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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이산두의 영정을 그려오라,
어필영정각(御筆影幀閣)

프롤로그


“부브르르르~ 부브르르르~ 푸루르르~ 푸루르르~.”

6개월 된 빈이 투레질을 한다. 옆에서 나도 같이 ‘부브르르르’ 따라 하니 빈이 입을 벌리고 좋다고 웃는다. 이번엔 아에이오우~~! 얼굴 근육을 최대한 사용해 입 모양을 크게 했더니 우스운 지 내 얼굴을 잡고 가볍게 탁탁 친다. 나는 내친김에 빈을 안고, ‘반짝반짝 작은 별’ 노래에 맞춰 발음 연습을 한다.

“각낙닥락막박삭,악작착칵탁팍학. 간난단란~ . 다람다람 다람쥐 / 알밤 줍는 다람쥐 / 보름보름 달밤에 / 알밤 줍는 다람쥐 / 엄마 볼은~~~.”

빈이 칭얼댄다. 잠이 올 때 하는 옹알이를 시작했다. 나는 빈을 안고 흔들흔들 움직이며 옹알이에 답하듯 ‘별을 좋아한 소년 장영실’을 들려준다.

“시계가 없던 옛날에는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요? 밤에는 하늘의 달을 보고, 낮에는 그림자의 길이를 보면서 ‘아, 몇 시쯤이겠구나’하고 대강 짐작만 했데요….”

잠든 빈이를 눕히고, 나는 계속 장영실 이야기를 한다.




그의 초상을 그려오라.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왕이 노인을 공경하면 백성도 효행을 실천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은 신하들에게 기로연을, 백성들에게 양로연을 베풀었다. 잔치만 베푼 것이 아니다. ‘기로소(耆老所)’를 설치하여 연로한 조정 원로들이 안락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기로소는 원칙적으로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 전직·현직 문관으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이들을 기로소 당상이라 불렀다. 국왕도 나이가 되면 기로소에 소속되었는데, 숙종은 59세에, 영조는 51세에 각각 기로소 회원이 되었다.

1769년 4월 12일(영조 45).

“지중추부사 이산두는 안동의 고로(故老)로서 나이가 지금 90이다. 비록 함께 기로소에 있지만, 임금이 그 신하를 볼 수 없고 신하도 그 임금을 볼 수 없어 마음으로 늘 그리워한다. 기로소에 명해 그림을 잘 그리는 화원을 보내 초상을 그려오게 하고, 내가 직접 본 다음에 기사어첩에 함께 철해 놓아라. 그리고 초상을 가지고 올 때 그 자손 중에 누군가로 하여금 가져오게 하라.”


영조가 친히 화원을 보내 초상을 그려오라 명했다고 하니, 난졸재(懶拙齋) 이산두(李山斗, 1680~1772)의 삶이 궁금해진다. 이번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는 이산두의 초상화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며 그의 삶과 꼿꼿한 성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산두는 1756년 77세의 나이에 당상관인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2년 후인 1758년에는 그의 맑은 풍도와 높은 절개에 감복한 경상 감사의 추천으로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산두는 자신의 나이를 이유로 장례원 판결사를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다.

1758년 10월 2일(영조 34).

“제 나이 이미 일흔아홉 살입니다. 빈껍데기만 남았을 뿐, 정신이 육체를 벗어나서 죽을 때가 임박하여 아침 아니면 저녁인 상황입니다. (중략) 이에 감히 피를 뿌리는 마음으로 글을 올리오니,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저하께서 빨리 명을 고쳐 내리시어 어리석은 제가 분수에 맞게 살게 해주신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이산두가 영남 사람으로 본성이 질박하기 때문에 우대한다며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산두는 자신이 여름철 학질 등을 앓아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은 점을 말하며 끝내 장례원 판결사의 자리를 사양하고 만다.

이산두의 고집만큼 영조의 부름도 계속된다. 1761년(영조 37) 2월 이산두는 영조로부터 가선대부 공조 참판에 임명한다는 교지를 받고, 공조 참판 사직소를 제출한다. 그는 사은숙배(謝恩肅拜) 해야 마땅하지만, 늙은 몸을 이끌고 가다가 길에서 죽게 된다면 미천한 신하를 대우하는 임금의 큰 뜻을 저버리게 될까 두렵다고 하였다.

이산두의 사직 상소를 본 영조는 1761년(영조 37) 3월, 승지 류정원(柳正源)에게 이산두의 근력에 대해 묻는다. 류정원이 “나이는 82세이며, 보고 듣는 것이 쇠하지 않고 근력 또한 자못 강건하여 연세 높은 노인의 모양은 아닌 듯 하였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영조는 “내가 한 번 보고자 하니, 그에게 올라오게 하되 반드시 곧바로 할 필요는 없고 형편을 보아 이 뜻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며 전교를 쓰게 한다. 영조의 뜻이 이러하나 이산두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이번에도 사직할 것을 전한다.

이산두에 대한 영조의 총애는 어쩌면 1728년(영조 4)에 있었던 이인좌의 난 이후 침체된 남인에 대한 긍정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이산두는 1763년 가의대부, 1766년 자헌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영조실록』 108권에는 ‘전 참판 이산두를 지중추로 발탁하고 본도로 하여금 고기와 비단을 주게 하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의 나이 88세에 지중추부사로 기로소의 회원이 된 것이다.


기로소제명록(左), 기로소에 등록된 이산두(右)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영조는 그의 언행과 덕성을 인정하여 거듭 승진을 명하고, 초상화까지 선물한다. 조선 시대의 초상화는 일반적으로 생전에 공신으로 봉해졌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하는데, 많은 경우 해당 인물이 사망한 후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렸다. 그래서 임금의 명으로 초상화를 하사받는 것을 명예롭게 여기던 시대였다.

1769년 5월 16일(영조 45).

지중추부사 이산두의 초상을 2장 모사하게 하여, 1장은 궁중에 들이고, 다른 1장은 기로소에 보관하게 하였다. 초상화 원본은 본가로 돌려보냈다. - 영정 왼쪽 가에 있는 ‘지중추이산두(知中樞李山斗)’ 여섯 자는 임금이 직접 썼고, 오른쪽 가에 있는 ‘구십세상(九十歲像)’ 네 자는 세손(世孫, 훗날의 정조)이 직접 썼다. -


영조는 초상화를 서울로 가져간 그의 손자 이전춘(李全春)에게 영릉 참봉의 관직을 제수한다. 그리고 이전춘에게 옥새가 찍힌 『유곤록(裕昆錄)』도 선물한다.

“새로 간행한 『유곤록』 1건에 옥새를 찍어[安寶] 이산두의 손자에게 하사해 주라. 너 한 사람에게 하사함으로써 72주의 선비들을 용동(聳動) 시키려는 뜻이니, 이를 잘 알도록 하라.”


1764년에 간행한 『유곤록』은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당파와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책이다. 이 책을 이전춘에게 하사한 것은 영남 남인 역시 영조의 백성이고 탕평의 대상이기 때문에 앞으로 관직에 지속적으로 등용할 것이라는 영조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제엄제방유곤록(御製嚴堤防裕昆錄)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처럼 이산두는 만년에 많은 복록(福祿)을 누렸다. 그의 유년과 젊은 시절의 삶은 어땠을까?




나를 속일 수는 없다.


이산두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자는 자앙(子昻), 호는 난졸재(懶拙齋),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고려 태사 이도(李棹)가 그의 시조이다. 이산두의 8세조인 전농 정(典農正) 이웅(李雄)은 세상이 혼란에 빠질 것을 예견하여, 안동 풍산현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이후 그 후손들은 풍산을 세거지로 그 문명을 떨쳤다. 이웅의 아들, 양정공(襄靖公) 이화(李樺1391~1459)는 세종대에 출사하여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병조 판서를 지냈다.


야소헌 이화의 정자, 침류정(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이산두의 증조 이영(李苓)은 좌승지, 조부 이명길(李鳴吉)은 호조 참판, 부친 이필(李泌)은 호조 판서에 각각 추증되었다. 어머니 광주 안씨(廣州安氏)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3대가 모두 추증된 것은 이산두가 고관을 지냈기 때문이다.

1680년 6월에 태어난 이산두는 세 살 때, 병으로 숨이 끊어졌다가 3일 만에 되살아났다.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며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고 여겼다. 이산두는 정곡처사(井谷處士) 권징(權憕, 1636~1698)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어느 추운 겨울, 함께 공부하던 여러 아이들이 견디기 힘든 추위에 언 손을 불며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이산두는 홑옷과 바지만 입고도 오뚝하게 단정히 앉아 추운 기색을 비추지 않았다. 함께 공부하던 아이들이 춥지 않냐고 묻자, 그는 “춥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만약 이 추위를 인내할 수 없다면, 앞으로 닥칠 추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바로 잡고 가다듬는다면, 저절로 추위를 잊을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춥거나 덥다고 해서, 4일이나 굶어 배가 고프다고 해서 흐트러지지 않았다. 십여 년을 공부하는 동안, 그의 행동은 항상 법도에 맞았다.

1701년에 이산두는 향시에 합격했다. 마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향시 합격을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21세의 청년 이산두는 들뜬 마음 없이 꼿꼿하게 앉아 평정심을 유지했다. 1704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종사촌 형인 김구성이 이산두의 궁핍해진 살림살이를 딱하게 여겨, 매달 곡식 10말을 보냈다. 이산두는 도움을 받되,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구차스럽게 행동하지 않았다. 김구성은 이산두를 돕고자 자신의 밭을 주었는데, 이산두는 이사하는 날, 그 밭을 도로 돌려주었다. 김구성 역시 이산두에게 밭을 준 것이라고 하며 받지 않아, 결국 밭이 묵어버렸다. 나중에 이 밭은 김구성 재사의 밭이 되었다. 후에 김구성은 “그대에게 물건을 주는 것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기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이산두는 “공자께서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개 삼아도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다. 의롭지 못하게 부유하고 귀해지는 것을 나는 뜬구름처럼 여긴다.[夫子飯蔬食飮水 曲肱而 枕之 樂亦在其中 不義爲富且貴 於我如浮雲]”라고 하는 몇 마디의 말을 직접 써서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산두는 가난하다고 해서 주눅 들거나 비굴하지 않았다. 가난에 굴복하거나 정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을 즐기며 올바른 도리를 실천하고자 했다.

우리는 매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타인의 평가에 앞서 나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살았는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는가 하는 자기 성찰이 더 중요함을 우리는 잊고 산다. 이산두는 스스로의 평가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대학(大學)』「성의장(誠意章)」의 “이른바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이니,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는 것과 같이하며, 선을 좋아하기를 좋은 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해야 하니, 이를 스스로 자겸이라 이른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라고 하는 ‘무자기(毋自欺)’ 이 세 글자를 부적처럼 삼았다.

1721년 이산두가 전강(殿講)에 응시했을 때 일이다. 강을 마치고 성적을 매기려고 할 때 그는 스스로 한 글자를 잘못 읽었다고 말한다. 당시의 시관 중 그 누구도 그가 글자를 잘못 읽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다. 당시 시관이던 홍용조(洪龍祚)가 깜짝 놀라 말하길, “여러 시험관이 몰랐던 것을 그대는 어째서 혼자 스스로 밝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남들은 모를지라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찌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탈락을 자처했다. 그는 이와 같은 삶의 태도로 평생을 살았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732년 53세의 나이로 대과에 급제하자, 영조는 ‘이산두는 마음을 바로잡을 줄 아는 사람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신들 또한 ‘영남의 명망 있는 선비’라고 하며 영조에게 인재를 얻은 것을 경하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이산두, 그의 관직 생활은 어땠을까?




지금 남포현은 피폐한 고을입니다.


1735년 남포 현감(藍浦縣監)에 제수된 것이 그의 유일한 지방관 경력이다. 당시 남포를 비롯한 충청도 내포 지역은 거의 모든 군현이 피폐한 상황이었다. 조정에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관리를 선발하고자 했다. 당시 판서 김시형(金時炯)은 ‘명예와 재물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이산두를 적임자라고 추천했다. 남포 현감으로 부임한 이산두는 남포현의 오래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산두가 스승 권징의 아들인 병곡(屛谷) 권구(權榘, 1672∼1749)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남포현의 사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1735년 (영조 11) 권방숙에게 주다.

남포현(藍浦縣)은 아주 쇠잔하고 각박하며 피폐한 고을입니다. (중략) 대흉년을 겪은 뒤로는 더욱 형편없어졌습니다. 관청의 곳간이 텅텅 비어 재원의 운용이 매우 어려워, 사람을 궁하게 만드는 귀신이 밑바닥까지 침입한 것입니다.


남포현의 백성들은 궁핍한 삶을 살았다. 부실한 호적 관리와 편중된 군역 부담 때문이다. 호적의 경우 매년 도망자나 사망자가 생기면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기록했다. 이른바 허호(虛戶)로 채워 넣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호적상으로는 100명이 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70~80명 정도만이 거주하는 것이 된다. 문제는 정부에서 조세를 징수할 때 호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를 기준으로 세금을 정하는 데 있다. 결국 허호로 인한 과도한 조세부담은 백성들의 삶을 곤궁하게 만든다. 이산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직을 그만두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으면서, 관찰사와 정면 대결하여 허호의 폐단을 바로잡았다.

또한 남포현에서는 건장하고 부유한 군역 대상자들이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군역을 피하고 있었다. 이에 이산두는 가난한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군역 회피자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군역에 동원했다.

1736년 (영조 12) 권방숙에게 주다.

본 고을의 조세 나르는 배가 두 번이나 전복되고, 다른 관선도 연이어 이곳에서 전복당하는 것 때문에 조사하고 확인하는 일로 여름 석 달을 말 위에서 보냈습니다. (중략) 월초에 좀도둑이 구멍을 뚫고 잠입해서 일상생활에 쓰는 의복과 기명을 전부 훔쳐 가는 바람에, 관청의 살림이 씻은 듯이 텅 비게 되어 어떻게 조치할 길이 없습니다.


이외에도 관청 기금을 비축하여 그 돈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漕運船)을 건조하여 세곡 운송에서 발생하는 민폐도 없앴다. 이처럼 남포 현감으로 약 2년 여 간 재직하는 동안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관행이나 폐단을 없앴고, 이를 통해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백성들에게는 관대했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삶의 표본으로 여겼으며 영남의 종사로 인정하고 존경했다.




초상을 보니 그를 보는 것 같구나.


1749년 69세의 이산두는 봉산 아래에 작은 집을 짓고, 새로운 거처를 기념하는 시를 지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평생의 일을 점검하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인간 난졸옹(게으르고 졸렬한 노인)이라 부르는 게 적당하네”라고 했다. 평생 호를 갖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이 ‘난졸(懶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가 살았던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에 가면, 그의 작은 집은 없고, 대신 ‘어필영정각(御筆影幀閣)’이 남아 있다. 이곳은 영조가 이산두에게 하사한 영정의 원본을 보관하던 곳이다. 늦여름, 어필영정각은 무성한 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기와 위의 잡풀이 옛 명성의 허무함을 느끼게 했다. 쇠락한 어필영정각은 문이 닫혀있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고, 담장에 기대어 ‘어필영정각’ 편액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어필영정각(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침류정(左), 정헌대부청헌공난졸재이선생기적비(中), 어필영정각(右)



앞에서 언급했듯, 이산두 초상화의 원본은 이산두 본가에 보내고, 2장을 더 모사하여 하나는 궁중에, 남은 하나는 기로소에 보관하게 했다. 이때 당시 작성한 3장의 영정 중 현재 남아 있다고 확인되는 것은 두 장이다. 한 장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영정 오른편에 ‘지사이산두구십세진(知事李山斗九十歲眞)’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모사본일 것이다. 남은 한 장은 이산두 문중에서 관리하다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영정으로, 『승정원일기』의 기사에 의하면 이산두 문중에서 관리하던 영정이 원본일 것이다.


이산두 영정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는 모두 3점의 이산두 영정이 기탁되어 있는데, 그중 두 점은 훼손이 심하고, 남은 한 점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영정 원본 1점이 3점이 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아마도 이산두의 손자 이전춘과 후손들은 영조와 정조의 어필이 있는 영정을 영정각(影幀閣)을 세워 소중하게 보관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 때 있었던 서원 철폐령 이후 영정각이 훼철된 만큼 영정도 훼손되었을 것이다. 이에 후손들은 원본 영정을 모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원본에 있던 어필을 잘라내어 모사본에 붙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어필을 모사해서 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태가 양호한 영정 좌우에 무언가를 붙였다 떼어낸 흔적이 있는데, 원본의 어필이 있던 자리가 아닐까 싶다. 영조와 정조의 친필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이산두 영정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이산두의 마지막 영예는 1871년(고종 8)에 청헌(淸憲)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이다. ‘청헌’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은 그의 일생을 ‘의롭지 않은 것을 멀리하였고[避遠不義曰淸] 선을 행한 것이 법이 될 만하다[行善可紀曰憲]’고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후손들은 이산두에 대한 행적과 유훈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역사에 묻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어필영정각’ 옆에 ‘정헌대부청헌공난졸재이선생기적비(正憲大夫淸憲公懶拙齋李先生紀蹟碑)’를 세웠다.


정헌대부청헌공난졸재이선생기적비(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혼령이 있다면 내게 감응해 흠향하라.


1772년 4월 20일 이산두는 정침(正寢)에서 작고하셨다. 향년 93세였다. 그의 부고가 궁에 알려지자 영조는 직접 제문을 지어, 안동 부사 조창규(趙昌逵)를 보내 이산두의 영전에 제사를 올리게 했다. 영조는 제문에서 “경상 감사가 부음을 알리니 내 이를 듣고 슬퍼했네. 경의 혼령이 있다면 내게 감응해 흠향하라”고 하며 신하의 죽음을 애도했다.

지금까지 이산두의 삶과 관직 생활, 초상화에 얽힌 이야기를 했다.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이 쓴 그의 행장과 이산두가 쓴 시와 편지를 읽으며 ‘무자기(毋自欺)’ 이 세 글자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기껏해야 자기소개서를 쓸 때만 생활신조를 생각하기에 삶의 기준이 때때로 바뀌어 나에게는 후하고 남에게는 박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산두는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신조를 갖고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너그러웠다. 상대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선한 점을 보고 칭찬했다. 그는 90이 넘는 평생 동안 이러한 삶의 자세를 지키고자 했다. 그렇기에 그의 주변 사람들은 물론 국왕인 영조까지도 그에 대해 존경심을 표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에필로그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단입니다. 지원자께서는 14기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면접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합격이라니!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면접심사 ‘질의응답’ 때 적절한 답을 못한 것 같아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떨어지면 내년에 다시 도전하리라 마음먹었는데 합격 문자를 받으니 날아갈 듯 기쁘다. 손짓과 몸짓을 하며 생동감 있게, 그렇지만 너무 과장되지 않게 이야기하듯 어린 손주를 안고 연습하던 때가 생각난다. 빈이를 안고 ‘별을 좋아한 소년 장영실’을 외우고 외우기를 수백 번! 앞으로 있을 월례 교육이 기대된다.


2022 제14기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면접_대구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100세 시대, 아니 그 이상의 기대수명도 가능한 시대가 왔다. 그러나 100세 시대란 말이 무색하게 50대 중후반이 되면 일선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당연한 시대이기도 하다. 나이가 주는 지혜와 여유는 빠르게 흐르는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것일까? 여기 당당한 직업의식으로 다시 사회에 선 이들이 있다. 바로 ‘한국국학진흥원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이다. 경쟁률만 10대 1, ‘이야기할머니’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엄마와 할머니들! 세월이라는 지혜와 경험을 무기로 다시 사회로 내딛는 그들에게서 당당함을 본다.

무엇을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80이 넘은 나이에 임금의 끊임없는 부름을 받고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이산두, 78세의 나이로 미국 골든글로브 TV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오징어 게임>의 오영수, 75세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미나리>의 윤여정, 73세의 실버 요가 강사의 삶을 살고 있을 미래의 나, 그리고 나이 듦의 새 역사를 쓸 누군가 …….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유교넷 (https://www.ugyo.net)더보기
2.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더보기
3.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https://storymama.kr)더보기
4. 이산두, 권진호 외 4명 역, 『난졸재선생문집』 한국국학진흥원, 2012.
5. 배한철,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생각정거장, 2016.
6. 증자·자사, 김원중 역, 『대학·중용』, 휴머니스트, 2020.
7. 김윤제, 『기사지 해제』, e-규장각 자료총서
“양로연(養老宴)을 열고 비둘기 지팡이를 선물하다”

낙남헌양로연도(落南軒養老宴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문해, 초간일기, 1588-11-10 ~

1588년 11월 10일, 봄날같이 화창하고 따뜻한 날이다. 이 지역의 어른 70여 명의 노인을 모시고 잔치를 여는 뜻깊은 날, 날씨까지 포근하고 화사하니 이를 준비한 권문해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관아의 앞뜰에 마련된 양로연(養老宴)에 참여한 남자들은 오른편에 자리하고, 여자들은 왼편에 자리하여 종일 취하고 배불리 먹으면서 춤도 추며 흥겨운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권문해는 비둘기 모양이 새겨진 지팡이 구장(鳩杖)과 수건을 만들어 양로연에 참석한 노인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장수를 비는 잔치들”

이원기로회계첩(梨園耆老會契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장석영, 흑산일록, 1919-08-22

1577년 9월, 금난수의 고모와 고모부 이징(李澄)의 사위 박세현(朴世賢)이 그의 장인과 장모를 위해 온계에서 잔치를 열었다. 금난수로서는 두 해 전 돌아가신 부친이 떠올랐기 때문에 고모, 고모부의 장수를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서글픈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장수를 비는 날인만큼 모두가 받은 상마다 꽃이 꽂혀 있었고, 술동이에는 향기로운 술이 찰랑였다. 잔치에서 여러 자손들이 돌아가며 노부부에게 잔을 올리는 헌수(獻壽)를 하였고, 악사들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다음 달에는 금난수의 숙부인 금희가 노인회를 열었다. 원래는 봄과 가을마다 나라에서 퇴직한 노 관료들을 위해 베풀어 주는 것이 기로연의 원형이었으나, 사적으로도 노인들이 한데 모여 자신들의 장수를 자축하였다. 노인들의 행사인 만큼 금난수는 이곳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근처에 머물며 물심양면으로 행사를 도왔다. 숙부를 모시는 것이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갑자년에 태어나 갑자년을 맞이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24-12-04 ~

1624년 12월 4일, 장흥효는 명종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선조를 거쳐 광해군을 지나 인조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는 일기에 스스로 “갑자년에 태어나 다시 갑자년을 맞이하고 12월 4일에 태어나 다시 12월 4일을 맞이했다”고 기록했다. 어찌 보면 환갑이라는 나이가 마냥 신기했던 모양이다. 갑자년에 태어나 다시 갑자년을 맞이했다는 것은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다른 생명체로 거듭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이는 들어가지만 오히려 덕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덥수룩해졌으며 사람의 됨됨이는 더욱 볼품이 없었다. 다시 살아가는 갑자년이라고 하지만 어린아이로서의 갑자년과는 사뭇 달랐던 셈이다.

여러 지역 인사들이 그를 찾아왔다. 무려 3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의 환갑을 맞아 술을 대접하고 각기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자신이 보잘것없는 노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런 자신에게 이렇게 성대하게 맞아주는 것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부끄러움만 더해갔다.

자신이 읽은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60세에 60년만큼 교화되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60세에 60년만큼 잘못된다고 하면서 차라리 자신을 버리고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지만 도리어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과 정성을 주고 있으니 더욱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은 오늘로 그만두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었다.

“기로소 대신에게 연회를 베풀다”

권상일, 청대일기,
1719-04-16 ~ 1719-04-18

1719년 4월 16일, 숙종은 기로소(耆老所) 대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로소 대신으로 당연히 참여해야 할 영중추부사 이유(李濡)가 대간의 논박을 받아서 궐에 출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회에 이유가 빠질 난처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동궁은 여러 번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타이르고 승지와 함께 출사하기를 권하였다. 결국 동궁의 조처로 숙종이 진행하고자 했던 연회가 개최되었다.

연회는 오전 경현당에서 진행되었다. 숙종은 건강상의 이유로 나오지 못했고 세자만 참석했다. 이날 참석한 기로소 대신은 영중추부사 이유(李濡),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판중추부사 김우항(金宇杭), 공조 판서 신임(申銋), 형조 판서 황흠(黃欽) 등이었다. 본래는 전 판서 최규서(崔奎瑞)도 참석해야 했으나 고향인 용인으로 내려간지 오래라 관직을 사양한 상태였다. 다른 승지들이나 시위하는 신하들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여 오로지 장악원 악공등만 참여했다.

오후에 연회가 끝나고 기로소 신하들은 궁궐의 꽃을 가득 꽂고 크게 취하여 부축을 받으면서 나왔다. 연회가 성대하기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기로소 본청에서 다시 한번 연회의 자리를 마련하자는 명령이 내려왔다. 한번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권상일은 여태껏 있지도 않았던 성대한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숙종은 기로소 신하들에게 ‘경들은 모두 이미 칠십 팔십이 되었으나 다들 변이 없이 건강한데 나는 이제 겨우 육순이나 몸은 병들고 눈은 어두우니 이제 이와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기로소 대신들보다 숙종이 10여 세 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암시였을까 숙종은 기로소 대신보다 먼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문중 모임을 주관하다”

최흥원 역중일기, 1752-03-17 ~

1752년 3월 17일. 최흥원은 어제부터 문중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기거하는 칠곡 마을을 비롯하여 인근 지묘 마을, 해안 마을 등 최씨 일족이 거주하는 동네마다 모두 사람을 보내어 참여하기로 한 모임이었다. 본래 모임을 개최하기로 한 것은 어제였는데, 어제 해안 마을의 일족들이 도착하지 않아 개회가 하루 늦어졌다.

오늘 아침 일찍 해안 마을의 일족 노인이 비로소 도착하였다. 모두 모여 자리에 앉은 이후, 남산에 사는 일족의 아재를 문중의 어른으로 추대하였다. 추대한 어른을 특석에 앉도록 요청한 이후, 임신(壬申)생 이후에 출생한 환갑이 되지 못한 일족들이 모두 어른에게 공경히 절을 올렸다. 앞으로 문중 모임에서는 이 어른이 모든 일을 결정할 어른이었다.

아울러 앞으로 문중 일을 도맡아 할 실무자인 유사도 뽑았다. 성주에 사는 일족의 어른을 유사로 선발하였다. 유사로 선발된 어른은 첫 업무로 문중에 관한 절목을 수정하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하필이면 그 일을 최흥원에게 부탁하였다. 지난 신해년에 만든 완의를 수정하고, 새로 결정된 일을 보충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최흥원은 거듭 사양하였으나 유사 어른의 의사가 공고하여 결국 일을 맡고 말았다. 최흥원은 일을 맡은 이상 문중의 일이니만큼 온 힘을 다하겠노라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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