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봇 R.U.R〉은 로봇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등장한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이 작품의 결말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결말 자체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현대적 개념으로는 무생물인 기계 인간이 아니다. 인간과 비슷한 유기체로서, 휴머노이드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생식 기능이 결여됐고 인간보다 수명도 길지 않다. 작품 안에서 ’로봇‘들이 늘어나면서 인간들의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고 감정을 습득한 로봇들이 반란을 통해 인간을 살해하고 그들의 세상을 연다. 마치 터미네이터의 원조 같이 흘러갈 거 같지만 원조는 조금 다르다. 그보다 애수가 넘친다. 작품 속 로봇은 마치 〈블레이드러너〉 속의 안드로이드처럼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봇 R.U.R〉(출처: 출판사 이음)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로봇을 생산할 수 있는 공식마저 불타버린 탓에 이미 종말을 맞은 인간에 이어 인간 모습을 한 로봇의 종말도 코앞이다. 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읽는 사람마다 다르고, 무대에 올라올 때는 연출가의 의도에 따라 갈라진다. 대부분의 의견은 인류에게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로 귀결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이 작품 속에서도 휴머노이드가 반란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아기를 낳는 것은 여성이거나 여성의 몸을 한 로봇이어야만 한다. 공장에서 휴머노이드가 만들 수는 있을지언정 낳을 수는 없다. 로봇이 처음 공연된 게 1920년이고 그로부터 세월이 백 년이 더 흘렀으며 수많은 영화가 휴머노이드나 복제인간 등을 다루고 있지만 아직은 먼 상상 속의 일이다. 아직까지도 아이는 여성이 낳는다.
때문에 간혹 여럿의 아이를 낳은 사람들에게 우스개처럼 ‘애국자’라고 부르기도 하며, 여기저기서 출산 장려 정책이 발표되지만 대부분 기괴하기 짝이 없다. 서울시에서 발표한 외국인 가사 도우미 정책은 심지어 아주 질 낮은 농담인 줄 알았지만 뚝심있게 진행되는 모양새라 섬뜩하다. 출산은 여성의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 모른 척 하는 것 같다. 아니면, 오직 여성만의 일이라고 외면해 버리든가.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그녀의 조각들〉(2020) 이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 마사의 출산 장면이 무려 30분 남짓 이어진다. 가정 출산을 결심한 마사와 병원에 안 가려는 아내가 못마땅한 남편 숀, 조산사 에바가 등장한다. 이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던 조산사 바바라는 마침 먼저 진통이 온 다른 집에서 다른 아이를 받고 있기에 처음 보는 낯선 조산사 에바가 이끄는 대로 아기를 낳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마사의 두려움, 고통을 거르지 않고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장면의 끝은 비극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죽는다. 이후 영화는 조산사의 과실을 두고 재판을 이어가며 자신의 고통을 오롯이 혼자서 마주해야 하는 마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녀의 조각들〉(출처: 넷플릭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의 원작은 오로지 마사의 집 내부에만 머무는 실내극이다. 하지만 연극에 비해 영상에 담긴 〈그녀의 조각들〉은 훨씬 더 진한 내적 충격을 준다. 가장 스펙타클한 장면이 거실과 침실을 오가는 출산 장면이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출산을 미화하거나 비극으로만 밀어붙이지 않으면서도 힘든 출산의 과정이 극명하게 다가오게 만들었다. 평범하게 시작됐던 부부의 저녁 시간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출산으로 인해 결코 이전과는 같을 수 없는 단계로 돌입하는데, 그 긴박함은 아이의 죽음이라는 슬픈 결과가 없었다 해도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이 놀랍다. 연극에서 이 장면을 다루는 것과 달리 영상에서 롱테이크로 이 장면을 삼십 분에 걸쳐 이어가는 장면은 주인공인 마사의 긴장감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관객들은 그의 머리가 헝클어져 가는 동안 그와 함께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그리고 영상이면서도 마치 무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영상 안에서 흐르는 시간이 실제 흐르는 시간과 똑같이 흐르며 장소도 변하지 않는다. 연극적인 효과를 영상으로 극대화 한 장면이다.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인 간접 체험을 유도하지 않는다는 부분도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녀의 조각들〉 공식 예고편(출처: 넷플릭스)
이 영화에 중요한 것은 대사다. 찍히는 배우의 몸이 아니다. 영화감독이 연극의 연출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연극에서 좋은 효과를 거둔 장면을 영화적인 효과를 주기보다 무대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물론 연극은 관객이 무대 위의 어느 공간을 볼 것인지를 영화에 비하면 능동적으로 선택한다. 마사가 대사를 하고 있어도 어떤 관객은 남편인 숀이나 조산사인 에바를 본다. 하지만 영화에는 연극에는 없는 비장의 무기인 클로즈업이 있다. 관객은 능동적 시선을 빼앗기는 대신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에 훨씬 더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출산과 아이의 죽음을 겪는 여성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초반의 삼십 분은 후반의 재판 장면에서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그리고 마사와 에바의 주장을 대비하면서 앞에서 본 장면에 근거해 두 사람의 신뢰성을 재고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관객의 입장에서 깨닫게 되는 지점이 있다. 관객인 나는 아기를 안았을 때의 온도나 냄새 아기의 촉감 같은 기억이 없다. 이 기억은 오로지 마사의 것이다. 아! 하는 짧은 탄식이 터져 나온다. 주인공 마사가 잃은 것, 아이, 그 상실감에 대해 무언가 처음으로 구체적인 형체가 생긴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탄생의 순간에 이토록 충실한 감각으로 육박했을까.
뮤지컬 〈명성황후〉에는 명성황후가 아들 척을 기르는 장면이 나온다. 명성황후를 마치 나라를 지키다 죽어간 영웅처럼 그린 내용에는 분명히 호불호가 갈리고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만 그 안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명성황후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을 장면은 훗날의 순종을 낳고 애정을 쏟아부으며 우리 세자가 영민하다고 기뻐하는 어미의 모습이다. 뮤지컬에는 민씨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장면도 그저 스케치로 지나갈 뿐이다.
뮤지컬 〈명성황후〉(출처: ACOM)
극 중에서 기뻐할 일 별로 없는 민씨가 가장 사심 없이 기뻐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왕자를 낳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안심이 되었을까, 어떤 권력도 왕자 없이는 이어질 수 없다. 이쯤 되면 판소리 심청전의 주인공 심청이도 중전이 된 후에는 왕자를 낳는 지난한 노력의 길로 접어들었겠구나 싶으면서 마음이 짠해진다. 나라의 가장 고귀한 여성조차 대를 이을 왕자의 출생에 운명을 걸어야 하는 세상이 그려진다. 그때와 지금 과연 출산을 하는 여성의 지위는 차이가 얼마나 있을까? 지금 중요한 것은 출산율 그 자체가 아닐 것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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