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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오우당(五友堂)과 절우사(節友社)에서 만난
선비의 벗, 매화(梅花)

내 삶의 고비, 그 꼭대기에서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를 만났다. 내 인생의 해답을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알고 있지 않을까 하여 날마다 조금씩 비워나갔다. 나와 내 가족이 머문 공간을 정리하고 비우는 동안, 거짓말처럼 난제를 풀어나갈 실마리가 보였다. 내가 돌봐야 했던 물건들이 정리되고 빈 공간이 생기자 오만가지의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타인의 시선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나와 내 가족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인생 앞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잡동사니들이 걷히고 나니 오롯이 내가 남았다.

‘미니멀 라이프’는 나를 좀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 음악, 영화, 옷, 술, 음식이 무엇인지 그동안 나조차 몰랐던 나의 취향을 알게 했다. 내가 나를 알아가는 여정, 그 속에서 찾은 것들이 나를 설레게 했다.

미니멀 라이프는 수많은 다양한 삶의 방식 중 하나이다. 문득,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했던 삶의 방식이 궁금해진다. 그들은 무엇을 지향하며 행복감을 느꼈을까? 그들을 설레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이 거처하는 곳, 자신이 지향하는 뜻, 좋아하는 물건에 ‘호(號)’를 지어 본 이름 대신 불렀다. 동방의 주자라 불리는 성리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의 호 ‘퇴계(退溪)’는 벼슬에서 물러나 물가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살겠다는 유학자의 모습을 담았다. 조선 중기 학자 오우당(五友堂) 김근(金近, 1579~1656)은 생담정사(笙潭精舍)를 짓고 그 주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연꽃을 심은 후 이들과 벗하며 수양하겠다는 의미로 ‘오우당’ 당호 편액을 걸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황의 절우사(節友社)·정우당(淨友塘), 김근의 오우당에는 ‘송(松)·죽(竹)·매(梅)·국(菊)·연(蓮)’이 있다. 이황과 김근이 벗이라 칭하는 이 다섯 수목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움 속에 숨어 있는 강인함과 절개는 이들이 닮고 싶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길러내는 그 힘듦 속에서 ‘본래의 나’를 찾고 나를 알아봐 주는 벗을 갈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이번 편액에서는 오우당 편액과 함께 조선 선비들이 사랑한 봄꽃, 매화 이야기를 한다.




오우당 속 매화


점심을 먹고 나선 산책길, 시큼하고 구린내 나는 거름 냄새가 서부리 예끼마을에서 강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퇴비의 고약한 냄새 사이로 은은하고 달큰한 꽃향기가 봄바람에 실려 가던 길을 멈추게 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입구 돌계단 옆에 있는 키 작은 나무, 출퇴근길에 매일 보는 나무인데 꽃이 핀 줄도 몰랐다. 바쁜 척하지 말고 나 좀 보고 쉬어가라는 듯, 매화가 어느새 활짝 피어있었다. 벌이 매화 향기에 취해 윙윙거린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핸드폰 카메라에 매화를 담았다. 하지만 프레임 속 매화는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못해 아쉽다. 그래서 이황이 ‘시냇가에 팔 벌린 매화 두 가지, 그 향기는 숲으로 퍼지고’라는 시를 남겼나 보다.


한국국학진흥원의 매화



벚꽃이 봄꽃의 제왕인 듯 들썩거리기 전, 이른 봄에 다른 꽃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는 그 이름도 다양하다. 화형(花兄), 군자(君子), 빙기옥골(氷肌玉骨), 암향(暗香), 설중매(雪中梅)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또 매화는 난초·국화·대나무와 함께 사군자(四君子), 소나무·대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 대나무·난초·국화·연꽃과 함께 오우(五友)라 부르기도 한다. 김근은 난초 대신 소나무를 심고, 대나무·국화·연꽃과 매화를 뜰에 심어 놓고 벗들에 대해 칠언절구를 지었다.

서호의 풍월이 한가로운 사람에게 있어西湖風月屬閒人 한 그루 맑은 의표 속세를 멀리 벗어났네一樹淸標逈出塵 벼슬살이 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니殷鼎調羹非我事 황혼에 풍겨 오는 매화 향기가 참 좋구나黃昏浮動正堪親


이 시는 김근의 「오우당」 6절 중 제4수 ‘매화’이다. 겨울 끝자락인 음력 2월, 제주도에는 ‘이월 바람에 검은 쇠뿔이 오그라진다’라는 속담이 전해진다. 이월의 바람이 몹시 차가워 검은 암소의 단단한 뿔이 굽을 정도로 매섭다는 뜻이다. 매화는 딱 이런 때 피어난다. 봄꽃들이 피기 전에 홀로 피어 봄을 알리는 매화의 선구자적인 모습, 혹한을 견디고 피어난 강한 생명력, 그리고 세속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고결한 모습은 선비의 곧은 지조와 닮았다. 그래서 『나무백과』의 저자 임경빈은 매화나무를 ‘은둔하는 선비와 낙향하는 선비를 위한 나무’라고 했는가 보다.

김근이 시에서 밝혔듯, 그는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는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나 부귀하고 권세 있는 집 주변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늘 좌우에 책을 쌓아 놓고 그 가운데 앉아서 책 속의 깊은 뜻을 탐구하는 일생을 보냈다.

그렇다고 그가 과거시험을 안 본 것은 아니다. 1623년(광해군 15), 그의 나이 45세 때 우수한 성적으로 소과(小科)에 합격했으나 합격 발표가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당시 그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다음 해 명경과(明經科)에 응시했다. 시험장에서 감독관이 넌지시 시험 내용에 대한 암시를 주자 이를 거부하고 결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 빌미가 되어 파방(罷榜) 된 것이다. 부정에 항거하여 과거장을 박차고 나온 그의 뒷모습에서 그윽한 매화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이후 오래도록 과거를 보지 않다가 1642년(인조 20), 환갑을 넘긴 64세의 나이에 친구들의 강권으로 진사시에 응시하여 갑과제삼인(甲科第三人)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벼슬을 제수 받지 못하니 관운(官運)과는 처음부터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김근이 시에서 언급한 ‘서호(西湖)’는 중국 항주(杭州)의 서쪽에 있는 호수를 말한다.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리는 중국 송나라의 화정(和靖) 임포(林逋, 967~1028)는 서호 부근 고산에 은거하며 결혼도 하지 않고 매화나무 300그루를 심고 학 두 마리를 기르며 20여 년 동안 성안에 들어오지 않고 풍류 생활을 했다. 어느 봄날 저녁에 임포는 서호에 거꾸로 비친 매화를 보고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매화시를 읊었다.

온갖 꽃 다 진 뒤 홀로 곱게 피어서衆芳搖落獨喧姸 작은 정원의 풍정을 독차지하였구나占盡風情向小園 성긴 가지는 맑고 얕은 물에 비껴 있고疎影橫斜水淸淺 그윽한 향기가 으스름한 달빛 아래 풍겨 오네暗香浮動月黃昏 (생략)


임포가 매화를 표현한 ‘암향(暗香)’과 ‘황혼(黃昏)’은 이황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의 매화 시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표현이다. 김근의 시에 나오는 ‘황혼’이라는 표현도 임포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매화 시에 자주 나오는 전형적인 표현이라 상투적일 수 있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황혼에 달이 뜨면 꽃의 흰 색깔과 혼동이 되어 잘 드러나지 않지만, 풍겨 오는 향기만은 그대로 느낄 수 있기에 암향이라 한 것’이라고 하며, 암향과 황혼의 시적 표현을 설명했다. 나는 어스름한 달빛 아래 은은하게 전해오는 매화 향기 가득한 봄밤의 정취를 아직은 알지 못한다. 만약 내가 시를 쓴다면 이 이상의 표현을 할 수 있을까?

3월 마지막 날, 김근의 생담정사(笙潭精舍)를 찾았다. 김근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옥을 지어 강학하던 곳을 ‘생담(笙潭)’이라 이름하였다. 이후 1795년(정조 19) 6세손 김굉(金㙆)의 주도로 김근의 유덕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현재의 생담정사를 중건하였다.


생담정사(笙潭精舍)

생담정사 편액



생담정사는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 있다. 귀미리는 의성 고운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오우당 김근과 손암(遜巖) 김원(金遠, 1595~1621) 형제가 귀미 마을에 정착한 후 400여 년 동안 이곳은 의성김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매화 한 그루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큰 나무들이 생담정사를 지키고 있었다. 생담정사 당호 편액 ‘오우당’은 문이 잠겨 있어 볼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생담정사 위에 올라서 그 옛날 이곳에서 김근이 책을 읽고 강학하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지금은 봄 가뭄 끝이라 생담정사 앞 미천에 물이 흐르지 않지만 여름 장마 후 넘실거리는 물소리와 책 읽는 소리가 어우러져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된 선비 김근을 만나본다. 고독한 유학자의 길이 매화와 소나무, 대나무, 국화, 연꽃 등 벗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노라 말할 것 같다.


생담정사 오우당(五友堂) 편액(출처: 한국의 편액)




절우사 속 매화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걷기 행사”가 지난 3월 27일부터 4월 9일까지 13박 14일 동안 진행되었다. 서울 경복궁에서 도산서원까지 총 270Km를 걷는 행사에 아쉽지만 참가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2019년 첫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걷기 행사의 답사기인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를 읽으며 퇴계 선생의 귀향길을 함께 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의 권진호 선생님은 「나의 진휴(眞休)를 막지 마시오」에서 ‘퇴계는 세속의 명리를 벗어나 자연을 즐기고 사랑하는 것이 정도에 지나쳐 마치 고치기 어려운 깊은 병을 지니고 있는 듯하였다. …(중략)…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은 것이다’라고 하며 가장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아 나선 퇴계의 귀향길을 올해도 함께 하셨다.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출처: 푸른역사)




권진호 선생님의 말씀처럼 퇴계를 평생토록 따라다닌 ‘천석고황(泉石膏肓)’의 절정은 107수의 매화시 중 62제 91수를 선별하여 자필로 엮은 『매화시첩(梅花詩帖)』이 아닐까 싶다. ‘매화’의 어떤 모습이 퇴계를 설레게 했을까?

매화가 주인에게 주다 (생략) 지금은 다행히도 낙향 윤허 받았으니此日幸蒙天許退 하물며 내가 꽃 필 봄 아니던가況來當我發春時 주인이 답하다 (생략) 내 이제 약속을 지켜 여기 돌아왔으니此日幸蒙天許退 좋은 때를 저버렸다고 나를 싫어하진 않겠지?況來當我發春時

김기현·안도현 편저,『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



「늦봄에 도산에 돌아와서 산매화와 주고받다」는 퇴계와 매화가 서로의 속마음을 나누는 ‘문답시’이다. 매화가 먼저 퇴계에게 말을 걸었다. 매화는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온 퇴계를 반기며 때마침 자신이 꽃을 피웠노라고 고백한다. 퇴계는 그동안 매화를 보러 오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달라고 부탁한다. 매화가 꽃 피던 시절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 퇴계는 이제라도 약속을 지키겠다고, 앞으로 자신도 매화처럼 맑은 향기를 전하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다짐한다.

도연명의 동산에는 솔과 국화, 대 세 벗뿐이니松菊陶園與竹三 매화 형은 어찌하여 함께 하지 못했는가梅兄胡奈不同參 나는 지금 매화를 넣어서 풍상계(風霜契)를 맺었노니我今倂作風霜契 굳은 절개, 맑은 향기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라오苦節淸芬儘飽諳


「도산잡영(陶山雜詠)」 18수 중 하나인 「절우사(節友社)」이다. 김근에게 ‘오우당’이 있다면, 이황에게는 ‘절우사’가 있다. 이황은 ‘샘 위의 산기슭을 파서 암서헌과 마주 보도록 평평하게 단을 쌓고는, 그 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고 「도산잡영(陶山雜詠) 병기(幷記)」에서 밝혔다.

퇴계 귀향길 걷기 행사에 참석하는 대신 도산서원을 찾았다. 혹 매화가 진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시사단(試士壇)이 보이는 도산서원 입구에서부터 도산매(陶山梅)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도산서원 이곳저곳에 핀 매화의 아기자기한 꽃잎들이 흩날릴 때 마음이 들떠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다.


도산서원과 매화


도산서원의 매화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있네[三徑就荒 松菊猶存]’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삼경(三徑)’은 중국 한나라의 장후(蔣詡)가 자기 집 정원에 세 개의 좁은 길을 내고 소나무· 대나무· 국화를 심었다는 데서 유래하는 말로, ‘은자(隱者)의 앞마당’을 뜻한다. 이황은 도연명이 시에서 매화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는 북풍한설(北風寒雪)에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와 대나무, 늦가을 서리에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향기를 전하는 국화와 함께 매화 역시 세속의 온갖 풍상(風霜) 속에서 변하지 않는 고매한 멋과 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산서당의 암서헌(巖栖軒)에 앉아 절우사에 핀 매화를 바라보니, 퇴계의 매화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느껴졌다.


암서헌에서 바라본 절우사와 매화



매화가 외로울까 안타깝게 여긴 하늘이梅花天惜太孤絕 이 꽃 저 꽃 더불어 흰 꽃망울 열었구나且竝羣芳發素葩 난초꽃이 먼저 피네 마네 따지지 말라莫與國香論早晚 순결한 그 영혼은 시절을 다투지 않나니眞貞元不競年華 (생략)

김기현·안도현 편저,『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에게 학자로서의 퇴계는 어렵고 조심스러워 저만치 멀리 있는 존재다. 하지만 시인 퇴계는 나에게 성큼 다가와 축 처진 내 어깨를 말없이 토닥여주는 아버지 같다. 봄의 전령사로 매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들 눈에는 여러 봄꽃이 핀 후에 늦게 핀 매화가 ‘매화의 한(恨)’이라고 하며 안타까워한다. 퇴계는 먼저 핀 꽃들이 매화를 위한 하늘의 선물이라 생각하며 늦게 핀 매화를 따뜻하게 맞이한다. 가끔 내 인생의 꽃은 도대체 언제쯤 활짝 피는 것인지, 성공한 사람들이 부러워질 때가 있다. 아직도 언 땅속에 웅크리고 있는 내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퇴계의 이 매화시는 살아갈 힘을 준다. 안도현 시인은 『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에서 ‘나는 삶의 꽃을 피우는데 남들의 것과 비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남들의 꽃이 크고 화려하다고 창피해하면서 주눅 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하며 자신의 꽃을 피우는 데 집중하자고 말한다. 퇴계의 매화 시 곳곳에 ‘늦게 피는 매화’에 대한 배려와 헤아림이 나를 위로해준다.


도산서당과 매화



1570년에 이황이 돌아가시고 9년 후 김근이 태어났다. 매화는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온 때에도 여전히 선비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매화를 사랑한다. 매화는 이황과 김근 그리고 모든 선비들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품고 있어 닮고 싶은 존재인 듯하다.




나를 설레게 하는 무엇!


‘비워내면 채워지는 것들’ 나는 이 역설이 좋다. 나에게 있어 비우며 채워진 것은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토요일 밤에 마시는 맥주 한 캔은 주중의 고단함을 달래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힘을 준다. 화이트 셔츠는 여배우를 빛나게 하는 반사판처럼 내 얼굴을 환하게 해줘서 좋다. 다양한 사람들이 쓴 여러 빛깔의 삶을 엿볼 수 있어 ‘브런치 스토리’의 글이 좋다. 우울한 날,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 그 감미로움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점심 산책 후 같은 팀 선생님과 ‘매심사(梅心舍)에 앉아 나누는 담소는 직장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다. 저녁 식탁에서 아이들이 들려주는 학교 이야기가 좋다. 그리고 하루의 끝, 내 편과 손을 잡고 걷는 강변길과 바람이 나는 좋다.

이황과 김근의 매화시를 읽으며 지금 나를 설레게 하는 그 무엇이, 혹 찰나의 순간 반짝 다가오는 쾌락은 아닌지 생각했다. 그것이 찰나의 쾌락이 아닌,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로 날마다 이어지길 바라본다.


한국국학진흥원 매심사(梅心舍)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더보기
2. 유교넷 (https://www.ugyo.net)더보기
3. 한국국학진흥원, 『의성김씨 귀미파문중』,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61, 2019.
4. 이광호 외 지금,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푸른역사, 2021.
5. 김기현·안도현 편저, 『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 Humam & Books 2012.
6. 이상희,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넥서스, 1998.
7. 소현수·임의제, 「매화시제(梅花詩題)를 통해 본 매화 완상(玩賞)의 대상과 경관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1호, 한국전통조경학회, 2013.
8. 김태오, 「퇴계의 매화사랑과 매화시의 교육적 함의」, 『한국학논집』 50호,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13.
9. 김재룡, 「退溪 李滉의 梅花詩 硏究」, 『우리文學硏究』 19호, 우리문학회, 2006.
“조선시대 담배의 보급”

조선에 담배가 보급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 담배가 처음 전래될 때는 약재로 인식되어 보급되었다. 술을 깨게 한다든지, 소화가 잘 된다는 말과 함게 담배는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1614)에서 사람들이 밭에 담배를 많이 심는다고 기록했다. 담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약초보다는 기호품으로 애용되었다. 손님을 대접할 때 담배를 권하는 풍습도 생겨났다. 담배의 수요는 급격히 증가하여 남녀노소와 양반, 백성을 가리지 않고 소비하였다.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표류하였던 하멜은 조선인들이 4, 5세 때부터 담배를 핀다고 기록했다. 담배는 점차 상품작물로 변해갔다. 한성(서울)에서는 담배만을 파는 엽초전이라는 시전이 생겼고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담배가 매매되었다. 그러나 담배 보급이 늘어나면서 폐단도 늘었다. 먼저 비옥한 토지에 담배를 많이 심어 다른 작물의 생산량이 떨어졌다. 다음으로는 담배 예절이었다. 남녀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긴 담뱃대를 물고 서로 담배를 피우게 되자, 예의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은 이를 용납하기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담배를 피울 때 지키는 규율을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연장자 앞에서는 피우지 말 것이라든지 양반 앞에서 평민은 피우면 안 된다든지, 평민이나 천민의 담뱃대는 양반의 것보다 길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유가야산록」에는 여행지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온다. 담배는 여행의 준비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담배를 피울 때 많은 준비물이 필요했다. 담뱃대를 비롯하여 담배를 넣어 둘 담배 주머니, 재떨이 등이 필요했다. 물론 양반들이 여행을 할 때는 노비들에게 이를 대신 들고 오게 하였을 것이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 보았다.

“담배와 미숫가루, 꿀과 돈 - 상소 준비 과정에 받은 다양한 부조품”

권문해, 초간일기,
1584-03-09 ~ 1584-03-15

1792년 5월 11일, 부조를 받는 길이 한 번 열린 뒤에는 폐단을 막기가 어렵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었다. 포천 현감 홍약호(洪若浩)가 편지로 문안을 하고 남초(南草: 담배) 2근, 미식(米食: 미싯가루) 2되, 꿀 1항아리를 보내주었다. 1792년 5월 20일, 좌의정이 돈 50냥을 보내오고, 채홍리(蔡弘履)가 남초(南草: 담배) 40근을 보내왔다. 5월 24일 안악(安岳)의 이익운(李益運)이 편지로 문안을 하고 돈 20냥과 향초(香草: 담배) 5근을 또 보내왔다.

“양반들은 산수유람 때 무엇을 준비했을까?”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08-06 ~

1587년 8월 6일, 산수유람 중이던 황여일(黃汝一)은 식후에 숙부[황응청(黃應淸)]와 잠시 낮잠을 잤다. 얼마 되지 않아 이 고을의 학자인 김득경(金得鏡)이 달려와 이르니, 이 곳 태수 조정간(趙廷幹)이 가서 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흰 밥에 푸른나물로 식사를 하였는데, 산에서 먹는 맛이라 더욱 좋았다. 술도 서너 잔 했다. 이윽고 노승(老僧)이 짚신을 가지고 나와서 말하였다.

“절의 서쪽 편으로 가면 구름 사이로 돌길이 나 있는데 매우 가파르고 끊어질 듯합니다. 그러나 이 길이 아니면 건너갈 방법이 없습니다.”

곧이어 함께 갈 일행을 선발했다. 이야기를 나눌 승려는 ‘학연(學衍)’이라 하고, 시문(詩文)을 챙기는 이는 ‘덕룡(德龍)’이라 하며, 벼루를 들고 갈 이는 ‘홍원(洪源)’이고, 술시중할 이는 ‘매운(梅雲)’이며, 옷과 양식을 들고 갈 이는 ‘억동(億童)’이었다. 또한 한 승려로 하여금 걸음을 예측해서 날이 저물면 어떤 암자에 이르러 잠잘 수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그리고 함께 출발하여, 쉬엄쉬엄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합격과 낙방,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탁족과 술로 마음을 달래다”

김령, 계암일록,
1623-05-05 ~ 1624-01-20

1845년 7월 3일, 낙육재의 여러 벗들이 함께 바람이나 쐬고 오자 하여, 서찬규 일행은 십여 이 술을 가지고 남암(南菴)에 올랐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7월 10일에는 예닐곱 관동들과 함께 신천에서 목욕하고 거북굴에서 바람을 쐬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덕우는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돌아갔다.

1846년 5월 18일, 국오 족숙을 모시고 여러 친족들과 함께 앞산으로 회포를 풀러 갔다. 동네 어귀에 도착해 자리를 펴고 밥을 내오는 사이에, 서찬규와 태곤(자는 노첨)·재곤(자는 자후), 그리고 몇몇 서당 아이들은 탁족할 곳을 찾아 가파른 바위로 등나무 넝쿨을 잡고 올라가 굽이굽이 물길을 찾아갔다. 마침 한 승려가 갈포 적삼에 송납을 쓰고 인사를 하는데 은암의 중이었다. 어디서 오는지 물으니, 약초를 캐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물을 따라 걸어가다가 목이 마르면 손으로 떠서 마시고, 더우면 손으로 끼얹어 씻었다. 이렇게 몇 리를 가니 예계암에 이르렀다. 술기운이 막 깨니 배고프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는데, 우연히 나무하는 사람을 만나 그의 도시락으로 쾌히 빈 배를 채웠다.

산림에 회포를 붙여 일어났다 누웠다 하다 보니 돌아가는 것을 잊고 있어서, 어느덧 해가 한낮을 지났다. 친구들이 돌아가자 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시 내려왔다. 하루 종일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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