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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이저우 이야기 (2) ]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마을안 골목길

임세권

추억의 발원지, 골목길

누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은 골목에서 시작된다. 골목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수다 떠는 동네 사랑방이고 아이들이 흙먼지 피우며 뛰어 다니던 마을 놀이터다. 사람들의 소통은 언제나 골목에서 이루어지고 모든 정보들이 공유되던 곳도 골목이었다. 골목은 집과 집을 연결하는 끈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고속도로나 국도를 사람의 동맥이나 정맥에 비유할 수 있다면 골목은 우리 사회의 실핏줄이라 할 수 있겠다.

골목에서는 더불어 사는 이웃사람들끼리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나누며 음식이 오고 간다. 그냥 어느 두 지점을 연결해주는 단순한 도로의 기능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세한 감정들이 섞여 흐르는 곳이다. 그래서 골목에 들어서면 다른 넓은 길과 달리 뭔가 따뜻한 기운이 우리 몸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살고 있는 마을이나 도시 또는 나라가 달라도 모두 같다. 어느 나라나 오래된 도시의 뒷골목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시골 마을의 골목을 들어서면 한 결 같이 느끼는 포근함이 있는 것은 그런 때문일 것이다.

마을은 지에와 시앙이 교차하는 바둑판

후이저우 지역의 마을 안 골목에서 느낀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 이곳의 골목에 들어섰을 때는 좀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후이저우의 골목에서는 한국의 마을 안길과 같은 곡선과 곡선이 서로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하모니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골목은 곧게 뻗은 직선들이 교차하면서 마치 바둑판 같이 짜여진 현대 계획도시의 도로망 같았다. 그러면서도 길 폭은 너무 좁아 어떤 길은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불편할 정도이고 창문도 없는 양쪽의 담벽은 너무 높아 마치 감옥 사이를 빠져나가는 듯 했다. 이들은 왜 이런 불편한 길을 마을 안에 내고 사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골목이 그렇게 좁은 것은 아니다. 마을의 골목은 크게 지에(街)와 시앙(巷) 두 가지로 나뉜다. 지에는 마을을 관통하는 중심축을 이루는 도로다. 큰 마을은 서너 개 이상의 지에가 있고 작은 마을은 한 두 개의 지에가 있다. 지에는 마차가 다닐 정도의 넓이를 가졌는데 양쪽으로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서 상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지에와 지에를 연결하는 좁은 골목이 있는데 이 골목이 시앙이다. 시앙은 엄청 좁다. 어떤 시앙은 폭이 1미터도 안 된다. 시앙은 왜 이렇게 좁은가? 아마 이 길은 물품의 이동보다는 사람의 이동 통로로서의 역할만 하는 듯하다. 그러니 사람 하나만 지나갈 수 있으면 된다.

아마 청나라 말기까지의 농촌 마을에서는 집안으로 골목의 폭보다 더 넓은 물건이 반입될 일이 거의 없었을지도 모른다. 너비가 넓고 비교적 크기가 큰 가구류들은 자재만 옮겨 집안에서 짰을 것으로 생각된다. 길의 폭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관습과 문화 속에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마을의 골목은 지에와 시앙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져 바둑판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골목의 구성 체계는 마을들이 대체로 계획적으로 조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툰시구 롱푸 마을의 골목, 개 한 마리가 서 있으면 사람이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길이지만 곧고 길게 벋은 길 양쪽으로 높이 선 돌벽은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모든 길의 바닥에는 청석판 등의 판석을 깔았다. 툰시 라오지에처럼 넓은 길에는 넓적하고 큰 판석이 깔려 있지만 좁은 시앙에는 좁은 판석을 깔았다. 경우에 따라 길 중심부에는 판석을 깔고 양쪽으로 자갈을 깐 곳도 있다. 쟝완의 지에와 지에가 만나는 넓은 곳에는 자갈을 이용하여 물고기 그림을 만들어 꾸미기도 했다. 물고기는 자손의 번성이나 재산의 증식을 의미한다. 이처럼 길에 판석을 깔아 길가는 사람이 흙을 밟지 않도록 한 것은 중국 전역에서 볼 수 있다. 길 양쪽에 수로 또는 배수로가 있으니 비가와도 길에 물이 고이지 않고 질척거리지도 않아 신발이나 바짓가랑이에 흙이 묻을 걱정도 없다.


판석과 자갈을 길 전체에 깐 황산시 이현 루춘마을의 골목길.


골목길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는 모든 골목길 한쪽으로 수로가 있다는 것이다. 길이 아무리 좁아도 대부분의 길옆에는 수로가 있고 이 수로는 모든 집들의 대문 앞을 지나간다. 따라서 사람들은 대문 앞에 나오면 채소를 씻을 수 있고 생선을 다듬을 수 있으며 식사 후 설거지도 할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명한 황산시 이현의 홍춘 마을에는 마을 한 복판에 작은 호수가 있고 이 호수로 흘러온 뒷산의 맑은 물이 다시 마을의 모든 골목으로 흘러나가게 하여 모든 골목길로 용수를 공급하도록 되어 있다. 사용된 물은 마을 앞의 넓은 호수로 다시 흘러 들어간다. 이러한 마을의 용수 공급 시스템은 정밀한 설계에 의해 건설된 마을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황산시 이현 홍춘 마을의 골목길 수로에서 설거지를 하는 여성


마을 안에는 작은 광장들이 있다. 이 광장들은 대개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곳이나 사당 등의 공공건물 앞에 있는데 여기서는 마을 사람들의 크고 작은 모임이나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 휴식공간이기도 하다. 광장은 마치 우물처럼 마을의 작은 공동체들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베네치아 같은 유럽의 중세도시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광장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곳에는 광장이 있다. 몇 개 가구의 공공 공간으로 활용, 집회, 공연, 공동 작업 등이 이루어지는 공간. 황산시 이현 시디 마을


골목에서 보는 소통과 배려

골목에서 만난 또 하나의 특이한 모습은 골목 입구에 서 있는 대문이다. 후이저우 뿐 아니라 중국의 골목은 큰 길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대문 형태의 문이 서있는 경우가 많다. 이 문은 공문(拱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궁륭형 문이라는 뜻이다. 윗부분이 궁륭형 즉 아치형으로 되어 있으며 실제 열고 닫는 문이 달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틀과 지붕까지 갖추고 있다. 아예 정자형 건물을 지어 내부에 휴식용 긴 의자까지 설치한 경우도 있다. 골목의 입구는 다른 골목의 출구이니 공문이 설치된 지점은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관절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골목 입구의 정자는 이쪽 마을 사람들과 저쪽 마을 사람이 만나 서로간의 소식도 듣고 다리도 잠시 쉬는 휴식처 역할을 한다. 골목이 공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소통의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정자 모양을 갖춘 골목 입구. 쟝시성 우위엔현 쟝완 마을



입구에 아치형 문을 설치한 골목길 – 황산시 셔현 위량바 마을



툰시구 라오지에와 연결된 환춘샹의 좁은 골목 끝에 유명한 청대의 상가 거리 라오지에가 보인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러한 누각 형태의 건물이 골목과 골목이 교차하는 곳에 설치된 경우도 볼 수 있다. 안후이성 황산시에 있는 청칸(呈坎) 마을의 종영루(鍾英樓)는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鍾英’ 두 글자는 명나라의 명필 동치창(董其昌)의 글씨로 전하며 자연의 영험한 기운으로 훌륭한 인재를 길러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각은 경루(更樓)라고도 하며 일층은 도로가 지나간다. 이층에는 북을 매달아 시각을 알리기도 하며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농기구라든가 도로 정비에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기도 한다.


황산시 청칸 마을의 종영루, 세 갈래 길이 만나는 곳에 있다.


골목의 모서리에는 후지에(胡界) 우지에(吳界)등 성씨의 경계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글자가 새겨진 곳이 있다. 중국인 연구자에게 물어 보았으나 자신 있는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아마도 같은 성씨들의 집단 거주지역의 경계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골목 모서리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모서리를 각을 죽여 깎았거나 아니면 둥글게 처리한 것이다. 모든 길 모서리가 이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우위엔의 리컹이나 쟝완, 황산시 툰시구의 롱푸 마을 등에서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길 가던 사람이 모서리에 부딪치거나 지니고 있는 짐이 부딪쳐 파손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또 타고 가던 가마가 모퉁이를 부딪치지 않고 돌아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골목은 그 구조에서 보이는 특징만으로도 사람과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배려하는가를 보여준다.

골목의 형태에서 골목안 사람들끼리 어떻게 배려하고 사는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있다. 우위엔현 리컹 마을에는 좁은 골목의 중간 부분만 양쪽의 집을 약간씩 들여 지어서 길을 넓게 한 곳이 있다. 이곳에는 길 한쪽에 돈 많은 부자 상인이 살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아주 가난한 농민이 살고 있었는데 돈 많은 집 아들이 가난한 집의 처마가 자기 집 바로 앞을 막은 것을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을 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고 나서 그 나라가 얼마나 오래갔는가? 라는 의미의 시를 써주자 아들이 깊이 뉘우치고 오히려 자기 집의 벽을 안으로 들여쌓았다. 그를 본 가난한 집에서도 부자의 너그러운 마음씨에 감동하여 자신의 집도 함께 뒤로 물려 쌓아 골목이 지금처럼 넓어졌다는 것이다.


황산시 툰시구 롱푸 마을의 후지에(胡界)라고 새겨진 골목의 모서리



황산시 툰시구 롱푸 마을의 둥글게 각을 죽인 길 모서리



리컹의 좁은 골목에서 마주 본 두 집이 서로 집 외벽을 안으로 들여서 골목을 넓게 했다.


마을안 공동체의 표징, 우물

골목을 골목답게 보이게 하는 것으로 우물이 있다. 우물은 물이 나는 곳을 찾아 만들기 때문에 마을의 구조를 생각해서 인위적으로 배치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 골목에 위치하는데 어떤 경우 골목의 중간에 위치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기도 한다. 또 골목 한쪽에 비켜 있는 경우는 따로 담을 치고 문을 달아 우물의 공간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 경우 대체로 관음보살상 등을 우물 벽에 모시는 경우가 많다.

우물은 커다란 바윗돌을 원기둥 모양으로 가공한 후 속을 파내서 우물 위에 올려 우물 틀을 만들었다. 하나의 돌로 된 우물 틀은 수백 년을 거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두레박줄에 쓸려 굵은 홈이 파여져 있으며 돌의 표면은 닳고 닳아 맨질맨질하고 윤기가 난다. 어떤 우물 틀은 하나의 돌로 되었을 뿐 아니라 우물 위가 뚜껑처럼 막혀 있는데 막힌 윗면에 세 개의 구멍을 뚫어 물을 긷도록 하였다. 이 세 개의 구멍은 과거 시험의 세 단계를 모두 합격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휘주 사람들의 최고의 목표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임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우물을 보면 이 우물들이 얼마나 멀리 내다보고 만들어진 것인지, 이 우물들을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먼 후손들의 시대까지 예견하였던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

세계 어디에서나 우물은 주변의 가옥들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는 중심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물은 마을이 몇 개의 작은 공동체로 나누어져 있는가를 알려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이 우물들이 골목길에 위치한다는 것은 그래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황산시 흡현고성 하마징(蛤蟆井) 우물



강희년간1662-1722에 만든 황산시 잔치 마을의 우물. 길 한 복판에 있다.



황산시 탕모 마을의 옛 우물


길바닥에 박아 넣은 역사 기록들

과거 신안강 유역의 가장 큰 현은 셔현이었다. 셔현은 후이저우부의 여섯 현 가운데 부의 치소였던 곳이다. 후이저우를 과거에는 셔저우歙州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치소가 셔현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셔현에는 옛 후이저우의 치소였던 지역이 성곽으로 둘러싸여 후이청진徽城鎭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보존되어 있다. 후이청진은 후이저우부의 치소라는 뜻이다. 셔현은 지금도 신안강 연안의 대표적인 도시이며 옛 후이저우의 행정 중심지인 만큼 고성곽과 성 안의 옛 도시가 옛 그대로 남아 있어 휘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가보아야 할 명소다. 셔현 고성에서 강을 따라 2.5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면 위량바漁梁坝라는 고대의 물막이 보가 있다. 수나라 때 처음 축조했고 명대에 중건했다는 이 석조 제방은 신안강의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는 풍부한 수자원을 항상 확보하여 주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시설물이다. 후이저우의 중심지 후이청진에 신안강의 가장 오랜 치수 유적이 있는 것은 후이저우와 신안강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보인다.

골목을 걷다가 땅을 내려다보면 그 마을의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금석문들이 길 바닥에 깔려 있음을 드물지 않게 본다. 대부분 비석의 깨진 조각들인데 이따금씩 온전한 비석들도 볼 수 있다. 대부분 묘비들이 많지만 마을의 사회사적 정보를 알려주는 주요 사료들도 있다. 비석들은 대부분 청나라 때 것인데 정월 대보름 등불 행사와 관련한 마을 규약이나 결혼한 날 밤에 길에서 치루는 행사와 관련된 마을 규약 등 마을과 관련된 사회적 민속적 의미가 담긴 비석들도 보인다. 뿐 아니라 골목의 양쪽에 높이 치솟은 건물의 외벽은 수많은 글자들이 몇 겹씩 겹쳐 쓰여져 있다. 붉은 색 페인트로 크고 작게 쓰여진 이 글자들은 현대 중국이 출발한 1949년 직후 벌어진 대약진운동에서부터 1960년대 중엽에서 70년대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국 천지를 흔들었던 문화대혁명 그리고 80년대 후반 실시된 개혁개방 이후의 다양한 구호와 마을의 규약 같은 것들이다.

이 글자들은 그대로 중국 현대사를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 날것 그대로의 사료들이다. 이 벽 위의 문서라 할 수 있는 글자들은 마을이 새롭게 정비되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마을을 깨끗하게 정비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나 살아 있는 사료들을 잃어버린다는 점에서 안타깝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자료 외에 ‘태산석감당(太山石敢當)’ 같은 풍수와 관련된 민속자료 석비들도 볼 수 있다.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지점이나 골목이 휘돌아가는 지점의 벽에 끼워 넣은 작은 석비로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다.


결혼식 날 밤 도로에서 벌이는 행사와 관련된 규약을 새긴 1799년의 석비. 우위엔현 리컹 마을 골목 바닥의 석비



골목 바닥에 깔린 정월대보름날 관등행사와 관련된 1847년의 석비. 우위엔현 리컹 마을



골목이 만나는 삼거리에 가경15년 1810년 새겨진 태산석감당 석비가 담벽에 끼워져 있다. 우위엔현 칭화진 홍춘 마을



위 사진의 태산석감당



‘무산계급의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완수하자’라는 붉은 글씨 밑으로 마을 주민들이 지켜야할 규약으로 보이는 검은 색의 작은 글자들이 깨알처럼 쓰여져 있다. 황산시 셔현 셔현고성 떠우산지에(斗山街)


하늘 위에도 골목길이

또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에도 골목이 있다. 바닥에 청석판 대신 파란 하늘이 깔린 또 하나의 골목을 땅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다. 땅에서 하늘을 내려다보다니 특이한 체험이다. 골목에 널어놓은 빨래도 그대로 하늘골목에 걸려 있다. 하늘의 골목에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집과 집을 이어주는 다리도 보인다.


하늘에는 땅에서와 똑같은 길이와 너비의 골목이 있다. 황산시 이현 루춘 마을



하늘에 널린 빨래들 – 황산시 툰시구 라오지에



쟝시성 우위엔현 칭화진 홍춘 마을의 공중다리


이 다리는 벽과 지붕을 덮어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봉건시대의 여자들은 집 밖을 함부로 나다닐 수 없기 때문에 남의 눈데 뜨이지 않고 이웃에 다니는 것을 위해 이처럼 공중다리를 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로는 구태여 여자들의 문제를 이유로 들지 않더라도 폭이 불과 2~3미터 밖에 안 되는 좁은 골목을 이용한 매우 효과적인 이웃 간 통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골목을 그대로 하늘로 올린 것이다.

그런데 골목길을 다니면서 나는 또 다른 체험을 했다. 끼니 때 조금만 골목길을 걸으면 작은 밥그릇을 한 손에 받쳐 들고 밥을 먹는 사람들을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집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밥 때가 되면 한꺼번에 대문 밖으로 나와 골목길에서 밥을 먹는 것이다. 길에서 밥을 먹는 것은 걸인이나 하는 짓으로 알았던 나에게 이것은 참 기이한 풍경이었다. 밖에서 먹는다고 꼭 여럿이 어울려 먹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자기 집 대문 앞에서 먹고 어떤 이는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먹고 또 어떤 이는 동네 어귀 다리 위에 앉아서 먹기도 했다. 나중에 이들의 집 구조를 이해하면서 식사 관습도 이해하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런 풍습이 모두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또 너무 알려고 하지도 말자. 다른 나라 다른 풍습을 이방인이 이해하기에는 알 수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그래서 지금도 그냥 그 사람들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도 말해두고자 한다. 다만 골목의 형태가 경직되게 보이는데 비해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에서 골목을 사람 사는 곳으로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골목길에서 이웃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모습. 황산시 이현 시디마을



밥을 먹는데 꼭 누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하루 중 거쳐 가는 생활일 뿐이다. 황산시 이현 시디 마을




작가소개

임세권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관장)
임세권
1948년 생.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안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과 동북아시아 선사암각화와 고대 금석문 연구자로 다양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1992년 2월부터 1년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암각화 유적 조사, 이후 2012년까지 러시아 몽골 중국 등 동북아시아 암각화 현장 조사, 1999년 8월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남서부 암각화 유적 조사. 2007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후이저우 지역 전통마을 조사 및 촬영 작업을 진행중이다. 2013년 9월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개관하고,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
<중국 변방을 가다>(신서원), <한국의 암각화>(대원사),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 광개토왕비>(한국국학진흥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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