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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을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는 미국의 소설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가 2005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2년 뒤 그러니까 2007년에 코헨 형제 감독에 의해서 영화로 만들어졌지요. 소설과 영화 모두 뛰어난 작품성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고 또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과 영화를 직접 경험하지 않으신 분들 중에서 이 단정적인 제목에 대해서 오해하고 계시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제목만 얼른 보면 사실 그럴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노인들의 복지를 너무 소홀히 한다거나, 혹은 요즘 노인들은 이 나라에서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던가, 아니면 반대로 이런 나라에서는 노인으로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했으므로 이제는 노인들도 핸드폰으로 동영상 편집 정도는 척척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준엄한 충고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소설과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의미는 이런 통상적인 인상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작품은 매우 낯설고 거친 문법을 통해서,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양상을 포착해 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물론 이미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했듯이, 우리 뜻대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과 전혀 무관하게 흘러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실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을 통과하고 시간을 쌓아나가면서 이 복잡한 세상을 좀 더 분명하고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세상이 그 자체로 우리의 이해와 예측을 배반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시간의 축적이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압축적 표현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세상이 나아지는 데에 그만큼 공헌할 수 있게 됩니다. 역사는 거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인식의 폭을 넓혔고 그래서 그를 통해 이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는 데에 공헌한, 그런 나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공동체에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 그리고 그것의 합리적 역사에 낙관적 신뢰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웹진 “담談”의 이번 호에서 그런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매카시와 코헨 형제의 생각에 반대하면서 제목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로 잡았습니다.

오항녕 선생님은 조선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1547-1634)의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원익은 늘 근면하고 청렴하게 살면서 평생 백성의 안위를 돌보는 일에 전념했고, 정치적 고초를 겪은 후에 영의정에 복귀하여 노정치인으로서의 혜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명재상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정치 영역에서 나이와 경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자산일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정창권 선생님은 조선 선비의 황혼 육아라는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서 글을 써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육아일기라 할 수 있는 “양아록”을 집필한 묵재 이문건, 큰손자 이안도가 공부에 전념하도록 끊임없이 격려한 퇴계 이황, 그리고 체벌을 통해 손자를 훈육하려 했던 미암 유희춘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조선 시대 노인의 삶의 또 다른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서은경 작가님은 스토리테마파크에 수록된 장흥효의 환갑잔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해서 환갑을 축하했지만, 정작 본인은 나이를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깁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덕이 쌓여갔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 갈수록 덕이 낮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죠. 세월의 흐름 앞에 진정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던 참으로 현명한 노인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수진 작가님의 연재 “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는 이번 호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무대 위 노인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비교적 최근에 한국에서 초연된 뮤지컬 “하데스타운”을 중심으로 삼아 연극 무대에서 노인의 배역 문제, 주연 배우의 수당의 문제, 청년의 문제 등을 다각도로 짚어 나갑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이야기 역시 이번 호에서도 흥미롭게 이어집니다. “양로연 좀도둑 사건”은 흥겨운 양로연에서 안경이 없어진 사건을 들려주고 있는데, 이번에도 포천 현감 오달현의 딸 산비가 이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갑니다.

화제의 연재물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은 이번호에서 난졸재 이산두 선생에 관련된 “어필영정각”을 다룹니다. 이산두 선생은 69세 때 지은 시에서 자신을 “난졸” 그러니까 “게으르고 졸렬하다”고 말할 만큼 강직한 성품을 지닌 재상이었습니다. 이 글은 영조가 이산두에게 하사한 영정을 보관하던 “어필영정각”에 얽힌 이야기들을 풍요롭게 들려줍니다.

시간이 갈수록 반드시 지혜가 쌓이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갈수록 반드시 인격이 고매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오랜 시간 동안의 주체적이고도 지속적 노력을 통해 얻어집니다. 노년에 숭고한 인품을 유지했던 선인들은 엄격한 자기 수양을 통해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고 스스로 윤리적 모범을 실천했던 분들입니다. 역시 우리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편집자 소개

글: 김수영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철학을 공부하고 출판계에서 일했으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이토록 매력적인 철학”이 있다.
“양로연(養老宴)을 열고 비둘기 지팡이를 선물하다”

낙남헌양로연도(落南軒養老宴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문해, 초간일기, 1588-11-10 ~

1588년 11월 10일, 봄날같이 화창하고 따뜻한 날이다. 이 지역의 어른 70여 명의 노인을 모시고 잔치를 여는 뜻깊은 날, 날씨까지 포근하고 화사하니 이를 준비한 권문해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관아의 앞뜰에 마련된 양로연(養老宴)에 참여한 남자들은 오른편에 자리하고, 여자들은 왼편에 자리하여 종일 취하고 배불리 먹으면서 춤도 추며 흥겨운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권문해는 비둘기 모양이 새겨진 지팡이 구장(鳩杖)과 수건을 만들어 양로연에 참석한 노인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장수를 비는 잔치들”

이원기로회계첩(梨園耆老會契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장석영, 흑산일록, 1919-08-22

1577년 9월, 금난수의 고모와 고모부 이징(李澄)의 사위 박세현(朴世賢)이 그의 장인과 장모를 위해 온계에서 잔치를 열었다. 금난수로서는 두 해 전 돌아가신 부친이 떠올랐기 때문에 고모, 고모부의 장수를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서글픈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장수를 비는 날인만큼 모두가 받은 상마다 꽃이 꽂혀 있었고, 술동이에는 향기로운 술이 찰랑였다. 잔치에서 여러 자손들이 돌아가며 노부부에게 잔을 올리는 헌수(獻壽)를 하였고, 악사들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다음 달에는 금난수의 숙부인 금희가 노인회를 열었다. 원래는 봄과 가을마다 나라에서 퇴직한 노 관료들을 위해 베풀어 주는 것이 기로연의 원형이었으나, 사적으로도 노인들이 한데 모여 자신들의 장수를 자축하였다. 노인들의 행사인 만큼 금난수는 이곳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근처에 머물며 물심양면으로 행사를 도왔다. 숙부를 모시는 것이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갑자년에 태어나 갑자년을 맞이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24-12-04 ~

1624년 12월 4일, 장흥효는 명종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선조를 거쳐 광해군을 지나 인조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는 일기에 스스로 “갑자년에 태어나 다시 갑자년을 맞이하고 12월 4일에 태어나 다시 12월 4일을 맞이했다”고 기록했다. 어찌 보면 환갑이라는 나이가 마냥 신기했던 모양이다. 갑자년에 태어나 다시 갑자년을 맞이했다는 것은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다른 생명체로 거듭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이는 들어가지만 오히려 덕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덥수룩해졌으며 사람의 됨됨이는 더욱 볼품이 없었다. 다시 살아가는 갑자년이라고 하지만 어린아이로서의 갑자년과는 사뭇 달랐던 셈이다.

여러 지역 인사들이 그를 찾아왔다. 무려 3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의 환갑을 맞아 술을 대접하고 각기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자신이 보잘것없는 노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런 자신에게 이렇게 성대하게 맞아주는 것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부끄러움만 더해갔다.

자신이 읽은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60세에 60년만큼 교화되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60세에 60년만큼 잘못된다고 하면서 차라리 자신을 버리고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지만 도리어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과 정성을 주고 있으니 더욱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은 오늘로 그만두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었다.

“기로소 대신에게 연회를 베풀다”

권상일, 청대일기,
1719-04-16 ~ 1719-04-18

1719년 4월 16일, 숙종은 기로소(耆老所) 대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로소 대신으로 당연히 참여해야 할 영중추부사 이유(李濡)가 대간의 논박을 받아서 궐에 출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회에 이유가 빠질 난처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동궁은 여러 번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타이르고 승지와 함께 출사하기를 권하였다. 결국 동궁의 조처로 숙종이 진행하고자 했던 연회가 개최되었다.

연회는 오전 경현당에서 진행되었다. 숙종은 건강상의 이유로 나오지 못했고 세자만 참석했다. 이날 참석한 기로소 대신은 영중추부사 이유(李濡),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판중추부사 김우항(金宇杭), 공조 판서 신임(申銋), 형조 판서 황흠(黃欽) 등이었다. 본래는 전 판서 최규서(崔奎瑞)도 참석해야 했으나 고향인 용인으로 내려간지 오래라 관직을 사양한 상태였다. 다른 승지들이나 시위하는 신하들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여 오로지 장악원 악공등만 참여했다.

오후에 연회가 끝나고 기로소 신하들은 궁궐의 꽃을 가득 꽂고 크게 취하여 부축을 받으면서 나왔다. 연회가 성대하기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기로소 본청에서 다시 한번 연회의 자리를 마련하자는 명령이 내려왔다. 한번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권상일은 여태껏 있지도 않았던 성대한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숙종은 기로소 신하들에게 ‘경들은 모두 이미 칠십 팔십이 되었으나 다들 변이 없이 건강한데 나는 이제 겨우 육순이나 몸은 병들고 눈은 어두우니 이제 이와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기로소 대신들보다 숙종이 10여 세 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암시였을까 숙종은 기로소 대신보다 먼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문중 모임을 주관하다”

최흥원 역중일기, 1752-03-17 ~

1752년 3월 17일. 최흥원은 어제부터 문중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기거하는 칠곡 마을을 비롯하여 인근 지묘 마을, 해안 마을 등 최씨 일족이 거주하는 동네마다 모두 사람을 보내어 참여하기로 한 모임이었다. 본래 모임을 개최하기로 한 것은 어제였는데, 어제 해안 마을의 일족들이 도착하지 않아 개회가 하루 늦어졌다.

오늘 아침 일찍 해안 마을의 일족 노인이 비로소 도착하였다. 모두 모여 자리에 앉은 이후, 남산에 사는 일족의 아재를 문중의 어른으로 추대하였다. 추대한 어른을 특석에 앉도록 요청한 이후, 임신(壬申)생 이후에 출생한 환갑이 되지 못한 일족들이 모두 어른에게 공경히 절을 올렸다. 앞으로 문중 모임에서는 이 어른이 모든 일을 결정할 어른이었다.

아울러 앞으로 문중 일을 도맡아 할 실무자인 유사도 뽑았다. 성주에 사는 일족의 어른을 유사로 선발하였다. 유사로 선발된 어른은 첫 업무로 문중에 관한 절목을 수정하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하필이면 그 일을 최흥원에게 부탁하였다. 지난 신해년에 만든 완의를 수정하고, 새로 결정된 일을 보충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최흥원은 거듭 사양하였으나 유사 어른의 의사가 공고하여 결국 일을 맡고 말았다. 최흥원은 일을 맡은 이상 문중의 일이니만큼 온 힘을 다하겠노라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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