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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팔인에 대한 기별을 받다


1519년 11월 24일, 함안. 저녁에 창원부사 채효중이 서울 기별을 봉해서 말을 달려 보내왔다. 열어본 즉 이 달 16일 자정 무렵에 임금이 명한 것이었다. “김정·김식·조광조·김구는 서로 패거리가 되어 요로를 나누어 차지하고 있으면서, 후배들을 이끌고 도와주어 괴상한 습속을 이루게 해서, 명성과 위세를 서로 의지함에, 조정 관리들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한다. 각각 먼 변방에 안치하라. 박세희·박훈·기준·윤자임 등은 이들과 서로 부화뇌동하였으니, 곤장 100대를 치고 고선을 모두 추탈하라.”라고 하였다.

황사우는 이 소식을 듣고 감사의 방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방으로 들어와서 어제 함께 있던 세 사람, 박광전·윤설남·이주와 취하도록 마시고 같이 잤다.

12월 1일, 개령. 조정 기별을 들었다. 11월 22일자 전지에 “오호라. 내 오직 덕에 밝지 못해서, 한갓 잘 다스리려는 뜻만 간절하였지 인재를 알아보는 지혜가 없어서 등용하고 버리는 사이에 크게 잘못하였으니, 내 심히 부끄럽구나. 지난날 조광조·김정·김식·김구·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 등이 모두 시종으로 있으면서, 성리의 학문을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진강하여, 내 그들의 사람됨이 나의 정치를 도와서 이루어 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좋은 관직을 가려서 임명하고, 직급을 뛰어넘어 승진시켜서, 몇 년 안 되는 사이에 모두 높은 자리에 발탁했으니, 내가 그들을 대우함에 부끄러움이 없다 할만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조광조 등이 서로 어울려 결탁해서 자기에게 붙는 자는 진출시키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며, 명성과 위세를 서로 의지하여 힘 있고 중요한 자리를 틀어잡았다. 조종의 법도는 지킬 것이 못된다하고, 원로의 말씀은 쓸 가치가 없다고 하며, 후배들을 유인해서 과격한 언행이 버릇이 되도록 하고, 심지어 일을 의논할 때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가 있으면 반드시 극구 배격하고 막아서 상대를 꺾고 자기를 따르게 하니, 국론이 뒤집히고 나라 정치가 날로 잘못되었다. 조정 신하가 가만히 분개하고 개탄하는 마음을 품지만, 그 불같은 위세가 두려워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였다. 그 하는 짓들이 국정을 어지럽히는 데로 귀착되어, 일의 진상이 이미 드러남에 마침내 용서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법에 따라 죄를 다스려 모든 관리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다만 전에 시종한 공을 생각하여 특별히 가벼운 처벌을 정하였으니,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은 먼 변방에 안치시키고, 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 등은 외지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라. 각기 그 죄질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니, 이를 어찌 내가 그만둘 수 있겠는가? 오직 너희 의정부에서는 경향 각지에 널리 알려 다들 나의 생각을 알 수 있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출전 :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
저자 : 황사우(黃士祐)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519-11-24 ~ 1519-12-01
장소 : 경상남도 함안군, 경상북도 김천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황사우, 채효중, 박광전, 윤설남,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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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와 기묘팔인


정국공신 삭훈이 이루어지고 난 5일 후인, 11월 15일. 중종은 의금부를 통해 조광조 등의 죄를 추고하라고 명한다. 이들의 죄목은 ‘붕당을 결성’한 것이었다. 이날의 실록 기록이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를 내렸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은 서로 붕당을 맺고서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로 서로 의지하여 권요의 자리를 차지하고, 후진을 유인하여 궤격이 버릇이 되게 하여 국론과 조정을 날로 글러가게 하였으나, 조정(朝廷)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게 된 일과, 윤자임·박세희·박훈·기준 등이 궤격한 논의에 화부한 일들을 추고하라.” 기묘사림의 주요인사로 지목을 받은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 박훈, 박세희, 기준 등 8명의 인사경력은 사림파의 영향력과 인사에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먼저 조광조(1482-1519)는 중종 10년 6월에 종6품직인 조지서 사지에 보임된 이래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원, 홍문과 수찬·교리·응교·전한을 거쳐 중종 13년 1월에 당상관인 부제학에 올랐다. 종6품에서 종2품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기간이 3년 5개월에 불과하였다. 그것도 대개 사헌부·홍문관·승정원 등의 요직에 국한되어 있었다. 김정(1486-1521)은 중종 2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사간원 정언·헌납, 홍문관 교리를 거쳐 잠시 외직인 순창군수를 지낸 다음 중종 9년 2월에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고 이어 홍문관 응교로 배수되었다. 그 후 12년 7월에는 부제학, 동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13년 7월에는 대사헌, 14년 7월에는 형조판서로 승배되었다. 문과에 급제해 초서되는 종6품직에서 정2품직까지 대략 12년이 소요되었다. 그 중 중종 12년 종4품 홍문관 부교리에서 14년 5월 정2품의 형조판서가 되기까지는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거쳐 단기간 동안 주요 요직에 있었다. 김식(1482-1520)은 현량과가 처음 실시된 1519년(중종 14년) 4월 17일에 종3품인 성균관 사성이 되었고, 28일에는 다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에 승배되었으며, 이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천거로 관리가 된 이후 홍문관의 부제학의 되기까지 겨우 1개월이 소요되었다. 김구(1488-1534)는 중종 9년 7월에 정8품인 홍문관 저작에서 홍문관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사간원 헌납, 홍문관 응교·전한, 사간원 사간, 승정원 동부승지, 홍문관 부제학 등을 거쳤다. 정8품의 홍문관 저작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되는데 소요된 기간은 4년 10개월 이었다. 윤자임(1488-1519)은 중종 9년 10월에 정9품인 홍문관 정자에서 홍문관 박사,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사간원 사간을 거쳐 중중 14년 2월에 정3품인 승정원 동부승지·좌승지를 지냈다. 정9품에서 정3품에 오르는데 4년 4개월이 걸렸다. 박훈(1484-1540)은 중종 9년 12월 종6품인 홍문관 부수찬에 이어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사간원 사간을 거쳐 중종 14년 6월에 정3품인 승정원 동부승지, 7월에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냈다. 4년 6개월 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의 고속 승진을 한 셈이다. 박세희(1491~?)는 중종 9년 12월 종6품인 홍문관 부수찬에 이어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사간원 사간을 거쳐 중종 14년 6월에 정3품인 승정원 동부승지, 7월에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냈다. 4년 6개월 만에 종6품 홍문관 부수찬에서 정3품인 승정원 동부승지에 이른 것이다. 기준(1492-1521)은 중종 10년 5월에 정9품 홍문관정자에서 홍문관 박사,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부교리, 홍문관 부응교, 사헌부장령을 거쳐 중종 14년 7월에 정3품인 홍문관 직제학에 제수되고 다시 정4품인 홍문관응교가 되었다. 5년 만에 정9품의 홍문관 정자에서 정4품의 홍문관 응교가 된 것이다. 기묘팔인이라 불리는 이들 8명은 공히 4년 만에 고속승진을 하였다. 당시 관료는 일정한 임기가 있어서 그 임기가 차면 전근 혹은 승진할 수 있었는데, 6품 이상은 출근일이 900일이 달한 후에 전근하고, 7품 이하는 450일이 지난 후에 전근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 기묘팔인은 짧은 시간에 승진을 하였고 직책 또한 언론을 맡았던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삼사(三司)와 국왕의 비서기관으로써 왕명의 출납을 관장했던 승정원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기묘팔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요 기관에 소속된 사람파의 정책 제안비율은 전신료가 47.8%, 비 사림파가 42.4% 인데 반해, 사림파는 60.0%였고, 정책 채택율도 비 사림파의 채택률을 100으로 볼 때 사림파는 141.5에 차지하는 비중이었다. 인사점유율도 중종 12년부터 높아져 중종 14년에는 홍문관의 84%, 의정부의 75%, 사헌부의 69.2%, 사간원의 60%가 기묘사림이 점유하고 있었다. 정책 제안빈도도 체제 부문과 관련해서는 다른 부문보다 훨씬 많은 정책을 제안하였다. 이처럼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 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먼저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 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타파와 향약(鄕約)실시를 강행하고,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반포하게 하였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현량과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7가지 항목을 종합하여 인재를 천거하고 그들을 궁궐 뜰에 모아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책(對策)으로 시험보고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별시로 치러졌다. 이를 통해 1519년 4월, 28명의 신진 사림들이 등용되었다. 그러나 뜻을 달리하는 문인의 사장(詞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직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였고, 특히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쳤다. 중종반정 공신 117명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 없이 공훈을 남수(濫授)하였으니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하여 작위를 삭탈하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 등도 모두 국가에 귀속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을 야기했다. 훈구파의 전횡에 시달린 백성들은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환영하였지만 중종은 임금의 권위마저 압박해오는 것으로 받아들여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신진 사류와의 알력과 반목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走·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곤·심정(沈貞)·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중종은 점차 신진 사류의 급진적·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위훈삭제 사건이 중종반정을 반역사건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중종은 결국 조광조와 신진사류를 몰아내었다.




집필자 소개

글 그림 | 권숯돌
권숯돌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방송작가 일을 하다가 이십대 후반에 심리학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와서는 지금까지 눌러살고 있다.
글과 그림으로 소통하는 일을 좋아한다.
2019년 다음웹툰에 연재된 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의 일대기 <희순할미> 스토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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