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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수신과 학문에 마음과 힘을 다하다,
만수재(晩修齋)

2022년 12월 어느 날 초등학생 딸이 작년처럼 올해도 ‘제야의 종소리’를 듣자고 했다. 그러자, 뭐 어려운 일이라고. 섣달그믐,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는 롱패딩 안에 경량 패딩을, 그 안에 가디건과 목폴라, 마지막으로 내복까지 껴입고, 다시 롱패딩 위에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그럴 리가 없다. 이 엄동설한에 이불 밖은 위험해! 우리 가족은 포근한 잠옷을 입고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유튜브의 ‘온라인 타종행사’를 지켜볼 것이다.

‘금연, 체중계 앞자리 숫자 4, 전과목 올A, 울지 않고 말하기, 일일 만보 걷기’, 결과는 실패지만 과정만큼은 성공한, 우리 가족 2022년 신년 다짐은 아마도 계묘년으로 이월해야 할 것 같다. 가족의 눈에 담긴 내 모습이 웃고 있다. 웃고 있는 내 앞에 똑같은 모습으로 웃고 있는 가족, 서로의 눈부처가 웃고 있기에 아쉽지만 괜찮다. 올 한해 우리 가족에게 있었던 크고 작은 이슈들을 돌아보며 잔을 부딪쳤다. 막, 11시 59분 1초를 지나고 있다. 유튜브의 볼륨을 높이고 함께 카운트다운을 한다.

섣달그믐 밤을 보내는 마음은 옛사람이라고 다를까?

悠悠成老大    유유한 시간 속에 늙은이 되었으니
草草度光陰    허둥지둥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지
古壁燈火冷    오래된 방벽엔 등불이 차가운데
荒村雨雪深    황량한 마을엔 눈비가 깊어가네
那能六十化    어찌 예순의 변화를 기대할거나
徒媿二三心    그저 흔들리는 마음 부끄러울 뿐
惜取前頭景    앞날의 시간을 아끼며 보낼지니
眞功繼自今    진정한 공부 지금부터 이어 가리


소퇴계(小退溪)라 불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시다. 많은 날의 시간을 허둥지둥 흘려보낸 것을 후회한 이상정은 ‘예순의 변화’를 기대해 본다. 이 말은 『장자』 「우언」에서 나온 말인데 “나이 예순에는 예순에 맞게 변화하였다”라는 의미로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새롭게 변화함을 이른다. 그런데, 가만히 있기만 해서는 새롭게 변화할 수 없다. 그는 다가올 ‘앞날의 시간을 아끼며 진정한 공부는 지금부터’ 이어 나가리라 다짐한다. 이상정의 이러한 다짐은 ‘만수재(晩修齋)’ 편액에 집약되어 나타나 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의 웃는 모습이 2023년에도 계속 이어지기 위해 우리는 저마다 ‘수신(修身)’해야 하지 않을까? ‘검은 토끼의 해’를 맞이한 1월, ‘만수재’에서 새해 다짐을 한다.




만수재 편액을 바라보며,


2022년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만수재’ 편액 답사를 갔다.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한산이씨 대산종가에 도착하니, 차갑고 깨끗한 겨울 냄새가 겨울바람 끝에 실려 왔다. 종가를 지키는 우직한 개가 낯선 이의 방문을 알리자 종부님이 버선발로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셨다.


대산 이상정 종택


우리는 대산 이상정의 9대 종손 이방수 선생님과 사랑방에서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종손께서는 “선조들의 가학을 이어갈 수 있게 집안에 한학자 1명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비쳤지만 당신의 아들은 지금 다른 길을 걷고 있노라고 아쉬워하셨다. 종부님께서는 직접 덖어 만드신 우엉차와 도라지 정과, 송화다식을 대접해 주셨는데, 불쑥 찾아간 우리를 시집간 딸 반기듯 환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다.

종손께 직접 대산 이상정의 삶과 학문에 대해 들으니 오랫동안 흘러온 대산종가의 기품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 가문을 일으키고 그 가풍을 계속 이어지기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가학을 계승하는 것도 어렵지만 공간을 보존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종손께서는 손 볼 곳 많은 종가의 이곳저곳을 고치다가 다치기를 여러 번 하셨는데, 이번에는 그 다친 정도가 심해서 왼쪽 어깨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수술을 앞둔 종손께서는 곧 있을 대산 이상정의 기제사를 걱정하셨다.


종택 이곳저곳을 설명해주신 9대 종손 이방수 선생님


숨이 더욱 끊어질 듯하였고, 말씀도 이미 분명하지 않았다. 선생께서 평소에 주무실 때에 반드시 몸을 기울여서 누우시고 손과 발을 가지런히 하였다. 병이 들고 나서 병이 깊어질 때까지 고치지 않으셨다. 이날 날이 새려고 어둑한 때에 선생께서 조금씩 몸을 돌렸는데 상체는 바르게 누웠는데 하체는 여전히 기울어 있었다. 시자가 부축해서 바르게 하였다. 정신은 안에서 분명하고 기상은 겉으로 온화하였다. 이날 진시(辰時, 7~9시 사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대산선생실기』, 「고종일기」, 1781년 12월 9일


이상정은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하고자 했다. 제자 김종섭(金宗燮, 1743~1791)과 류범휴(柳範休, 1744~1823)는 스승 이상정의 마지막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여 「고종일기(考終日記)」를 남겼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상정은 문병을 위해 찾아온 이들이 고맙고 미안하여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게 했다. 추운 날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학문적인 질문을 하는 제자들이 기특하여 최선을 다해 답하려 했다. 노학자는 생의 끝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자신을 찾아온 이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 위해 배려했다.

이상정의 배려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11월 25일, 병세가 악화되어 혼자 힘으로 협실(夾室)을 갈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변기를 침실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서가(書架)에 가득한 책은 모두 성현이 남긴 가르침인데 어찌 더럽혀서 모독하겠는가”라고 하시고 베로 만든 휘장으로 가리게 했다. 학문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얼마만큼 인지 나로서는 가름도 되지 않는다.

“대산종가 사랑채 편액, 만수재! 만년에 수신과 학문에 마음과 힘을 다하다.”

‘수(修)’는 ‘닦다, 연구하다, 다스리다, 베풀다, 도덕을 기르다, 행하다, 뛰어난 사람’ 등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수신’한다는 것은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성장하려 몸부림치는 정적(靜的)이면서도 동적(動的)인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한 ‘수신’은 나 자신만을 위한 ‘업글 인간 프로젝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기여하는 ‘베풂의 정신’도 포함되는 말이라 생각한다. 대산 이상정의 삶은 만수재 편액의 의미에 걸맞게 ‘수신’과 ‘학문’에 온 마음과 힘을 다 한 삶을 살았노라 말할 수 있다. 사후 24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기제사에 마흔 명이 넘는 제꾼들이 온다고 하니 숙연해진다. 지금의 대산종가를 지키고 있는 종손과 종부의 건강을 기원하며 대산 이상정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어릴 적 나는 할머니를 보며 내가 그 나이가 되는 것은 아득하게 먼 후의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내 나이 마흔도 훌쩍 넘었으니 ‘시간 순삭’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나의 15,400일, 순간 삭제되었다고 느끼는 그 시간을 살아오면서 나는 내가 맡은 다양한 역할들을 멋지게 소화해 냈는지 반문해 봤다. 일 년 365일 부끄럽지 않은 날이 있었을까 싶은데, 이상정은 어땠을까?

이상정이 태어나기 전, 어느 날의 석양 무렵에 한 나그네가 찾아왔다. 그의 할아버지는 길손을 사랑방으로 안내하고 며느리에게 저녁상을 차려오게 했다. 과객은 ‘오늘이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인데, 제사를 모실 형편이 못 되어 제사 시간이 되면 이 밥상으로 제사를 모시려 한다’고 말했다. 이를 듣고 며느리는 제사상을 정성스럽게 준비해왔고, 할아버지는 과객이 부친의 제사를 잘 모실 수 있도록 도왔다. 그날 밤 그의 할머니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흰 구슬 두 개를 주기에 치마폭을 벌여 소중하게 구슬을 받았다. 후에 이상정이 태어난 날 두 개의 구슬 가운데 하나가 없어졌고,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1714~1789)이 태어난 날 나머지 구슬이 없어졌다.

이상정은 안동부 일직현 소호리 가정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경문, 호는 대산이다. 그가 태어난 방에서 소산 이광정, 간암 이완, 긍암 이돈우, 정재 류치명 등이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죽부인전』으로 유명한 가정 이곡,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이다. 아버지 이태화는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지냈으며 모친은 재령이씨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손녀이며, 밀암(密庵) 이재(李栽, 1657~1730)의 딸이다.

6남 3녀 가운데 셋째 아들인 이상정은 학문이 깊고 성품이 온화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비대면 소통 플랫폼이 넘쳐나는 요즘과 달리, 이상정이 살았던 때는 편지가 거의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그래서 그는 그와 관계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받은 편지에 답장을 했다. 그가 보낸 편지는 문집에 수록된 것만 623통에 이른다. 이 편지 가운데 부친 태화공에게 올린 편지, 동생 이광정과 아들 이완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대산 이상정 간찰(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해 부모님 생각 간절했는데 입노(立奴) 편으로 두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서늘한 가을 날씨에도 두루 평안하시다고 하니 위안이 됩니다. 햇곡식이 아직 여물지 않아 아침저녁 끼니를 잇기 어렵지 않을까 밤낮으로 걱정이 됩니다. 저는 다행히 객지에서 먹고 자는 것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습니다. 집안이 평안하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이렇게 궁핍한 계절에는 생활이 어려울까 염려되어 음식을 먹어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적은 녹봉에 겨우 지내고 있어 도움을 줄 형편이 못되니, 탄식만 나옵니다.

『대산집』, 제38권, 아버지께 올림.


1747년 36살, 부모님 곁을 떠나 외지에서 벼슬할 때 아버지께 보낸 편지이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자주 찾아뵐 수 없는 죄송함, 청렴한 공직 생활로 아무것도 보내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잘 나타나 있다.

근래에 무슨 책을 보며,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가?
동생이 문장을 베끼고 시들을 가려 뽑고 잡서를 보는 것은 모두 실질적인 공부가 아니라네. 이는 마음을 허황하고 들뜨게 하여 차분함이 없게 하네. 반드시 사서(四書)와 『근사록』, 『심경』, 『주자서』 등을 단락마다 구절마다 읊조리고 외워 의미가 푹 젖어들도록 해야 하니, 이것이 가장 힘을 얻는 것이라네. 내가 조금 효험을 얻은 듯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네.

『대산집』 제38권, 막냇동생 휴문 광정에게 줌.


이상정과 동생 이광정은 3살 차이로 형은 늘 동생을 보살피고, 동생은 형을 의지했다. 그는 동생보다 먼저 공부한 선배로서 공부 방법에 대해 자세히 일러 주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과 인간 본성에 관한 깊이 있는 내용이 담긴 사서를 먼저 읽기를 권하고 있다. 그냥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구구절절 의미를 음미하여 글의 내용이 완전히 내 것이 될 수 있도록 권했다. 그는 동생과 학문에 관한 조언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연일 현감(延日縣監)으로 있을 때의 심정을 솔직하게 전하기도 했다. ‘고을이 작고 일이 번잡하며 소송 문서가 쌓여 있어, 나름대로 처결해 나가고는 있지만 종일토록 머리를 들지도 못하네’라고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몇 칸짜리 집을 짓고 형제들과 함께 노년을 보내고 싶은 속내를 비추기도 했다.

아득히 먼 곳으로 너를 보내니 마음이 매우 좋지 않구나. 전후로 두 통의 편지를 받고서 암재(巖齋)로 잘 가서, 날마다 과정을 정하여 공부하고 있음을 알게 되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네가 만약 마음을 하나로 하여 즐겁게 공부를 한다면 학업에 있어 진도가 잘 나갈 수 있을 것이다. 3백리 밖 먼 곳으로 너를 보낸 애비의 고심을 알기나 하느냐? 제발 옛 습관을 버리고 착실히 공부하여 훗날 서로 만났을 때, 그 옛날의 몽매한 모습이 아니기를 이 애비는 밤낮으로 희망한다.

『대산집』 제38권, 아들 완에게 부침.


내가 친정을 다녀가면, 일흔이 넘으신 아버지께서는 운전 조심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시며 대문 밖까지 배웅해 주신다. 부모 마음에 자식은 늘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마냥, 불안하고 걱정되는 존재인가 보다. 이상정은 아들 완이 독서를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 많다. ‘매일 책상에 앉아 글을 읽고 글씨를 쓰고 글을 짓는 데 힘쓰도록 하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는다. 공부를 위해 먼 곳으로 보낸 아들이 그립기도 하지만, 혹여 공부에 소홀할까 걱정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가정 내에서 이상정은 근엄하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25세에 대과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아갔을 때 그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로서, 임금의 뜻에 따라야 하는 신하로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궁금하다.




관리자와 신하


1736년 3월에 권지승문원부정자라는 벼슬을 받아 관직에 나간 이상정은 4월에 가주서라는 벼슬로 궁궐에서 며칠 근무했으나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줄 것을 청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관직에 임용될 때마다 사직소를 제출하거나 병으로 돌아온 때가 많았다. 그는 관직 생활에는 별 뜻이 없고 학문의 세계를 더 동경했다. 하지만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만큼은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살피는 목민관의 모습을 보였다.

1753년 연일 현감으로 부임하여 민생을 살피던 때의 일이다. 당시 연일 지역은 오랜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이상정은 이를 걱정하며 성심을 다해 기우제를 지냈고 백성들을 통솔하여 하천을 준설하고 물길을 내기도 했다. 그때 경주 부윤과 다른 고을 수령 몇 명이 뱃놀이를 하며 연일현 경계에 이르렀다. 그는 이들을 대접하지 않고 민생을 돌보는 일을 계속했다. 가뭄으로 백성들은 애가 타는데 이 와중에 뱃놀이를 하는 수령이라니, 이상정의 눈에 그들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상정의 관직 생활 이야기 중 ‘소금을 구워 구휼하다 관직을 삭탈당한’ 1755년 연일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의 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 해는 가뭄과 장마가 연이어져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흉년을 구제하는 정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무렵 목장 바깥 솔숲이 이리와 호랑이의 소굴이 되어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일이 많았다. 그는 감영의 공문에 따라 솔가지와 잎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이전에 백성들과 소금을 구워 이익을 나눈 사례가 있었기에 그는 상사에게 보고하여 소금을 구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과 함께 소금을 굽고 수입의 반을 관청에 들이게 하여 구휼 정책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암행어사가 이 사실을 알고 ‘해금(海禁)을 범하였다’고 하여 그를 탄핵했다. 이 사건으로 의금부에 가서 심문을 받게 된 이상정은 해금이 엄격한 때에 균역청에 보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소금을 구운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흉년을 당하여 온 고을이 아우성쳤으나 고을의 재정은 피폐하여 구휼할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흉년에는 평상시와 다르고, 구휼 비용은 사용(私用)과 다르다’고 생각하여, 아무렇게나 버려진 소나무 가지를 잘라 민간에서 통용되는 사례를 따랐습니다. 백성을 구제하는 데 마음이 급하여 법을 어기는 과오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탄핵되었지만 그의 사람됨이 청렴하고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벌어진 일이니, 그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래서 약 두 달간의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정조는 자신을 도와 정국과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인물로 이상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3품 당상관 형조참의에 이상정을 제수했다. 하지만 이상정은 관직 생활이 결코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정무에 참여하기가 힘들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지만 정조는 쉽게 물러나지 않고 계속하여 벼슬을 내렸다. 1781년에 그는 형조참의 직을 사직하면서 9조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첫째는 ‘뜻을 세우는 것〔立志〕’입니다. 뜻이란 마음이 가는 것으로, 기(氣)의 장수이고 일의 근간(根幹)입니다. 그 뜻이 있은 뒤라야 그 일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옛날에 학문을 논하는 사람은 반드시 뜻을 세움을 우선으로 여겼습니다. … 그 둘째는 ‘이치를 밝히는 것〔明理〕’입니다. 이치란 사물의 당연한 법칙으로 저절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무릇 소리, 빛깔, 모양, 상(象)을 갖추고서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모두 물건인데, 각각 당연한 이치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그 셋째는 ‘경에 거하는 것〔居敬〕’입니다. 경이란 송연(悚然)히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듯함을 일컫는 말로, 한 마음의 주재이고 만사의 강령입니다. … 그 넷째는 ‘하늘을 본받는 것〔體天〕’입니다. 하늘이란 도(道)일 뿐입니다. 중정(中正)하고 순수(純粹)한 것이 하늘의 도이며, 만물의 본체가 되고 고금에 뻗쳐서 그치지 않는 것이 하늘의 굳셈이며, 쉼이 없어 오래되고 징험되고 유원(悠遠)한 것이 하늘의 성실함입니다. … 그 다섯째는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納諫〕’입니다. 간언이란 자신의 모자라는 점을 다스리고 천하의 선(善)을 불러들이는 방법입니다. … 그 여섯째는 ‘학문을 일으키는 것〔興學〕’입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인재를 완성하는 방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 그 일곱째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用人〕’입니다. 인재란 임금이 천직(天職)을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 그 여덟째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愛民〕’입니다.그 아홉째는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尙儉〕’입니다. … 위의 아홉 조목은 모두 덕을 닦고 마음을 기르는 요체이고 다스림을 내고 정사를 시행하는 근본이니, 비록 평상적이고 천근하여 신기하거나 빼어난 의논은 없지만 성학(聖學)의 본통(本統)과 왕정(王政)의 강령이 대략 갖추어졌습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비근하여 행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지 마시며, 실정과 동떨어져서 굳이 행할 것이 못 된다고 하지 마소서.”

『대산집』 제4권, 세 번째 형조 참의를 사직하고 임금의 덕을 면려하기를 진언하는 소



『대산집』 제4권, 세 번째 형조 참의를 사직하고 임금의 덕을 면려하기를 진언하는 소 부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이상정은 고향에서 지낼 수 있기를 소원했지만, 정조는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정조는 “9조의 모든 말은 말마다 참되고 간절하여 좌우명으로 삼아 반성하는 자료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조금 낫기를 기다렸다가 올라와 직무를 수행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렇게 벼슬을 내릴 때마다 번번이 여러 이유를 들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은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는 많은 제자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산서당과 고산정사


이상정의 나이 27세에 대산서당(大山書堂)이 완공되었다. 이는 문중의 어른들이 그가 집안의 자제들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서당은 집의 오른쪽 푸른 절벽 아래에 있다. 서당의 이름은 집 뒤의 대석산(大夕山)에서 따 왔다. 그는 서당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지극한 정성으로 학생들을 이끌어 주니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많아 ‘재거학규(齋居學規)’라고 하는 학규까지 정했다. 그를 따르는 선비가 점점 많아져서 학사에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40년이 지난 그의 나이 69세 때, 대산서당을 중건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대산서당이 허물어져 볼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이상정은 늘 관직 생활을 떠나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뿐, 그것을 실천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1767년 이상정의 나이 57세에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집 짓는 일을 추진했다. 그의 소망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고산정사가 완공된 후 그는 ‘고산잡영(高山雜詠)’에서 “내 나이 30세 때 이곳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높은 산과 깊은 물, 그리고 바람과 안개가 감도는 것이 너무도 좋아 마음 깊이 이곳에 은거하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그저 왕래하며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였다”라고 하며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마음에서 잊지 못하다가 그렇게 소망하던 산수의 집을 얻어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고산정사 편액(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고산서원


그는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했다. 철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었고 맑은 시냇물에는 물고기 떼를 볼 수 있어 한가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는 고산정사 주위의 아름다운 비경을 찾아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지었다.

水靜山深自一村    고요한 물 깊은 산에 절로 마을 이뤘는데
虛齋終日掩柴門    텅 빈 서재 종일토록 사립문을 닫았어라
汀禽欲睡階花笑    물가 새는 자려 하고 뜰의 꽃은 피었는데
一炷爐香坐不言    한 가닥 향로 향기에 말없이 앉아 있네

『대산집』 제3권, 고산잡영 사곡(四曲)


제4곡은 현재의 고산서원 앞에서 볼 수 있는, 암석으로 된 절벽이 있는 곳이다. 그는 이곳이 이 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조용한 서재에 앉아 향 한 자루 피우고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지금의 그곳은 겨울철 얼음 썰매를 타고 놀 수 있는 자연 빙상장이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꼬맹이들과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리운 어른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경치가 좋아 지금도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제4곡, 이상정이 살아있다면 그는 북적대는 사람들을 피해 꼭꼭 숨을까, 아니면 그들을 불러 함께 시를 지으며 노래를 부르고 학문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이상정은 후학들을 이끌어 그들의 학문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을 평생의 임무로 여겼다.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입술이 타고 입이 바짝 말라도 피곤한 줄 몰랐다. 혹 가르치다가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다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비유하여 가르쳤고, 격려하여 분발하도록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문답법을 통해 스스로 깨치게 하거나 과제를 내주어 학생이 스스로 의문을 가지게 하는 등 여러 교수법을 사용하여 가르쳤다. 그런데 아무리 설명해도 학생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산책을 하며 답답한 마음을 푼 뒤에 돌아와 다시 새로운 방법으로 학생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기다려줬다. 절대 혼내지 않았다. 내 아이를 가르치다 보면 도대체 누굴 닮아 이렇게 머리가 나쁜지 속에서 천불이 나고 화가 나서 독설을 퍼붓지 않고서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때가 있다. 하지만 그는 교육자로서 가장 힘든 ‘기다림의 미학’을 실천한 진정한 스승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14살 때부터 외할아버 이재에게 학문을 배운 이상정은 후에 『사례상변통고(四禮常變通攷)』·『약중편(約中編)』·『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심동정도(心動靜圖)』·『이기휘편(理氣彙編)』·『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연평답문속록(延平答問續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교육자이면서 동시에 학자로서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저술을 남기는 등 정체되지 않고 나아가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그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학문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만수재’ 편액은 그의 나이 29살에 소동파의 ‘늘그막에 도를 깨닫고 그럭저럭 졸렬함으로 스스로 닦노라’에서 따와 자신의 사랑채 편액으로 삼았다. 이는 만년의 다짐이 아니라 이제 막 꽃피우기 시작한 청년기의 다짐이었던 것이다. 그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깨달은 것을 기록하여 『만수록(晩修錄)』을 썼는데, 마음에 관한 그의 생각이 인상 깊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은 형체가 없어 출입이 일정하지 않고 잡으면 잡을수록 더욱 일정하지 않다. 반드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고 응접하는 가운데서 공부를 하여 조금이라도 방기됨이 없도록 하여야 이 마음이 이 안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며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아주 긴요한 공부라고 했다. 명상을 하면 일 분의 짧은 시간에도 오만가지의 생각이 드나들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체가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이란 것을 공부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만수재’ 편액을 걸고 다짐했으니, 그가 날마다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간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수재 편액(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인생의 쓴맛 앞에서


‘죽은 물고기만이 강물을 따라 헤엄친다’

우리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왜 유독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있는지 때론 신이 있다면 물어보고 싶은데, 자세히 보면 나에게만 가혹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삶의 무게를 지고, 고난을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새해가 밝았다고 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인생의 쓴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센 물결과 부딪쳐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작심삼일로 끝났던 새해 다짐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의 새해 다짐은 ‘날마다 아름답게’이다. ‘프로 작심삼일러’라 사흘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만 그때마다 작심하고 삼일을 실천한다면 나는 올해 팔방미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더보기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더보기
3.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더보기
4. 김순석, 『대산 이상정의 생각과 삶』, 한국국학진흥원, 2007.
5. 이상정, 김근호 외 5명 역, 『대산선생실기』, 한국국학진흥원, 2012.
“을미년 새해가 밝다”

오희문, 쇄미록, 1595-01-01 ~

1595년 1월 1일, 날이 밝자 일어나서 어머님을 찾아뵙고, 다락 위에 올라가 아버님 신주 앞에 절을 하였다. 아울러 차례를 올렸는데, 겨우 만두를 넣은 떡국, 군고기 한 그릇, 탕 한 그릇에 잔을 올린 게 전부였다. 가난해서 제대로 차례상도 차리지 못하였으니, 탄식한들 무엇하겠는가. 이곳 임천 고을에 와 있은지가 이제 3년인데, 달리 갈 곳이 없고 궁색함은 날로 심해지니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과연 내년 설에도 궁색하게나마 무사히 차례를 올릴 수 있을지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해를 만났건만 아우와 두 아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니, 슬픈 감회가 밀려들었다. 또 큰 아들 윤해가 선조들의 묘를 찾아뵙기 위해 지난해 말 길을 나섰는데, 오늘 늦지 않게 도착하여 술이라도 한 잔 올리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변변히 노자도 챙기지 못하고, 한겨울에도 얇은 옷 한 벌이 전부였는데, 아들이 떠난 이후 왜 그리 눈은 많이 오는지... 오희문은 눈 밭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큰아들이 보이는 듯하여 심란한 새해 아침을 보내었다.

“환갑 새해를 맞이하다”

최흥원, 역중일기, 1765-01-01~

1765년 1월 1일. 날이 바뀌는 자시부터 바람이 그치고 춥지 않으면서 구름이 없어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길한 날씨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어지럼증을 호소하셨으나, 다행히 일어나 앉아 말씀을 나누실 정도는 되시니 매우 다행이었다. 날이 바뀌는 자시 무렵 어머니께 선성벽온단을 올렸다. 돌림병을 막아주는 약이었는데, 올해도 부디 평온하게 한 해를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오늘은 최흥원의 60세 회갑을 맞이하는 해의 설날 아침이었다. 사촌 일초가 와서 밤새 최흥원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수세하였다. 회갑을 맞이하는 해의 설날이 되니, 문득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게 되고 그 감회가 백배나 새로웠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후에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고, 얼마 전에는 아들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천지사방에 의탁할 곳이라고는 없는 궁색하고 외로운 신세였다. 살아오면서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고, 친척들의 질병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육십 해를 보내왔으니, 그간 쌓인 감회가 오늘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나마 동생들과 조카들, 그리고 인근에 사는 친지들이 잊지 않고 최흥원의 회갑을 축하해 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어머니를 비롯한 동생과 친지들을 보살피며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었다. 최흥원은 이런 생각으로 설날 하루를 보냈다.

“형제끼리 의지하는 쓸쓸한 객지의 새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6-01-01 ~ 1786-01-06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노상추 곁에 있는 가족이라고는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온 동생 노억 뿐이었다. 고단한 관직살이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도성에서 쓸쓸한 새해를 맞는 것은 비단 노상추 형제뿐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병마절도사 조학신(曺學臣)은 청교(淸橋)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영남 출신 무관들을 불러 모아 술과 떡, 안주를 대접하였다. 비록 가족들은 만나지 못하지만 익숙한 말씨의 고향 사람들끼리 새해 첫날을 보내니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술기운에 고향집 생각을 하자, 어른 없이 홀로 차례를 지냈을 큰조카가 떠올라 안쓰럽고 서글퍼졌다. 노상추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동생과 함께 여관에서 묵으며 이러한 쓸쓸한 심사를 나누었다. 노억은 그러한 형님을 위로하며 설 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방문하며 새로운 기분을 내 보자고 제안했다. 노상추도 이에 응하여 며칠 동안 이리저리 많은 친지를 방문하였다. 매일같이 새해를 기념하는 술자리가 이어졌고, 우울했던 마음도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며칠만 더 지나면 휴가를 써서 고향에 내려가 그리운 가족들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친지들과 새해인사를 나누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6-01-01 ~ 1596-01-05

1596년 1월 1일, 금난수는 풍기 숙모를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 금난수의 삼촌 금희(琴憙)가 돌아가시고 나서 숙모가 10년간 혼자 계셨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찾아뵈어 적적함을 달래드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후 금난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해라 그런지 낮부터 새해 인사를 하러 찾아온 사람들로 금난수의 집이 붐볐다. 금응각(琴應角), 구백수(具伯綏), 손행원(孫行源), 류의(柳誼)가 찾아온 것이다. 금난수는 여러 친척들과 세 아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더없이 기뻤다.

1월 4일에는 조금 뒤늦게 금난수의 외조카인 권산기(權山起)와 금난수의 사위인 이광욱(李光郁)이 와서 새해 인사를 하였다. 새해 초이니 올해는 서로 건강하고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덕담을 나눈 것이었다.

1월 5일에는 금난수는 이미 일정을 정해놓은 대로 사람들과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역동서원(易東書院) 두 곳의 사당에서 참배하였다. 그 수는 20여 명으로 모두 모여 사당에 참배하였다. 참배를 끝마칠 무렵에서야 이시(李蒔), 이립(李苙), 이강(李茳) 삼형제가 사당에 왔다. 금난수는 가까운 사람들과 새해인사 및 덕담을 나누고 사당에 새해를 맞아 참배하니 올해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해 첫날, 아내의 건강과 행복한 여생을 바라다”

오희문, 쇄미록, 1599-01-01

1599년 1월 1일, 동녘이 틀 무렵 다례를 지냈다. 왜적이 모두 물러가고 맞는 새해였다. 지난 임진년부터 작년까지 꼬박 여덟 해 동안 왜적에게 시달린 생각을 하니, 올해의 첫 날이 새삼 감격스러웠다. 올해는 왜적들을 피해 다닐 일도 없으니, 식구들이 모두 정착할 만한 곳을 알아보고 집을 옮길 생각이었다.

새해 첫날인데, 집사람이 지난밤부터 병이 있어 새벽까지 신음하고, 정신이 혼미한 것이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니 보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며칠 전에는 점차 차도가 있어서 온 집안이 기뻐했더니, 오늘은 또 이와 같으니 더욱 걱정스러웠다. 이 때문에 간단히 다례만 지내고, 이웃 마을에서 온 사람들을 도로 돌려보내고 술도 대접하지 못하였다.

올해는 기해년이니 오희문의 환갑이 되는 해였다.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 보니, 앞길이 얼마 남지 않아 슬프고 탄식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거기에 집사람의 병세가 위태로워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어 40년 동안 같이 늙은 내외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다니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오희문은 새해 첫날 앓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부디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동안 아프거나 고생하지 않고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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