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스토리이슈

한국국학진흥원의 금기, ‘불’

한국국학진흥원은 민간 소장 국학자료를 자연적 멸실과 인위적 훼손으로부터 효율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소장자의 소유권을 보장하고 관리권만 위임받는 ‘기탁’의 방식으로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고 있다. 국학자료의 조사 및 수집이 사업의 원동력이 되는 만큼 장판각의 화재는 국학진흥원의 최대 금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국학진흥원 내부에서는 화재로 인한 재난발생을 사전에 예방 · 대비하고, 화재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응 ·복구하는 소방 예방 및 완화를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일반현황, 자체점검, 일상적 안전관리 뿐만 아니라 화재예방 및 홍보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 · 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20조에 따른 자위소방대 및 초기대응체계를 구성 · 운영하고 있다.


소방 훈련 장면



소방 교육 장면



산불소화시설 수관수막타워 시험분사



조선시대 소방은 어떠했을까?


2017년 제3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에서 대상인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한 ‘장안의 화재’팀의 <구화당, 조선의 불을 멸하라>는 조선시대 소방서와 소방관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기획은 스토리테마파크에서 찾아낸 조선시대 소방업무와 멸화군의 이야기를 주요 소재로 활용해, ‘화재수사’를 테마로 한 ‘재난범죄추리활극’ ‘판타지’로 TV드라마를 구성했다. 무녀의 주술로 인한 화재, 그리고 불을 끄는 멸화군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왕실의 왕위쟁탈을 둘러싼 화재 사건의 범인을 찾는 추리극으로 구성하였다.

조선의 소방서 수성금화사는 멸화군(滅火軍)을 별도로 편성했는데 이들은 24시간 대기해 있다가 불이 나면 가장 먼저 출동해 진화에 나서는 전문소방대원이었다.<스토리테마파크 - 지방관의 사행단 접대와 재난 中>

조선의 화재를 담당했던 ‘수성금화사’는 여러 번의 구조조정을 거친 후 탄생한 조선시대 소방서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수성금화사의 명령에 따라 불을 끄던 이들이 바로 멸화군이다. 불이나면 종을 울려 화재 사실을 알렸으며 쇠갈고리와 도끼 등의 도구를 가지고 진화작업을 펼쳤다. 물을 퍼 나르는 급수비가 함께 활동했으며 멸화군임을 증명하는 구화패를 갖고 다녔다. 또한 숙소생활을 하는 멸화군은 나름의 노하우들을 전수하며 손발을 맞춰 활동했다.

멸화군은 불을 끄는 일 외에도 방화범을 잡기도 하였다. 검안을 통해 방화의 흔적이 나타나면 수성금화사에 방화범을 잡으라는 명이 내려지기도 한 것이다.

멸화군은 나름의 체계를 갖고 있는 조직으로서 조선의 전문 직업군을 보여줄 수 있음과 동시에, 조선시대라 기술의 한계가 있는 조직이었다. 우리는 이를 활용해 멸화군이 된 주인공이 다른 동료들과 좌충우돌 숙소생활을 하며 현대의 지식으로 화재를 진압하고, 연쇄방화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방화범을 잡는 이야기를 만들었다.<구화당 : 조선의 불을 멸하라> 기획안 중에서

제3회 스토리테마파크 공모전 최종심사 피칭
'구화당:조선의 불을 멸하다'  더보기




“기둥과 들보를 올린 늦은 봄 밤, 조용히 상량제를 지내다”

1805년 4월 24일에 예정된 대로 기둥과 들보를 올렸다. 기둥은 사시(巳時, 9~11시)에 세웠는데 손방(巽方, 동남쪽)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기둥을 세우기 시작한 지 12시간이 지난 해시(亥時, 21~23시)가 되서야 들보를 올렸다. 이어서 상량제를 지냈지만, 밤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인근의 사림이 와서 볼 수 없었다. 비로소 대장장이[冶匠] 2명에게 사당 건립에 필요한 철물을 만들게 하였다. 전후로 10여 일이 되어 철물 만드는 일을 마쳤다.

“역질이 돌아 능동 재사에서 제사를 합설하여 지내다”

1603년 2월 23일, 향시를 보러 현풍에 다녀온 김광계는 도착한 다음날 아침을 먹자마자 재종숙인 김기(金圻)를 뵙기 위해 찾아 갔다. 그런데 동네의 여러 친족들이 모두 애당(崖堂)에 모여 있었다. 김광계는 재종숙을 모시고 동네 친족들과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향시를 보러 갔다 온 이야기와 갑자기 퍼진 역질을 걱정 하다 보니 밤이 다 되어갔다. 내성(奈城) 재종숙 김령(金坽)과 숙항인 금발도 밤에 함께 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 밤이 늦어서야 흩어졌다.
다음날 김광계는 증조모 및 조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능동재사(陵洞齋舍)로 갔다. 원래 선대의 묘는 거인(居仁) 마을에 모셔져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서 지내야 했지만, 얼마 전부터 기세를 부리기 시작한 역질 때문에 거인 마을로 갈 수가 없었다. 김광계는 어쩔 수 없이 능동 재사로 가서 재사의 마루에서 증조모와 조부의 제사를 합설하여 지내고 다음날 내려와서 다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고나서 김광계는 서둘러 서원으로 향했다. 춘기제사를 준비하는 입재(入齋)를 하기 위해서였다. 입재 의식은 제사 3일 전에 시작하는데, 올해 제사는 2월 29일이라서 26일에는 서원에 들어가야 했다.
3일 동안 서원 경내에 머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여러 절차에 따라 예를 올리고, 29일엔 본 의식을 올리고 제사를 마쳤다. 제사를 마친 후 참여했던 사람들은 음복상을 받았다. 3일간의 제사 예식이 모두 끝나자 모든 유생들은 상하유사에게 절을 하고 서원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김광계는 음복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역질이 돌아 설날 제사 대신 참배만 올리다”

향1610년 1월 1일, 경술년 새해가 시작됐지만, 김광계의 집안은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집안에 역질이 돌아 설날 제사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김광계는 아우들인 광실, 광보, 광악과 함께 대문 안에서 사당을 바라보며 참배만 하였을 뿐이다.
참배를 마친 사형제는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처음 찾아간 김호 재종숙 댁에서 김광계와 형제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좌수 재종숙 댁의 노비들이 안에 알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참 동안 문 밖에서 서 있다가 겨우 사당문 밖에서 참배만 하고 돌아 나왔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김령 재종숙 댁이었는데, 내성 댁에는 광재, 광업 형제와 광하 형 등 동네 친족 몇 사람이 와 있었다. 곧이어 김지 재종숙도 찾아와서 함께 설술 몇 잔을 나누고 일어나 나왔다.
김광계는 동생들과 광찬 형의 아들인 김확을 만나러 갔다가 아침에 인사를 못 드린 좌수 댁에 다시 찾아갔는데, 그제야 마침내 들어가 세배를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김광계는 아우들과 함께 노산 재종조부 집을 들렀는데, 동네 친족들이 모두 함께 오고 오직 두세 사람만 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성 재종숙이 김광계의 집으로 가자고 하여 김광계 형제들과 김령 재종숙은 함께 나와 집으로 가던 길에 참봉 댁에 들렀더니 충주 사람 김극방(金克邦)이 김령 재종숙을 만나보려고 와 있었다. 그래서 다 함께 김광계의 집으로 가고, 동네 친족들도 모였지만, 역시 참배만 마치고 모두 모여 앉아 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공은 너무 취해 내성 재종숙과 함께 김광계의 집에서 자게 되었다.

“조선시대 망년 의례”

‘망년(忘年)'이라는 말은 “나이(歲)를 잊는다” 또는 “나이 차이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고려사』 권102 「열전」15 ‘이인로’조에는 ‘망년우(忘年友)’와 ‘망년교(忘年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인로·이규보·오세재·임춘 등 무신쿠테타 때 살아남은 젊은 문인들은 ‘망년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망년회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죽림칠현을 본받았다고 하여 ‘죽림고회(竹林高會)’라고 불리기도 했고, 강남 쪽에 산다고 하여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도 하였다. 망년회 회원들은 이의민·최충헌 등 무신들이 권세를 누릴 때, 술과 시로 세월을 한탄했다.
또한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은 자신의 문집인 『사가집(四佳集)』에 망년회에 관한 두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권14 제12의 「한강루 망년회 석상(漢江樓忘年會席上)」이라는 제목의 시와 권22 제15의 「여섯번째 답장 2수(六和 二首)」라는 제목의 시에서 ‘제천정 위의 망년회(濟川亭上忘年會)’가 바로 그것이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