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본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행덕이가 산비 방의 문 앞에서 말했다.
“본가에서? 들라해라.”
산비가 말하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뛰어들듯이 들어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채비 아니냐? 대체 무슨 일이냐?”
채비는 이곳 포천 관아의 하녀로 있다가 크게 사고를 쳐서 한양 본가로 보낸 아이였다. 맹랑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산비도 채비의 말이라면 조심스레 들어야 했다.
“아가씨, 도련님을 살려주세요.”
“도련님이라니, 정훈 오래비 말이냐?”
산비의 아버지 오달현이 포천현감을 맡으면서 한양 집을 관리할 사람도 필요하고 대를 이을 아들도 필요해서 다섯째 삼촌네 둘째 아들인 정훈을 양자로 들였었다.
“네네, 도련님이 도박을 하다가 그만…”
“또!”
산비가 눈을 치떴다. 정훈은 도박 때문에 고리대금업자인 식리인(殖利人)에게 빚을 낸 적도 있었다. 오 현감이 그걸 알고 노발대발하며 파양하겠다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결국 다섯째 삼촌까지 달려와 서로 논의 끝에 빚을 반반 내어 갚았다. 물론 정훈은 앞으론 절대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
“오라비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약조까지 하지 않았더냐!”
산비가 있는 대로 화를 내자 채비가 벌벌 떨며 말했다.
“그것이 골패는 안 한다고 약조한 것이고, 투전은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산비가 이마를 짚었다.
“골패나 투전이나 다 도박이지, 뭐가 다르단 말이냐?”
“쇤네도 잘 모릅니다. 골패는 말 그대로 뼈(骨)에 여러 모양을 만든 패를 가지고 노는 겁니다. 짝을 서로 맞추기도 하고, 패를 순서에 맞춰 연달아 놓는 것도 있고, 패가 뭔지 맞추는 것도 있고 아주 다양합니다.”
골패(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잘 모르는 것 같지 않구나.”
채비가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저 도련님 따라다니면서 어깨너머로 본 것 뿐입니다요.”
“골패는 뼈로 만든다고 했는데 투전은 뭘로 만드느냐?”
“투전은 기름먹인 종이로 만듭니다. 앞면에는 패의 종류를 적고 뒷면에는 낙엽(落葉)이라는 한자를 초서로 적어놓는다고 합니다.”
“손으로 만드는 거로구나.”
“네.”
“그럼 투전은 어떻게 노는 거냐?”
“노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수투전은 네 사람이 하는 놀이인데, 투전패 80패를 네 사람이 스무 패씩 가지고 한 패씩 내는 놀이입니다. 제일 높은 패를 내는 사람이 이깁니다.”
“그리 단순한 놀이가 무슨 도박이 되느냐?”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규칙이 복잡하거든요.”
“그래? 투전에 또 다른 놀이는 어떤 게 있느냐?”
“돌려대기라고 40장을 가지고 하는 놀이가 있습니다. 패를 다섯 장 받은 다음에 세 장으로 합을 0을 만들고 두 장의 패를 더해서 그 수를 비교하여 높은 쪽이 이기는 놀이입죠. 보통 수투전이나 돌려대기를 많이 합니다.”
투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산비는 투전에 대해서 세세한 질문을 더 했는데, 채비가 아는 것이 한계가 있어서 놀이 방법은 대강 짐작만 할 수 있었다.
“도박을 하다가 오라비가 어찌 되었단 말이지?”
“투전을 하시다가 가진 돈을 다 잃자 집문서를 걸었는데, 그마저 잃고 마셔서…”
“집문서를 노름으로 날렸다고?”
“네네, 그래서 그건 안되겠다 싶어 들고 도망쳐 나오려다가, 그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산비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젠 정말 파양해야 한다. 집문서를 담보로 도박을 했다니!
“그럼 잃은 돈이 집값만큼이나 된단 말이냐?”
“그런 건 아니어서 백 냥만 있으면 변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투전집에 붙들려 계신 터라 쇤네가 이렇게 살려주십사고 달려온 것입니다.”
“백 냥만 있으면? 현감의 녹봉이 2백 냥이다! 아버님의 반년치 녹봉을 지금…”
산비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이 자리를 얻으려고 뇌물을 한참이나 바쳤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나 저제나 그 돈을 이 고을에서 뽑아낼 생각을 하실 터였다. 그런데 이런 일로 백 냥이나 또 축내게 된다면 정말 못 말릴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오라비가 잡혀 있다고 했지?”
“네네.”
“가자. 내가 직접 가야겠다.”
“네?”
채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산비는 오 현감에게 본가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통보하듯이 말하고는 행덕과 채비를 앞세워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에서 도박이 그렇게 성하냐?”
산비가 채비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도 못 하죠. 양반가에서 제일 성행하는 건 골패입니다. 그래서 도련님도 골패를 하셨던 거고요.”
행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산비에게 물었다.
“아가씨, 정말 어찌 하려고 거길 찾아가시는 건가요?”
“어찌하긴? 오라비를 꺼내고 집문서도 되돌려 받아야지.”
“그러시려면 차라리 포교를 대동하고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집안일에 포교는 왜? 더구나 우리 고을 일도 아니고 한양 일인데, 포도청도 무시하고 작은 현의 포교가 도박꾼이라고 기찰하고 그러면 그 후과를 어찌 감당하겠느냐?”
행덕과 채비 모두 산비의 속내를 알 수 없는 가운데 문제의 투전집에 도착했다.
“포천에서 오셨다고?”
투전집 대문을 막아선 텁석부리(텁석나룻이 난 사람)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쓰개치마를 눌러 쓴 산비는 고개를 반쯤 돌리고 있었고 채비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다니까요.”
“그럼 돈은 가져오셨고?”
“그, 그야…”
채비도 그걸 알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산비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흔들며 말했다.
“돈은 가져왔지. 하지만 그냥 줄 순 없다.”
짤랑짤랑 소리에 텁석부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냥 안 주면 엎드려서 주겠다는 건가? 이게 뭔 소리여?”
“투전을 하지.”
“하겠다면… 뭐? 뭐라굽쇼?”
텁석부리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투전을 해본 적은 있으신가? 내가 기생이 골패를 만진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양반집 부녀가 투전을 한다는 말은 금시가 초문이올시다.”
“그게 뭔 상관인가? 돈 놓고 돈 먹기면 그만이지.”
“하하, 우리가 따면 그건 빚을 갚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요?”
“물론이지. 웬만하면 오라비가 빚진 것만큼만 따겠다.”
기산 김준근, 〈골패(骨牌)하고〉(출처: 독일 MARKK)
텁석부리는 다시 크게 웃어버렸다.
“이건 뭐, 눈에서 피눈물 흘려봐야 정신 차리겠군. 물러달라고 해도 소용없을 거요.”
“사설이 너무 길구나. 앞장서라.”
텁석부리는 투전판으로 산비를 안내했다. 텁석부리가 양반집 아가씨가 투전을 같이하겠다고 했다는 말을 전하자 투전꾼들은 모두 박장대소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있었구만. 큰일날텐데. 투전을 할 줄은 아시는지요?”
염소 수염을 기른 사내가 빙글빙글 웃으며 산비에게 말했다.
“모른다. 규칙을 알려다오.”
염소 수염은 이마를 탁 쳤다.
“원 세상에. 그럼 맛보기로 수투전을 해봅시다. 이게 나름 재밌으니까요. 수투전은 사람(人)·물고기(魚)·새(鳥)·꿩(雉)·별(星)·말(馬)·토끼(兎)·노루(獐)의 여덟 종류가 1부터 10까지 있어서 모두 80패로 노는 겁니다. 10은 장(將)이라 부릅니다. 사람·물고기·새·꿩은 9가 제일 높고 1이 제일 낮습니다. 별·말·토끼·노루는 1이 제일 높고 9가 제일 낮습니다.”
“그럼 장은?”
“장이 제일 높죠. 그중에서도 노루 장은 도통이라 부르는데 이 패가 최고로 높습니다.”
“패는 한 사람이 스무 장씩 갖는 거고?”
“어, 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패씩 내고 제일 높은 패를 낸 사람이 그 판을 먹는 거죠. 제일 많은 판을 먹은 사람이 이기는 놀이올습니다.”
투전패. 종이에 그림이나 문자 따위를 그려 투전 노름에 사용하는 패로 총 40장이다.
마분지의 앞면에 먹으로 다양한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각 문양은 2장씩이다.
뒷면에는 새의 깃털과 비슷한 문양이 일괄적으로 그려졌다. 길이가 약간씩 다르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알겠다. 패를 보여다오.”
산비는 천천히 모든 패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과연 채비가 말한 대로 뒷면에는 초서로 낙엽이라 쓰여있었다. 패를 다 살펴본 뒤에 산비가 돌려주면서 말했다.
“하나 제안할 게 있다.”
“말씀해보시죠?”
“패를 내면 그 패가 뭔지 다음 패를 낼 사람은 보는 거 아닌가? 그래서야 무슨 도박의 재미가 있겠는가? 동시에 뒤집은 패를 내서 무슨 패를 냈는지 모르게 하고, 패를 열어서 승패를 결정지으면 어떻겠는가?”
산비가 낸 뜻밖의 제안에 사내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염소 수염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재미있겠군요. 한번 해봅시다. 패 하나에 한 냥이니 그리 아쇼.”
첫 판이 벌어졌다. 네 사람이 패를 낸 뒤에 뒤집어보니 산비는 노루 9를 냈다. 제일 낮은 패니까 산비가 이길 까닭이 없었다. 두 판째도 산비는 꿩 1을 냈고 또 졌다. 산비는 내리 다섯 판 동안 한 판도 먹질 못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채비와 행덕은 속이 타서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정작 산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여섯 판 째 산비는 물고기 7을 냈는데, 처음으로 이겼다. 그 뒤로는 연전연승이었다. 중간에 두 판을 지긴 했지만 20판 중 12판을 이겼다. 산비가 받아야 할 돈이 112냥이었다. 산비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빚 100냥은 갚은 것이고 열두 냥을 받아 가면 되겠군.”
염소 수염이 손을 흔들었다.
“셈이 그러면 안 되죠. 100냥은 집문서 값이고, 도령이 진 빚은, 가만있자 사흘이 지났으니 이자까지 해서 55냥이 되었으니 열두 냥을 빼도 아직 33냥이 남았습니다요.”
“그런가? 수투전을 한 판 더 하면 너희들이 2백냥을 잃을 것 같은데, 괜찮겠나?”
염소 수염의 이마에 빠직 소리가 날만큼 핏대가 올랐다.
“수투전은 시간이 좀 걸리니 이번엔 좀 빠른 걸로 해보죠. 돌려대기를 하실 줄 압니까?”
“세 장 합으로 숫자를 만들고 남은 두 장으로 승부를 보는 놀이라고 알고 있네.”
“패를 뽑을 때마다 돈을 걸 수 있습니다. 해보시겠습니까?”
“그러지, 뭐.”
산비가 너무 쉽게 응해서 염소 수염은 다시 한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염소 수염은 이번에야말로 이 철딱서니 없는 양반집 아가씨에게 교훈을 단단히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어처구니도 없게 몇 판을 치고 나자 산비 앞에는 60냥의 돈이 쌓였다. 산비는 자기 패가 안 좋을 때는 귀신처럼 돈을 걸지 않고 자기 패가 좋을 때는 한정 없이 돈을 걸었다. 그때마다 산비에게 운이 따랐다.
“이제 빚도 완전히 청산되었지? 그럼 이만 가보겠네. 오라비도 이리 불러오게.”
염소 수염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양반집 아가씨에게 해코지를 할 배짱까지는 없었으니.
“그런데 아가씨, 돈은 어디서 나셨어요?”
채비가 내내 궁금했던 것을 산비에게 물었다.
“돈? 없었는데?”
“아이 참, 주머니 흔들어서 돈 있는 거 보여주셨잖아요?
산비가 킥킥 웃었다.
“아, 이 주머니?”
산비가 주머니를 열어서 채비에게 보여주었다. 주머니 안에는 쇠붙이 조각들이 들어있었다.
“포천에서 떠날 때 공방에 들러서 쇠붙이 좀 챙겼다.”
정훈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듣자하니, 투전꾼들이 손도 못 쓰고 졌다는데 그 비결이 대체 뭐냐? 내게도 좀 알려다오.”
산비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다 외웠어.”
“외우다니? 뭘?”
“투전패를.”
“투전패야 그냥 아는 건데, 뭘 외워?”
“뒷면을. 뒷면에 낙엽이라고 쓰여있더라고. 비슷하게 쓰려고는 했지만 조금씩 다 다를 수밖에 없잖아? 인쇄한 것도 차이가 나기 마련인데 사람이 손으로 쓴 건 다 차이가 있지. 그거 보고 다 외워서 상대가 무슨 패를 들었는지 다 아는데 어떻게 지겠어?”
다들 입이 딱 벌어졌다. 채비가 물었다.
“그렇긴 해도 수투전에선 동시에 패를 냈잖아요? 상대가 무슨 패를 낼지 아셨단 말이에요?”
“알았지. 그거 알려고 앞의 몇 판을 져줬잖아. 사람마다 패를 손에 쥐는 방식이 있단 말이지. 누구는 낮은 패를 왼쪽에, 누구는 오른쪽에 놓더란 말이지. 그거만 알면 패를 내려고 손이 갈 때 알 수 있지. 상대보다 높은 패를 내면 이기는 거니까 이렇게 쉬운 도박이 어디 있겠어?”
행덕이 놀라서 물었다.
“그럼 처음에 투전패 보여달라고 했을 때 그걸 다 외우셨다고요?”
“사서삼경 외우는 것보단 쉽더라, 뭐.”
정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훈이 사정조로 말했다.
“산비야, 그, 그럼 나랑 편을 먹고 투전을…”
산비의 눈에서 번갯불이 튀어나왔다.
“다시는 도박하면 안 돼!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정말 모두 끝장낼 거야! 집문서는 내가 가지고 갈 테니 그런 줄 알고.”
산비는 바로 연달아 채비에게 말했다.
“채비야, 너는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오라비 동향을 보고해라.”
정훈은 금세 울상이 되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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