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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독립운동가의 숙명(宿命), 그리고 풍뢰헌

가벼운 장난이나 그럴듯한 거짓말로 남을 속이기도 하고 헛걸음을 시키기도 하는 4월 1일, 만우절. 이 날은 악의 없는 거짓말로 서로 장난을 치면서 노는 날입니다. 하지만 만우절은 오늘날 ‘가짜 뉴스‘로 변질되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현재는 과거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고 선택해서 봐야할 정도로 뉴스들이 넘쳐납니다. ‘가짜 뉴스’는 너무나도 많은 기사들이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통해 뭔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생산됩니다. 또한 이러한 가짜뉴스는 남이 던진 정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확산하는 방법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시대에도 가짜 뉴스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조선시대 학자이자 경상도 초유사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13대손인 여현(汝見) 김용환(金龍煥, 1887~1946)입니다. 김용환은 독립자금을 만주에 지원하려고 도박꾼 행세를 하며 사람들에게 가짜 정보를 퍼뜨리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비밀로 간직했던 독립운동가입니다.

이번 호의 편액이야기는 가짜 정보를 퍼뜨려 독립운동을 실천하신 김용환, 그를 길러낸 학봉종가의 가풍과 풍뢰헌(風雷軒)입니다.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본향, 학봉종가



학봉종택 전경(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유교넷)


‘풍뢰헌’은 여현 김용환이 거주했던 학봉종택 좌측 별당의 편액으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서후면 금계리는 ‘천 년이 지나도록 패하지 않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을은 지세가 거문고처럼 생겼다 하여 ‘금지’라 불렀으며, 학봉 김성일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금계(金溪)라 적었습니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위치에 지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잦자, 1726년에 현 위치에서 100m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이 있던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의 자리에 소계서당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1964년에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옮겼습니다.

청계공(靑溪公) 김진(金璡)의 넷째 아들인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자가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며,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입니다. 19세에 퇴계 문하에 들어가, 한강 정구, 서애 류성룡, 월천 조목과 함께 영남학파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이후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고, 1568년(선조 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형조참의, 경상우도병사, 경상좌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경상우도 초유사에 임명되어 경상도 의병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국가에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성리학의 본류인 퇴계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선무원종공신에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대제학에 추증되었습니다. 현재 김성일은 임천서원(臨川書院) 등에 모셔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김성일은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실천한 선인(善人)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국가와 지역사회의 발전에 고민하고 참된 심정을 행동으로 옮긴 점을 볼 때, 후손들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모습에서 그러한 정신을 잘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 숙명(宿命)을 이어가다



학봉종가 독립운동가계도(출처: 월간중앙-중앙시사매거진_201606호)


김용환은 의성 김씨 학봉종가의 종손으로,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며 독립운동가로 의병활동을 일으킨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의 손자입니다. 명문대가의 후손으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도 있었지만,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며 일가친척들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파락호(破落戶)’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보내는 위장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김용환은 가문과 가족의 원망과 미움을 받으며 말년에 쓸쓸히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헌신은 3년상이 끝나는 1948년, 하중환의 제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이러한 의병활동은 그의 할아버지 김흥락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김흥락은 유림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유림에 통문을 돌려 전국에서 처음으로 을미의병을 일으켰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으나 노령을 이유로 물러났습니다. 김용환의 독립운동은 이러한 가풍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1896년 의병활동을 벌이던 의성 김씨 일족인 김회락(金繪洛, 1844~1896)이 패전하여 학봉종택에 은신하였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김회락을 체포하고, 김흥락과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익모 등을 포박해서 마당에 꿇어앉게 하고 집안의 물건을 가져가는 등 약탈행위를 하였습니다. 결국 김회락은 총살당했습니다. 김용환은 어릴 적에 이 모습을 목격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다고 합니다.


나는 파락호가 아닌 독립운동가이다



학봉종택 사랑채에 걸려 있는 건국훈장 애족장(출처: 월간중앙-중앙시사매거진_201606호)


김용환은 당시 사방 십 리 이내로는 학봉종택의 땅이 아닌 곳이 없었을 정도로 막대한 자금을 밑천삼아 안동일대의 노름판에 꼭 끼었다고 합니다,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베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베팅에 실패하면 “새벽 뭉둥이야” 하고 큰 소리로 외쳤는데,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 명이 뭉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자루에 쓸어 담고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의 행동에도 문중의 자손들은 돈을 모아서 집과 전답을 되사주곤 했습니다.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종가가 망하면 문중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롯해 외동딸에 대한 일화도 있습니다. 외동딸이 시집갈 때 시가(媤家)에서 장롱을 마련하라고 준 돈 역시 도박으로 탕진, 결국 외동딸은 친정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고 합니다. 가정에 대한 무관심이 도를 넘어 딸의 농값을 가로채는 아버지, 당시 하나 뿐인 딸이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은 무척이나 크고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정에 무관심하여 도박에 탐닉하던 것으로 보이던 그의 행동은 모두 가짜 정보를 퍼뜨리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도 재산은 비밀리에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지고 있었습니다. 도박판에서 돈을 날리는 모습은 사라진 재산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었던 것입니다.

김용환은 막대한 재산도 명문가 장손이라는 명예도 버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파락호라는 무시를 받으며, 심지어 외동딸에게마저 원망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입니다. 훗날 모든 것이 밝혀져 1995년에 김용환이 대한민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으며 그의 업적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그럭저럭 나이 차서 16세에 시집을 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가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시가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선한 것은 배우고, 잘못된 것은 고치자



학봉종택에 위치한 풍뢰헌(風雷軒)(출처:한국학자료센터_한국고문서소장처)


풍뢰헌(風雷軒) / 96.0×37.0 / 행서(行書) / 의성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峰宗宅)(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유교넷)


글자의 뜻과 같이 광풍이 몰아치듯 힘과 기운이 넘치는 행서체로 어떤 힘에도 흔들리지 않을 무게감이 느껴진다.


풍뢰헌(風雷軒)은 학봉종택 별당에 걸린 현판으로, 학봉 선생의 장손인 단곡(端谷) 김시추(金是樞, 1580~1640)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양성을 하기 위해 세운 장소입니다. ‘풍뢰’란 말은 『주역(周易)』 익괘(益卦)의 괘상(卦象)으로서 바람이 세차면 우레도 빠르고 우레가 거세면 바람도 억세다는 풍(風)과 뢰(雷)의 상보상성(相輔相成)에 따라 인세(人世)의 천선(遷善)과 개과(改過)에 있어서도 마땅히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성인의 뜻에서 취한 것입니다.

이는 항상 행동을 함에 있어 선한 것을 보면 바람이 몰아치듯 즉시 실행하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되 우레처럼 신속히 고쳐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정보의 과잉은 가짜 뉴스를 양산하여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언론, TV 등으로 유통된 가짜 뉴스는 또 다른 가짜 정보를 만들고 그에 따른 피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풍뢰헌은 가짜뉴스를 활용하여 독립운동을 실천한 김용환의 가풍을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풍뢰헌의 뜻처럼 김용환은 옳은 일이라 생각되면 주저없이 행동으로 실행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학봉종가의 막대한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도 있었으나, 도박꾼 행세를 하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도 묵묵히 감내하고 독립을 위해 죽을 때까지 힘썼습니다. 이밖에도 그와 혼맥으로 얽혀있던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룡이 대종택 임청각을 팔아 독립운동에 앞장 서 기여한 것도 풍뢰헌의 뜻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뭔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오늘날, 풍뢰헌(風雷軒)의 의미가 우리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정      리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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