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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액을 먹는 괴물, 방상씨와 매귀 풍습

요즘 국어사전 중에는 “매구”라는 낱말을 가리켜 “천 년 묵은 여우가 변하여 된다는 전설상의 짐승”이라고 풀이 해 놓은 것이 있다. 그런데 나는 “매구”라는 말 뜻의 이런 풀이가 과연 얼마나 널리 통용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여우가 변한 짐승이 매구라면 매구는 어떻게 생긴 짐승이고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가? 과연 매구라는 단어를 쓴 사람들이 여우가 백 년도 아니고 5백년 도 아니고 딱 천 년 만에 변한 괴물을 매구라고 부른다고 확실히 의식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매구”라는 말에는 다른 뜻도 있다. 설 무렵에 농악을 하면서 사람들이 복을 빌기 위해 하는 민속 행사를 일컬어 말할 때에도 “매구”라는 말을 쓴다. 다행히 이런 뜻으로 “매구”라는 단어를 쓰는 사례는 여러 보도나 논문, 신문 기사 등의 자료를 통해 비교적 조사된 사례가 명확히 나타나는 편이다. 매구라는 행사를 벌이는 것을 두고, “매구 때린다” “매구 친다”와 같이 부르는 경우도 있고, “매구굿”을 한다고 표현하는 사례도 있다. 한문으로는 흔히 매귀(埋鬼)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훈상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초에는 이러한 행사를 일종의 연극이나 공연처럼 생각하여 “매귀극(埋鬼劇)”이라고 부른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민속 행사 중에도 과거의 매구굿을 계승하는 것들이 있어서, 농악 놀이의 한 종류처럼 언급될 때도 있다.

매구라는 말이 “매구 친다”와 관련이 있고 과거에는 “매귀(埋鬼)”라고 표기하기도 했다는 단서를 이용하면, 매귀의 전통을 좀 더 깊이 찾아볼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 전기에 나온 유명한 이야기 책인 《용재총화》에도 매귀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용재총화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용재총화》는 16세기 초에 출간된 책이다. 매구를 두고 그것이 여우가 변한 전설상의 이상한 짐승이라는 현대 국어사전에 정리된 이야기만을 막연히 받아들이는 데 그쳤다면 이야기는 거기서 그냥 끝이 난다. 그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더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고 더 상세히 따져 볼 소재도 별달리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도대체 그 말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온 말인지 추적해 나가는 단서가 있어서 그것을 추적해 나갈 수 있다면, 매귀의 역사는 갑자기 5백년 전의 《용재총화》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그 5백년 동안 매귀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알아보면서, 매귀의 특징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 거리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음악회의 주요 참여자들이 부자나 세력가들이 아니라
어린이들이라는 점도 유쾌



《용재총화》의 기록에서는 매귀를 “방매귀(放枚鬼)”라고 쓰고 있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귀신을 때려서 내쫓는다는 뜻이다. 마침 “매구 때린다” “매구 친다”는 현대에 조사된 민속과 통하는 말이다. 또한 이 기록에서는 “방매귀”가 궁중의 “방상씨(方相氏)” 놀이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방상씨는 고대 중국 사람들의 주술적인 의식에 등장하던 것으로 대체로 눈이 네 개가 달린 이상한 형상의 가면을 쓰고 귀신을 쫓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 고전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자주 접할 수 있는 《주례(周禮)》에도 등장하는 것이므로, 조선 시대 선비들도 방상씨에 대해서는 친숙하게 여겼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설날에 액운을 쫓기 위해 궁중에서 하는 공식 행사로 중국에서 유래한 방상씨 놀이가 자리 잡기 쉬웠던 것 같다.

《용재총화》에 묘사된 조선 전기, 궁중의 공식 행사로 이루어지는 방상씨 놀이 장면은 재미 있는 점이 있다. 이에 따르면, 한 해의 맨 마지막 날에 어린 아이들 수십 명을 모아서 붉은 옷에 붉은 두건을 씌워 궁중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행사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조정의 관청인 관상감(觀象監)에서 북과 피리를 준비해 두었다가 설날 새벽이 되면 방상씨, 즉 방상씨 가면을 쓴 사람이 등장하여 붉은색 차림의 어린 아이들을 쫓아내며 음악을 연주하는 수순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궁중의 방상씨 놀이는 조선 시대의 신년 음악회인 셈이다. 그런데 음악회를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에 준비해서 다음날 새벽에 진행한다는 점도 재미있고, 한 편으로는 음악회의 주요 참여자들이 부자나 세력가들이 아니라 어린이들이라는 점도 유쾌해 보인다.

애초에 어린이를 방상씨 놀이에 참여시키는 것은 중국의 “진자(侲子)” 풍습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방상씨가 본래 귀신을 쫓는 일을 한다는 점을 짚어 보면, 이 행사에서 방상씨가 쫓아내는 어린이들이 사실 액운과 재난을 나타내는 불길한 귀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용재총화》의 다른 대목에도 그 어린이들이 방상씨에게 죄를 비는 역할을 맡았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린이 같은 모습이면서 동시에 붉은 옷차림, 붉은 두건을 쓴 귀신 형상을 재수 없음을 나타내는 신령이라고 여긴 것 아닌가 싶다. 유럽권에서 악마를 흔히 붉은 색으로 나타내는 것과 비교해 보면 비슷해 보이는 점도 있고, 한편 천사를 흔히 어린이로 나타내는 것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정 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점도 있다.

그리고 매귀, 즉 “방매귀”는 궁중에서 하는 행사인 방상씨 놀이를 민간에서 흉내내어 비슷하게 하는 행사라고 되어 있다. 《용재총화》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방매귀, 곧 매구 때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때리는 데 쓰이는 방망이였다. 특별한 빗자루를 만들어 귀신 쫓는 방망이로 쓴다고 하는데, 그 재료는 녹색 죽엽(竹葉), 붉은 형지(荊枝), 익모초(益母草) 줄기, 도동지(桃東枝)를 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문 내지는 창문을 마구 두드린다. 그리고 동시에 북과 방울로 소리를 내면서 집에 있는 귀신을 문 밖으로 몰아 내는 흉내를 내는 것이 5백년 전 매귀의 핵심이다.

조선 시대의 공식 기록을 보면 방상씨 놀이는 꾸준히 후대에도 이어졌던 것 같다. 외규장각 의궤와 같은 자료에 그림으로 그려 놓은 방상씨 모습이 남아 있기도 하고, 방상씨가 장례식에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심지어 20세기 들어 고궁에서 궁중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방상씨 가면이 발견된 적도 있다. 이런 자료를 보면, 방상씨의 옷차림은 눈이 네 개이고 귀고리를 하고 있으며, 검은색 상의와 붉은 색 하의를 입고 곰가죽을 둘렀으며, 양 손에 창과 방패를 든 모습이다. 고대 중국에서 전래된 방상씨가 조선에서 나름의 모습으로 변해서 정착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고궁에서 발견된 방상씨탈(국가민속문화재 제16호,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악운을 쫓는 것이 멋진 모습의 기사나 화려한 모습의 천사가 아니라,
볼 품 없는 선비, 늙은 할머니 같은 사회의 약자들이 같이 힘을 합친 모습



민간의 행사이기 때문에 기록은 훨씬 불분명하지만, “방매귀”라는 이름의 기록으로 등장했던 매귀 역시 후대에도 꾸준히 이어졌음은 분명하다. 18세기의 기록인 《학성지》에는 울산 지역의 “매귀악(煤鬼樂)” 행사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종이로 만든 깃발을 중심에 두고 밤에 행사를 하며 불을 밝히고 불에 태우는 절차를 중요시한다는 묘사가 보인다. 한편으로 “기두(魌頭)” 가면을 쓴 사람들이 남의 집 뜰을 밟는 행동을 한다고 되어 있다는 대목도 있다. 기두 역시 방상씨와 비슷한 역할로 중국 고전에 나오는 것이므로, 이 역시 이상한 형상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귀신을 쫓는 일을 흉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남의 집 뜰을 밟는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지신밟기 풍속과 연결되기도 한다.

19세기로 넘어가면 좀 더 다채로운 매귀 기록도 나타난다. 《봉성문여》에는 “매귀희(魅鬼戱)”라는 이름으로 합천 지역의 매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매귀를 주도하는 인물들이 광부(狂夫)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광부”는 아마도 어릿광대를 뜻하는 말로 보이는데, “조대(措大)”, “노파”, “귀면(鬼面)”, 즉 볼품 없는 가난한 선비, 늙은 할머니, 귀신 얼굴을 한 사람, 세 사람의 광부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 셋은 밤에 꽹가리와 북을 치면서 노래를 했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런 모습으로 꾸민 어릿광대들이 밤거리를 행진하면서 한 바탕 놀이를 벌인 듯 싶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바로 그런 행동으로 액운을 내쫓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오광대춤 (출처: 문화재청)


고성 오광대와 같은 현대의 민속놀이 탈춤에는 아마도 조선시대 신년을 장식하던 행사인 매귀의 영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매귀라는 말은 점점 생경한 것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괴물처럼 생긴 이상한 것들이 음악이나 무엇인가를 때리는 소리에 맞춰서 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놀이가 있었고 그것의 역사가 최소 5백년 가량이라는 사실도 대중 사이에서는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

그렇지만, 2021년 새해는 옛 매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아도 좋은 때라고 생각한다. 특히 악운을 쫓는 것이 멋진 모습의 기사나 화려한 모습의 천사가 아니라, 볼품 없는 선비, 늙은 할머니 같은 사회의 약자들이 같이 힘을 합친 모습이라는 점은 되짚어 볼만하다. 모두가 새해에 복을 많이 받으라고 떠드는 시절이지만, 사회에는 그런 말 만으로는 도저히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같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그런 사람들의 처지를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 재난을 막는 방법일 것이고 2021년 다운 매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집필자 소개

곽재식
공학박사. 화학업계에서 꾸준히 일하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가 MBC TV에서 영상화된 후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장편소설 『사기꾼의 심장은 천천히 뛴다』는 SBS 드라마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지상 최대의 내기』, 교양서 『로봇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이 있다.



“매해의 마지막을 구나로 장식하며 추억에 젖다”

김령, 계암일록,
1603-12-30~ 1608-12-30

1603년 12월 30일, 한 해가 다 지나갔다. 김령은 어버이가 모두 살아 계실 때를 추억해 보니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 그지없었다. 그는 입으로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다. 내일 제사 때문에 제수 음식을 살펴보고 초저녁에는 구나(驅儺)를 행했다. 자개·이지 등과 옛날에 한 약속이 있어서 후조당(後凋堂)에 모여서 대화했다. 닭이 운 뒤 각자 흩어졌다.
1606년 12월 30일, 김령은 초저녁에 구나(驅儺)를 행했다. 병중에 있다 보니 옛날 어버이 계실 적의 성대했던 일들을 생각하니 김령은 자신도 모르게 느꺼움이 사무쳐 슬퍼졌다.
1607년 12월 27일, 김령은 밥을 먹은 뒤 방잠에 가서 큰 배소(拜掃)를 행했다. 나례(儺禮) 행사의 북소리를 들으니 옛날 일이 생각났다.
1608년 12월 30일, 추위가 심했다. 김령은 저물녘에 설월당에서 외가의 절제(節祭)를 지냈다. 한해가 이미 다 지나갔다.
옛날, 어버이를 모시고 즐겁게 지내던 시절과 아이 적에 장난치며 뛰어놀던 추억이 떠올랐다. 느꺼움에 탄복되고 탄복되었다. 김령은 밤에 구나(驅儺)를 행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년 김령의 소회와 아이들의 구나(驅儺)”



바람이 세차게 부는 162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김령은 여러 어른에게 감사 편지를 써드렸다. 그리고 정오경에 부모님께 절제(節祭)를 올렸다.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한 해의 마무리를 했다.
마을 아이들은 보잘것없으나마 구나(驅儺)를 하였다. 김령은 한 해의 끝을 보내며 점점 노경(老境)으로 접어드는 감회에 젖었다. 옛 추억이 엊그제 일 같아 스스로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상께서 전염병을 막을 제사를 지내라 명하시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6-05-22

1746년 5월 22일, 흐린 날이었다. 요사이 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났는데, 그 때문인지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부 시장에 보낸 종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질 못했다.
요사이 주상께서 민간에 역병이 도는 것을 아시고는 이를 치료할 벽온단을 나누어 하사하셨다고 한다. 또한 낭관과 감사를 파견하여 여귀에게 올리는 제사,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주상의 성은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료들과 백성들은 마땅히 감격하여 은혜를 갚을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고을에서는 세금 거두는 것을 어찌나 화급하게 독촉하는지, 온 고을이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서울에 계신 주상은 백성들이 전염병에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일선 관리들과 향리들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에만 골몰하고 백성들의 삶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어찌 이것이 관리로서 임금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 하겠는가! 최흥원이 보기에 전염병을 일으키는 여귀보다, 세금을 독촉하는 관리들이 백성들에겐 더 무서운 존재 같았다.

“1846년의 설날 - 세배와 차례, 성묘 그리고 한해 운수 점치기”

서찬규, 임재일기,
1846-01-01~ 1849-01-01

오늘은 1846년 1월 1일, 정사(丁巳)년 설날이다. 매해 그러했듯 서찬규는 닭이 울 무렵 할머님과 부모님께 세배하고, 날이 샐 무렵 절 차례를 지냈다. 서실로 나와서 덕우와 함께 시초점을 쳤는데 서지췌(噬之萃) 괘가 나왔다. 오후에는 신제(新堤) 북쪽 산언덕의 선영에 가서 성묘했다. 5대 조비(祖妣) 영양 이씨(永陽李氏), 조비 월성 손씨(月城孫氏), 증조비 동래 정씨(東萊鄭氏), 숙부 등 모두 네 분의 묘소가 여기에 있다. 1849년(헌종15년) 1월 1일에는 감기 때문에 차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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