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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의 사건일지

양로연 좀도둑 사건

관아에서 양로연이 열리게 되었다. 양로연이란 그 고을의 나이 많은 사람들을 관아로 초청해서 위로 잔치를 여는 것으로 세종대왕이 시작한 행사였다. 처음에는 궁궐에서만 열렸는데, 점차 지방 관청에서도 열게 되었다. 관직을 지낸 남자 노인은 70살 이상, 평민은 80살 이상이 양로연의 대상이었고, 여자도 80살 이상이면 대상이 되었다. 양로연은 9월에 열렸다.

며칠 전부터 준비에 바빴다. 식재료를 들여오고 기생과 악공이 모여서 공연 연습을 하고 선물로 나눠줄 구장(鳩杖)과 무명 수건도 일일이 검수해야 했다. 물론 이 일을 해낸 건 현감 오달현이 아니고 그의 열다섯 된 딸 산비였다.


〈낙남헌양로연도(落南軒養老宴圖)〉(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아버지, 이 지팡이를 구장이라고 부르는 건 이 지팡이 꼭대기에 있는 비둘기 조각 때문이죠? 그런데 왜 노인장들께 구장을 선물로 내리는 거예요?”

“그건… 흠… 궁중에서도 양로연을 열면 나눠주니까 우리도 나눠주는 거지.”

“예? 그건 아닐 거 같은데요?”

분명 아버지도 모르는 거라고 생각하고 산비가 혀를 쏙 내밀었다.

“사또 나리 말씀이 맞습니다.”

그때 예방 조맹현이 말을 꺼냈다. 이번 행사 책임자이기도 한 조맹현은 키가 6척(약 180센티미터)이나 되는 장신에 뼈와 살밖에 없는 것처럼 마른 사람이었다. 멀리서 보면 허수아비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가 조금 보충 설명을 해도 될까요?”

“들려주세요.”

“구장은 임금님께서 나라에 공이 많은 원로대신이 70세가 넘어 물러날 때 하사하는 물건입니다. 구장을 하사하는 풍습은 한나라 때부터 내려오는 것이죠. 쓰러지지 말고 잘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하사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또 나리 말씀이 맞고요. 그럼 왜 비둘기를 지팡이에 새기냐? 비둘기는 음식을 먹을 때 체하는 법이 없는 날짐승입니다. 앞으로도 음식을 잘 먹고 건강 하라는 뜻으로 비둘기를 새겨서 주는 것입니다.”

“굉장해요.”

산비가 박수를 쳤다. 조 예방은 별것 아니라는 듯 흠흠 헛기침을 했다.


구장(鳩杖)(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산비가 동헌 뜰을 가리키며 조 예방에게 물었다. 동헌의 관속들이 멍석과 방석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리가 왼쪽, 오른쪽 나뉘어 있는데 왜 이렇게 만든 거죠?”

“남녀칠세부동석이니 남녀의 자리를 나누는 것은 당연지사죠. 오른쪽에는 남자들이 앉고, 왼쪽에는 여자들이 앉는 겁니다.”

오 현감이 끼어들었다.

“그만하면 됐네. 하루 종일 이바구만 할 생각인가? 일을 하게, 일을.”

“네, 네.”

오 현감의 짜증 섞인 소리에 조 예방이 허리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산비도 쓸데없이 잔소리를 듣기 전에 주방으로 얼른 몸을 옮겼다.

“오실 손님 명단은 다 확보되었지요?”

주방에서는 숙수들이 마지막 작업 중이었다. 소반 위에 밥과 소고깃국, 산적과 생선전, 너비아니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비가 누구랄 것 없이 주방에 대고 물었다.

“그럼요. 남자 10명, 여자 12명입니다.”

밥상을 차리던 하녀 한 명이 대답했다.

“모두 다 오시겠지?”

“가끔 아프셔서 못 오시는 분도 있답니다.”

하녀가 싹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산비는 갑작스럽게 호감을 느껴서 하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이는 자기와 비슷하게 보였다. 콧등에 주근깨가 있는 걸 빼면 꽤 예쁜 얼굴이었다. 쌍꺼풀은 없었지만 자기와도 닮은 것처럼 보였다.

“못 보던 얼굴인데 이름이 뭐냐? 나이는 몇이고?”

산비의 말에 하녀는

“쇤네 이름은 채비이고 열다섯 살입니다. 주인 나리들을 잘 채비하라고 그렇게 지으셨다네요.”

“내 이름은 산비인데, 갑자기 동무가 생긴 기분이네.”

채비가 산비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쇤네가 동무라니 어림도 없는 말씀입니다.”

조 예방이 동헌 안뜰에서 고함을 쳤다.

“뭣들 하느냐? 음식상을 가져오지 않고!”

채비가 얼른 음식을 올린 소반을 들고 걸어갔다. 산비는 어슬렁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어느 틈에 왔는지 노인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산비가 조 예방 옆에 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선 시대 잔칫상 재현 (출처: 궁중음식문화재단, 오마이뉴스 2018.08.03.)



“모두 다 오셨나요?”

“뜻밖에도 모두 다 오셨네요. 보통 한두 분은 빠지기 마련인데 신기하네요.”

“오신 분들은 어떻게 확인하나요?”

“명단이 있어서 외삼문에서 확인 후 들어오지요. 올해 새로 들어오신 분도 세 분이나 있습니다. 남자가 한 분, 여자가 두 분이었죠.”

산비는 연희를 펼치는 광대패 뒤에 서서 마을 노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유심히 살펴보았다. 남자 쪽은 갓에 도포를 입은 양반이나, 패랭이나 맨상투 차림의 평민들이었고 여자 쪽은 옷차림이 좀 다를 뿐 모두 쪽진 머리로 똑같았다. 할머니 한 분과 눈이 마주친 것 말고는 눈길을 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할머니도 산비를 유심히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산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산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니, 어떻게 여기에? 대체 무슨 일이지?”

어느덧 잔치가 끝날 때가 다 되어갔다. 남자 쪽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큰 갓을 쓴 노인이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대체 어디 간 거야?”

오 현감이 그쪽을 바라보자 옆에 서 있던 조 예방이 얼른 귓속말을 했다.

“이조 정랑 김병연 나리 숙부 되십니다. 함자가 김재근입니다.”

이조 정랑 김병연이면 오 현감을 포천으로 보내 준 사람이었다. 오 현감이 그리로 가서 점잖게 말을 붙였다.

“어디 불편하신 게 있으신지요?”

“내 안경이 없어졌어. 내가 분명히 여기다 벗어놨는데!”

김재근은 소반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조 예방이 물었다.

“어디 떨어진 건 아닐까요?”

“안경 쓴다고 내가 봉사인줄로 아는 겐가? 떨어지긴 뭐가 떨어져?”

“그럼 혹시 댁에 놓고 나오신 걸 깜빡하신 건…”

딱! 김재근이 곰방대로 조예방의 이마를 강타했다.

“네가 내 마누라냐? 마누라도 맨날 날 보고 깜빡한다고 하더니만, 내가 여기서 그 소릴 또 듣네! 에라이, 육시랄 놈.”

조 예방이 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고 어쩔 줄 몰라 하자 오 현감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본관이 잘 찾아보겠습니다. 조금만 심기를 누그러뜨리시지요. 여봐라, 김재근 나리께 새로 술과 안주를 내드려라.”

채비가 그 말에 얼른 달려갔다. 김재근은 자기만 상을 한 번 더 받자 기분이 좋아져 잠시 안경 생각을 잊었다. 이 소동에 산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외삼문을 지키는 포졸이 두리번거리면 안뜰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딱히 여기 올 일이 없는데, 뭔가 이상했다. 포졸은 두리번거리다가 조 예방을 보고는 얼굴이 펴지면서 달려가 인사를 올렸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긴가를 주고받았는데, 산비와는 거리가 멀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 예방이 포졸과 함께 내삼문을 나가버렸다.

상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가는 채비를 산비가 붙잡았다. 산비는 채비에게 뭔가를 일렀는데, 채비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내삼문 쪽으로 달려갔다.

이제 선물을 나눠줄 차례였다. 오 현감이 남자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산비가 여자들에게 선물을 나눠줬다. 산비는 아까부터 자기를 유심히 보고 있던 할머니에게 선물을 드린 뒤에 낮은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말했다.

“얼른 일어나서 나를 따라오세요.”

할머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산비를 바라보았다. 산비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얼른요.”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는 말을 붙이지 않고 주방 쪽으로 가는 산비를 뒤를 따라갔다. 그 뒤로 김재근이 또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내 안경은 어디 있냔 말이야! 사신으로 갔던 내 조카가 청나라에서 사 온 거란 말이지! 뭐, 내가 깜빡깜빡하니까 안경도 깜빡한 거라고? 이것들이 사람을 뭐로 보고!”

김재근은 이제 소반을 던져버릴 참이었다. 그때였다. 조 예방이 종종걸음으로 돌아와 오 현감에게 귓속말을 했다. 오 현감이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산비가 옆에 있으면 안심일 텐데, 산비가 보이질 않았다.

“그, 그러니까 예방 이야기는, 이 양로연에… 우, 우리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있다는 거지?”

“지각한 노파가 외삼문에 와서 들여보내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할머니로 변장을 하고 관아에 침입한 겁니다.”

“양로연에 그렇게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뭔가 훔치려고 한 거 아닐까요? 가령 청나라에서 가져온 귀중한 보물인 안경 같은 것을?”


안경(출처: 한독의약박물관)



예방의 말에 오 현감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 그러니까 김병연 대감의 숙부께서 쓰고 온 그 안경 말인가? 그, 그럼 이제 어쩌지?”

조 예방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시를 내려야 할 사람은 사또 아니었나?

“일단 진짜 할머니가 왔으니 가짜 할머니부터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찾을 필요도 없었다.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선물도 그대로 남겨둔 채로. 그럼 범인은 이미 도주한 것인가. 조 예방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산비는 내실로 향했다. 산비가 방으로 들어가자 할머니가 머뭇거렸다. 산비가 말했다.

“정서린 도련님, 어서 올라오세요.”

할머니가 우물쭈물하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남자 목소리가 나왔다.

“제 이름은 어찌 알았습니까?”

“일단 들어오세요. 남의 눈에 뜨이기 전에.”

그제서야 서린이 방으로 들어갔다. 서린은 향교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있던 유생이었다. 산비는 유생에 대해서 빠삭하게 조사했다. 어디 사는지, 어느 가문인지 다 알아보았다. 꼭 잘 생겼기 때문은 아니라고, 산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 도령을 떠올릴 때마다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양로연에 오신 겁니까? 할머니들이 다 오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박가네 어머님이 어제 곽란(癨亂)이 오는 바람에 오늘 참석 못하는 게 분명했습니다. 그러니 빈자리 하나를 제가 채운 것이지요.”

산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설마 도령께서 곽란을 일으키신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아니죠! 저는… 그저…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네? 보고 싶어요? 양로연을…?”

산비는 말하다가 서린이 보고 싶어 한 게 저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끝을 흐렸다. 서린은 딴청을 피우다가 말을 바꾸었다.

“낭자에게 들키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

산비가 웃으며 말했다.

“선물을 가져다 드릴 때 알았습니다.”

“내 분장이 그렇게 어설펐습니까?”

“분장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선물 가져다주면서 보니까 양쪽 무릎이 치마 위로 표시가 나더군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던 거지요. 여자들은 그렇게 앉지 않습니다.”

“아, 치마를 입어서 모를 줄 알았는데, 그게 실수였군요.”

“몸에 배인 버릇은 쉽게 고칠 수 없죠.”

“하지만 그거야 남자가 변장을 했다는 거고, 그게 정서린이라는 증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원래 도령을 알지 못했다면 저도 몰랐을 겁니다. 변장을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숨길 수 없다기보다는 숨겨야 하는 줄 모르는 곳이 있지요. 가령, 귀 모양이나 전체 얼굴의 윤곽은 숨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눈빛도…”

“눈…빛이요?”

서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고 산비는 헛기침을 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산비가 짓궂은 표정이 되더니 서린에게 물었다.

“어찌 선비가 여자로 변장을 해서 들어올 수가 있습니까? 남녀칠세부동석도 모르십니까?”

“낭자가 그런 걸 고리타분하게 따질 줄은 몰랐습니다.”

산비가 한방 먹은 얼굴이 되었다가 깔깔 웃었다.

“그럼 다음에도 또 여자로 변장하실 겁니까?”

서린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나, 낭자를 보기 위해선… 할머니가 아니라 개나 고양이로 변장해야 한다고 해도 할 것입니다.”

산비가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빨갛게 볼이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옷을 갈아입으세요. 지금 사라진 할머니를 찾느라 난리가 났을 겁니다.”

산비는 아버지 옷 일습을 꺼내주었다. 서린이 옷을 받으며 말했다.

“낭자가 제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몇 달을 보지 못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몇 번 뵀습니다. 기억을 못 하실 뿐입니다. 하하.”

“아, 이 눈은 달려있어도 쓸모가 없었군요.”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나서 산비가 방을 나왔다. 채비가 섬돌 밑에 와 있었다.

“어찌 되었느냐?”

“아가씨 말씀대로였습니다. 안경은 안경집에 고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댁 주인마님이 지금 동헌에 와서 소란이 진정되었습니다. 아가씨, 대체 어찌 안경이 집에 있는 줄 아셨습니까?”

산비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할아버지가 안경을 쓰고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오늘 온 사람 중에 안경을 쓰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깜빡하고 아니 가져온 것일 수밖에. 너도 소반 나를 때 보지 않았느냐?”

채비는 그런 걸 챙겨볼 생각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지금 아가씨 방에 남자가 있다는 것도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었다. 댓돌 위에 남자 신발이 버젓이 놓여 있었지만.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양로연(養老宴)을 열고 비둘기 지팡이를 선물하다”

낙남헌양로연도(落南軒養老宴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문해, 초간일기, 1588-11-10 ~

1588년 11월 10일, 봄날같이 화창하고 따뜻한 날이다. 이 지역의 어른 70여 명의 노인을 모시고 잔치를 여는 뜻깊은 날, 날씨까지 포근하고 화사하니 이를 준비한 권문해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관아의 앞뜰에 마련된 양로연(養老宴)에 참여한 남자들은 오른편에 자리하고, 여자들은 왼편에 자리하여 종일 취하고 배불리 먹으면서 춤도 추며 흥겨운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권문해는 비둘기 모양이 새겨진 지팡이 구장(鳩杖)과 수건을 만들어 양로연에 참석한 노인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장수를 비는 잔치들”

이원기로회계첩(梨園耆老會契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장석영, 흑산일록, 1919-08-22

1577년 9월, 금난수의 고모와 고모부 이징(李澄)의 사위 박세현(朴世賢)이 그의 장인과 장모를 위해 온계에서 잔치를 열었다. 금난수로서는 두 해 전 돌아가신 부친이 떠올랐기 때문에 고모, 고모부의 장수를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서글픈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장수를 비는 날인만큼 모두가 받은 상마다 꽃이 꽂혀 있었고, 술동이에는 향기로운 술이 찰랑였다. 잔치에서 여러 자손들이 돌아가며 노부부에게 잔을 올리는 헌수(獻壽)를 하였고, 악사들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다음 달에는 금난수의 숙부인 금희가 노인회를 열었다. 원래는 봄과 가을마다 나라에서 퇴직한 노 관료들을 위해 베풀어 주는 것이 기로연의 원형이었으나, 사적으로도 노인들이 한데 모여 자신들의 장수를 자축하였다. 노인들의 행사인 만큼 금난수는 이곳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근처에 머물며 물심양면으로 행사를 도왔다. 숙부를 모시는 것이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갑자년에 태어나 갑자년을 맞이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24-12-04 ~

1624년 12월 4일, 장흥효는 명종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선조를 거쳐 광해군을 지나 인조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는 일기에 스스로 “갑자년에 태어나 다시 갑자년을 맞이하고 12월 4일에 태어나 다시 12월 4일을 맞이했다”고 기록했다. 어찌 보면 환갑이라는 나이가 마냥 신기했던 모양이다. 갑자년에 태어나 다시 갑자년을 맞이했다는 것은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다른 생명체로 거듭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이는 들어가지만 오히려 덕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덥수룩해졌으며 사람의 됨됨이는 더욱 볼품이 없었다. 다시 살아가는 갑자년이라고 하지만 어린아이로서의 갑자년과는 사뭇 달랐던 셈이다.

여러 지역 인사들이 그를 찾아왔다. 무려 3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의 환갑을 맞아 술을 대접하고 각기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자신이 보잘것없는 노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런 자신에게 이렇게 성대하게 맞아주는 것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부끄러움만 더해갔다.

자신이 읽은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60세에 60년만큼 교화되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60세에 60년만큼 잘못된다고 하면서 차라리 자신을 버리고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지만 도리어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과 정성을 주고 있으니 더욱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은 오늘로 그만두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었다.

“기로소 대신에게 연회를 베풀다”

권상일, 청대일기,
1719-04-16 ~ 1719-04-18

1719년 4월 16일, 숙종은 기로소(耆老所) 대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로소 대신으로 당연히 참여해야 할 영중추부사 이유(李濡)가 대간의 논박을 받아서 궐에 출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회에 이유가 빠질 난처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동궁은 여러 번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타이르고 승지와 함께 출사하기를 권하였다. 결국 동궁의 조처로 숙종이 진행하고자 했던 연회가 개최되었다.

연회는 오전 경현당에서 진행되었다. 숙종은 건강상의 이유로 나오지 못했고 세자만 참석했다. 이날 참석한 기로소 대신은 영중추부사 이유(李濡),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판중추부사 김우항(金宇杭), 공조 판서 신임(申銋), 형조 판서 황흠(黃欽) 등이었다. 본래는 전 판서 최규서(崔奎瑞)도 참석해야 했으나 고향인 용인으로 내려간지 오래라 관직을 사양한 상태였다. 다른 승지들이나 시위하는 신하들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여 오로지 장악원 악공등만 참여했다.

오후에 연회가 끝나고 기로소 신하들은 궁궐의 꽃을 가득 꽂고 크게 취하여 부축을 받으면서 나왔다. 연회가 성대하기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기로소 본청에서 다시 한번 연회의 자리를 마련하자는 명령이 내려왔다. 한번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권상일은 여태껏 있지도 않았던 성대한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숙종은 기로소 신하들에게 ‘경들은 모두 이미 칠십 팔십이 되었으나 다들 변이 없이 건강한데 나는 이제 겨우 육순이나 몸은 병들고 눈은 어두우니 이제 이와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기로소 대신들보다 숙종이 10여 세 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암시였을까 숙종은 기로소 대신보다 먼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문중 모임을 주관하다”

최흥원 역중일기, 1752-03-17 ~

1752년 3월 17일. 최흥원은 어제부터 문중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기거하는 칠곡 마을을 비롯하여 인근 지묘 마을, 해안 마을 등 최씨 일족이 거주하는 동네마다 모두 사람을 보내어 참여하기로 한 모임이었다. 본래 모임을 개최하기로 한 것은 어제였는데, 어제 해안 마을의 일족들이 도착하지 않아 개회가 하루 늦어졌다.

오늘 아침 일찍 해안 마을의 일족 노인이 비로소 도착하였다. 모두 모여 자리에 앉은 이후, 남산에 사는 일족의 아재를 문중의 어른으로 추대하였다. 추대한 어른을 특석에 앉도록 요청한 이후, 임신(壬申)생 이후에 출생한 환갑이 되지 못한 일족들이 모두 어른에게 공경히 절을 올렸다. 앞으로 문중 모임에서는 이 어른이 모든 일을 결정할 어른이었다.

아울러 앞으로 문중 일을 도맡아 할 실무자인 유사도 뽑았다. 성주에 사는 일족의 어른을 유사로 선발하였다. 유사로 선발된 어른은 첫 업무로 문중에 관한 절목을 수정하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하필이면 그 일을 최흥원에게 부탁하였다. 지난 신해년에 만든 완의를 수정하고, 새로 결정된 일을 보충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최흥원은 거듭 사양하였으나 유사 어른의 의사가 공고하여 결국 일을 맡고 말았다. 최흥원은 일을 맡은 이상 문중의 일이니만큼 온 힘을 다하겠노라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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