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가을은 단풍이 아니라면 공연과 함께

자연이 가득한 창극, 〈나무, 물고기, 달〉


여름이 바다라면 가을은 단풍이다. 단풍으로 노을 진 언덕이라도 갈 수 있다면, 그런 곳에서 한나절만 보낼 수 있다면 사람이 만든 공연보다 더 큰 위안과 카타르시스, 스펙터클 한 감정의 폭발까지 느낄 수도 있다. 선조들이 가을을 어떻게 즐겼나 보면 그분들도 가을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곳으로 더욱더 깊이 찾아 들어가곤 했다. 하다못해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이라도 단풍은 단풍이었다. 강에서 바다에서 선조들은 가을을 보내며 술잔을 기울였고 때로는 배탈이 나기도 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지으며 운치 가득하게 이 찰나와 같은 계절에게 이별을 고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서 때로는 옅은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무대 위의 자연으로 만족해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공연을 보는 일은 때로는 썩 만족스럽기도 하다.

국립창극단에서 2021년에 초연을 올린 현대 창극 〈나무, 물고기, 달〉 은 제목만으로도 이미 자연이 가득하다. 재밌게도 제목은 나무, 물고기, 달 순서지만 실제로는 달이 먼저다. 달에 사는 달지기들이 1년에 단 하루, 달에서 수미산으로 내려와 수미산에서 자라는 소원나무를 살피러 내려와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원형인 국립극장의 하늘극장에 작고 동그란 무대를 만들고 그 무대 위에 소원나무이자 강줄기인 작은 원형의 상징적인 조형물을 세웠다. 사실상 판소리만큼이나 연극적 약속으로 진행되는 공연도 없다. 단 한 명의 고수가 반주를 하고 소리꾼 한 명이 모든 장소와 모든 등장인물을 연기하지만 그것이 판소리를 더욱 다채롭게 해준다. 〈나무, 물고기, 달〉은 가장 단순한 형태인 판소리의 연극적 약속을 현대적으로 훌륭하게 재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국립창극단, 〈나무, 물고기, 달〉, 2021(출처: 국립극장)


작품의 기본적인 개념은 인도의 신화인 ‘칼파 타루’에서 가져왔다. ‘칼파 타루’는 인도의 낙원에 있다는 나무로 인간의 소원을 그 즉시 들어주는 나무다. 이 나무가 유명해진 것은 자신도 모르게 칼파 타루 아래에서 낮잠을 잤던 사람 때문이다. 잠에서 깬 사람이 음식을 원하자마자 음식이 날아왔고 목이 마르자 포도주가 솟아났다. 지나친 행운에 넋이 나간 사람은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건 혹시 무서운 유령들의 수작이 아닐까? 그러자 즉시 으스스한 유령들이 나타났고 사람의 머릿속에는 이러다 죽겠네가 스쳤고, 그는 죽었다. 어떻게 보면 소원나무는 소원나무라기보다는 사념나무에 가깝다. 마치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괴물처럼. 세상을 파괴할 괴물은 오게 되어 있지만 그 형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형태로 정해진다.


영화 〈고스트 버스티즈〉, 2016 (출처: 네이버 영화)


다른 한 편으로 소원나무는 영국 작가 닐 게이만이 만든 코믹북 〈샌드맨〉의 주인공인 샌드맨의 물건 중 하나인 꿈의 루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루비를 손에 넣은 사람은 그가 꿈꾸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만 그 꿈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다. 마치 소원나무처럼 루비는 어린아이의 생일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면 그 즉시 이루어진다. 변별력 없고 무분별한 소원성취다. 어쩌면 소원 나무 근처에 갔을 때는 가장 바라는 것 세 가지를 재빨리 외친 뒤에 소원나무가 내 생각을 듣지 못할 만큼 저멀리로 도망가는 게 상책일지도 모르겠다.




소원나무 앞에서


창극 〈나무, 물고기, 달〉은 인도 신화에서 가져온 걸러 들을 줄 모르는 소원나무라는 소재에 제주 신화인 ‘원천강본풀이’를 엮었다. 동그란 무대 위를 수미산의 강에서 인간들의 세상으로 뛰어내렸다가 기억을 잃고 죽어가던 물고기와 그 물고기를 구해준 소녀, 깨달음을 찾아 세상을 떠도는 순례자,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걷는 법도 잊은 나무가 된 사람들, 가족 대신 소 108마리를 형제처럼 여기는 소년 등이 하나씩 하나씩 일행에 붙으면서 가슴에 소원 하나씩을 품고 소원나무로 향한다. 세상 꼭대기에 있다는 수미산의 꼭대기에 있다는 소원나무로 향하는 길은 쉬울 리가 없다. 수미산 꼭대기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을 거스르기 위해 제일 먼저 물고기가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지며 자신을 희생하여 일행들을 수미산에 올려준다. 하지만 그렇게 도달한 소원 나무에 이르러서는 생각이 너무 많아진 순례자가 인도 신화 ‘칼파 타루’의 이야기 주인공처럼 자신의 사념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


국립창극단, 〈나무, 물고기, 달〉의 한 장면 1(출처: 국립극장)


마음이 불러낸 어둠에 목숨을 잃는 걸 목격한 소원나무에 도착한 인물들은 깊은 탄식에 빠진다. 소원나무에 도착하기 전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려 보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배는 주렸지만 살아있었고, 뿌리를 내려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생존해 있었다. 꽃은 피우지 못했지만 잎사귀는 푸르렀다. 가족은 없지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소원도 원망도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지 않은가. 결국 소원나무로부터 다이아몬드 하나 얻지 못하고 이들은 자신의 원래 삶을 찾기 위해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얼핏 주어진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삶을 살라는 틀에 박힌 주제같이 보이지만 이들은 삶의 기반을 박차고 세상의 꼭대기에 이르렀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이 결코 전과 같을 수가 없고, 같다 해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같을 수 없다. 길을 떠난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너그러움으로 갈 때는 티격태격했던 인물들이 소원을 모두 내려놓고 돌아오는 길에서야 진정한 동료가 되고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주기에 이른다.




행복도 잠깐, 불행도 잠깐, 지나가면 그뿐


작창을 담당한 이자람의 가사는 어려운 한자어로 가득한 기존의 판소리와 달리 시종일관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운율도 아름답게 이어진다. 그렇게 이어지는 가사는 직관적이면서도 명료하다.

“몰라, 몰라 암것도 몰라. 뭘 모르는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모르겠네.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 세상은 텅 비어있고 괴로움도 없고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니 이상도 하지.”


국립창극단, 〈나무, 물고기, 달〉의 한 장면 2(출처: 국립극장)


순례자가 부르는 이 노래는 들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몸이 둥기둥기 움직일 듯 부드럽고 흥겹다. 진리를 찾아 헤매는 자의 목마름과 안타까움이 반복되는 몰라 몰라와 함께 유머러스하게 이어진다. 다소 헐거운 이야기 구조를 배우들의 연기와 이자람의 노래가 채우고 이 모든 것을 연출가 배요섭은 잘 빚은 송편 한 바구니처럼 무대 위에 펼친다.

그저 산에 올라, 혹은 멀리서 산을 바라보며 단풍을 구경한다면 머릿속을 비우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잠이 오기 전까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최근의 일상에서는 머리를 비우기가 채우기보다 열두 배는 더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소원나무의 소원을 이뤄주는 능력 앞에서 혼비백산한 등장인물들을 보는 마음은 남 일이 아니다.

“행복도 잠깐, 불행도 잠깐, 지나가면 그뿐이라.”

달지기들이 부르는 마지막 노래와 함께 〈나무, 물고기, 달〉도 그렇게 지나간다. 단풍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 가을이 아주 많이 바빴다면 그 대신 주변의 공연장을 찾아보는 것도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선택이 될 수 있기를.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가을 풍경에 술 생각이 간절해지다”

추수한 작물을 타작하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오희문, 쇄미록, 1599-08-27

1599년 8월 27일, 오늘 오희문은 계집종 중금의 밭보리를 타작하는 일로 인아와 덕노를 데리고 옥동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하루 종일 종들이 일을 하는 모습을 감독하고 늦은 오후께 아들 윤해와 함께 걸어서 말지산 뒷산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서는 계집종들이 거둔 보리를 묶고 있었고, 한켠에서는 인아의 밭에서 조를 수확하고 있었다. 오희문은 인아와 함께 종들이 일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한참 일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이켜 사방을 바라보니 가을산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단풍이 들어 비단 같은 풍경을 이루어 술 마시기에 안성맞춤인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는 한 병 소주도 없고, 함께 술잔을 기울일만한 이웃도 없으며, 아우도 먼 곳에 있으니 마시려 해도 마실 수가 없었다.

비록 간절한 술 생각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높은데 오르니 기분이 몹시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이웃 사람들과 아우를 데리고 이곳에 올라 거나하게 술을 한잔 하며 이 정취를 즐기리라. 오희문은 이렇게 다짐하며 일을 마친 종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강가에서 가을 풍경을 즐기다”

지리산 천왕봉의 가을(출처: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 김광계, 매원일기,
1638-08-19 ~ 1638-08-22

1638년 8월 19일, 가을이 깊어 풍경도 크게 변하였다. 김광계는 재종숙 김령(金坽)의 집에 갔다. 김령의 집에 가니 사종질 김확(金確)의 사돈인 김응조(金應祖)가 있기에 앉아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기분이 났는지, 김응조과 김확, 그리고 금발(琴撥)까지 함께 말을 타고 다정하게 강가로 유람을 하러 나갔다. 말고삐는 나란하고, 강바람은 시원했다.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회까지 쳐서 술에 곁들여 먹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외유를 하고,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잠도 함께 잤다.

다음날에는 김광계의 셋째 동생 김광보(金光輔)와 넷째 동생 김광악(金光岳)까지 합세하여 다시금 말을 타고 강을 따라 갔다. 강 양쪽으로 단풍잎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어 그 광경이 과연 사랑할 만 하였다. 이번에는 오담(鼇潭)에 머물러 배를 띄웠다. 배 위에서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고, 배가 강물에 흘러가면 다시금 노를 저어 올라오고 하며 뱃놀이를 즐겼다. 이 날은 오담과 가까이 있는 역동서원에 가서 잤다.

다음날에도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며 질리지도 않고 날이 저물 때 까지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저물 때 쯤 애일당(愛日堂)에 올라서 또 술독을 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기고 있자니 달이 이미 고개 위로 넘어와 강물에 비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시고 여러 벗들과 도산서원으로 가서 잤다.

다음 날인 22일에는 시를 지으며 놀았다. 그러다가 김광악이 먼저 떠났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 저녁에 단사협(丹砂峽)에 갔다. 단사협의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 듯했고, 그 절벽의 둘레는 몇 리나 되니 거대한 절벽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절벽의 아래에는 맑은 물이 흘러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였다. 물 위로 단풍나무가 거꾸로 비추어 보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흘간 벗들과 함께 강을 따라 가을 풍경을 즐기자니 이번 가을은 더욱 풍성하게 느껴졌다.

“산이 유명해질수록 승려들이 더 고달파진다고?”

승려가 멘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08-07 ~ 1587-08-08

1587년 8월 7일, 황여일과 그 숙부 황응청는 이 날 내영산을 구경하고 돌아와 보경사(寶鏡寺)에서 잤다. 조매당[趙梅堂, 조정간(趙廷幹)]은 대두(大豆)를 보내어 연포탕(軟泡湯)을 끓이게 하니 이는 우리들과 배부르게 먹고자 함이고, 김명숙(金明叔)이 소설책과 오래된 술을 남겨두었으니 이는 우리들과 취하고자 함이다. 배부르게 먹고 또 취하면서 승려들과도 더불어 우도(友道)를 함께 하였다.

8월 8일, 학연(學衍)이 세수를 하고 황여일에게 문안하며 말하였다.

“이 산(내영산)은 예전에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선동(仙童)이라는 승려가 굴집을 만들어 살았었는데, 근래 몇 년 사이에 수령으로 부임한 성(姓)이 옹(邕)이라는 사람이 은사(隱士)인 체 하면서 이곳을 찾아와 도원(桃源)을 구경하고 돌아가면서 동경부윤(東京府尹)인 이구암[李龜巖, 이정(李楨)] 선생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이구암 선생은 곧장 사령운(謝靈運)의 여행을 본받아 이곳을 여행하였고, 여름에 재차 유람하였습니다. 이구암 선생은 선비들이 우러러 보는 분이기에, 여행하는 자들은 구암(龜巖)이 다닌 곳과 그 자취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므로 구암(龜巖)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고, 이 산과 함께 이름이 오래가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영남에서 유람하는 선비로서 산을 말하는 자는 봄에는 진달래가 볼 만하고, 가을에는 단풍 숲이 아름답다며, 내영산을 앞 다투어 칭찬하였습니다, 공무를 띠고 지나가던 중앙 관료와 지방에 부임한 관리에 이르기까지 또한 계절마다 묵어갔습니다. 이에 승려는 가마꾼이 되고 절은 밥을 지어 나르는 여관이 되었습니다. 이 산이 유명해진 것은 우리 승려들에게는 심한 재앙입니다.”

“산을 오르기 전에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다”

『근사록』(출처: 문화재청) 권상일, 청대일기,
1719-04-16 ~ 1719-04-18

정구(鄭逑)는 이인개(李仁愷),이인제(李仁悌) 형제와 함께 사촌(沙村)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느 날 곽준(郭䞭)이 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며칠을 즐겁게 보냈다. 정구는 이들과 함께 가야산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가야산은 이 고을과 접해있는데 마치 신선이 사는 곳과 같은 절경을 자랑한다네. 나는 한번 유람한 적이 있지만 자네들은 그렇지 않으니 아쉽지 않은가? 이맘때라면 단풍과 국화꽃이 한창일 것이고, 구름이나 안개도 끼지 않는 시절이니 우리 함께 가야산을 두루 돌아보고 정상에 올라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고 “그리고 보니 마침 정인홍(鄭仁弘)도 지금 막 영천(永川)에서 군수직을 하다가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 있다고 하니, 마침 함께 할 좋은 때 일세”라고 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그렇게 하세”라며 동조해주었다 그 때부터 가야산 여행을 위한 여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9월 10일의 일이었다. 정구는 쌀 한 주머니, 술 한 병, 반찬 한 상자, 과일 한 바구니를 여행 중에 먹을 것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책을 준비했는데 「근사록(近思錄)」과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만을 넣었다. 정말이지 단출한 짐이었기에 중국 송나라 때 심괄(沈括)이 산을 유람할 때 갖춘 짐보다 간단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다음날 이인개가 먼저 출발하였는데 내일(12일)에 송사이(宋師頤)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김면(金沔)으로부터도 15일쯤에 성사(城寺)라는 절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정구 일행은 이날 출발하게 되었으므로 조금 더 빨리 만나자고 답신을 보냈다. 정구는 이인제, 곽준과 길을 늦게 떠났다. 여우 고개(狐嶺)를 넘을 때가 되자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당시 해가 진 산길을 걷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마침 같은 길을 가는 무인(武人)이 있어 같이 가기로 했다. 분명 힘이 되는 일이었다. 마침 선영(先塋 : 조상의 무덤)을 지나게 되었다.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묘소 쪽으로 절을 올렸다. 한강(寒岡) 지역에 도착하자 어시헌(於是軒)이라는 건물에 올라 옷고름을 느슨하게 하게 잠시 쉬었다. 경치를 내려다보니 밤하늘에 달빛은 맑았고 그 빛에 소나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달빛에 희게 빛나는 바위는 더 희게 보였고 소리로만 들리는 개울물은 차가운 기운을 전해왔다. 여행의 첫날이었지만 잠시나마 자연을 느끼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더니 가슴 속이 편해지고 세상의 복잡한 일이 사라진 듯 했다. 그러나 아직 오늘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촛불을 잡고 그날의 숙소에 돌아와 숙소에 소장되어있던 「주자연보(朱子年譜)」 중에서 「운곡기(雲谷記)」 부분을 한 번 읽은 뒤에 짐 속에 넣었다. 이 날은 매우 피곤하였기에 깨지 않고 곤히 잘 잤다.

“가야산에서 옛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다”

송민고 《나귀를 탄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만운, 가야동유기, 1786-08-22 ~

1786년 중추(仲秋:음력 8월) 이만운(李萬運)과 친척, 동료들이 성주의 가야산 아래에 모였다. 곳곳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모인 것이었다. 이만운으로서는 1772년 가야산을 유람한 이래 15년 만의 여행이었다. 그래서 감회가 깊었다.

8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말을 타고 회연(檜淵)에 도착했다. 다음날에는 이성민(李聖民), 정휘조(鄭輝祖)와 함께 길을 나서서 환선도(喚仙島)에서 밥을 먹고서 날이 저물어 쌍계(雙溪)에서 묶었다. 밥을 먹은 뒤에 정구(鄭逑)가 머물던 수도산(修道山) 무흘정사(武屹精舍)에 도착했다. 여기는 정구가 모은 책들이 소장된 무흘서재(武屹書齋)가 있었다. 정구의 지팡이와 신발, 책을 공경한 마음으로 살펴보고 무흘정사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해인사에 들러 하루를 머문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만운은 15년 전의 여행 경험을 떠올렸다. 풍경은 많이 바뀐 것이 사실이었다. 그의 인상에 남았던 멋진 폭포의 전경은 물살에 깎여 이전의 모습을 잃었다. 이만운은 이를 아쉬워했다. 다만 무흘정사는 몇 년 사이에 위치를 옮겼는데 도리어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이전의 자태를 잃지 않은 듯 했다. 월연(月淵)이라는 연못의 경치는 일찍이 보지 못한 경치였으며 해인사의 단풍의 붉은 비단 같은 모습에 감탄했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좋은 벗들과 함께 한 것이었다.

이만운은 이 즐거운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한 사람들의 성과 자와 이름을 종이에 써서 한 사람씩 나누어가졌다. 기념사진을 남길 수 없었던 시절, 집으로 돌아가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질 때 이 종이를 펴보고 위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