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라? 도둑이 들었다고? 그것도 김 대감 댁에?”
포천 현감 오달현이 자리에서 펄쩍 뛸 듯이 놀라 물었다. 형방 구태현이 고개를 깊숙이 조아렸다.
“없어진 건 무엇이냐? 도둑은 잡았느냐? 삼계 어르신은 무사하시고? 설마 구장을 집어간 것은 아니겠지? 아참, 안경은 무사한가? 설마 도둑맞은 게 아니라 잊어버리신 건 아니겠지?”
언제나 어딘가 맥이 좀 풀려있는 듯한 현감의 속사포 질문에 형방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김 삼계 어르신은 누구인가? 안동김씨로 이조정랑 김병연 나리의 숙부 김재근의 호가 삼계였다. 김재근 자신은 큰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안동김씨가 세도를 행한 이래 그 집을 김 대감 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병풍 뒤에 있던 산비가 병풍 아래로 막대를 내밀어 아버지 엉덩이를 쿡 찔렀다. 진정하라는 신호였다.
“어, 흠, 흠. 그러니까 자초지종을 소상히 고해보게.”
구 형방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아침에 삼계 어르신이 직접 동헌으로 오셔서 도둑이 들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집안의 가보로 내려오는 물건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가보? 그게 뭔가?”
“금과 옥으로 만든 거북이라고 합니다. 함에 잘 넣어둔 것인데 사라지고 대신 목간 하나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쪽지?”
구 형방이 소매에서 목간을 꺼내서 오 현감에게 바쳤다.
“이게 뭔가? 숫자가 적혀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목간에는 ‘일팔충십십일팔입(一八虫十十一八卄)’이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벌레 충(虫)자를 빼면 다 숫자였다. 마지막의 입(卄)이라는 글자는 20을 뜻하는 한자였다.
오 현감의 엉덩이에 다시 신호가 왔다. 엉덩이를 쿡쿡 찌른 것은 전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오 현감은 슬그머니 뒤로 손을 뻗어 막대기의 갈라진 틈에 끼워놓은 쪽지를 잡았다. 쪽지에는 언문으로 물어볼 말이 적혀 있었다.
“흠흠, 그래. 그 목간이 일부러 두고 간 것인가? 아니면 실수로 떨어뜨린 것인가?”
구 형방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돌았다.
“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거북이가 들어있던 함 안에서 나왔다고는 했는데…….”
“함 안에서 나왔다고…… 윽!”
오 현감이 중얼거리다가 난데없이 비명을 질러서 구 형방이 고개를 들었다. 오 현감이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거 좀 살살해라.”
“네?”
“아니, 형방한테 한 말이 아니네.”
“네? 그럼 누구한테?”
오 현감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지나갔다.
“지금 본관을 신문하는 건가?”
구 형방이 얼른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아니옵니다. 소인이 그럴 리가….”
그 틈에 오 현감은 산비가 새로 보낸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그, 그러니까 아침에 함을 발견했을 때, 함은 잠겨있었나, 열려있었나?”
“삼계 어르신이 함을 직접 들고 와서 관아에 넘겼습니다. 살펴보니, 연장으로 자물쇠 붙인 부위를 뜯어내서 함을 열었습니다.”
오 현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진작 말하지 않고 왜 이제야 말하는 건가? 그럼 가서 함을 보세.”
구 형방은 속으로 ‘물어보지 않으셨잖아요’라고 중얼거렸다. 오 현감이 동헌 마루를 내려가는데 마침 이방이 눈에 띄었다.
“아 참, 이방!”
이방 장윤진이 얼른 달려왔다.
“내일이 중양절(重陽節) 아닌가?”
“맞습니다.”
장 이방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럼 등고회(登高會) 준비는 잘 되고 있나?”
“네, 그러문입쇼. 국화전은 오늘 부칠 예정이고 국화주는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수유(茱萸) 열매를 담은 붉은 주머니도 준비해놓았습니다.”
“수유 열매가 뭐예요?”
수유 열매 말린 것(출처: 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
산비가 어디선가 툭 튀어나왔다. 사실은 병풍 뒤쪽에서 밖으로 나와 동헌을 돌아온 것이었다.
“수유나무 열매입니다. 쉬나무를 수유나무라고 쓰지요.”
“쉬나무면 소등(燒燈)나무요? 그 열매를 왜 가져가요? 산에서 불놀이 할 건가요?”
쉬나무 열매는 기름기가 많아서 불이 잘 붙었다. 이 때문에 불붙이는 용도로 많이 써서 소등나무라고도 불렀다.
장 이방이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산에서 불놀이를 했다간 큰일 납니다. 이건 중양절 액막이로 가져가는 겁니다.”
“액막이요?”
장 이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등고회라 하는데, 중양절이라 함은 양(陽)의 수인 9가 두 번 거듭 나와서 붙인 이름입니다. 이날 높은 곳을 올라가는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중국 후한 때 사람 환경(桓景)이 선인(仙人) 비장방(費長房) 제자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장방이 환경을 불러서 말하길, ‘9월 9일에 너희 집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집안사람들과 높은 산에 올라가되, 붉은 주머니에 수유 열매를 담아서 팔뚝에 걸고 올라갈 것이며, 산 위에서 국화주를 마시면 재앙을 면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환경이 집으로 돌아가 시킨 대로 하고 해가 진 뒤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던가요?”
“그렇습니다. 집에 돌아가 보니 가축들이 모두 죽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안사람들은 다 무사했죠. 그 후에 등고회에 갈 때는 붉은 주머니에 수유 열매를 담게 되었습니다.”
“고마워요. 이방 아저씨.”
산비가 인사를 하고는 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리는 내일 그럼 어디로 가요?”
오 현감이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자 이방이 다시 말했다.
“해룡산(海龍山)에 갈 예정입니다. 이곳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산입니다.”
산비의 눈이 놀람을 담아 동그래졌다.
“해룡산이라니, 바다도 없는 곳에 어쩌다 그런 이름이 붙었나요?”
『해동지도(海東地圖)』 포천현에 표시된 해룡산(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 산 정상에 연못이 있는데, 감지(鑑池) 또는 천호(天湖)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큰 이무기가 살았는데, 어느 날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 이름이 해룡산이 되었습니다. 그 연못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크다고 합니다. 다 해룡이 보우하기 때문에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연못 주위를 말을 타고 달렸다가는 그늘은 생겨도 절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 참 신기하네요. 그럼 장마철에 거기서 말을 타면 되겠는데요.”
장 이방이 입을 딱 벌렸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 하하하. 그런데 지금은 안 됩니다. 연못은 말라서 사라졌어요.”
“네에? 원래 없었던 건 아니고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산 정상 아래쪽에 안국사 절터가 있는데, 여기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말라버렸는데요. 태조 대왕께서 해룡산에서 군사 훈련을 하신 후에 그 우물에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물 이름을 어수정(御水井)이라고 하죠. 이 우물이 본래 감지와 연결되어 있었을 겁니다. 감지가 말라버리자 우물도 막혀버렸죠.”
어정(御井)(출처: 문화재청)
산비가 손뼉을 쳤다.
“이방 아저씨, 대단하세요. 여기 사람들은 다 그 이야기를 아는 건가요?”
이방이 속으로 기뻐하면서 애써 태연한 척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 동네 촌로들은 대충 다 알긴 하죠. 그래도 제가 제일 잘 알 겁니다. 포천 사정은 제 손바닥 보듯이 다 알죠.”
산비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무기라, 이무기가 있었단 말이지. 그러니까 이무기면 대망(大蟒)이라고도 쓰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산비가 장 이방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방 아저씨. 삼계 어르신네 식구가 어떻게 되죠?”
“네? 아… 본래 큰 집안이었는데, 그 집 큰 아드님이 한양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서 한양 집으로 옮기고, 작은 아드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1남 1녀가 있는데, 도련님은 아직 어리고 아가씨는 아마 올해 열여덟이죠?”
“열여덟이면 혼기가 찼는데, 혼담이 오가고 있겠죠?”
“그렇죠. 워낙 명문거족이라서 좋은 집안들 하고 이야기가 오가는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 진사댁 도령만 안 됐죠.”
“하 진사댁 도령이요?”
그러자 구 형방이 끼어들었다.
“김 대감댁 옆집인데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고 원래 돌아가신 작은 서방님이랑 혼약을 맺었다는 소문도 있죠.”
장 이방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구 형방에게 말했다.
“그런 소문 함부로 옮기는 거 아냐. 규중 아가씨에게 실례잖아.”
구 형방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어차피 자기가 이야기 안 했으면 장 이방이 했을 게 분명했다. 그냥 이야기 끼어들었다고 한마디 한 것이 분명했다.
산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뭔가 짚이는 일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러다 한순간 주먹을 꽉 쥐었다. 산비가 아버지 옆에 꼭 붙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등고회에 꼭 삼계 어르신 모시고 가야 합니다.”
“집안의 가보를 잃었다는데 등고회 갈 정신이 있겠느냐?”
“그런 거 상관없이 꼭 모시고 가야 합니다. 명을 내려서라도 참가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면 가보를 반드시 찾을 수 있으니까요.”
“뭐? 가보를 찾아?”
오 현감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이방과 형방이 뭔 말인가 하고 현감을 바라보았다.
“바, 반드시 가보를 찾아야 한다! 암, 찾아야지.”
오 현감이 더듬거리며 어색하게 말했다. 난데없는 일이었지만 워낙 그런 일이 잦은 사또였던지라 이방과 형방은 고개를 흔들기만 하고 입은 벌리지 않았다.
함은 아전들이 일을 보는 길청(吉廳)에 있었다. 그때까지 김재근이 자리를 뜨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서자, 버럭 화를 냈다.
고창읍성의 길청(출처: 문화재청)
“뭐 하다 이제야 오는 거냐?”
그러다 오 현감을 보고서야 소리가 줄어들었다. 산비는 얼른 달려가 함을 먼저 살펴보았다. 자개 장식이 된 네모난 함인데 과연 자물쇠를 뜯어낸 상태였다. 함이 생각보다 작았다. 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간은 일부러 넣어둔 것이다. 어쩌다 떨어져서 함 안에 들어갈 리는 없었다.
다음날, 중양절 등고회는 예정대로 열렸고 김재근 일가는 물론 하 진사댁도 불러서 같이 올라가게 되었다.
일행은 정상까지 가기 전에 안국사 절터에 멈췄다. 태조 대왕이 군사 훈련을 하고 물을 마신 어수정을 보고 예를 올리고자 했던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자 단풍이 든 산천이 눈 아래 펼쳐졌다. 하지만 산비는 단풍에는 관심이 없었다. 두리번거리다가 한곳을 가리키며 장 이방에게 말했다.
“저게 어수정이라는 우물이군요. 지금은 말라붙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말라붙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산비는 슬쩍 김 대감 댁 아가씨 효옥 쪽을 살펴보았다. 초조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산비가 우물로 쪼르르 달려가 들여다보았다.
“어? 물이 차 있는데요?”
멀리서 비명 같은 소리가 났다. 효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물이 찼다니, 안 돼요!”
사람들이 효옥을 바라보았다. 효옥은 사람들이 전부 자기를 쳐다보자 덜덜 떨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꿈을 꾸었어요. 조상님이 오셔서 우물 안에 저희 집 가보가 있다고….”
김재근이 펄쩍 뛰었다.
“뭣이라! 그런 꿈을 꾸었다고? 왜 이제서야 말하는 거냐! 어서 가서 가보를 찾아야지!”
하지만 물이 차 있는 우물 속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꿈이라고 하지 않았나? 꿈을 믿고 우물 속에 들어갈 사람도 없었다. 허황된 이야기라고 다들 수군대기만 했다. 산비가 입을 열었다.
“과연 영험한 거북이군요. 우물에 자리를 잡으니까 물이 차오르다니, 이러다 해룡도 돌아오는 거 아닙니까? 빨리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김재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우물 속에 가보가 빠졌다면 영영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누구든 우리 가보를 구해오면 큰 상을 내리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눈치만 보며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문득 한 청년이 도포와 윗도리를 벗어던졌다. 그는 밧줄로 허리를 감은 뒤에 우물 곁의 나무에 묶고는 우물에 들어갔다.
“저, 저, 하 진사댁 하종수 도령 아니야?”
“맞네, 맞아. 대단한 도령일세.”
사람들이 수근댔다. 우물로 내려간 종수는 한동안 올라오질 않았다. 효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물 쪽으로 달려왔다. 산비가 막아섰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산비는 낮은 목소리로 효옥에게 말했다.
“도령은 무사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네?”
“결혼 승낙을 받으려고 도령이 거북이를 훔친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도와드리려고 삼계 어르신을 꼭 등고회에 오시게 했습니다.”
효옥의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요?”
“목간의 ‘일팔충십십일팔입’는 파자지요. 이무기를 뜻하는 대망(大蟒)을 풀어서 쓴 거잖아요. 우리 현에 이무기랑 연관된 곳은 해룡산뿐이고요. 사람들이 건드리지 않을 곳은…… 말라붙은 우물인데다가 태조 대왕의 유적인 어수정뿐이겠죠. 하 도령이 어디다 가보를 숨겨둔 것인지 아가씨에게 전하기 위해 목간은 일부러 놓아둔 것이고요.”
효옥의 입이 딱 벌어졌다. 산비가 마치 하 도령 머릿속에 들어가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 그런데 물은 어떻게…”
“어제 고생 좀 했습니다.”
산비가 킥킥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멀리서 서린이 빙긋이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가 산비의 부탁으로 집안 하인을 모두 부려 밤새 말라붙은 우물에 물을 부어 놓았던 것이다. 물론 그전에 마른 우물 속에 감춰두었던 거북이를 빼냈다. 거북이는 종수가 우물에 들어가기 전에 건네주었다. 종수가 허리에 맨 밧줄도 서린이 미리 가져다 둔 것이었다. 산비는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하여 이 가련한 두 연인을 엮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유숙(劉淑), 〈수계도권(修禊圖卷)〉(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종수는 김재근에게 큰 상으로 효옥과 혼인하게 해달라고 청했고, 김재근은 이 모든 기적이 조상들의 뜻이라 생각하여 그 청을 들어주었다. 중양절 등고회에서 곱게 물든 단풍과 더불어 뜻밖의 경사를 보게 된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새로 혼인하게 된 양가에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날 정상에서 가진 시회에는 모두 이 혼약을 축하하는 시들이 지어졌다. 그리고 이런 소동 끝에 조상이 내린 것이라 여기게 된 목간 역시 집안의 가보로 고이 간직하게 되었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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