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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그것’에게, 안녕?!

코로나 바이러스의 백신 소식으로 세상이 들썩입니다. 하루라도 먼저 맞고 싶은 마음과 정말 문제가 없는지 조심하며 기다리다 중간 즈음의 순서에 맞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 내 차례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듭니다. 그나저나 치료약은 언제나 나올까요. 그러다 보니 새해가 밝아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보통, 모름지기 새해란 매해 미뤄왔던 운동도 시작하고 싶고 누군가는 금연을 결심하기 딱 좋은 시기였습니다. 보통은 그랬는데, 어쩐지 2021년의 새해는 온통 그 단어뿐입니다. 코로나. 거기에 하나만 더 붙여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종결.

홍윤정 선생님은 인상적인 제목의 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문 앞에 서 있다면, 그것이 꼭 액운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뭔가 더 좋은 것으로 바꾸는 것도 우리들이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만 오래된 편견이나 관습은 어서 내다 버려야 한다는 건 알겠습니다.

강선일 선생님은 『무명자집(無名子集)』이라는 문집을 낸 무명자라는 호를 지닌 윤기라는 영민했던 선비가 남긴 과거 독감 유행에 대해 쓴 시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의 독감은 지금의 코로나처럼 힘든 병이었겠지요. 그런데 내용이 2020년 1월에 쓰셨다 해도 믿을 판입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지만 어째서 그 유행에 역병마저 올라타는지요.

스토리이슈는 웹진 담談을 발행하는 한국국학진흥원 최대의 금기를 다뤄주었습니다. 그건 바로 불입니다. 제목만 봐도 아찔합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의 무게는 둘째치고, 한국국학진흥원은 나무와 종이의 집이 아니겠습니까.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근무하시는 모든 분이 멸화군의 일원이라고 굳게 믿어봅니다.

2021년의 첫 편액은 극복재입니다. 이보다 더 적절한 편액도 없을 듯 싶습니다. 철 지난 유행어 ‘극뽀옥!’이 절실한 새해입니다.

뮤지컬 칼럼니스트 김효정 선생님은 공연장의 새로운 금기에 대해 정리해 주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가장 서글픈 면모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과 어우러져 사는 사회에서 사람이 가장 큰 금기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새해가 모든 사람에게 희망이지는 않겠지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가까이해도 좋은,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다.




편집자 소개

글 : 이수진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
<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기둥과 들보를 올린 늦은 봄 밤, 조용히 상량제를 지내다”

1805년 4월 24일에 예정된 대로 기둥과 들보를 올렸다. 기둥은 사시(巳時, 9~11시)에 세웠는데 손방(巽方, 동남쪽)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기둥을 세우기 시작한 지 12시간이 지난 해시(亥時, 21~23시)가 되서야 들보를 올렸다. 이어서 상량제를 지냈지만, 밤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인근의 사림이 와서 볼 수 없었다. 비로소 대장장이[冶匠] 2명에게 사당 건립에 필요한 철물을 만들게 하였다. 전후로 10여 일이 되어 철물 만드는 일을 마쳤다.

“역질이 돌아 능동 재사에서 제사를 합설하여 지내다”

1603년 2월 23일, 향시를 보러 현풍에 다녀온 김광계는 도착한 다음날 아침을 먹자마자 재종숙인 김기(金圻)를 뵙기 위해 찾아 갔다. 그런데 동네의 여러 친족들이 모두 애당(崖堂)에 모여 있었다. 김광계는 재종숙을 모시고 동네 친족들과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향시를 보러 갔다 온 이야기와 갑자기 퍼진 역질을 걱정 하다 보니 밤이 다 되어갔다. 내성(奈城) 재종숙 김령(金坽)과 숙항인 금발도 밤에 함께 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 밤이 늦어서야 흩어졌다.
다음날 김광계는 증조모 및 조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능동재사(陵洞齋舍)로 갔다. 원래 선대의 묘는 거인(居仁) 마을에 모셔져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서 지내야 했지만, 얼마 전부터 기세를 부리기 시작한 역질 때문에 거인 마을로 갈 수가 없었다. 김광계는 어쩔 수 없이 능동 재사로 가서 재사의 마루에서 증조모와 조부의 제사를 합설하여 지내고 다음날 내려와서 다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고나서 김광계는 서둘러 서원으로 향했다. 춘기제사를 준비하는 입재(入齋)를 하기 위해서였다. 입재 의식은 제사 3일 전에 시작하는데, 올해 제사는 2월 29일이라서 26일에는 서원에 들어가야 했다.
3일 동안 서원 경내에 머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여러 절차에 따라 예를 올리고, 29일엔 본 의식을 올리고 제사를 마쳤다. 제사를 마친 후 참여했던 사람들은 음복상을 받았다. 3일간의 제사 예식이 모두 끝나자 모든 유생들은 상하유사에게 절을 하고 서원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김광계는 음복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역질이 돌아 설날 제사 대신 참배만 올리다”

향1610년 1월 1일, 경술년 새해가 시작됐지만, 김광계의 집안은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집안에 역질이 돌아 설날 제사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김광계는 아우들인 광실, 광보, 광악과 함께 대문 안에서 사당을 바라보며 참배만 하였을 뿐이다.
참배를 마친 사형제는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처음 찾아간 김호 재종숙 댁에서 김광계와 형제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좌수 재종숙 댁의 노비들이 안에 알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참 동안 문 밖에서 서 있다가 겨우 사당문 밖에서 참배만 하고 돌아 나왔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김령 재종숙 댁이었는데, 내성 댁에는 광재, 광업 형제와 광하 형 등 동네 친족 몇 사람이 와 있었다. 곧이어 김지 재종숙도 찾아와서 함께 설술 몇 잔을 나누고 일어나 나왔다.
김광계는 동생들과 광찬 형의 아들인 김확을 만나러 갔다가 아침에 인사를 못 드린 좌수 댁에 다시 찾아갔는데, 그제야 마침내 들어가 세배를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김광계는 아우들과 함께 노산 재종조부 집을 들렀는데, 동네 친족들이 모두 함께 오고 오직 두세 사람만 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성 재종숙이 김광계의 집으로 가자고 하여 김광계 형제들과 김령 재종숙은 함께 나와 집으로 가던 길에 참봉 댁에 들렀더니 충주 사람 김극방(金克邦)이 김령 재종숙을 만나보려고 와 있었다. 그래서 다 함께 김광계의 집으로 가고, 동네 친족들도 모였지만, 역시 참배만 마치고 모두 모여 앉아 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공은 너무 취해 내성 재종숙과 함께 김광계의 집에서 자게 되었다.

“조선시대 망년 의례”

‘망년(忘年)'이라는 말은 “나이(歲)를 잊는다” 또는 “나이 차이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고려사』 권102 「열전」15 ‘이인로’조에는 ‘망년우(忘年友)’와 ‘망년교(忘年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인로·이규보·오세재·임춘 등 무신쿠테타 때 살아남은 젊은 문인들은 ‘망년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망년회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죽림칠현을 본받았다고 하여 ‘죽림고회(竹林高會)’라고 불리기도 했고, 강남 쪽에 산다고 하여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도 하였다. 망년회 회원들은 이의민·최충헌 등 무신들이 권세를 누릴 때, 술과 시로 세월을 한탄했다.
또한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은 자신의 문집인 『사가집(四佳集)』에 망년회에 관한 두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권14 제12의 「한강루 망년회 석상(漢江樓忘年會席上)」이라는 제목의 시와 권22 제15의 「여섯번째 답장 2수(六和 二首)」라는 제목의 시에서 ‘제천정 위의 망년회(濟川亭上忘年會)’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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