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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대대손손 이어질 화락(和樂),
화수당(花樹堂)

생의 기쁨 뒤에서


내일이 시험인데, 아들은 헤드셋을 끼고 친구와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이 잘되고 있는 모양이다. 친구와 낄낄거리는데 돌고래 웃음소리가 방 안 가득 펴진다. 중저음 변성기 아들의 목소리가 맞나 싶다.

예상했지만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시험 점수에 나는 좌절했다. ‘게임을 하고 나면 공부를 하겠지, 아들도 다 계획이 있겠지’ 했으나 그건 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결국 교양 있는 엄마 노릇을 포기하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봇물 터지듯 시작된 잔소리는 끝날 줄 모르고 흘러넘쳤다.

“너 이렇게 게임만 하고 루저로 살 거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오만가지 잔소리를 해도 끄떡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을 시전하던 아들은 ‘루저’라는 말에 반응했다.

“현실에선 루저 맞아. 근데 게임 속에서 나는 루저가 아니야.”

아들은 울먹이며 ‘내 자존감은 바닥이야,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게임 말고는 다 재미없어’라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춘기의 한가운데 서서 나를 보며 웃고 장난치던, 내가 우울해하면 초콜릿을 사 주던 아이가 저만치 멀어져 간다. 그의 눈빛만 봐도 그가 뭘 원하는지 안다 생각했는데, 아들의 눈빛과 행동, 말들이 모두 낯설다. 나는 나의 자랑이었던 아들의 반항과 방황을 지켜보며 울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 거리 가득 벚꽃이 흩날렸다. 온 세상의 봄꽃 중 제일 빛나는 꽃은 내 아이였다. 첫사랑보다 더 아련한 첫아이, 비옥한 땅에서 걱정 없이 무탈하게 자라길 바랐는데 지금 아이가 서 있는 곳은 절벽 바위틈일지 모른다. 바닷가 절벽 바위틈에서 자라는 해국(海菊)처럼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제 꿈을 펼칠 수 있길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일까?

부모가 되고 나니 흙수저와 금수저라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나는 무엇을 아이들에게 남겨줄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끝에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을 만났다.




버드나무 가지 끝에 걸린 사랑


아들이 태어난 다음 날이 마침 식목일이어서 아버님은 텃밭 가에 손자 나무를 심으셨다. 어머님은 밭일 가다가 생각나면 물 한 번 주고 쓰다듬어주고 자주 보지 못하는 손자를 대신해 사랑을 주셨다. 이제 작은 묘목이었던 자두나무는 가지가 꺾일 만큼 자두를 키웠고 아들의 키는 내 머리하나보다 더 크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옛날이라고 다를까? 아홉 명의 아들을 둔 김대현은 1600년경 장남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1572~1630)에게 버드나무 아홉 그루를 마을 어귀에 심으라 명했다. 아홉 그루의 나무가 있는 길, ‘구수목가(九樹木街)’는 구전되면서 ‘구시나무거리’로 불리게 되었다. 아홉 그루 모두 잘 자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그루는 심은 지 얼마 후 고사했는데, 우연인지 여덟째 김술조(金述祖, 1595~1611)가 17세가 되던 해 낙동강에서 선유(船遊) 하다 사고로 요절하고 말았다.

공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장남 봉조(奉祖)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둘째 영조(榮祖)는 길주 목사(吉州牧使), 셋째 창조(昌祖)는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넷째 경조(慶祖)는 내시부 교관(內侍府敎官), 다섯째 연조(延祖)는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여섯째 응조(應祖)는 흥덕 현감(興德縣監), 일곱째 염조(念祖)는 종사랑(從仕郞)이고, 여덟째 술조(述祖)는 관례를 올리고 나서 요절하였으며, 아홉째 숭조(崇祖)는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이다.

정경세, 『우복집(愚伏集)』 제18권, 「김공 대현(金公大賢)의 묘갈명(墓碣銘)」


김대현의 아들 8 형제는 모두 소과(小科)에 합격하고 그중 5 형제(김봉조, 김영조, 김연조, 김응조, 김숭조)가 대과(大科)에 급제했다. 막내 설송(雪松) 김숭조(金崇祖, 1598~1632)가 문과에 급제했던 1629년(인조 7) 인조(仁祖, 1595~1649)는 김숭조 형제의 이러한 과거(科擧) 이력을 듣고 김대현을 이조 참판으로 추증하고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소과는 연꽃, 대과는 계수나무’에 비유]라고 칭찬하며 마을 이름을 ‘오미동(五美洞)’이라고 지어 내려주었다. 살아생전 이런 경사를 누렸으면 더 좋았을 것을, 김대현과 정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막내아들이 대과 급제하는 모습을 보기 전에 돌아가셨다. 사마시(司馬試) 합격도 어려운데, 어떻게 대과 급제를 5명이나 했을까? 구시나무거리의 버드나무를 쓰다듬으며 수능 대박을 기원해본다. 조선 시대에 살았다면 ‘대과 급제 노하우’라도 전수받고 싶다. 잠시 김대현의 삶을 따라가 본다.




16세기를 살아가는 김대현


김대현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낸 청백리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 1467~1535)의 증손이다. 1553년(명종 8) 2월 7일, 김대현은 장례원 사의(掌隷院 司議)를 역임한 화남(華南) 김농(金農, 1534~1591)과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온화하며 인정이 두터워 동년배의 존경을 받았다.

1582년(선조 15) 봄, 김대현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이후 그는 유사(有司)에게 여러 번 천거되어 그가 곧 관직에 오를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서른일곱에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원장으로 추대된 것을 보면 그의 명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지극한 정성으로 학문을 권면하여 뭇 선비들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선조 15) 김대현의 아버지 김농은 한양에서 관직 생활 중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당시 김대현은 영주 봉향리 집 서편에 유연당(悠然堂)을 짓고 생활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들은 그는 한양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영구를 받들고 돌아와 지금의 예천군 호명면 광석산에 안장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온 나라가 짓밟혔을 때 그는 아버지의 궤연[几筵, 죽은 사람의 신주를 모셔 두는 곳]을 받들고 태백산 아래로 피난하여 제수를 정성스레 마련하여 모셨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김대현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영주에는 왜적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바가지를 들고 문 앞에 와서 음식을 구걸하는 자가 하루에도 십여 명이었다. 선군께서는 마음 아파하시며 식량이 있고 없고를 헤아리지 않고 번번이 집안사람을 불러 먹을 것을 주게 하셨다. 굶주린 백성들은 “어느 마을의 어느 집에 가면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으니 너도 가서 구걸해 봐라.”고 서로 말하였다.

김대현, 『유연당선생문집(悠然堂先生文集)』 제4권, 「행년기(行年記)」


그는 아버지의 상중(喪中)이지만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사람들을 도우며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는 문 앞에 걸인이 찾아오면, 한 줌의 곡식이라도 반드시 나누어 주었다. 당시 여러 읍에 진제막[賑濟幕,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임시 장소]이 있었으나 이름뿐으로 유민들이 실제 그 은혜를 입지는 못했다. 그는 군수에게 청하여 스스로 그 일을 주관하여 집 가까이에 진제막을 설치하고 아침과 저녁으로 몸소 그곳에 나아가 죽 쑤는 도구를 직접 점검했다. 그는 “아! 오랑캐의 근심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참혹하게 유린되고 혹독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하며, 칼끝에 놓인 어린 백성들, 외롭게 남겨진 노인과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척화소(斥和疏)」를 올리기도 했다.

영남은 주와 현이 예순여섯 곳인데 도륙당하지 않은 곳은 겨우 열에 하나입니다. 백성 중에서 적의 칼날을 피한 자가 거의 없고 2년을 농사짓지 못하니, 길에서 부축하고 지탱하며 서로 이끌고 골짜기에 굴러 떨어져 죽은 자들이 또한 반을 넘습니다.

김대현, 『유연당선생문집(悠然堂先生文集)』 제2권, 「청회복구난소(請恢復救難疏)」


이 글은 전란 수습에 직접 참여한 김대현의 경험이 녹아있다. 그는 상소의 끝에 “신이 듣자니 충청도와 전라도의 관청에는 쌓아놓은 곡식이 있어서 길에는 굶어 죽는 자가 없다고 하니, 이번 전쟁으로 유독 피해가 많은 경상도에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1595년(선조 28)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 백암(柏巖) 김륵(金玏, 1540~1616)이 김대현을 번갈아 천거, 그는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에 임명되었다. 성현도는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주시를 비롯하여 대구광역시 일부, 경상남도 밀양시, 창녕군 등지를 통과하던 역로(驛路)로써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쳐들어오는 초입이었다. 김대현이 성현도 찰방으로 부임했을 때 눈앞에 쑥과 억새만 가득하고, 백성도 얼마 남지 않아 양식과 역마가 전부 텅 비어있었다. 그는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아 마음을 다해 어루만지니 아전과 역졸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다. 자신을 위해 쓰는 물품을 간소하게 하고, 털끝 하나라도 본가에 보내 굶주림을 해결할 바탕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피해에 대한 진상 조사를 꼼꼼히 하여 피폐한 역이 완비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힘썼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자, 아전과 역졸이 마치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며 길가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그 옆에 새기기를, “맑고도 맑구나, 하얀 옥처럼 흠이 없으셨네.”라고 하며 칭송했다. 그의 청렴결백은 증조부 김양진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후 김대현은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를 역임하고 1601년(선조 34)에 산음 현감(山陰縣監)에 제수되었다. 부임 후 그는 전란으로 무너진 학교 건립에 애썼다. 경내의 선비와 부로(父老)들을 설득하여 대성전(大聖殿)과 명륜당(明倫堂)을 지었다. 건물을 지킬 사람이 없어 관속 몇 명을 뽑아 선비를 봉양하게 하고 유생들을 권면(勸勉)하자 산음현은 글 읽는 소리로 가득했다.

성현도 찰방으로 있을 때와 같이 김대현은 청렴하고 근면하게 관직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는 전쟁에 다치고 쇠잔해진 백성을 어루만지고 자식처럼 보살폈다. 백성의 노고를 풀 수 있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그 폐해를 없애고자 노력했다. 송사(訟事)를 판결할 때 사리에 맞지 않게 행동한 자에게도 법에 근거하여 밝게 깨우쳐 주거나 의리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송사에 진 사람도 억울해하지 않았으며 원근의 사람들이 그의 판결을 받기 위해 앞다투어 왔다.

김대현은 산음현에 사는 70 이상인 노인들을 모두 모아 환아정(換鵝亭)에서 양로연을 베풀기도 했다. 노인들은 배불리 먹고 술에 취하여 기뻐하며, 차례로 일어나 춤을 추며 감격하고 기뻐했다. 너무 늙어 양로연에 오지 못한 노인들에게는 구장(鳩杖)과 쌀과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김대현이 산음현에 부임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그 치적이 널리 드러났다. 관찰사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 1569~1626)이 김대현의 업적을 조정에 아뢰자, 선조는 그를 특별히 승진시키라고 명했다. 1602년(선조 35) 봄, 김대현은 휴가를 얻어 선영을 성묘하고, 여러 묘소에 가토(加土)하고 다시 산음으로 돌아왔다. 지금의 경남 산청에서 경북 안동시 풍산읍을 돌아 다시 산청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의 피로 탓일까? 그는 산음현으로 돌아온 이후 병으로 앓아누웠다. 병환이 위독해지자 그는 친구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며 삶을 정리했다. 같은 해 3월 11일, 관아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의 춘추 50이었다.

김대현이 돌아가셨을 때 여벌의 옷이나 염습할 도구조차 없었다. 그래서 산음현의 선비인 오장(吳長)‧권집(權潗)‧박문영(朴文楧)이 자신들의 옷을 벗어 수의(壽衣)를 짓고 예를 갖추어 염습했다. 발인하는 날, 읍의 모든 사람이 모여 전(奠)을 올렸는데, 울부짖으며 목이 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중략) 선을 쌓은 사람의 복이善人之慶 어찌 꼭 당일에만 있으랴豈必在卽 광석산은廣石之山 그 정기가 왕성하니其氣欝茀 더욱더 번창하여益熾而昌 자손이 천억이 되리라子孫千億


정경세, 『우복집(愚伏集)』 제18권, 「김공(金公) 대현(大賢)의 묘갈명(墓碣銘)」


이 시는 김대현과 동시대를 살았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1630년(인조 8)에 쓴 것으로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대현을 추모하며 후손들의 앞날까지 기원해 주고 있다. 1628년(인조 6) 장남 김봉조가 쓴 「가장(家狀)」에 “아버지의 손주와 증손자는 모두 113명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정경세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 김대현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20세기를 살아가는 김대현


폭우의 피해가 극심했던 지난 7월 말, 안동시 풍산읍 오미마을을 찾았다. 뜨거운 뙤약볕과 습한 공기에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 한낮, 봉황문을 지나 구시나무거리를 걸었다. 구수정(九樹亭) 아래 잠시 쉬려다 버드나무 잎들 사이에 숨어 있는 여름 모기에 발길을 재촉했다.


구시나무거리의 구수정과 버드나무 (장소: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오미마을회관 옆에 화수당(花樹堂)이 있다. ‘화수당’은 풍산김씨(豊山金氏) 문중의 회합 공간으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초서체로 쓴 편액이 남아있다. ‘화수’는 꽃과 나무가 가지를 치며 무성하듯 자식이 많고 문중이 번성함을 의미한다. 당나라 위씨(韋氏)들이 ‘화수회(花樹會)’를 결성하고 화수 아래에서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고사에서 비롯하였다.


화수당 (장소: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화수당 편액 (출처: 한국의 편액)


일제강점기 때 화수당은 죽암서실(竹巖書室)과 도림강당(道林講堂)에 이어 근대교육을 위한 교사(校舍)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08년 교남교육회에 참가한 김이섭(金履燮)·김응섭(金應燮)·김지섭(金祉燮, 1885~1928)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오릉학술강습회’는 오미마을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후에 ‘풍북공립보통학교’로 바뀌어 1929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김이섭과 김응섭은 김대현의 넷째 아들, 심곡(深谷) 김경조(金慶祖, 1583~1645)의 후손으로 맏형 김정섭(金鼎燮, 1862~1934)과 함께 항일 투쟁과 구국 활동을 했다. 이들 삼 형제가 나고 자란 곳이 바로 오미마을 영감댁이다. 이들의 증조부가 되는 낙애(洛厓) 김두흠(金斗欽, 1804~1877)이 동부승지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영감댁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미마을회관 왼편으로 영감댁이 있다. 영감댁 사랑채 다락방은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2월 14일은 엄청나게 바람이 불고 추운 날이었다. 행군하는 사람들이 동상에 걸리는 일이 속출했고, 다들 아우성이었다. 장정 한 명은 손가락이 완전히 마비되어 검지손가락을 절단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큰일이었다. 김정섭은 이 사태에 대해 크게 걱정이 되었다.

김정섭, 『일록』, 1895년 12월 일기


이 일기는 김정섭이 의병 활동을 하면서 쓴 것으로 추위와 배고픔에 고생하는 의병부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는 1919년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후 둘째 동생 김이섭과 사촌 김창섭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셋째 동생 김응섭에게 전달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일록(日錄)』, 『조고일록(祖考日錄)』, 『위암유고(韋庵遺稿)』 등을 남겼는데, 그의 『일록』은 안동 의병사와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영감댁(학남고택) (장소: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영감댁 오른쪽에 학암고택이 있다. 심곡파의 후손으로 『세전서화첩(世傳書畫帖)』을 남긴 학암(鶴巖) 김중휴(金重休, 1797~1863)가 진사시에 합격하여 제릉 참봉(齊陵參奉)을 지냈기에 참봉댁으로도 불린다. 참봉댁 앞에는 항일애국지사인 근전(槿田) 김재봉(金在鳳, 1890~1944) 선생의 어록비가 있다. 어록비에는 1922년 김재봉이 모스크바에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목적으로 밝힌 “조선의 독립을 목적하고”라는 친필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는 제1차 조선공산당의 책임 비서로 초기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는 명문 양반가의 후손으로 민중들의 삶에 눈을 뜨고 그들을 위해 애쓴 유학자였다.


참봉댁(학암고택)과 김재봉선생어록비 (장소: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김중휴의 『세전서화첩』,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명나라 장수가 조선을 떠나면서, 명나라 군대의 뒷바라지에 힘쓴 김대현에게 이 그림의
모본을 기념으로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수부대 ‘해귀’에 대한 묘사도 있다.
(장소: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참봉댁 뒤편으로 허백당 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김대현이 지었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며 없어졌는데 1600년에 장남 김봉조가 다시 세웠다. 허백당 종택 뒤로 김대현이 지은 죽암서실이 있다. 폭우로 길이 험해 죽암서실을 가지 못했다. 그곳은 김대현과 그의 여덟 아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후에 오릉학술강습회가 열려 풍산김씨 문중의 근대교육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교육 공간이 폭우로 훼손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허백당 종택 (장소: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추원사(追遠詞)와 도림강당이다. 이곳은 김대현과 그의 아들 8형제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곳이다. 도림강당 북편의 ‘봉황문(鳳凰問)’은 원래 인조가 김숭조의 문과 급제 후 관찰사에게 명하여 마을 입구에 ‘봉황려(鳳凰閭)’라는 편액을 걸도록 베풀었는데 세월이 흘러 봉황려는 부서지고 도림강당의 문 이름으로 바꾸어 세워진 것이다.


도림강당의 봉황문 편액 (장소 :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오마마을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이다. 8·15 광복절인 오늘,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며 암울했던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오늘의 풍요를 있게 해준 독립운동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선현들을 생각했다. 자정순국(自靖殉國)의 선두에 선 김순흠(金舜欽, 1840~1908), 서로군정서에 활약한 김만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계에서 활약한 김응섭, 그리고 의열투쟁사의 표상 김지섭까지 그들의 뜨거웠던 낮과 밤의 시간을 그려 본다.


오미광복운동기념탑 (장소: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돌고 도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김대현과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그의 풍산김씨 후손들의 삶이 스쳐 지나간다. 괴롭고 암울했던 순간에도 학문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들, 안락한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민중들의 삶을 어루만져주던 그들의 삶의 자세가 대를 이어 전해진다.




내 앞에 놓인 삶


나는 내 자식을 키워내느라 나를 키워낸 부모님에게 소홀했다. 7월 말,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밥은 잘 챙겨 먹는지 내 안부를 묻고 운전 조심하라고 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다. 엄마의 입원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다.

엄마는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어 건강을 챙기려고 아침 운동을 하시다 흉추 9번이 골절되었다. 엄마는 당신이 아프면 가까이 사는 내가 신경 쓰고 걱정할까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집에 혼자 계신 아버지의 반찬을 해드리며, 엄마가 해주신 멸치볶음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렸다.

‘힘들지 않은 때가 오기는 올까?’라는 생각에 우울해질 때면 나는 나의 부모님을 생각한다. 그들이 살아낸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거친 손을 잡아본다. 힘든 삶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한 그들의 노년이 축복처럼 느껴질 때 나도 그들처럼 빛나는 노년을 맞이해야겠다고 힘을 내본다.

연말, 미루고 미루다 건강검진을 하러 가면, 당뇨와 고혈압, 그리고 암 등 나의 부모, 형제·자매, 친척 중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가족력 체크리스트 항목을 마주하게 된다. 가족 간 공유된 삶의 방식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어떤 가족력을, 어떤 DNA를 물려줄 것인가? 나는 아이들이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고, 삶의 역경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을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들을, 나아가 조국(祖國)을 사랑한다.

김대현과 그의 후손들은 나와 가족과 친족의 안위를 생각하는 보종(保宗)과 함께 보국(保國)에도 힘썼다. 내면의 강한 정신력은 위기를 극복할 내적 힘을 주기 때문이다. 김대현을 만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나는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해보는 시간이었다. 나의 후손이 대대손손 화평하고 즐겁게 살아가기를….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더보기
2. 스토리테마파크 (https://story.ugyo.net)더보기
3.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더보기
4. 지역N문화 역사문화유산
(https://ncms.nculture.org/castle-road/story/2037)더보기

5. 김대현 저, 김정기·박미경 옮김, 『유연당선생문집』, 영남선현문집 국역총서 10, 한국국학진흥원, 2013.
6. 제10회 기탁문중 특별전, 풍산김씨 허백당 문중, 『민심을 보듬고 나라를 생각하며』,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2013.
7. 문중이야기 06, 『풍산김씨 오미마을 영감댁』, 한국국학진흥원, 2021.
8. 김주연, 「오미마을 장소성 강화를 위한 공간 스토리텔링 연구」, 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융합콘텐츠학과 문화기획 전공, 석사학위논문, 2020.
9. 심상훈, 「일제강점기 유학적 지식인들의 사회주의 수용 양상과 민족운동」, 『韓國思과 文化』, 70호,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10. 배영동, 「안동 오미마을 풍산김씨 『世傳書畫帖』으로 본 문중과 조상에 대한 의식」, 『韓國民俗學』, 한국민속학회, 2005.
“조선시대의 출산 풍속”


[출산 준비]

출산은 아내의 친정에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내방(주부의 거실) 바닥에 짚을 깔고, 아이를 낳을 방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른다. 임산부는 검은 치마를 입고 출산을 준비하였으며 시중은 시어머니나 경험이 풍부한 아주머니에게 부탁한다. 산실에는 <삼신상(산신)>을 설치하고, 짚을 깔은 위에 상을 바쳐서 밥과 미역국을 세 그릇씩 바치는데 임산부가 출산 후 처음으로 먹는 식사는 이를 내려서 만든다.
배내옷, 포대기, 기저귀, 솜 등을 마련한다. 배내옷은 바늘로 꿰매며 단추를 달지 않고, 긴 끈을 붙여 가슴에 한 바퀴 돌려 맨다. 단추 대신 긴 끈을 쓰는 것은 아기의 수명이 길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농촌의 남편은 아내의 산달이 가까워오면 삼으로 왼새끼를 꼬아둔다. 이것을 밧줄처럼 산실에 매어놓아 임산부가 아이를 낳을 때 이것을 잡고 힘을 쓴다.

[탯줄 자르기]

탯줄을 자를 때는 탯줄을 잡고 아기 쪽으로 훑은 다음 배꼽에서 한 뼘쯤 되는 부분을 자르고 그 끝 부분을 실로 잡아매어 깨끗한 솜에 싸서 아기 배 위에 올려놓는다. 태는 흔히 가위로 자르지만 여아가 태어났을 때는 동생이 남아이길 바라는 뜻으로 소독한 낫이나 식칼을 쓴다. 태는 짚이나 종이에 싸서 삼신상 아래에 두지만, 이를 귀하게 여기는 집에서는 일진에 맞추어 좋은 방위에 놓아둔다. 태는 보통 사흘이 지나기 전이나 사흘째 되는 날 태우거나 항아리에 담아 명당자리에 묻는다.

[금줄 치기]

아기가 태어나면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기 위해 1주일 또는 3주일 동안 집의 대문이나 산실, 부엌 입구 등에 금줄을 친다. 남아일 때는 금줄에 붉은 고추와 숯덩이를 끼워두며, 여아일 때는 미역, 솔잎, 종이 따위를 달아준다. 금줄은 반드시 왼새끼로 꼬며 양 끝을 자르지 않는다. 왼새끼는 잡귀를 쫓기 위해서이며, 양 끝을 그대로 두는 것은 아기와 산모의 수명이 끝없이 길기를 바라서다. 도 붉은 고추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붉은 기운도 잡귀를 물리친다고 여겼다. 한편 숯에는 독을 제거한다는 뜻이 담겨있고 여성을 나타내는 빛인 솔잎의 녹색에는 여아가 성장하여 바느질을 잘하라는 기대가 들어 있다.
금줄은 7일, 21일 또는 49일간 걸어 두는데, 이 사이 외부 사람의 출입은 금지되며, 또한 산실에서 물건을 내오는 것도 금지된다. 금줄을 떼고 산실이 개방된 후에 비로소 친척이나 이웃사람들이 축하하러 온다.

“큰 딸이 사내아이를 출산하다”

오희문, 쇄미록, 1596-01-26 ~

1596년 1월 26일, 시집간 큰 딸아이가 어젯밤부터 기운이 불편하고, 출산의 기미가 있어서 즉시 고모 방으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종일 머물다가 오늘 밤이 깊은 해시 무렵에 출산을 하였다. 방안에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몹시 기뻐하였다.

오희문은 그 무렵 정계번, 이기수 등과 한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해산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 방에서 나와 하늘을 우러러보니, 시간은 밤 12시경이었고, 정확하게는 해시였다. 사위인 신응구는 한질을 앓아 오래 누워있고 일어나질 못하였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기뻐해 마지않았다. 오희문은 딸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사위의 집은 사내가 귀하였는데, 이렇듯 아들을 낳았으니 앞으로 딸도 시댁에서 더욱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감초를 달인 이후 아이에게 먹였다. 딸아이 역시 다른 곳은 무탈하였고, 다만 힘을 너무 쓴 나머지 미역국이 입에 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무사하게 출산한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오희문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란의 와중에도 무사히 아들을 출산한 큰 딸이 무척 기특하였다.

“조선시대의 산후조리”


전근대에는 산후의 산모와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생과 의약 공급 환경이 낙후되어 있었던 탓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산모와 영아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방책은 외부와의 격리였다. 지역과 집안, 그리고 상황마다 달랐지만 대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삼칠일(3·7)간 금줄을 드리우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였는데, 산모도 물론 바깥출입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최소 21일이 지나야 늘어났던 자궁이 제자리를 찾고 몸이 회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모는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처음으로 목욕을 하는데, 더운물을 수건에 묻혀 몸을 닦아내는 것으로 산후풍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몸에 직접 물을 묻히는 일은 출산 후에 한 달이 지나야 했다. 산후풍을 방지하고자 하는 조치에는 또한 문을 닫고 병풍을 쳐서 바깥바람이 몸에 닿지 않도록 하고, 여름철에도 방에 불을 때는 방법들이 있었다. 산모는 또한 여름에도 두껍고 긴 옷을 입고 버선을 신으며, 부채질하지 않아야 했다. 그 외에도 약쑥 삶은 물로 좌욕을 하고 무거운 것을 들지 않도록 하여 회복을 도왔다.

산모의 몸을 보하기 위해 특별히 탕약을 지어 먹이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향신료를 넣지 않은 뜨거운 국과 밥을 먹도록 했다. 그리고 성질이 차다고 여겨지는 메밀 등의 식재료나,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육류 역시 금해졌다. 또한, 산모의 치아를 위해 딱딱하고 차가운 음식도 피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민간 풍습에 따라 금하는 음식 재료들이 있었다.

산모가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가족들도 싸움, 살생 등의 부정한 행위를 피하고, 부정한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를 피하는 등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아들을 잃었던 달부, 다시 득남하다”

배냇저고리(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김령, 계암일록, 1620-10-13 ~

1620년 10월 13일, 이실의 집에 한달부와 배원선이 찾아왔다. 그 소식을 듣고 김령 또한 이실의 집으로 찾아가 그들을 만났다. 이날의 만남은 한달부의 득남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는 올해 아들을 한 명 잃었는데, 다행히도 다시 득남하였다. 주인이 술을 따랐고, 김령은 밤이 되어 술에 취한 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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