문에 현재도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어떤 공연이든 올리기 위해서는 거기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최저 임금을 지급해야만 한다. 최저임금은 2년에 한 번씩 노조와 제작자 협회가 협상한다. 2022년 현재 브로드웨이 배우들의 최저임금은 2,323 달러로 정해져 있다.
배우 노조(Actor's Equity Association)(출처: 유튜브_Companies On The Move)
그렇다면 제작자들은 계산을 해야만 한다. 공연에 등장하는 코러스의 숫자와 대사가 있는 조연배우들의 출연료, 창작자들에게 지급된 작품료와 로열티, 디자이너들, 기술 스텝과 무대 뒤 스텝들, 극장 대관료, 프로덕션 운영비 등을 모두 계산한 뒤 회당 벌어들일 수 있는 액수에서 그 총액을 빼고서야 유명 배우에게 줄 수 있는 출연료가 드러난다. 노조에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는 물론 극장에서 안내를 맡은 어셔, 무대 뒤에서 배우의 빠른 의상 교체를 돕는 인력까지 모두 각자의 분과에 가입되어 있고 최저 임금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를 어긴다면 제작자는 노조의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브로드웨이 제작자는 반드시 노조에 가입된 배우를 80퍼센트 이상 고용해야만 한다. 때문에 제작자가 노조의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는 것은 브로드웨이에서 더 이상 작품을 올리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출연료를 몇 번이나 제대로 지급하지 못한 제작자 가스 드라빈스키는 20개의 토니상을 받은 경력의 제작자임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블랙리스트 최상단에 이름을 올리고 파산했다. 브로드웨이의 출연료 계산은 아래로부터 위로 차곡차곡 쌓여 올라간다.
브로드웨이에서 노인 배역을 노인이 아닌 사람이 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물론 〈하데스타운〉의 헤르메스는 다르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고 그는 여성도 남성도 어느 인종이든 가능하다. 한국 공연에서 멋들어진 젊은 배우가 하는 것도 한국 프로덕션만의 개성이다. 하지만 브로드웨이에서는 배역에 분명히 노인이라고 정해져 있다면 노인 배우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노인 배우를 찾는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최저 임금이 받쳐주는 한 배우들은 무대에 머물고 싶고, 연출가들은 오디션을 통해 배우를 선발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출연료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상황에서 노인 배역에 노인 배우를 캐스팅할 만한 여력이 남아 있기가 쉽지 않다. 결국 배우들과 제작자들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관객들은 객석에 앉아 주연배우보다 나이가 많은 배역에게서 주연배우보다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모습을 종종 마주치는 낭패를 겪는다.
얼마 전 리노베이션을 끝낸 국립극장에서 오랜만에 연극 〈햄릿〉이 올라왔다. 손진책이 연출한 이 햄릿에는 원작에서라면 단 두 장면만 등장하는 유랑극단이 있다. 이 유랑극단의 단원을 맡은 배우들은 박정자(1942년 생), 윤석화(1956년 생), 손숙(1944년 생)이었다. 과거에 햄릿을 연기했던 유인촌(1951년 생)은 클로디어스 역을 맡았고 정동환(1949년 생)은 오필리어의 아버지인 폴로니우스를, 권성덕(1940년 생)은 무덤지기, 전무송(1941년 생)은 죽은 아버지를 맡았다. 죽을 이가 모두 죽은 뒤 햄릿을 맡은 강필석(1976년 생)이 “내 무대는 끝났다!”를 외칠 때 그의 뒤로, 정말 삶의 여명기를 보내고 있는 노배우들이 천천히 조명 밖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안긴다. 우리에게 이토록 많은 배우가 있다는 사실을 전설들이 증명해 보인 프로덕션이기도 했다.
연극 〈햄릿〉(출처: 국립극장)
노인에 관한 작품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심청전〉일 것이다. 심청전을 지켜보는 생각들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의 심청은 초반부터 팔 둥둥 겉어붙이고 ‘이제는 나 안 빠져 죽을라요!’를 외치기도 하고, 늙은 아버지 눈 뜨라고 어린 딸이 바다에 뛰어드는 사실을 본 젊은 관객은 분노하기도 한다. 세대 간 작품 해석이 가장 극단적으로 갈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국립창극단의 〈심청가〉의 한 장면(출처: 조선일보 2018.05.08.)
아니 잠깐, 그런데, 마지막으로 본 국립창극단의 〈심청가〉에서 심학규 역을 맡은 배우 나이가 몇이었더라? 스물여섯. 무대에는 무대만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도 백세의 절반도 안 되는 배우가 연기하는데, 우리는 지금 무대에서 노인을 위한 자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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