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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작은 작은 관심으로부터

어느 사회나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요순(堯舜)시대의 태평성대를 노래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문제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우리의 열망을 투사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문제없는 시대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물론 시대에 따라 문제의 성격은 변합니다. 약 천 년 전 한반도의 백성들을 고심하게 했던 문제와 인터넷과 AI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이 시대의 문제가 같다면 이상한 일이겠지요. 우리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문제들을 탐구하며 그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바로 “중독”이 그런 문제 중의 대표 격이겠지요. 시대에 따라 세상은 변해도 그 중심에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변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중독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것은, 그것이 변하기 어려운 인간 본성의 어느 한구석과 깊이 관계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중독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술적인 정의가 가능하겠습니다만, 그 핵심에는 지나친 의존성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특정 대상 없이는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이 영위되지 않는 상태, 그것이 중독의 뜻이겠지요.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중독 현상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최근에는 마약 중독이 사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지만, 이외에도 정말 다양한 중독 현상들이 있겠지요.

우리는 이번 호에서 조선 시대의 사회적 중독 문제를 다룹니다. “중독: 파멸의 지름길”이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시선을 통해서 조선 시대의 중독의 문제를 들여다봅니다. 전경목 선생님은 〈노름으로 패가망신한 양반과 청부업자로 전락한 수령〉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주셨습니다. 조선 시대 말, 전라도 장수현에 살던 양사헌의 탄원서를 통해 당시 성행한 노름으로 인한 폐해를 보여줍니다. 게다가 노름빚 상환을 증명해 달라는 탄원서에는 조선 후기 부패한 수령의 모습을 담고 있어 수령과 노름꾼의 유착 관계도 보여주기도 합니다.

조석연 선생님은, 〈전통사회의 가정상비약 아편은 어떻게 ‘마약’이 되었나?〉라는 글을 써주셨습니다. 제목 그대로 전통사회의 가정상비약인 아편이 마약이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약재로 사용되었던 아편이 조선 후기, 헌종 대에 아편에 대해 경계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바로 청나라의 아편 피해 발생을 직접 보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 이후 아편이라는 마약이 제국주의와 만나는 과정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 변화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이번 호 스토리 웹툰의 서은경 작가님은 웹툰 〈운명-동전 던지기〉를 그려주셨습니다. 작가님은 『노상추일기』에서 아동들이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다 장천항이란 아이가 김세황을 돌로 때려 죽인 사건을 그렸는데요. 작은 내기에서 살인까지 이어지는 도박의 무서움을 담아 주셨습니다.

이번 호 “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의 이수진 작가님은 〈투전판이 사랑보다 중하더냐〉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미국의 뮤지컬 〈쇼 보트〉, 한국의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통해 사랑보다 도박을 중요시 한 도박사들의 말로를 보여주고 계십시다.

비야의 사건일지, 이문영 작가님은 글 〈투전의 달인〉을 보내주셨습니다. 주인공 산비는 오라버니 정훈의 도박 빚을 처리하기 위해 투전판에 들어가는데요. 산비는 패를 다 외우는 기지를 발휘하여 도박꾼들을 상대로 승을 따내며 이번 사건도 마무리합니다.

이번 스토리 이슈는 『정생, 꿈 밖은 위험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신 이문영 작가님에 대한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이 책은 웹진 〈담談〉에 2021년 7월부터 2022년 8월까지 연재된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복순 선생님이 저자에게 책의 배경과 소재, 그리고 앞으로 연재될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셨습니다.

웹진 〈담談〉은 이번 호에서 중독의 문제를 살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다소 우울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이런 문제일수록 문제의 본질에 정면으로 마주 서는 용기가 필요할 겁니다. 중독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는, 그래서 올바로 행동하지 못하는 몇 사람을 치료하거나 격리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호에서 중독이라는 조선의 사회 문제를 두루 살펴보는 일이 오늘날보다 바람직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에 작은 실마리라도 던져줄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변화는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관심은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편집자 소개

김수영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철학을 공부하고 출판계에서 일했으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이토록 매력적인 철학』, 『철학이 내 손을 잡을 때』 등이 있다.
“어느 땅에나 도박의 폐단이 존재하다”

미상, 계산기정,
1803-12-12 ~ 1803-12-13

1803년 12월 12일, 대릉하보(大凌河堡) 30리를 가서 말에 풀을 먹이고 쌍양점(雙陽店) 20리를 가서 묵었다.

대릉하(大陵河)는 퍽 넓고 크다. 바다에서 80리 떨어져 있고 삼면이 다 큰 들판이다. 곧 명말(明末)의 전쟁터이다.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군중을 거느리고 적군과 항거하는데, 하루는 큰바람이 급작스럽게 일어나 나는 모래가 하늘에 가득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병이 진지 앞에 닥쳐와 채 대오를 정비하기도 전에 단숨에 붕괴되었다. 그래서 유정은 마침내 그 일로 죽었고 그의 휘하 수십 만의 무리들이 뒤이어 죽었는데, 언제나 구름 끼고 흐린 때가 되면 답답하고 억울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대릉하보의 마을은 대릉하에서 5리가 떨어진 곳으로, 민가와 점포의 번성함이 신민참(新民站)과 맞먹을 정도다. 이곳에는 식품으로 어차과(魚鹺苽)가 있어 별미로 친다.

대릉하보(大凌河堡)에서 앞으로 10여 리를 가면 길 왼쪽 평원에 사동비(四同碑)가 있다. 명 나라의 도독 첨사(都督僉事) 왕평(王平)과 왕종성(王宗盛)의 묘비이다. 만력(萬曆) 연간에 왕씨의 부자 형제가 충절을 세워 마침내 비석을 건립하여 일문(一門)의 충렬을 포창하였는데, 무덤 네 모퉁이에 각각 비석 하나씩을 세웠기 때문에 사동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뒤쪽의 두 비석은 뽑아가 버리고 단지 귀부(龜趺)만 남아 있는데, 앞쪽의 두 비석에는 각각 명도독 첨사 왕공휘모지묘(明都督僉事王公諱某之墓)라고 씌어져 있다.

비석에는 자획을 긁어 버린 흔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틀림없이 본래 공적을 기술한 글이 있었으나, 그 어구가 당시의 기휘에 저촉되었기 때문에 혹 뽑아 긁어 버린 것이리라.

서북쪽으로 금주위(錦州衛)까지 20리 사이에는 지나온 여관이나 관청에 ‘금지도박(禁止賭博)’ 네 글자가 많이 씌어져 있다. 도박의 폐단이 우리나라와 똑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송산보(松山堡)는 소릉하(小凌河)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옛 성터가 있는데 적루(敵樓)를 두었던 곳이다. 《심양일기(瀋陽日記)》, ‘신사년(1641, 인조 19) 중추 보름에 세자(世子)와 대군(大君)이 심양에서 출발하여 무릇 6일 만에 가로놓여진 한 언덕에 이르러 금주성(錦州城)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호행인(護行人)이 말하기를 ‘한족(漢族)의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이 성을 굳게 지켜 성 밖에 화포(火砲)를 많이 묻었으며, 유림(柳琳)도 그 동쪽 모퉁이에 있었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몽고병과 함께 전진(戰陣)을 치고 불을 놓았으며 성안에서도 그것에 맞서 포를 쏘아 포탄이 여러 차례 세자막에 떨어졌는데, 포탄이 거위알 크기만 하므로 흙담을 쌓아 가리우다가 후에는 또 송산(松山) 서쪽 10리 가량에다 막차(幕次)를 옮겼다.’고 하였다.

산마루부터 평지까지 다 참호를 판 것이 토성(土城)의 형상 같았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포위 진지를 쌓았던 자리다. 조대락(祖大樂)이 총병(摠兵)으로 성을 지켜 2년 동안 포위되었다가, 임오년(1642, 인조 20) 2월, 총병 왕정신(王廷臣)의 내응으로 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성안의 사람들은 다 도륙되었는데 오직 친절한 장관(將官) 13인만이 죽지 않았다. 조대락과 군문(軍門) 홍승주(洪承疇)는 다 잡혔는데 조대락은 곧 항복하였고 홍승주는 처음에는 굽히지 않다가 심양에 이르러서 역시 항복했다고 한다. 보루 위에는 봉화대가 있고 연기와 불을 피우던 곳이 아직도 뚜렷하게 보인다.

관마산(官馬山) 아래에 큰 무덤 둘이 있는데, 이것은 경관(京觀)이다. 옛날의 싸움터였는데 지금은 목장이 되었다. 산 뒤에는 본래 몽고 부락이 있었는데, 몽고 족속들은 거처하는 가옥이 없고 좋은 물과 풀이 있는 데로 가서 머물러 살곤 한다. 명대 말기에 한번은 이들이 비바람같이 급작스레 닥쳐와 남의 부녀자를 약탈해 가 버려서 주민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여 다른 데로 이전해 버렸다.

행산보(杏山堡)는 역시 명대 말기에 백전을 거듭한 싸움터다. 관군(官軍)이 이곳에서 크게 패전하여 마을 집들이 아직도 쓸쓸하고 들판의 기색은 황량하다. 그래서 자연 보는 것마다 처참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다.

이곳에서부터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는데, 넘쳐흐를 듯하게 높다. 바다 남쪽이 곧 산동(山東)의 여러 읍들로 옛날의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의 땅이다. 동쪽은 우리나라 황해도 연안과 서로 통하니 숭정(崇禎) 이후에 명 나라로 들어가던 길이다. 고교보(高橋堡)의 마을도 역시 번화하여 송산보(松山堡)와 서로 맞설 정도다. 병신년(1776)에 사신 일행이 왕씨(王氏) 성을 가진 점사에 투숙했는데, 밤중에 뜻밖에 은 1000냥을 잃어버려 형부(刑部)에다 일러 왕씨 일가를 체포 심문했다.

왕씨의 처는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사실 은을 훔치지는 않았고, 다만 처녀[室女] 때에 한 사나이와 간통했으니, 죄를 감히 모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자백하였다. 건륭 황제(乾隆皇帝)가 그 말을 듣고 그녀가 숨김이 없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왕씨의 식구를 전부 풀어 주고 그 처에게 옷 한 벌을 내리고 역(驛)의 수레에 태워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그 일이 지금까지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마을에는 관제묘(關帝廟)가 있는데, 꽤 현저하게 영이(靈異)하여 밤중의 음산한 기가 내릴 때에는 번번이 병마의 치닫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수투전으로 악명이 자자한 자, 감옥에 갇히다”

투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김령, 계암일록,
1607-06-05 (윤) ~ 1607-06-10 (윤)

1607년 윤6월 5일, 권경흥(權景興)의 사건을 듣고 섬뜩했다.

윤 6월 10일, 몹시 더웠다. 심부름꾼이 영천에서 돌아왔다. 그가 전해준 전 형의 편지를 보았다. 편지에 권경흥이 팔목(수투전)으로 악명이 자자하여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살인으로 이어진 동전 던지기 놀이”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02-26 ~ 1794-03-12

산창(山倉), 대관창(大館倉), 남창(南倉)을 돌며 환곡을 나눠주고 있을 때였다. 파발꾼이 헐레벌떡 달려와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노상추에게 바쳤다. 고목에는 “어제 본창(本倉)에서 환곡을 나눠줄 때 북면(北面) 송정리(松亭里)의 아동 김세황(金世况)과 읍내의 향교 남자종 장삼득(張三得)의 아들 장천항(張天恒)이 함께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때 장천항이 기왓장 돌로 김세황을 때렸습니다. 김세황은 한나절이 지난 신시(오후 3~5시)에 죽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경악한 노상추는 바로 검안소로 나아갔다. 김세황의 시신을 직접 조사하니, 얼굴 전체에 특별한 상처는 없으나 머리 살갗과 귓바퀴 근처 뺨에 오목하게 함몰된 부분이 있었다. 상처의 길이는 손가락이 두 개 들어갈 정도였고, 넓이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노상추는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冤錄)』을 뒤져 비슷한 상처의 모양을 찾아보았다. 책에는 구타를 당해서 즉시 죽었을 때 이런 상처 구멍이 난다고 적혀 있었다.

노상추가 검시를 끝내고 관아로 돌아오자 죽은 김세황의 부모가 공초를 올렸다. 기타 여러 사람에게도 이와 관련한 공초를 받았는데, 김세황을 때려서 죽게 한 범인은 장천항이라고 증언한 것이 모두 일치했다. 노상추는 이를 참고하여 옥안(獄案)을 작성하고 파발로 이웃 고을인 창성부(昌城府)로 보내 창성부사의 복검(覆檢)을 요청했다.

다음날 오후에 창성부사가 삭주부로 와서 복검을 하였다. 전례대로 두 부사는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하였다. 그런데 하인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온 창성부사가 거만하게 구는 꼴이 같잖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번 옥사는 함께 처리해야 하긴 했으니, 싫어도 싫은 티를 다 낼 수는 없었다. 그저 요즘 새기고 있는, 화내면 더 곤란해진다는 뜻인 ‘분사난(憤思難)’이라는 글자만을 떠올리며 참아보았다.

노상추는 복검 결과까지 종합하여 옥안을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보름 만에 돌아온 처분 내용은, “이 옥사만큼 잔인한 것이 없지만 처형할 나이에 차지 않았으니 1등을 감해 차율(次律)을 적용해서 장(杖) 1백으로 죄를 결정하여 희천군(熙川郡)에서 3천 리 떨어진 곳에 정배하라.”라는 것이었다. 범인인 장천항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터라 처벌을 1등 감하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장 1백 대를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장을 맞은 몸으로 3천 리나 유배 가면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바둑과 장기에 이성을 잃은 사람”

장기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808-05-09 ~ 1808-05-24

요즘 노상추가 묵고 있는 여관 사람들 사이에서는 바둑과 장기가 대유행이었다. 같은 여관에 묵는 사람 중에는 바둑에 넋을 잃고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빠진 사람도 있었다. 비단 이 집에서만 유행인 것은 아니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바둑과 장기에 푹 빠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여 앉으면 바둑판과 장기판을 펴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며 훈수를 두곤 했다.

이렇게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건만, 노상추는 바둑알과 장기말에 손도 대질 않았다. 잡기는 군자가 익힐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노상추 집안이 3대가 무업에 종사하는 집안이니 노상추도 으레 바둑 등의 잡기를 즐길 것이라 여기지만 노상추는 바둑과 장기가 저포(杼浦)나 다름없는 못된 습속이라 여겼다. 오늘도 장동원(張東源) 령(令) 등 여러 사람이 모여서 바둑을 온종일 두었다. 장동원 령이 노상추에게도 같이 바둑을 두자고 권했으나 노상추가 거절하자 사람들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재미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어찌 바둑에서 재미를 찾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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