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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사욕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다,
극복재(克復齋)

활기차게 시작했던 2020년이 지나가고, 2021년 하얀 소의 해 신축년 새해가 왔습니다.

2020년은 코로나19로 인해 어떠한 해보다 모두에게 힘든 한 해였습니다. 아무리 길어야 한두달이면 끝날 것이라 막연한 생각만 했는데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갑니다. 우리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지금은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소비자들은 소비 심리가 위축되어 결국 자영업자들이 큰 타격을 받았으며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져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에 걸린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도 위기에 강한 나라입니다. IMF 경제위기에도 2년 남짓한 사이에 위기를 벗어났으며, 6.25 전쟁의 폐허에서 2020년 10월말 기준 GDP규모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도 새마을 운동, 금모우기 운동 등이 위기 극복에 중요한 핵심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밑바탕에는 과거로부터 교육받았던 공동체 질서와 기강을 유지하려 했던 예(禮)의 정신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코로나의 종식에 필요한 공동체 질서와 기강에 밑바탕이 되는 ‘예(禮)’의 정신을 되짚어보고자, ‘자기 사욕을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극복재(克復齋)’ 편액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관직을 뒤로 한 채, 후학을 양성하다


영양남씨 봉주공파(鳳洲公派) 봉주정사(출처: 한국국학진흥원_한국의 편액)


‘극복재’는 봉주(鳳洲) 남국주(南國柱, 1690~1759)가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1724년(경종 4)에 건립한 봉주정사(鳳洲精舍) 서재의 편액으로,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봉주정사의 원래 위치는 지금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는데, 최근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합니다.

남국주의 자는 하중(廈中)이고, 호는 봉주(鳳洲)입니다. 조부는 남상소(南尙召)이고, 부친 남필명(南弼明)과 모친 전적(典籍) 정요천(鄭堯天)의 딸 동래정씨 사이에서 6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약관(弱冠)인 20세부터 거침없이 시를 지었는데, 단양에서 채헌징(蔡獻徵, 1648~1726)과 이별하면서 준 시와 제주판관으로 가는 당숙부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 1661~1719)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는 22세 전후에 지은 것입니다.

그의 능력을 알아본 고을의 수령이 만나보기를 간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한 일이 있었는데, 그 해에 지방시험에서 1등을 하였으나 수령이 고시관(考試官)으로 참여하여 명부(名簿)를 열어보고 지난번의 유감 때문에 그의 이름을 명부에서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면서 “이것도 운명이다. 과거라는 것은 녹봉을 받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다.”하고 과거 시험장을 나와 세상과 인연을 끊어버렸습니다.

이로 보아, 봉주 남국주는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비라면 누구나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능력과 자질이 부족하여 과거시험에 떨어지기보다 고을의 수령과 만남을 거절한 이유로 낙방했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을의 수령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 봉주서원을 건립해 연구 가치가 있는 책을 저술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써 다른 방법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했습니다.


공동체 질서와 기강 유지에 애쓰다


영양남씨 봉주공파 봉주정사(출처: 한국국학진흥원_한국의 편액)


봉주 남국주는 평소 산수를 좋아하여 꽃 피는 아침이나 달 뜨는 저녁이면 집 근처에 있는 대황산 아래의 물가를 지팡이 짚고 다니며 마음을 수양하였습니다. 만년에 천륜, 인륜과 내면의 수양을 통한 실천을 당부하는 『곤범(梱範)』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자손들에게 남겼는데, 모두 상·중·하 3편으로 나누어져 있고 23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상편(上篇)은 부모·자녀간이나 형제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 효도할 것, 임금에게 충성할 것, 가정에서 모범을 보일 것, 자식을 가르칠 것,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낼 것, 종족 간에 화목할 것, 친구 간에 신의가 있을 것 등 7개는 천륜과 인륜에 있어서 없앨 수 없는 것을 상편에 두었습니다.

중편(中篇)은 내면 수양과 실천할 규범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받들 것, 손님을 접대할 것, 혼인을 신중히 할 것, 학문에 오로지 힘쓸 것, 이단(異端)을 배척할 것, 농사를 권장할 것, 근검절약을 숭상할 것 등 7개는 사람들이 항상 행해야 하는 것을 중편에 두었습니다.

하편(下篇)은 사람들과 관계에서 필요한 내면 수양과 실천할 규범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바르게 할 것, 말과 행동을 조심할 것, 독실히 공경할 것, 겸손하고 양보할 것, 규율과 법도를 실천할 것, 남에게 알려지지 아니하게 널리 베풀 것, 집안에 내려오는 관례를 준수할 것, 향약(鄕約)을 지킬 것 등 9개 조항은 몸가짐과 행실에 관계되는 규범을 하편에 두었습니다,

봉주 남국주가 저술한 『곤범』은 천륜과 인륜의 도리를 마땅히 지키고 내면과 외면의 수양하고 실천할 규범을 당부하고 있는 서적입니다. 봉주 남국주는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을 뿐 아니라 자손들에게 예의 중요성을 『곤범』을 통해 말해주었습니다. 개인의 이익을 꾀하는 욕심을 부리기보다 가정을 비롯해 국가라는 공동체의 질서와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고민했고 이러한 답을 ‘예(禮)’를 통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사욕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다


극복재(克復齋) / 44.5×90.0 / 해서(楷書) / 영양남씨 봉주공파(鳳洲公派)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한국의 편액)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기어이 예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갈필(渴筆)의 억센 필획에서 묻어나온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을 터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극복재(克復齋)는 봉주정사(鳳洲精舍) 서재에 걸린 편액입니다. ‘극복’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줄인 말이며, 『논어』 「안연(顔淵)」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안연이 인(仁)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의 사욕(私欲)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仁)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안연이 “좀 더 자세하게 가르쳐주십시오.”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마는 것이다.” 하니, 안연이 말하기를 “제가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이 말씀대로 실천해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극복’은 ‘극기복례’의 줄인 말이라 명시하고 있습니다. ‘극기’는 사욕을 이기는 것이고, ‘복례’는 예(禮)로 돌아가다를 의미하며, ‘극복’의 뜻은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다’입니다. 또한 공자는 안연에게 예(禮)를 통해 인(仁)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하며 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는 도덕적인 행위, 사회적인 관례, 조상에게 제사하는 제례 등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는 공동체 생활에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조절해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더불어 사는 사회입니다. 버스를 탔을 때 거동이 불편한 임산부가 오면 자리를 양보해 주고, 어른이 지나가면 먼저 인사를 해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을 예를 지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어느 때도 겪지 못했던 힘든 한해가 지나고, 2021년 신축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1년의 희망적인 소식은 백신이 접종되어 코로나19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지만, 고통 받았던 한해를 잊어버리고 새해를 시작하기 위해 우리들은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시행되었던 사회적 거리는 우리들을 공동체 단절로 변모시켰으나 2021년은 작년보다 더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한해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어쩌면 2021년 질서 있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마음에 되새기는 것도 생활의 지혜입니다.

봉주 남국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봉주정사는 예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그가 남긴 저술서 가운데 『곤범(梱範)』은 자손들에게 천륜과 인륜의 도리를 마땅히 지키고 내면과 외면을 수양하고 실천을 당부하는 서적으로 오늘날 학습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봉주정사 서재에 걸린 ‘극복재’ 편액은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으로 개인의 이익만을 꾀하는 욕심을 버리고 예를 실천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禮)는 코로나19가 억누른 욕구를 올바르게 해소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덕목이기도 합니다. 봉주정사 서재에 걸린 ‘극복재’는 우리에게 필요한 ‘공동체 정신’과 배려를 다시금 일깨워 주게 해 줍니다.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정      리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기둥과 들보를 올린 늦은 봄 밤, 조용히 상량제를 지내다”

1805년 4월 24일에 예정된 대로 기둥과 들보를 올렸다. 기둥은 사시(巳時, 9~11시)에 세웠는데 손방(巽方, 동남쪽)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기둥을 세우기 시작한 지 12시간이 지난 해시(亥時, 21~23시)가 되서야 들보를 올렸다. 이어서 상량제를 지냈지만, 밤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인근의 사림이 와서 볼 수 없었다. 비로소 대장장이[冶匠] 2명에게 사당 건립에 필요한 철물을 만들게 하였다. 전후로 10여 일이 되어 철물 만드는 일을 마쳤다.

“역질이 돌아 능동 재사에서 제사를 합설하여 지내다”

1603년 2월 23일, 향시를 보러 현풍에 다녀온 김광계는 도착한 다음날 아침을 먹자마자 재종숙인 김기(金圻)를 뵙기 위해 찾아 갔다. 그런데 동네의 여러 친족들이 모두 애당(崖堂)에 모여 있었다. 김광계는 재종숙을 모시고 동네 친족들과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향시를 보러 갔다 온 이야기와 갑자기 퍼진 역질을 걱정 하다 보니 밤이 다 되어갔다. 내성(奈城) 재종숙 김령(金坽)과 숙항인 금발도 밤에 함께 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 밤이 늦어서야 흩어졌다.
다음날 김광계는 증조모 및 조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능동재사(陵洞齋舍)로 갔다. 원래 선대의 묘는 거인(居仁) 마을에 모셔져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서 지내야 했지만, 얼마 전부터 기세를 부리기 시작한 역질 때문에 거인 마을로 갈 수가 없었다. 김광계는 어쩔 수 없이 능동 재사로 가서 재사의 마루에서 증조모와 조부의 제사를 합설하여 지내고 다음날 내려와서 다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고나서 김광계는 서둘러 서원으로 향했다. 춘기제사를 준비하는 입재(入齋)를 하기 위해서였다. 입재 의식은 제사 3일 전에 시작하는데, 올해 제사는 2월 29일이라서 26일에는 서원에 들어가야 했다.
3일 동안 서원 경내에 머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여러 절차에 따라 예를 올리고, 29일엔 본 의식을 올리고 제사를 마쳤다. 제사를 마친 후 참여했던 사람들은 음복상을 받았다. 3일간의 제사 예식이 모두 끝나자 모든 유생들은 상하유사에게 절을 하고 서원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김광계는 음복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역질이 돌아 설날 제사 대신 참배만 올리다”

향1610년 1월 1일, 경술년 새해가 시작됐지만, 김광계의 집안은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집안에 역질이 돌아 설날 제사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김광계는 아우들인 광실, 광보, 광악과 함께 대문 안에서 사당을 바라보며 참배만 하였을 뿐이다.
참배를 마친 사형제는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처음 찾아간 김호 재종숙 댁에서 김광계와 형제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좌수 재종숙 댁의 노비들이 안에 알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참 동안 문 밖에서 서 있다가 겨우 사당문 밖에서 참배만 하고 돌아 나왔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김령 재종숙 댁이었는데, 내성 댁에는 광재, 광업 형제와 광하 형 등 동네 친족 몇 사람이 와 있었다. 곧이어 김지 재종숙도 찾아와서 함께 설술 몇 잔을 나누고 일어나 나왔다.
김광계는 동생들과 광찬 형의 아들인 김확을 만나러 갔다가 아침에 인사를 못 드린 좌수 댁에 다시 찾아갔는데, 그제야 마침내 들어가 세배를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김광계는 아우들과 함께 노산 재종조부 집을 들렀는데, 동네 친족들이 모두 함께 오고 오직 두세 사람만 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성 재종숙이 김광계의 집으로 가자고 하여 김광계 형제들과 김령 재종숙은 함께 나와 집으로 가던 길에 참봉 댁에 들렀더니 충주 사람 김극방(金克邦)이 김령 재종숙을 만나보려고 와 있었다. 그래서 다 함께 김광계의 집으로 가고, 동네 친족들도 모였지만, 역시 참배만 마치고 모두 모여 앉아 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공은 너무 취해 내성 재종숙과 함께 김광계의 집에서 자게 되었다.

“조선시대 망년 의례”

‘망년(忘年)'이라는 말은 “나이(歲)를 잊는다” 또는 “나이 차이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고려사』 권102 「열전」15 ‘이인로’조에는 ‘망년우(忘年友)’와 ‘망년교(忘年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인로·이규보·오세재·임춘 등 무신쿠테타 때 살아남은 젊은 문인들은 ‘망년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망년회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죽림칠현을 본받았다고 하여 ‘죽림고회(竹林高會)’라고 불리기도 했고, 강남 쪽에 산다고 하여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도 하였다. 망년회 회원들은 이의민·최충헌 등 무신들이 권세를 누릴 때, 술과 시로 세월을 한탄했다.
또한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은 자신의 문집인 『사가집(四佳集)』에 망년회에 관한 두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권14 제12의 「한강루 망년회 석상(漢江樓忘年會席上)」이라는 제목의 시와 권22 제15의 「여섯번째 답장 2수(六和 二首)」라는 제목의 시에서 ‘제천정 위의 망년회(濟川亭上忘年會)’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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