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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용기의 상징,
귀여운 토끼들이 몰려온다

세계적 금리 인상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지구촌의 삶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원자재 값 상승과 고용 불안정이 심화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또한 팬데믹의 비대면 시대는 끝나고 있지만 여전히 코로나19는 위협적입니다.

하지만 지난 날은 가고, 새날은 다가옵니다. 먹이 피라미드의 제일 밑에 있지만 생기발랄하고 무성한 생명력을 지닌 채, 더 멀리 뛰는 ‘검은 토끼들’의 새날이 열렸습니다. 이번 웹진 담談은 “계묘년, 새날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지혜와 용기뿐만 아니라 귀여움과 꾀를 지닌 토끼를 생각하며 웹진을 준비했습니다.

김이은 선생님은 〈한국 문화코드로서의 토끼 상징〉를 통해서 “달의 정령”인 토끼가 전통사상에서 지니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놓으셨습니다. 문화코드로서 동물 상징에 대해 연구해 오신 관점에서 토끼를 다룬 우리의 문화적 맥락을 흥미롭게 다루어 주셨습니다. 토끼가 과거와 현재를 잇고 우리 공동체가 역사적 이미지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주길 바랍니다.

고은임 선생님은 〈얄미운 토끼, 요설을 펴 용왕을 우롱하다〉에서 조선의 체제와 모순이 어떻게 토끼 이야기를 유행하게 하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부조리와 부패, 그리고 윤리성을 잃은 압제는 언제나 그렇듯 현실의 어려운 문제들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토끼전을 통해 드러나는 토끼에 대한 시각은 지배 질서에 맹목적이지 않으면서도 긍정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저항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서은경 작가님의 〈변방의 새해〉에서 조선의 가장 북쪽에 속한 갑산의 겨울을 지내는 지방관들의 일상을 그려주셨습니다. 매사냥과 썰매를 타면서도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수진 작가님의 〈새해에도 공연을 봅니다〉에서는 새해에 가족들과 함께 꼭 마당놀이를 보러 갔던 작가님의 일화를 소개하며 관객을 무장해제 시키는 마당놀이의 매력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객사 벽서 사건〉는 ‘산비’의 호기심 넘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한 도령이 산비에게 보낸 연서가 관청 벽에 붙은 사건을 긴장감 넘치고 명랑하게 풀어가는 과정이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은 평생 학문에 매진한 대산 이상정의 〈수신과 학문에 마음과 힘을 다하다, 만수재(晩修齋)〉에 대한 내용입니다. 편액의 의미처럼 자신을 닦고, 학문을 연구하고, 베풀었던 이상정의 삶을 과정을 수필처럼 담았습니다.

코로나에 지치고 복잡한 사회 속에서도 2023년, 계묘년(癸卯年)이 왔습니다. 지혜와 용기의 상징, 귀여운 토끼들처럼 우리 모두는 새로운 날들로 뛰어갈 것입니다. 웹진 담談의 독자 여러분들께 새로운 봄을 맞는 인사를 이상정의 고산잡영 사곡(四曲)에 담긴 시로 전합니다.


水靜山深自一村    고요한 물 깊은 산에 절로 마을 이뤘는데
虛齋終日掩柴門    텅 빈 서재 종일토록 사립문을 닫았어라
汀禽欲睡階花笑    물가 새는 자려 하고 뜰의 꽃은 피었는데
一炷爐香坐不言    한 가닥 향로 향기에 말없이 앉아 있네




편집자 소개

글 : 공병훈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등이 있다.
“을미년 새해가 밝다”

오희문, 쇄미록, 1595-01-01 ~

1595년 1월 1일, 날이 밝자 일어나서 어머님을 찾아뵙고, 다락 위에 올라가 아버님 신주 앞에 절을 하였다. 아울러 차례를 올렸는데, 겨우 만두를 넣은 떡국, 군고기 한 그릇, 탕 한 그릇에 잔을 올린 게 전부였다. 가난해서 제대로 차례상도 차리지 못하였으니, 탄식한들 무엇하겠는가. 이곳 임천 고을에 와 있은지가 이제 3년인데, 달리 갈 곳이 없고 궁색함은 날로 심해지니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과연 내년 설에도 궁색하게나마 무사히 차례를 올릴 수 있을지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해를 만났건만 아우와 두 아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니, 슬픈 감회가 밀려들었다. 또 큰 아들 윤해가 선조들의 묘를 찾아뵙기 위해 지난해 말 길을 나섰는데, 오늘 늦지 않게 도착하여 술이라도 한 잔 올리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변변히 노자도 챙기지 못하고, 한겨울에도 얇은 옷 한 벌이 전부였는데, 아들이 떠난 이후 왜 그리 눈은 많이 오는지... 오희문은 눈 밭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큰아들이 보이는 듯하여 심란한 새해 아침을 보내었다.

“환갑 새해를 맞이하다”

최흥원, 역중일기, 1765-01-01~

1765년 1월 1일. 날이 바뀌는 자시부터 바람이 그치고 춥지 않으면서 구름이 없어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길한 날씨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어지럼증을 호소하셨으나, 다행히 일어나 앉아 말씀을 나누실 정도는 되시니 매우 다행이었다. 날이 바뀌는 자시 무렵 어머니께 선성벽온단을 올렸다. 돌림병을 막아주는 약이었는데, 올해도 부디 평온하게 한 해를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오늘은 최흥원의 60세 회갑을 맞이하는 해의 설날 아침이었다. 사촌 일초가 와서 밤새 최흥원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수세하였다. 회갑을 맞이하는 해의 설날이 되니, 문득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게 되고 그 감회가 백배나 새로웠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후에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고, 얼마 전에는 아들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천지사방에 의탁할 곳이라고는 없는 궁색하고 외로운 신세였다. 살아오면서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고, 친척들의 질병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육십 해를 보내왔으니, 그간 쌓인 감회가 오늘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나마 동생들과 조카들, 그리고 인근에 사는 친지들이 잊지 않고 최흥원의 회갑을 축하해 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어머니를 비롯한 동생과 친지들을 보살피며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었다. 최흥원은 이런 생각으로 설날 하루를 보냈다.

“형제끼리 의지하는 쓸쓸한 객지의 새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6-01-01 ~ 1786-01-06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노상추 곁에 있는 가족이라고는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온 동생 노억 뿐이었다. 고단한 관직살이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도성에서 쓸쓸한 새해를 맞는 것은 비단 노상추 형제뿐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병마절도사 조학신(曺學臣)은 청교(淸橋)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영남 출신 무관들을 불러 모아 술과 떡, 안주를 대접하였다. 비록 가족들은 만나지 못하지만 익숙한 말씨의 고향 사람들끼리 새해 첫날을 보내니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술기운에 고향집 생각을 하자, 어른 없이 홀로 차례를 지냈을 큰조카가 떠올라 안쓰럽고 서글퍼졌다. 노상추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동생과 함께 여관에서 묵으며 이러한 쓸쓸한 심사를 나누었다. 노억은 그러한 형님을 위로하며 설 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방문하며 새로운 기분을 내 보자고 제안했다. 노상추도 이에 응하여 며칠 동안 이리저리 많은 친지를 방문하였다. 매일같이 새해를 기념하는 술자리가 이어졌고, 우울했던 마음도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며칠만 더 지나면 휴가를 써서 고향에 내려가 그리운 가족들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친지들과 새해인사를 나누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6-01-01 ~ 1596-01-05

1596년 1월 1일, 금난수는 풍기 숙모를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 금난수의 삼촌 금희(琴憙)가 돌아가시고 나서 숙모가 10년간 혼자 계셨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찾아뵈어 적적함을 달래드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후 금난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해라 그런지 낮부터 새해 인사를 하러 찾아온 사람들로 금난수의 집이 붐볐다. 금응각(琴應角), 구백수(具伯綏), 손행원(孫行源), 류의(柳誼)가 찾아온 것이다. 금난수는 여러 친척들과 세 아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더없이 기뻤다.

1월 4일에는 조금 뒤늦게 금난수의 외조카인 권산기(權山起)와 금난수의 사위인 이광욱(李光郁)이 와서 새해 인사를 하였다. 새해 초이니 올해는 서로 건강하고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덕담을 나눈 것이었다.

1월 5일에는 금난수는 이미 일정을 정해놓은 대로 사람들과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역동서원(易東書院) 두 곳의 사당에서 참배하였다. 그 수는 20여 명으로 모두 모여 사당에 참배하였다. 참배를 끝마칠 무렵에서야 이시(李蒔), 이립(李苙), 이강(李茳) 삼형제가 사당에 왔다. 금난수는 가까운 사람들과 새해인사 및 덕담을 나누고 사당에 새해를 맞아 참배하니 올해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해 첫날, 아내의 건강과 행복한 여생을 바라다”

오희문, 쇄미록, 1599-01-01

1599년 1월 1일, 동녘이 틀 무렵 다례를 지냈다. 왜적이 모두 물러가고 맞는 새해였다. 지난 임진년부터 작년까지 꼬박 여덟 해 동안 왜적에게 시달린 생각을 하니, 올해의 첫 날이 새삼 감격스러웠다. 올해는 왜적들을 피해 다닐 일도 없으니, 식구들이 모두 정착할 만한 곳을 알아보고 집을 옮길 생각이었다.

새해 첫날인데, 집사람이 지난밤부터 병이 있어 새벽까지 신음하고, 정신이 혼미한 것이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니 보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며칠 전에는 점차 차도가 있어서 온 집안이 기뻐했더니, 오늘은 또 이와 같으니 더욱 걱정스러웠다. 이 때문에 간단히 다례만 지내고, 이웃 마을에서 온 사람들을 도로 돌려보내고 술도 대접하지 못하였다.

올해는 기해년이니 오희문의 환갑이 되는 해였다.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 보니, 앞길이 얼마 남지 않아 슬프고 탄식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거기에 집사람의 병세가 위태로워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어 40년 동안 같이 늙은 내외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다니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오희문은 새해 첫날 앓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부디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동안 아프거나 고생하지 않고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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