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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에서 단풍에 대해 논쟁하다


가야산으로 향하던 정구(鄭逑)는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서 대퇴골(허벅지부근)을 다쳤다. 그러나 산행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따로 치료를 하지는 못하고 소합원(蘇合元) 한 알을 데운 술과 함께 마셨다. 길을 가다가 어제 먼저 출발한 이인개를 만났다. 함께 길을 갔다. 밤고개(栗峴)에 도착할 무렵 배협(裵協)이라는 소년이 뒤따라왔다. 또한 함께 가기로 했다. 심원암(深源菴)이라는 암자에 도착했다. 여기쯤 오니 가야산 계곡의 아랫자락이라 물과 바위가 맑고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잠시 쉬었다. 일행들 각자가 홍시 한 개와 술 반잔씩을 마셨다. 쉬다가 다시 출발하여 이윽고 홍류동에 도착했다. 계곡 바위 위에 앉아 쉬고 있으니 어떤 승려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한마디를 하였다. “금년 단풍은 예전만 못합니다.” 그러나 정구의 생각은 달랐다. 산과 계곡에는 푸른 잎, 누런 잎 사이로 붉게 물든 잎들이 짙고 옅은 색으로 서로 어우러져 있었다. 물론 진한 붉은 색 일색의 찬연한 단풍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풍경을 보고 나름대로 흥을 내어 감상을 하고 시를 읊고 하다 보니 충분히 울적한 마음을 털어낼 수 있는데다가, 구름이 깔린 산골 계곡의 바위와 돌만 보아도 충분히 풍류의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정구에게 단풍이 전에 비해 조금 좋고 나쁘고 정도야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주어진 풍경을 충분히 즐기면 되는 것이다. 주위에 있던 어떤 사람은 “가을 구경하기에는 철이 좀 이르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지금이 바로 제철이다.”라고 논쟁하였다. 정구가 생각하기에 가을 구경하기에 철이 이르다면 강절(康節)의 시에 나오는 ‘꽃구경은 피기 전의 꽃봉오리 보는 것이 좋다네.〔看花取蓓蕾〕’ 라는 구절과 맞아 떨어지니 좋고, 만약 제철이라면 더욱 좋은 것이니 이쪽이건 저쪽이건 다 좋았다. 바쁜 삶 속에서 이렇게 동료들과 함께 산 속에 들어와 풍경을 감상하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인데 계절이 단풍을 즐기기에 빠른지 늦은지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홍류동 계곡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줄기는 바위틈으로 어지럽게 쏟아져 흐르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흩날리는 물방울은 숲과 나무다리 속으로 흩어졌다. 계곡의 물 흐름을 보니 한 곳에 모여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고여 있었는데 그 깊이를 모를 정도였다. 이번에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산봉우리는 높았고 계곡은 깊고 절벽은 높았다. 소나무와 전나무 숲이 울창하게 자라있었다. 홍류동 계곡은 길게 8~9리 정도 계속되었다. 한 걸음 내 딛을 때 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났다. 그러한 아름다운 풍경에 속한 바위 위에는 예부터 여러 사람들이 경치에 이름을 붙여 새겨두었다. 홍류동(紅流洞), 자필암(泚筆巖), 취적봉(吹篴峯), 광풍뢰(光風瀨), 제월담(霽月潭), 분옥 폭포(噴玉瀑布), 완재암(宛在巖) 등의 글씨를 감상했다.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리라 생각했다. 폭포 옆 바위에는 최치원의 시가 새겨져있었다. 그러나 장마철이 되면 물이 불어나 글씨를 덮으므로 글씨가 깎인 부분이 많았다. 한참 동안 살펴보고 글씨를 읽어보았다. 狂奔叠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바위 골짝 치닫는 물 첩첩 산골 뒤흔드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말소리는 지척임에도 알아듣기 어렵구나. 却恐是非聲到耳(각공시비성도이)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흐르는 계곡 물로 산을 둘러치게 하였구나. 앉아서 점심을 먹으며 술도 한잔 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배협이 쌀가루(米屑)를 권하길래 한 줌 먹어보았다. 배협을 먼저 해인사로 보내서 자신들의 도착을 알리게 하고는 계곡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면서 홍류동의 끝인 홍하문에 도착했다. 승려들이 나와서 일행을 공손히 맞이했다. 그 중 신열(信悅)이라는 승려는 이전부터 정구와 알던 사이였다. 그가 앞장서서 일행을 안내했다. 일행은 절 안에 있는 감물방장(鑑物方丈) 이라는 건물에 짐을 풀었다. 앉아서 쉬다보니 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절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보니 김 박사(金博士)와 이 충의(李忠義)라는 사람들의 일행이라고 했다. 그들이 정구를 만나고 싶다고 하였으나 정구는 말에서 떨어져 몸이 편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저녁 무렵에는 최치원의 전설이 남아있는 학사대에 다녀왔다. 다녀오니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으나 바닥에 따로 깔아둔 이불이 없이 누웠더니 너무 차가웠다. 몸을 뒤척이다가 마당으로 나왔다. 일행들도 모두 잠을 이루지 못해 함께 나왔다. 맑고 밝은 달빛을 즐기면서 술을 반잔씩만 마시고 들어왔더니 잠이 들었다.

출전 :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
저자 : 정구(鄭逑)
주제 : 여행, 감상
시기 : 미상
장소 : 경상남도 합천군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정구, 이인개, 배협, 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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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가을 풍경에 술 생각이 간절해지다”

추수한 작물을 타작하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오희문, 쇄미록, 1599-08-27

1599년 8월 27일, 오늘 오희문은 계집종 중금의 밭보리를 타작하는 일로 인아와 덕노를 데리고 옥동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하루 종일 종들이 일을 하는 모습을 감독하고 늦은 오후께 아들 윤해와 함께 걸어서 말지산 뒷산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서는 계집종들이 거둔 보리를 묶고 있었고, 한켠에서는 인아의 밭에서 조를 수확하고 있었다. 오희문은 인아와 함께 종들이 일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한참 일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이켜 사방을 바라보니 가을산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단풍이 들어 비단 같은 풍경을 이루어 술 마시기에 안성맞춤인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는 한 병 소주도 없고, 함께 술잔을 기울일만한 이웃도 없으며, 아우도 먼 곳에 있으니 마시려 해도 마실 수가 없었다.

비록 간절한 술 생각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높은데 오르니 기분이 몹시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이웃 사람들과 아우를 데리고 이곳에 올라 거나하게 술을 한잔 하며 이 정취를 즐기리라. 오희문은 이렇게 다짐하며 일을 마친 종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강가에서 가을 풍경을 즐기다”

지리산 천왕봉의 가을(출처: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 김광계, 매원일기,
1638-08-19 ~ 1638-08-22

1638년 8월 19일, 가을이 깊어 풍경도 크게 변하였다. 김광계는 재종숙 김령(金坽)의 집에 갔다. 김령의 집에 가니 사종질 김확(金確)의 사돈인 김응조(金應祖)가 있기에 앉아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기분이 났는지, 김응조과 김확, 그리고 금발(琴撥)까지 함께 말을 타고 다정하게 강가로 유람을 하러 나갔다. 말고삐는 나란하고, 강바람은 시원했다.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회까지 쳐서 술에 곁들여 먹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외유를 하고,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잠도 함께 잤다.

다음날에는 김광계의 셋째 동생 김광보(金光輔)와 넷째 동생 김광악(金光岳)까지 합세하여 다시금 말을 타고 강을 따라 갔다. 강 양쪽으로 단풍잎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어 그 광경이 과연 사랑할 만 하였다. 이번에는 오담(鼇潭)에 머물러 배를 띄웠다. 배 위에서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고, 배가 강물에 흘러가면 다시금 노를 저어 올라오고 하며 뱃놀이를 즐겼다. 이 날은 오담과 가까이 있는 역동서원에 가서 잤다.

다음날에도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며 질리지도 않고 날이 저물 때 까지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저물 때 쯤 애일당(愛日堂)에 올라서 또 술독을 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기고 있자니 달이 이미 고개 위로 넘어와 강물에 비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시고 여러 벗들과 도산서원으로 가서 잤다.

다음 날인 22일에는 시를 지으며 놀았다. 그러다가 김광악이 먼저 떠났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 저녁에 단사협(丹砂峽)에 갔다. 단사협의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 듯했고, 그 절벽의 둘레는 몇 리나 되니 거대한 절벽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절벽의 아래에는 맑은 물이 흘러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였다. 물 위로 단풍나무가 거꾸로 비추어 보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흘간 벗들과 함께 강을 따라 가을 풍경을 즐기자니 이번 가을은 더욱 풍성하게 느껴졌다.

“산이 유명해질수록 승려들이 더 고달파진다고?”

승려가 멘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08-07 ~ 1587-08-08

1587년 8월 7일, 황여일과 그 숙부 황응청는 이 날 내영산을 구경하고 돌아와 보경사(寶鏡寺)에서 잤다. 조매당[趙梅堂, 조정간(趙廷幹)]은 대두(大豆)를 보내어 연포탕(軟泡湯)을 끓이게 하니 이는 우리들과 배부르게 먹고자 함이고, 김명숙(金明叔)이 소설책과 오래된 술을 남겨두었으니 이는 우리들과 취하고자 함이다. 배부르게 먹고 또 취하면서 승려들과도 더불어 우도(友道)를 함께 하였다.

8월 8일, 학연(學衍)이 세수를 하고 황여일에게 문안하며 말하였다.

“이 산(내영산)은 예전에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선동(仙童)이라는 승려가 굴집을 만들어 살았었는데, 근래 몇 년 사이에 수령으로 부임한 성(姓)이 옹(邕)이라는 사람이 은사(隱士)인 체 하면서 이곳을 찾아와 도원(桃源)을 구경하고 돌아가면서 동경부윤(東京府尹)인 이구암[李龜巖, 이정(李楨)] 선생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이구암 선생은 곧장 사령운(謝靈運)의 여행을 본받아 이곳을 여행하였고, 여름에 재차 유람하였습니다. 이구암 선생은 선비들이 우러러 보는 분이기에, 여행하는 자들은 구암(龜巖)이 다닌 곳과 그 자취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므로 구암(龜巖)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고, 이 산과 함께 이름이 오래가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영남에서 유람하는 선비로서 산을 말하는 자는 봄에는 진달래가 볼 만하고, 가을에는 단풍 숲이 아름답다며, 내영산을 앞 다투어 칭찬하였습니다, 공무를 띠고 지나가던 중앙 관료와 지방에 부임한 관리에 이르기까지 또한 계절마다 묵어갔습니다. 이에 승려는 가마꾼이 되고 절은 밥을 지어 나르는 여관이 되었습니다. 이 산이 유명해진 것은 우리 승려들에게는 심한 재앙입니다.”

“산을 오르기 전에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다”

『근사록』(출처: 문화재청) 권상일, 청대일기,
1719-04-16 ~ 1719-04-18

정구(鄭逑)는 이인개(李仁愷),이인제(李仁悌) 형제와 함께 사촌(沙村)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느 날 곽준(郭䞭)이 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며칠을 즐겁게 보냈다. 정구는 이들과 함께 가야산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가야산은 이 고을과 접해있는데 마치 신선이 사는 곳과 같은 절경을 자랑한다네. 나는 한번 유람한 적이 있지만 자네들은 그렇지 않으니 아쉽지 않은가? 이맘때라면 단풍과 국화꽃이 한창일 것이고, 구름이나 안개도 끼지 않는 시절이니 우리 함께 가야산을 두루 돌아보고 정상에 올라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고 “그리고 보니 마침 정인홍(鄭仁弘)도 지금 막 영천(永川)에서 군수직을 하다가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 있다고 하니, 마침 함께 할 좋은 때 일세”라고 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그렇게 하세”라며 동조해주었다 그 때부터 가야산 여행을 위한 여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9월 10일의 일이었다. 정구는 쌀 한 주머니, 술 한 병, 반찬 한 상자, 과일 한 바구니를 여행 중에 먹을 것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책을 준비했는데 「근사록(近思錄)」과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만을 넣었다. 정말이지 단출한 짐이었기에 중국 송나라 때 심괄(沈括)이 산을 유람할 때 갖춘 짐보다 간단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다음날 이인개가 먼저 출발하였는데 내일(12일)에 송사이(宋師頤)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김면(金沔)으로부터도 15일쯤에 성사(城寺)라는 절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정구 일행은 이날 출발하게 되었으므로 조금 더 빨리 만나자고 답신을 보냈다. 정구는 이인제, 곽준과 길을 늦게 떠났다. 여우 고개(狐嶺)를 넘을 때가 되자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당시 해가 진 산길을 걷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마침 같은 길을 가는 무인(武人)이 있어 같이 가기로 했다. 분명 힘이 되는 일이었다. 마침 선영(先塋 : 조상의 무덤)을 지나게 되었다.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묘소 쪽으로 절을 올렸다. 한강(寒岡) 지역에 도착하자 어시헌(於是軒)이라는 건물에 올라 옷고름을 느슨하게 하게 잠시 쉬었다. 경치를 내려다보니 밤하늘에 달빛은 맑았고 그 빛에 소나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달빛에 희게 빛나는 바위는 더 희게 보였고 소리로만 들리는 개울물은 차가운 기운을 전해왔다. 여행의 첫날이었지만 잠시나마 자연을 느끼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더니 가슴 속이 편해지고 세상의 복잡한 일이 사라진 듯 했다. 그러나 아직 오늘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촛불을 잡고 그날의 숙소에 돌아와 숙소에 소장되어있던 「주자연보(朱子年譜)」 중에서 「운곡기(雲谷記)」 부분을 한 번 읽은 뒤에 짐 속에 넣었다. 이 날은 매우 피곤하였기에 깨지 않고 곤히 잘 잤다.

“가야산에서 옛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다”

송민고 《나귀를 탄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만운, 가야동유기, 1786-08-22 ~

1786년 중추(仲秋:음력 8월) 이만운(李萬運)과 친척, 동료들이 성주의 가야산 아래에 모였다. 곳곳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모인 것이었다. 이만운으로서는 1772년 가야산을 유람한 이래 15년 만의 여행이었다. 그래서 감회가 깊었다.

8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말을 타고 회연(檜淵)에 도착했다. 다음날에는 이성민(李聖民), 정휘조(鄭輝祖)와 함께 길을 나서서 환선도(喚仙島)에서 밥을 먹고서 날이 저물어 쌍계(雙溪)에서 묶었다. 밥을 먹은 뒤에 정구(鄭逑)가 머물던 수도산(修道山) 무흘정사(武屹精舍)에 도착했다. 여기는 정구가 모은 책들이 소장된 무흘서재(武屹書齋)가 있었다. 정구의 지팡이와 신발, 책을 공경한 마음으로 살펴보고 무흘정사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해인사에 들러 하루를 머문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만운은 15년 전의 여행 경험을 떠올렸다. 풍경은 많이 바뀐 것이 사실이었다. 그의 인상에 남았던 멋진 폭포의 전경은 물살에 깎여 이전의 모습을 잃었다. 이만운은 이를 아쉬워했다. 다만 무흘정사는 몇 년 사이에 위치를 옮겼는데 도리어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이전의 자태를 잃지 않은 듯 했다. 월연(月淵)이라는 연못의 경치는 일찍이 보지 못한 경치였으며 해인사의 단풍의 붉은 비단 같은 모습에 감탄했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좋은 벗들과 함께 한 것이었다.

이만운은 이 즐거운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한 사람들의 성과 자와 이름을 종이에 써서 한 사람씩 나누어가졌다. 기념사진을 남길 수 없었던 시절, 집으로 돌아가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질 때 이 종이를 펴보고 위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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