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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단풍나무 아래 서서,
선원 김상용의 마음을 느끼다,
청풍각(淸楓閣)

작년 가을에 나는 뭘 입고 다녔나? 입을 옷이 없다. 지난가을에 즐겨 입던 검은색 카디건에 보풀이 생겼다. 그래, 이참에 새 카디건을 사야지. 그때부터 폭풍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자주 이용하는 의류 쇼핑몰에 키워드 ‘카디건’으로 13,000개 이상의 상품이 검색되었다. 다양한 색과 디자인의 카디건 중에 딱 하나를 고르기가 쉽지 않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겨우 주문을 했다. 몇 번의 배송 지연 후에 드디어 도착한 카디건! 색상, 디자인, 소재 모두 마음에 들었고, 심지어 나에게 제법 잘 어울린 새 카디건! 하지만 내 옷장 한편을 차지하지 못했다. 아뿔싸, 사이즈가 작아도 너무 작다.

신중하게 선택했지만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이 올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왕복 택배비를 지불하고 옷을 반품하면 된다. 아주 잠깐 ‘M 사이즈를 선택할 걸’ 하는 후회를 하겠지만 그렇다고 나의 일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떤 선택들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따라다닌다.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우리는 사소한 선택부터 중대한 선택까지 수많은 결정을 한다. 그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나의 역사가 된다.

가지 않은 길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그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

(중략)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난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로버트 프로스트(미국 시인, 1874~1963)


우리는 늘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몇 백 년 전의 역사를 돌아볼 때도 선택 너머에 있는 것에 기웃거린다. 조선 태종이 세종이 아닌 양녕대군을 후계자로 삼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문자를 사용하고 있을까?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임진왜란 때 누루하치의 원군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명에 대한 의리도 좋지만 청과 실리를 챙기는 외교 정치를 했다면?

역사의 어느 한순간이었던 그날, 그 누군가의 선택이 지금의 내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1636년 12월 14일,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된 김경징(金慶徵, 1589~1637)이 강화도 방비에 최선을 다했다면 1637년 1월 22일의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불길 속에서 생을 마감했을까? 깊어가는 가을, 이번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후금에 대한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형, 선원 김상용의 생애를 돌아보고 그의 공간이었던 ‘청풍각(淸楓閣)’을 이야기하려 한다.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1637년 1월 21일 밤, 통진 가수(通津假守) 김정(金頲)이 급하게 김경징을 찾았다.

“적이 낙타에 배를 싣거나, 동거(童車)에 배를 실어 갑곶 나루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밤을 틈타 물을 건너려는 것입니다.”

김경징은 오히려 첩보를 전하러 온 김정을 ‘군정을 요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죽이려 한다. 때마침 갑곶을 지키는 장수의 보고가 연이어 들어오자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김경징은 우왕좌왕하며 강화도를 지킬 계책을 급히 세운다.

한 달 전인 1636년 12월 14일, 김경징은 강화도 검찰사에 임명되어 강화도 방어의 임무를 띠고 강화도로 향했다. 이때, 김상용은 종묘사직의 위패를 받들고, 빈궁과 원손 및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피난길을 떠났다.

강화도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 믿고 있는 김경징은, 강화도 방어에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하지 않고 날마다 술을 마시고 주정을 일삼았다. 그래서 누군가 적군이 강화도를 넘보고 있다고 전해도, 강이 얼었다는 핑계로 방비(防備)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성문을 열고 적군을 두 팔 벌려 맞이하는 꼴이 되었다. 적병이 나루터에서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쏘면 그 포환이 강을 넘어 육지 몇 리 밖에 떨어졌다. 24일 새벽, 적의 배 1척이 전진하여 한 손에 방패를 쥐고 한 손으로는 노를 저으며 전선 사이를 뚫고 해안에 도착했다. 우리 관군이 총을 쏘려고 했지만 화약에 습기가 차서 폭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쏠 만한 화살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적의 배가 바다를 뒤덮고 강화도에 도착했다. 김경징은 나룻배를 타고 도망을 갔다. 성이 함락되는 순간이었다.

강화도는 지금 사방이 적으로 가득하다. 도망가는 사람, 자결하는 사람, 적의 손에 죽은 사람들이 뒤엉켜 있다. 눈 위를 기어 다니는 엄마 잃은 갓난아이, 죽은 엄마의 젖을 하염없이 빨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허망한 생각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언덕과 들에 가득하다. 손쓸 새도 없이 들이닥친 적군에 강화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를 군사들의 발에 밟히거나 끌려가고 살고자 뛰어들었으나 결국 바닷물에 빠져 죽고 만 사람들이 사방에 널렸다.

적의 한가운데, 나는 도망갈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그 밖에 다른 선택지가 있기나 한 것일까? 나는 도망칠 수만 있다면, 영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저기,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나는 이미 늙고 병든 몸이다. 지금 남한산성의 소식이 끊겨 임금의 안위를 알 수 없고, 강화도 역시 함락되었으니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구차히 살려고 하겠는가.”

김상용이다.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건네며 부탁한다.

“네가 만일 온전히 살거든 이 옷을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할 도구로 쓰도록 하라.”

김상용은 이 말을 남기고 곧장 남문으로 가서 화약 상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시자(侍者)에게,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를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

평소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시자는 불을 가져오지 않았다. 하지만 김상용은 끝내, 화약 상자 속에 불을 던졌다. 사람과 문루(門樓)가 날아가 보이는 것이 없었다. 이제 막 13세 살이 된 김상용의 손자 수전(壽全)과 종도 함께 죽음을 맞았다.

전쟁이 끝난 후 김상용의 여러 아들이 시신을 찾고자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이에 이해 4월 16일에 남겨 놓은 의관(衣冠)을 가지고 양주 도혈리의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그리고 병자호란까지 조선조 최대의 국난기를 살았던, 김상용의 시대가 저물었다.




언로(言路)가 막히지 않은 나라를 꿈꾸며


때는 1561년(명종 16) 5월 9일 오시(午時), 한양(漢陽) 수진방(壽進坊) 외가에서 김상용이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사미당(四味堂) 김극효(金克孝, 1542~1618)이고, 어머니는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의 따님 동래 정씨(東萊鄭氏, 1542~1621)이다.

김상용은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보다 글을 읽으면서 방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리고 말을 함부로 하거나 웃지 않고 행동이 단정하고 법도에 맞아 주위 사람들이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1582년(선조 15) 2월 김상용은 22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6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謀叛) 사건이 일어나자 김상용은 성균관 태학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김상용은 역모가 일어나게 된 원인과 옥사가 많이 일어나는 가운데에서도 무고한 사람은 구분해야 함을 진언했고, 선조로부터 좋은 비답(批答)을 받았다.

이후 김상용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거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김상용은 말의 길, 언로(言路)를 강조하며 선조에게 군신 간의 소통을 강조하였다.

“상께서 즉위하신 지 이제 40년이 다가오는데 특별히 직간을 하다가 죄를 얻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중략) 상께서 수용하시는 뜻을 보이신 뒤에라야 초야의 말이 위에까지 올라올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소신의 생각에는, 오늘날의 근심은 언로(言路)가 두절된 데 있고 이들 왜적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이곳에 있는 대신이나 중신들이 모두 할 말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지 않고 인견(引見)하실 때는 보통으로 진달하고 물러간 뒤에는 초기(草記)로 와서 바치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적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2월 10일
‘대신 및 비변사 당상과 일본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상의하다’


김상용의 말처럼 언로(言路)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귀 막고 눈 감은’ 집권자들은 어느 시대나 있다. 그래서 지금도 이 말은 유용하다. 지금이야말로 도끼로 맞아 죽을지언정 말을 물리지 않겠다는 결의, 지부극간(持斧極諫)을 갖춘 신하와 아랫사람의 충언을 경청하는 왕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이다.

누구보다 임금과 백성을 걱정하던 김상용은 그만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고 만다. 1602년(선조 35) 대북과 소북의 갈등 속에서 유영경(柳永慶, 1550~1608)의 배척을 받은 김상용은 평안북도 정주로 좌천되고 만 것이다. 당시 김상용은 아들의 죽음에 장례도 미쳐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부임지 정주로 떠났다. 김상용은 아들을 잃었음에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였다. 그는 임기를 마칠 때까지 애민 정신으로 정주의 농민들의 구휼과 교육에 힘썼다.

“정주 목사 김상용은 몸가짐이 청렴하고 근실합니다. 처사가 분명하고 매듭이 있어 간사한 서리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그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으며, 학교와 군무(軍務)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 닦였으므로 치적이 도내에 으뜸입니다. 다만 임기 만료되는 시기가 가까이 오므로 백성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머무르게 해주기를 일제히 호소하여 마지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7년 7월 22일
‘평안도 내 수령들의 포상에 관한 감사 김신원의 장계’


1604년(선조 37) 8월, 김상용은 2년여의 임기를 마치고 정주를 떠날 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가 탄 수레를 에워싸고 길을 막았다. 목민관으로서 그가 베푼 성정을 잊지 못한 정주 사람들은 그를 위해 송덕비를 세워 그의 공을 기렸다.

1617년(광해 9) 이이첨의 무리들이 인목대비 폐위를 주청(奏請)할 때, 김상용은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부친의 병환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하였다. 그 이듬해 부친이 돌아가셨다. 61세에 3년간의 원주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의 서강으로 돌아왔다.

1623년(인조 1)에 김상용은 인조반정 이후 다시 벼슬에 나갔다. 반정 초기, 훈신들은 광해군 때의 것은 무엇이든 개혁하고자 했다. 이에 그는 인조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그 심한 것만 고치는 것이 옳습니다. 일의 옳고 그름을 살피지 않고 한결같이 지난날의 것이라 하여 고치려고 생각한다면 백성이 그 시끄러움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인조 역시 기꺼이 이 말을 받아들였다. 전일의 것이면 좋은 정책일지라도 무조건 고치려고 하는 지금의 모습과 닮아있다. 누가 직간(直諫)할 것인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출궁할 때 검찰사로 선발되어 병사를 모집하고 양식을 모금하여 조달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할 때, 유도대장의 직책을 맡았다. 1630년(인조 8)에 김상용은 70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간 뒤 우의정과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수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다. 1636년(인조 14) 김상용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이듬해 1월 22일 남문루에서 76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

명종 대 태어나 인조 대에 세상을 떠난 김상용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위로를 받았을까?




청풍각(淸楓閣)이 있는, 청풍계(靑楓溪)와 청풍계(淸風溪) 그곳에서


서울 인왕산 동쪽 기슭,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 청풍계(靑楓溪)라 불리던 계곡이 있었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가 바로 청풍 계곡이 있던 자리다. 풍계(楓溪)는 김상용의 또 다른 호인데, 청풍계에서 따왔다. 원래 삼당(三塘) 김영(金瑛, 1475∼1528)의 집이었던 태고정(太古亭)을 종증손인 김상용이 물려받았다. 선조(宣祖)는 청풍계의 주인이 된 김상용에게 ‘청풍(淸風)’이라 하는 어필(御筆)을 하사했다. 김상용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써준 태고정과 청풍각(淸風閣) 편액을 대들보에 걸었다. 이때 ‘푸른 단풍나무가 많은 계곡’에서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으로 의미가 바뀌게 되었다. 청풍(淸風)은 백이와 숙제의 영원한 충절을 표현한 ’백세청풍(百世淸風)’에서 유래한 말이다.

인왕산의 청풍계 일대와 태고정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인 소유가 되어 훼철되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안동시 풍산읍에 태고정을 건립했다가 2006년에 소산마을로 이건(移建) 하였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는 북애공종택에서 기증한 태고정과 청풍각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이 중에서 태고정 편액은 한호의 글씨가 분명하지만 청풍각 편액은 그의 글씨가 맞는지 분명하지 않다.

안동김씨 집성촌인 소산마을은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있다. 이곳에 가면 청원루, 태고정을 볼 수 있다. 김상헌이 여생을 보내려고 지은 청원루(淸遠樓)는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인데, 현재 문화재 보수 공사 중이라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 태고정은 웃자란 잡풀이 에워싸고 있어 가까이 가기 힘들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태고정이 외롭게 서 있다. 소산마을의 태고정에는 한호의 것이 분명한 태고정 편액은 있고 청풍각(淸楓閣) 편액은 없다. 선조의 ‘청풍’ 어필을 보관했다고 전하는 홍벽색(紅碧色)의 비단이 방 가운데 걸려 있다.


태고정 문 앞


태고정 마당


태고정 편액


태고정 내부


청풍각 편액, (출처 : 한국의 편액)



조선의 문인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시문집을 남겼다. 문집 『선원유고(仙源遺稿)』에는 임진왜란 등 전란의 체험을 표현한 시와 청풍계의 생활이 녹아든 전원시 등이 수록되어있다. 김상용의 벗이었던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의 문집 『상촌집(象村集)』 제7권에 김상용의 시와 그 시에 차운한 신흠의 시가 있다. 김상용의 시를 살펴본다.

歲云暮矣北風寒    해는 저물고 북풍이 차가워서
層氷塞河雪滿山    변방의 강물 겹겹이 얼고 산에 눈 가득하여
山中松桂盡摧殘    산중의 소나무와 계수나무도 다 꺾이었는데
況復澗底之孤蘭    더구나 깊은 골짝의 외로운 난초이랴
老夫不出獨閉關    늙은이 홀로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은 채
縮頸擁爐依蒲團    목 움츠리고 화로 끼고 포단에 의지하노니
美人羈棲在江干    미인이 강 가에 우거하고 있는지라
思之不見涕汍瀾    그리워도 뵙지 못해 눈물만 줄줄 흐르네


신흠이 이 시를 자신의 집 벽에 걸어두고 “금인(今人)의 말이 아니다”라고 했던 시의 일부이다. 김상용은 전쟁 중 한 해의 끝자락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나무와 계수나무, 난초는 차가운 북풍과 눈에 꺾여버렸다. 이는 전쟁이라고 하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나라의 인재들을 암시한다. 그리운 미인이 강가에 있다고 한 것은 임금이 압록강까지 피난을 간 절박한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김상용은 청풍계에서 부친을 모시고 산수 간의 흥취와 풍류를 즐겼다.

隨風落葉滿空林    바람 결에 낙엽이 빈 숲을 가득 채우니
錦積紅堆一膝深    울긋불긋한 잎들이 무릎이 빠지도록 쌓였네
付與園丁供煖堗    산지기를 시켜 낙엽으로 구들을 덮히게 하니
山齋不怕曉寒侵    산속 서재에는 새벽 한기도 두렵지 않네


1년 12달의 절기를 따라 청풍계에서의 한가한 생활을 노래한 「산거축월유흥(山居逐月幽興)」 12수 중에 가을 낙엽을 소재로 한 「십월소엽난돌(十月掃葉煖堗)」이다. 지금의 우리가 인왕산의 청풍계를 가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청풍계의 절경과 함께한 인생샷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을 것이다. 그래서 SNS의 프로필 사진으로, 유튜브의 숏츠나 인스타그램의 릴스에 청풍계의 영상을 업로드할 것이다. 같은 풍경을 본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청풍계를 담은 「청풍계도(淸風溪圖)」를 남겼다. 김상용에게 인왕산의 청풍계는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의 공간이 아니라 생활 공간이었나 보다. 그의 작은 집 굴뚝으로 낙엽 타는 연기가 올라간다. 저녁에 데운 구들은 새벽에 조금은 식어있겠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의 시를 보니 참나무 장작더미 사이에 포일에 싼 고구마를 넣고 관솔과 낙엽을 넣어 불을 피우던 외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보물 제1952호 정선 필 청풍계도 (鄭敾 筆 淸風溪圖),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출처 : 문화재청)




삶의 기로에 서서


가을이 되니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올 한 해 무엇을 남겼는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선택과 비록 오늘은 틀렸지만 내일은 맞을 수 있는 선택들 사이에 서 있다. 역사 강사 최태성은 『역사의 쓸모』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기에 그때마다 막막하고 불안하지요.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역사 속 인물들은 이미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의 선택을 들여다보면 어떤 길이 나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역사가 불확실한 삶의 이정표가 되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벼슬에 나아갔을 때나 물러났을 때 한결같이 올곧게 살다간 선원 김상용의 생애를 들여다보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더보기
2.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더보기
3.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더보기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더보기
5. 김상헌, 정선용 역, 『청음집(淸陰集)』, 한국고전종합DB
6. 신흠, 임정기 외 7명 역, 『상촌집(象村集)』, 한국고전종합DB
7. 최태성, 『역사의 쓸모』, 다산북스, 2019
8. 손혜숙 역, 『가지 않은 길』, 창비, 2019
9. 지두환, 「仙源 金尙容의 家系와 政治的 活動」, 『한국학논총』 46호,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0. 강혜선, 「김상용의 생애와 한시 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 8호, 한국한시학회, 2003
11. 오석원, 「선원 김상용의 생애와 의리사상」, 『유교사상문화연구』 10호, 한국유교학회, 1998
“가을 풍경에 술 생각이 간절해지다”

추수한 작물을 타작하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오희문, 쇄미록, 1599-08-27

1599년 8월 27일, 오늘 오희문은 계집종 중금의 밭보리를 타작하는 일로 인아와 덕노를 데리고 옥동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하루 종일 종들이 일을 하는 모습을 감독하고 늦은 오후께 아들 윤해와 함께 걸어서 말지산 뒷산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서는 계집종들이 거둔 보리를 묶고 있었고, 한켠에서는 인아의 밭에서 조를 수확하고 있었다. 오희문은 인아와 함께 종들이 일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한참 일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이켜 사방을 바라보니 가을산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단풍이 들어 비단 같은 풍경을 이루어 술 마시기에 안성맞춤인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는 한 병 소주도 없고, 함께 술잔을 기울일만한 이웃도 없으며, 아우도 먼 곳에 있으니 마시려 해도 마실 수가 없었다.

비록 간절한 술 생각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높은데 오르니 기분이 몹시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이웃 사람들과 아우를 데리고 이곳에 올라 거나하게 술을 한잔 하며 이 정취를 즐기리라. 오희문은 이렇게 다짐하며 일을 마친 종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강가에서 가을 풍경을 즐기다”

지리산 천왕봉의 가을(출처: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 김광계, 매원일기,
1638-08-19 ~ 1638-08-22

1638년 8월 19일, 가을이 깊어 풍경도 크게 변하였다. 김광계는 재종숙 김령(金坽)의 집에 갔다. 김령의 집에 가니 사종질 김확(金確)의 사돈인 김응조(金應祖)가 있기에 앉아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기분이 났는지, 김응조과 김확, 그리고 금발(琴撥)까지 함께 말을 타고 다정하게 강가로 유람을 하러 나갔다. 말고삐는 나란하고, 강바람은 시원했다.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회까지 쳐서 술에 곁들여 먹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외유를 하고,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잠도 함께 잤다.

다음날에는 김광계의 셋째 동생 김광보(金光輔)와 넷째 동생 김광악(金光岳)까지 합세하여 다시금 말을 타고 강을 따라 갔다. 강 양쪽으로 단풍잎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어 그 광경이 과연 사랑할 만 하였다. 이번에는 오담(鼇潭)에 머물러 배를 띄웠다. 배 위에서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고, 배가 강물에 흘러가면 다시금 노를 저어 올라오고 하며 뱃놀이를 즐겼다. 이 날은 오담과 가까이 있는 역동서원에 가서 잤다.

다음날에도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며 질리지도 않고 날이 저물 때 까지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저물 때 쯤 애일당(愛日堂)에 올라서 또 술독을 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기고 있자니 달이 이미 고개 위로 넘어와 강물에 비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시고 여러 벗들과 도산서원으로 가서 잤다.

다음 날인 22일에는 시를 지으며 놀았다. 그러다가 김광악이 먼저 떠났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 저녁에 단사협(丹砂峽)에 갔다. 단사협의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 듯했고, 그 절벽의 둘레는 몇 리나 되니 거대한 절벽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절벽의 아래에는 맑은 물이 흘러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였다. 물 위로 단풍나무가 거꾸로 비추어 보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흘간 벗들과 함께 강을 따라 가을 풍경을 즐기자니 이번 가을은 더욱 풍성하게 느껴졌다.

“산이 유명해질수록 승려들이 더 고달파진다고?”

승려가 멘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08-07 ~ 1587-08-08

1587년 8월 7일, 황여일과 그 숙부 황응청는 이 날 내영산을 구경하고 돌아와 보경사(寶鏡寺)에서 잤다. 조매당[趙梅堂, 조정간(趙廷幹)]은 대두(大豆)를 보내어 연포탕(軟泡湯)을 끓이게 하니 이는 우리들과 배부르게 먹고자 함이고, 김명숙(金明叔)이 소설책과 오래된 술을 남겨두었으니 이는 우리들과 취하고자 함이다. 배부르게 먹고 또 취하면서 승려들과도 더불어 우도(友道)를 함께 하였다.

8월 8일, 학연(學衍)이 세수를 하고 황여일에게 문안하며 말하였다.

“이 산(내영산)은 예전에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선동(仙童)이라는 승려가 굴집을 만들어 살았었는데, 근래 몇 년 사이에 수령으로 부임한 성(姓)이 옹(邕)이라는 사람이 은사(隱士)인 체 하면서 이곳을 찾아와 도원(桃源)을 구경하고 돌아가면서 동경부윤(東京府尹)인 이구암[李龜巖, 이정(李楨)] 선생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이구암 선생은 곧장 사령운(謝靈運)의 여행을 본받아 이곳을 여행하였고, 여름에 재차 유람하였습니다. 이구암 선생은 선비들이 우러러 보는 분이기에, 여행하는 자들은 구암(龜巖)이 다닌 곳과 그 자취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므로 구암(龜巖)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고, 이 산과 함께 이름이 오래가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영남에서 유람하는 선비로서 산을 말하는 자는 봄에는 진달래가 볼 만하고, 가을에는 단풍 숲이 아름답다며, 내영산을 앞 다투어 칭찬하였습니다, 공무를 띠고 지나가던 중앙 관료와 지방에 부임한 관리에 이르기까지 또한 계절마다 묵어갔습니다. 이에 승려는 가마꾼이 되고 절은 밥을 지어 나르는 여관이 되었습니다. 이 산이 유명해진 것은 우리 승려들에게는 심한 재앙입니다.”

“산을 오르기 전에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다”

『근사록』(출처: 문화재청) 권상일, 청대일기,
1719-04-16 ~ 1719-04-18

정구(鄭逑)는 이인개(李仁愷),이인제(李仁悌) 형제와 함께 사촌(沙村)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느 날 곽준(郭䞭)이 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며칠을 즐겁게 보냈다. 정구는 이들과 함께 가야산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가야산은 이 고을과 접해있는데 마치 신선이 사는 곳과 같은 절경을 자랑한다네. 나는 한번 유람한 적이 있지만 자네들은 그렇지 않으니 아쉽지 않은가? 이맘때라면 단풍과 국화꽃이 한창일 것이고, 구름이나 안개도 끼지 않는 시절이니 우리 함께 가야산을 두루 돌아보고 정상에 올라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고 “그리고 보니 마침 정인홍(鄭仁弘)도 지금 막 영천(永川)에서 군수직을 하다가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 있다고 하니, 마침 함께 할 좋은 때 일세”라고 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그렇게 하세”라며 동조해주었다 그 때부터 가야산 여행을 위한 여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9월 10일의 일이었다. 정구는 쌀 한 주머니, 술 한 병, 반찬 한 상자, 과일 한 바구니를 여행 중에 먹을 것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책을 준비했는데 「근사록(近思錄)」과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만을 넣었다. 정말이지 단출한 짐이었기에 중국 송나라 때 심괄(沈括)이 산을 유람할 때 갖춘 짐보다 간단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다음날 이인개가 먼저 출발하였는데 내일(12일)에 송사이(宋師頤)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김면(金沔)으로부터도 15일쯤에 성사(城寺)라는 절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정구 일행은 이날 출발하게 되었으므로 조금 더 빨리 만나자고 답신을 보냈다. 정구는 이인제, 곽준과 길을 늦게 떠났다. 여우 고개(狐嶺)를 넘을 때가 되자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당시 해가 진 산길을 걷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마침 같은 길을 가는 무인(武人)이 있어 같이 가기로 했다. 분명 힘이 되는 일이었다. 마침 선영(先塋 : 조상의 무덤)을 지나게 되었다.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묘소 쪽으로 절을 올렸다. 한강(寒岡) 지역에 도착하자 어시헌(於是軒)이라는 건물에 올라 옷고름을 느슨하게 하게 잠시 쉬었다. 경치를 내려다보니 밤하늘에 달빛은 맑았고 그 빛에 소나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달빛에 희게 빛나는 바위는 더 희게 보였고 소리로만 들리는 개울물은 차가운 기운을 전해왔다. 여행의 첫날이었지만 잠시나마 자연을 느끼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더니 가슴 속이 편해지고 세상의 복잡한 일이 사라진 듯 했다. 그러나 아직 오늘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촛불을 잡고 그날의 숙소에 돌아와 숙소에 소장되어있던 「주자연보(朱子年譜)」 중에서 「운곡기(雲谷記)」 부분을 한 번 읽은 뒤에 짐 속에 넣었다. 이 날은 매우 피곤하였기에 깨지 않고 곤히 잘 잤다.

“가야산에서 옛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다”

송민고 《나귀를 탄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만운, 가야동유기, 1786-08-22 ~

1786년 중추(仲秋:음력 8월) 이만운(李萬運)과 친척, 동료들이 성주의 가야산 아래에 모였다. 곳곳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모인 것이었다. 이만운으로서는 1772년 가야산을 유람한 이래 15년 만의 여행이었다. 그래서 감회가 깊었다.

8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말을 타고 회연(檜淵)에 도착했다. 다음날에는 이성민(李聖民), 정휘조(鄭輝祖)와 함께 길을 나서서 환선도(喚仙島)에서 밥을 먹고서 날이 저물어 쌍계(雙溪)에서 묶었다. 밥을 먹은 뒤에 정구(鄭逑)가 머물던 수도산(修道山) 무흘정사(武屹精舍)에 도착했다. 여기는 정구가 모은 책들이 소장된 무흘서재(武屹書齋)가 있었다. 정구의 지팡이와 신발, 책을 공경한 마음으로 살펴보고 무흘정사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해인사에 들러 하루를 머문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만운은 15년 전의 여행 경험을 떠올렸다. 풍경은 많이 바뀐 것이 사실이었다. 그의 인상에 남았던 멋진 폭포의 전경은 물살에 깎여 이전의 모습을 잃었다. 이만운은 이를 아쉬워했다. 다만 무흘정사는 몇 년 사이에 위치를 옮겼는데 도리어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이전의 자태를 잃지 않은 듯 했다. 월연(月淵)이라는 연못의 경치는 일찍이 보지 못한 경치였으며 해인사의 단풍의 붉은 비단 같은 모습에 감탄했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좋은 벗들과 함께 한 것이었다.

이만운은 이 즐거운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한 사람들의 성과 자와 이름을 종이에 써서 한 사람씩 나누어가졌다. 기념사진을 남길 수 없었던 시절, 집으로 돌아가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질 때 이 종이를 펴보고 위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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