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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투전판이 사랑보다 중하더냐

도박사, 나쁜 남자의 전형


도박사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오랫동안 사랑해온 등장인물이자 클리셰다. 브로드웨이 최초의 히트 북뮤지컬인 〈쇼 보트(Show Boat, 1927)〉의 등장인물인 게일로드 레버널의 인물 설명에는 항상 핸섬한 ‘도박사’가 빠지지 않는다. 도박사라는 직업의 인물들은 서커스처럼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마치 그때가 세상 마지막인 듯 도박에 목숨을 걸고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꽤 핸섬해 보인다.

같은 떠돌이라도 서커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데 반해 도박사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한곳에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불확실성에 거는 그 모습을 멋지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간의 목숨은 유한하니 누구라도 목숨은 소중하기 마련인데, 도박사들은 담배를 손에서 떼지 않고 술을 물처럼 들이키면서도 가진 재산과 목숨까지 거는 이른바 삶의 법칙을 쿨하게 무시하는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1936년 개봉한 영화 〈쇼 보트〉(출처: 네이버 영화)


뮤지컬 〈쇼 보트〉는 대도시가 아니면 아직 극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19세기 중후반 미국에서 굵직한 강을 따라 항해하면서 강가 도시 주민들에게 여흥을 제공하던 움직이는 극장과도 같은 배를 말한다. 규모에 따라 구성은 다르지만 배 안에는 공연 무대를 갖춘 뮤직홀이 존재했다. 뮤직홀이란 카바레처럼 무대 아래 테이블에서 술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한 편에는 따로 방을 만들거나 커튼을 쳐서 도박을 할 수 있는 카지노를 갖췄다. 배가 정박하면 쇼단이 화려한 연주와 의상으로 마을 사람들을 몰았다. 배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평소에는 보지 못한 휘황찬란한 장식에 마음을 빼앗기고 처음 하는 도박에 돈을 잃었다.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도박사


그 카지노에는 반드시 전업 도박사가 있었고, 그는 순진한 마을 사람들의 돈을 쓸어가기 마련이다. 주인공 레버널이 바로 그러한 도박사로 어디에도 정착할 생각이 없는 인물이지만 쇼 보트 선장의 딸 마그놀리아에게 마음을 빼앗겨 정착을 꿈꾸고 결혼하여 아이도 낳아 마치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 것처럼 보인다.

사실 여기까지라면 평범한 이전의 브로드웨이 쇼코미디로 끝나겠지만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최초의 진지한 뮤지컬 드라마였다. 그들이 생활고를 겪게 되자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낀 레버널의 선택은 새로운 일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다. 거기에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자신에 대한 연민은 덤이다. 남은 마그놀리아는 필사적으로 아이를 키우며 예전에 무대에 섰던 경험을 살려 다시 무대에 서기 위해 오디션을 보고 뮤지컬 스타가 되고 딸인 킴까지 스타로 키운다.

오래전 그들이 처음 만났던 쇼 보트에서 화려한 은퇴 공연을 한 마그놀리아는 그곳에서 집 나간 남편 레버널을 다시 만난다. 믿기지 않지만, 여전히 마음에 사랑이 남았던 마그놀리아는 그를 따뜻하게 반기는 것으로 해피앤딩을 맞는다. 이 결말이 너무하다고 느꼈던지 1951년도에 개봉한 영화 버전에서는 두 사람의 이별 기간을 단 몇 년으로 줄이고 킴이 아직 어린아이일 때 재회하는 것으로 변경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영화가 나오고 이 작품에서 흑인을 지칭히는 ‘니거(nigger)’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수정되고 다시 수정될 동안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도박사 레버널이 자괴감으로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다.


뮤지컬 〈쇼 보트〉 중 ‘Ol Man River’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1oIjzGXw5rQ)더보기




도박사들에게 사랑이란 예기치 못한 암초일 뿐…


국립창극단의 인기 레파토리인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주인공인 변강쇠 또한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다. 변강쇠의 천생연분인 옹녀가 만나는 남자마다 죽어나가는 바람에 잠자리의 즐거움이 뭔지도 모른 채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며 가는 마을마다 쫓겨날 적에 변강쇠는 가는 마을마다 아낙네들에게 환영받으며 밤낮으로 이 육체 저 육체를 번갈아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심지어 변강쇠는 옹녀와 만나 첫눈에 반해 산이 들썩이고 강물이 일렁일 정도의 거한 정사를 나눈 후 혼인을 하여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의 직업은 ‘건달’이다. 바뀐 게 있다면 유부남이라는 사실 뿐.


창극〈변강쇠 점 찍고 옹녀〉(출처: 국립극장)


브로드웨이 뮤지컬 속 건달 중 건달 직업인 도박사들은 항상 사랑이라는, 그들만 예기치 못한, 암초를 만난다. 그들은 사기를 치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돈을 걸며 그게 멋진 것처럼 살아가며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규칙 아래 움직이는 듯하지만 항상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눈동자를 깜박이는 순수하고 어린 여자들이다. 세상의 먼지가 묻을 대로 묻은 도박사들은 쓰레기장에서 핀 한 떨기 백합 같은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고 도박사이기를 그만두거나 카우보이기를 그만두거나 사기꾼이기를 그만둔다.

그런데 옹녀는 다르다. 옹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이기기 위해 갖은 힘을 다한다. 단 한 번도 살기를 멈추고자 하지 않는다. 옹녀가 남자를 탐하지 않았고 남자들이 옹녀를 탐했지만, 그들이 죽어 나갔다는 이유로 단죄 당해도 옹녀는 당차게 말하며 자신에게 욕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외친다.




오냐, 옹녀 어서 가자!


보란듯 잘 살아보겠다며 마을을 떠난 옹녀는 자신을 안아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에 감읍해서 변강쇠가 도박을 해도 해가 중천에 뜨도록 배꼽을 내놓고 잠만 자도 변강쇠를 버리지 않고 거둔다. 옹녀는 살기 위해 바느질을 비롯해서 안 하는 일이 없지만, 옹녀가 한 푼이라도 벌어오면 변강쇠는 그 돈을 들고 한달음에 투전판을 향해 달린다. 그리고는 남김없이 날린 후에 돌아와 옹녀에게 화를 낸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서 주인공 옹녀(출처: 국립극장)


변강쇠는 옹녀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장승을 베어 군불을 때고는 동티가 나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도 옹녀는 그 서방을 잃었다고 온 세상 장승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렇다 옹녀는 단 한 순간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인물이다. 닳고 닳은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실은 더 이상 단단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옹녀는 독특하며 한국적인 인물이다. 이 세상 최고의 건달을 낚기 위해 어제 갓 태어난 듯 순진하고 순수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때문에 받지 않아도 될 벌을 계속 받지만, 무대 위의 옹녀처럼 그는 계속 걸어간다. 아니, 이런 옹녀를 두고 투전판으로 달려간 사내 변강쇠는 대체 뭐란 말인가. 대체 도박이 무엇이길래 사랑도 삶도 마다하고 매번 달려가게 할까. 모를 일이다.

뮤지컬 〈쇼 보트〉 중 ‘Ol Man River’   더보기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더보기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어느 땅에나 도박의 폐단이 존재하다”

미상, 계산기정,
1803-12-12 ~ 1803-12-13

1803년 12월 12일, 대릉하보(大凌河堡) 30리를 가서 말에 풀을 먹이고 쌍양점(雙陽店) 20리를 가서 묵었다.

대릉하(大陵河)는 퍽 넓고 크다. 바다에서 80리 떨어져 있고 삼면이 다 큰 들판이다. 곧 명말(明末)의 전쟁터이다.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군중을 거느리고 적군과 항거하는데, 하루는 큰바람이 급작스럽게 일어나 나는 모래가 하늘에 가득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병이 진지 앞에 닥쳐와 채 대오를 정비하기도 전에 단숨에 붕괴되었다. 그래서 유정은 마침내 그 일로 죽었고 그의 휘하 수십 만의 무리들이 뒤이어 죽었는데, 언제나 구름 끼고 흐린 때가 되면 답답하고 억울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대릉하보의 마을은 대릉하에서 5리가 떨어진 곳으로, 민가와 점포의 번성함이 신민참(新民站)과 맞먹을 정도다. 이곳에는 식품으로 어차과(魚鹺苽)가 있어 별미로 친다.

대릉하보(大凌河堡)에서 앞으로 10여 리를 가면 길 왼쪽 평원에 사동비(四同碑)가 있다. 명 나라의 도독 첨사(都督僉事) 왕평(王平)과 왕종성(王宗盛)의 묘비이다. 만력(萬曆) 연간에 왕씨의 부자 형제가 충절을 세워 마침내 비석을 건립하여 일문(一門)의 충렬을 포창하였는데, 무덤 네 모퉁이에 각각 비석 하나씩을 세웠기 때문에 사동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뒤쪽의 두 비석은 뽑아가 버리고 단지 귀부(龜趺)만 남아 있는데, 앞쪽의 두 비석에는 각각 명도독 첨사 왕공휘모지묘(明都督僉事王公諱某之墓)라고 씌어져 있다.

비석에는 자획을 긁어 버린 흔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틀림없이 본래 공적을 기술한 글이 있었으나, 그 어구가 당시의 기휘에 저촉되었기 때문에 혹 뽑아 긁어 버린 것이리라.

서북쪽으로 금주위(錦州衛)까지 20리 사이에는 지나온 여관이나 관청에 ‘금지도박(禁止賭博)’ 네 글자가 많이 씌어져 있다. 도박의 폐단이 우리나라와 똑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송산보(松山堡)는 소릉하(小凌河)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옛 성터가 있는데 적루(敵樓)를 두었던 곳이다. 《심양일기(瀋陽日記)》, ‘신사년(1641, 인조 19) 중추 보름에 세자(世子)와 대군(大君)이 심양에서 출발하여 무릇 6일 만에 가로놓여진 한 언덕에 이르러 금주성(錦州城)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호행인(護行人)이 말하기를 ‘한족(漢族)의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이 성을 굳게 지켜 성 밖에 화포(火砲)를 많이 묻었으며, 유림(柳琳)도 그 동쪽 모퉁이에 있었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몽고병과 함께 전진(戰陣)을 치고 불을 놓았으며 성안에서도 그것에 맞서 포를 쏘아 포탄이 여러 차례 세자막에 떨어졌는데, 포탄이 거위알 크기만 하므로 흙담을 쌓아 가리우다가 후에는 또 송산(松山) 서쪽 10리 가량에다 막차(幕次)를 옮겼다.’고 하였다.

산마루부터 평지까지 다 참호를 판 것이 토성(土城)의 형상 같았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포위 진지를 쌓았던 자리다. 조대락(祖大樂)이 총병(摠兵)으로 성을 지켜 2년 동안 포위되었다가, 임오년(1642, 인조 20) 2월, 총병 왕정신(王廷臣)의 내응으로 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성안의 사람들은 다 도륙되었는데 오직 친절한 장관(將官) 13인만이 죽지 않았다. 조대락과 군문(軍門) 홍승주(洪承疇)는 다 잡혔는데 조대락은 곧 항복하였고 홍승주는 처음에는 굽히지 않다가 심양에 이르러서 역시 항복했다고 한다. 보루 위에는 봉화대가 있고 연기와 불을 피우던 곳이 아직도 뚜렷하게 보인다.

관마산(官馬山) 아래에 큰 무덤 둘이 있는데, 이것은 경관(京觀)이다. 옛날의 싸움터였는데 지금은 목장이 되었다. 산 뒤에는 본래 몽고 부락이 있었는데, 몽고 족속들은 거처하는 가옥이 없고 좋은 물과 풀이 있는 데로 가서 머물러 살곤 한다. 명대 말기에 한번은 이들이 비바람같이 급작스레 닥쳐와 남의 부녀자를 약탈해 가 버려서 주민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여 다른 데로 이전해 버렸다.

행산보(杏山堡)는 역시 명대 말기에 백전을 거듭한 싸움터다. 관군(官軍)이 이곳에서 크게 패전하여 마을 집들이 아직도 쓸쓸하고 들판의 기색은 황량하다. 그래서 자연 보는 것마다 처참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다.

이곳에서부터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는데, 넘쳐흐를 듯하게 높다. 바다 남쪽이 곧 산동(山東)의 여러 읍들로 옛날의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의 땅이다. 동쪽은 우리나라 황해도 연안과 서로 통하니 숭정(崇禎) 이후에 명 나라로 들어가던 길이다. 고교보(高橋堡)의 마을도 역시 번화하여 송산보(松山堡)와 서로 맞설 정도다. 병신년(1776)에 사신 일행이 왕씨(王氏) 성을 가진 점사에 투숙했는데, 밤중에 뜻밖에 은 1000냥을 잃어버려 형부(刑部)에다 일러 왕씨 일가를 체포 심문했다.

왕씨의 처는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사실 은을 훔치지는 않았고, 다만 처녀[室女] 때에 한 사나이와 간통했으니, 죄를 감히 모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자백하였다. 건륭 황제(乾隆皇帝)가 그 말을 듣고 그녀가 숨김이 없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왕씨의 식구를 전부 풀어 주고 그 처에게 옷 한 벌을 내리고 역(驛)의 수레에 태워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그 일이 지금까지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마을에는 관제묘(關帝廟)가 있는데, 꽤 현저하게 영이(靈異)하여 밤중의 음산한 기가 내릴 때에는 번번이 병마의 치닫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수투전으로 악명이 자자한 자, 감옥에 갇히다”

투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김령, 계암일록,
1607-06-05 (윤) ~ 1607-06-10 (윤)

1607년 윤6월 5일, 권경흥(權景興)의 사건을 듣고 섬뜩했다.

윤 6월 10일, 몹시 더웠다. 심부름꾼이 영천에서 돌아왔다. 그가 전해준 전 형의 편지를 보았다. 편지에 권경흥이 팔목(수투전)으로 악명이 자자하여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살인으로 이어진 동전 던지기 놀이”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02-26 ~ 1794-03-12

산창(山倉), 대관창(大館倉), 남창(南倉)을 돌며 환곡을 나눠주고 있을 때였다. 파발꾼이 헐레벌떡 달려와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노상추에게 바쳤다. 고목에는 “어제 본창(本倉)에서 환곡을 나눠줄 때 북면(北面) 송정리(松亭里)의 아동 김세황(金世况)과 읍내의 향교 남자종 장삼득(張三得)의 아들 장천항(張天恒)이 함께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때 장천항이 기왓장 돌로 김세황을 때렸습니다. 김세황은 한나절이 지난 신시(오후 3~5시)에 죽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경악한 노상추는 바로 검안소로 나아갔다. 김세황의 시신을 직접 조사하니, 얼굴 전체에 특별한 상처는 없으나 머리 살갗과 귓바퀴 근처 뺨에 오목하게 함몰된 부분이 있었다. 상처의 길이는 손가락이 두 개 들어갈 정도였고, 넓이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노상추는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冤錄)』을 뒤져 비슷한 상처의 모양을 찾아보았다. 책에는 구타를 당해서 즉시 죽었을 때 이런 상처 구멍이 난다고 적혀 있었다.

노상추가 검시를 끝내고 관아로 돌아오자 죽은 김세황의 부모가 공초를 올렸다. 기타 여러 사람에게도 이와 관련한 공초를 받았는데, 김세황을 때려서 죽게 한 범인은 장천항이라고 증언한 것이 모두 일치했다. 노상추는 이를 참고하여 옥안(獄案)을 작성하고 파발로 이웃 고을인 창성부(昌城府)로 보내 창성부사의 복검(覆檢)을 요청했다.

다음날 오후에 창성부사가 삭주부로 와서 복검을 하였다. 전례대로 두 부사는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하였다. 그런데 하인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온 창성부사가 거만하게 구는 꼴이 같잖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번 옥사는 함께 처리해야 하긴 했으니, 싫어도 싫은 티를 다 낼 수는 없었다. 그저 요즘 새기고 있는, 화내면 더 곤란해진다는 뜻인 ‘분사난(憤思難)’이라는 글자만을 떠올리며 참아보았다.

노상추는 복검 결과까지 종합하여 옥안을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보름 만에 돌아온 처분 내용은, “이 옥사만큼 잔인한 것이 없지만 처형할 나이에 차지 않았으니 1등을 감해 차율(次律)을 적용해서 장(杖) 1백으로 죄를 결정하여 희천군(熙川郡)에서 3천 리 떨어진 곳에 정배하라.”라는 것이었다. 범인인 장천항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터라 처벌을 1등 감하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장 1백 대를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장을 맞은 몸으로 3천 리나 유배 가면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바둑과 장기에 이성을 잃은 사람”

장기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808-05-09 ~ 1808-05-24

요즘 노상추가 묵고 있는 여관 사람들 사이에서는 바둑과 장기가 대유행이었다. 같은 여관에 묵는 사람 중에는 바둑에 넋을 잃고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빠진 사람도 있었다. 비단 이 집에서만 유행인 것은 아니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바둑과 장기에 푹 빠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여 앉으면 바둑판과 장기판을 펴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며 훈수를 두곤 했다.

이렇게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건만, 노상추는 바둑알과 장기말에 손도 대질 않았다. 잡기는 군자가 익힐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노상추 집안이 3대가 무업에 종사하는 집안이니 노상추도 으레 바둑 등의 잡기를 즐길 것이라 여기지만 노상추는 바둑과 장기가 저포(杼浦)나 다름없는 못된 습속이라 여겼다. 오늘도 장동원(張東源) 령(令) 등 여러 사람이 모여서 바둑을 온종일 두었다. 장동원 령이 노상추에게도 같이 바둑을 두자고 권했으나 노상추가 거절하자 사람들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재미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어찌 바둑에서 재미를 찾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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