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흡연자이고, 담배 연기를 피하고 싶은 호흡기질환자입니다. 그런데도 뮤지컬 〈그날들〉을 보러 갈 때면 등장인물의 흡연 장면을 좀 더 가까이에서 잘 보고 싶어 특정 좌석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지인(청와대 운영관)이 동료의 죽음으로 직장을 떠나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주인공(청와대 경호원 차정학)을 찾아가 다시 돌아올 것을 설득하는 장면이 바로 그 흡연 장면입니다.
비흡연자로 알고 있던 운영관이 담배를 피우자 주인공이 의아해합니다. 운영관은 아들의 죽음으로 시작된 흡연을 청와대에 들어오게 되면서 끊게 되었는데 가끔 생각날 때는 피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처음에는 매 순간마다 생각나다가 시간이 지나니 뜨문뜨문 생각나고 더 시간이 흐르니 잊고 지내게 되더라’라며 그는 담배에 빗대어 세상을 떠난 아들을 가슴에 묻고 지냈던 지난 세월을 이야기 해 줍니다. 초로의 배우가 담담하게 이 대사를 풀어놓으면, 그가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서 그의 인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담배가 극에서 인생을 말할 수 있는 장치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은 흡연이 물건의 소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담배의 “중독성”과 흡연자의 “애착”이 만나 그것이 삶에 스며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호품을 다른 물건들과 달리 봐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에 스며든 기호품은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줄 수도 있고, 인물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특별한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조선시대 기호품 중에서 특별한 문화를 만들어 냈던 기호품들을 이야기해 봅니다. 이완범 선생님은 〈우리는 언제부터 식후에 커피 한 잔을 즐겼을까?〉에서 조선 철종 때의 커피 전래부터 현대 한국식 커피믹스의 세계화에 이르기까지의 커피 역사와 한국 근현대에서 커피 소비가 지니는 의미와 상징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하여주 선생님은 〈담배, 조선의 젠더 질서를 초월한 기호품〉에서 담배를 소비하는 조선 시대 여성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전래 초기에는 남녀노소 차별 없이 담배가 소비되었는데, 전통문화와 충돌하면서 유교적 흡연 규범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가부장적인 흡연 예절은 흡연에서 여성을 배제하였지만, 여성들은 이 규범을 “무시하는 대응”으로 자신들의 흡연문화를 만들어 내고 이어왔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에게 생경했던 물건(커피, 담배)들이 전래되고 점차 소비되어 마침내 문화까지 만들어 낸 과정들을 두 분 선생님의 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 전래된 기호품들은 처음에는 상류층들 중심으로 위세품이나 사치품으로 소비됩니다. 소비의 저변이 확대될 무렵에는 전통문화와 크게 충돌하게 되어 그 소비가 잠시 주춤하지만 이를 계기로 하여 찾은 활로 덕분에 토착화와 대중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물론 성공의 이면에는 그 기호품 소비자들의 열렬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여주 선생님 글에서 담배에 대한 여성들의 사랑을 보았다면, 서은경 작가님의 웹툰 〈심심草 로맨스〉에서는 조선 후기 문인 매암(梅庵) 이옥(李鈺)의 담배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옥과 그 일행에게 담배는 행장에 꼭 챙겨야 할 물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길을 가는 길동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길동무 챙기느라 또 다른 친구(문방사우)를 잊으셨어요.
조선 시대 선비들은 담배를 벗으로 여기기도 하고, 늘 곁에 두고 쓰는 붓과 벼루를 벗이라 부르기도 하고, 송죽매국연(松竹梅菊蓮)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벗으로 삼아 곁에 두려고 했습니다. 좋아하는 것에 인격을 부여하여 벗으로 삼고 곁에 두니, 그것들은 그의 삶 속에 들어앉아 그의 인생을 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복순 선생님은 〈오우당(五友堂)과 절우사(節友社)에서 만난 선비의 벗, 매화(梅花)〉라는 글에서 오우당 편액과 함께 오우당 주인 김근(金近)의 오우(五友) 중 하나였던 매화에 대한 사랑까지 소개해 주셨습니다. 매화를 벗으로 삼은 만큼 김근은 지조 있는 선비의 삶을 바랐고, 또 그런 삶을 살았는데, 그것이 “오우당” 편액에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합니다. 퇴계 선생의 매화 사랑도 빼놓을 수가 없기에 절우사와 함께 이 글에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좋아하는 물건을 가까이하면 그것의 향(香)이 밴다고 하니, 두 분께는 늘 매화향이 났을 것 같습니다.
향이라는 면에서 봤을 때, 담배처럼 ‘자기주장’이 확실한 향이 있을까요? 이번 달에도 우리 산비의 활약이 이어지는데, 광장에서 도둑을 잡았습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요술 보다 도둑맞았네〉에서 산비가 어떻게 절도와 도둑을 알아챘는지 확인해 보시죠.
이수진 작가님은 〈호랑이도 담배 피던 시절〉에서 무대 위의 담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배우나 관객에게 흡연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건강 담론 하에 금연이 대세가 된 지금은 객석의 담배는 물론이고 무대 위의 담배도 문제가 되곤 합니다. 담배를 쓸 것인지, 쓴다면 진짜를 쓸 것인지, 가짜를 쓸 것인지를 창작 단계부터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담배에 대한 관객의 반응까지 일일이 살피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현대의 무대 예술에선 담배는 선택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것 같습니다.
담배 냄새와 연기를 싫어하지만 저는 제가 사랑하는 어떤 것 때문에, 여전히 연극 〈레드〉 속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흡연 장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속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뮤지컬 〈그날들〉을 보러 가게 되면 운영관의 담배 연기가 닿는 자리를 여전히 고수할 것 같습니다. 무대 위의 담배가 진짜든 가짜든 간에 그것으로 표현하는 인생에는 진짜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니까요.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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