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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어느 선비의 경험,
그건 얼마였을까?

문질(文質)이 빈빈했던 선비, 조극선(趙克善)


옛말에 이런 격언이 있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사실, 이 문장은 논어에 실려 있는 공자의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다. 맹자는 양혜왕과의 문답에서 ‘이해(利)’보다 ‘어짊과 의리(人義)’ 가치를 강조했다. 모두가 공자와 맹자가 남긴 금언이다. 조선 시대 개인과 사회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리학적 가치를 중시했다. 문질빈빈, 즉 안과 밖의 가치가 균형을 이루면서 순간의 이익보다는 의리를 실천하는 도학자를 지향한 선비들이 있었다. 17세기는 조선 전기의 이념적 투쟁을 마무리하면서 이제 본격적인 성리학 질서 정착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이즈음 활동한 인물 중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이 있다.

조극선은 오늘날 예산과 덕산에서 생장한 인물로 성리학 이념의 실천에 진심이었다. 숨은 인재로 사회의 모범이 되면서 사림의 중망을 받는 산림(山林)을 역임했다는 사실은 조극선이 문질이 빈빈한 선비였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그의 삶의 자세를 들여다보는 통로가 있다. 조극선은 15세부터 41세까지 26년 동안 자신과 자신 주변에서 경험하거나 전해 들은 내용들을 일기에 꼼꼼히 적었다. 일기에는 교유한 인물, 공부한 독서, 주위의 소문 그리고 자신의 경제적 처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생활일기는 그의 주변에서 발생했던 여러 매매와 화폐 경험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조극선은 성리학자로서 치밀한 철학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자세는 일기를 쓰면서도 남달랐다.

일기의 시작은 1609년(광해군 1) 12월 3일이었다. 그는 “날마다 일어나는 일들을 적고 야사의 체제를 본받아 일록이라고” 명명했다. 15세의 젊은, 혹은 어린 나이에 일기의 체계를 정의하고 기록할 내용의 범주를 정한 다음, 그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부여했다는 사실은 역시 그가 대충 살려고 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인재일록(忍齋日錄)』(출처: 장서각 기록유산DB)


『인재일록(忍齋日錄)』, 「일록서(日録序)」(출처: 장서각 기록유산DB)


그로부터 10여 년 뒤, 1624년(인조 2) 자신의 일기에 범례를 정하고 기록의 체계를 다잡았다.


무릇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줄 때 윗사람이면 ‘사(賜)․급(給)’이라고 하고, 대등한 관계의 사람이라면 ‘궤(饋)․유(遺)․이(貽)․치(致)’라고 한다. 아랫사람은 ‘헌(獻)․진(進)․납(納)’이라고 한다. 만일 부조(扶助), 증신(贈贐) 등은 사람 이름으로 칭한다. 무릇 사람들이 나에게 덕을 베푼 것이 있으면, 내가 잊어서는 안 되는 까닭에 일의 크고 작음이나 비록 음식 같은 것이라도 반드시 상세히 기록한다.


『야곡일록(冶谷日錄)』(출처: 장서각 기록유산DB)


『야곡일록(冶谷日錄)』, 「범례(凡例)」(출처: 장서각 기록유산DB)


조극선이 정한 일기 기술의 원칙 중 하나로 경제적 거래에 있어 엄밀성을 밝힌 부분이다. 당시 화폐보다는 선물을 통한 생필품 조달의 관습 속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다. 이러한 엄격한 자기 관리 그리고 일기 기술에 있어 체계화와 구조화에 힘입어 그의 일기에 남은 매매 기록과 화폐 이용 내용은 “그건 얼마였을까?”의 물음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을 담고 있다.




무엇을 사고 또 팔았나?


조극선이 일기에 남겨둔 사고판 기록으로 17세기 전반의 가격 문제와 여러 사회 모습을 알 수 있다. 먼저 그가 남긴 파는 물건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20세이던 1614년(광해군 6) 가을, 자기의 초립을 팔아 감 10첩을 샀다. 기록은 주로 생필품을 팔아 곡물을 마련하는 내용이다. 면포나 신발을 팔아 봄과 가을에 보리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시세를 관찰했다. 22세 4월의 춘궁기에 “지금 목면 1필을 팔면 매조미쌀 3말 정도만 받을 수 있을 뿐인데, 올해의 시세가 그렇다”고 물가를 적었다. 도학자였던 그이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봄 춘궁기에 곡물을 구하기 힘들기는 일반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처가가 궁핍하여 『통감절요(通鑑節要)』 6권을 팔려고 했다. 그런데 대체로 곡식을 구하고 있는데 팔려는 사람은 적고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싼값을 주려고 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20명도 못 미치고 시가에도 미치지 못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양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 테마파크)


처가에서 춘궁기 곡식을 구하기 위해 『통감절요』를 팔고 있는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선비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양식이 담긴 책은 목숨의 부지를 위한 양식으로 대체하기 위해 매매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일기는 배고픔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춘궁은 현실이라 흥정에서 책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조극선은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지 않은 상황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궁핍함을 근심하고,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아 참상을 말로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다행스럽게도 한자의 베도 팔지 않아도 오히려 연명할 수 있다.



봄 기근으로 힘든 고비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그와 가족이 자급자족할 수 있어 운이 좋고 사람으로서 그리고 선비의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감정을 드러냈다. 전근대 사회에서, 특히 17세기 아직 시장의 발달을 통한 물품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한 현실은 무엇보다 곡물의 마련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주로 생필품들을 팔아 곡식을 마련하던 일이 일상이었고, 춘궁기에는 더욱 심했다.

조극선과 그의 집에서 사들인 물품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면포 5필로 제주의 망아지를 사거나 그가 역시 면포 5필로 소를 사기도 했다. 이 외에도 보리 2되로 오이를 사 먹거나, 쌀 1말로 소고기를 사기도 했다. 그리고 매조미쌀 한 말로 청어와 낙지 등을 샀다. 1620년(광해군 12) 5월에는 면포 1필로 도미 20마리를 사기도 했다. 소소한 물품의 구매 외에도 조극선은 기른 말을 팔거나 고향의 물품을 상경 길을 이용해 한양에서 팔아 이익을 도모했다.


평생 재산을 불리는 일에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간혹 때를 보아 하려고 해도 반드시 이로움 없이 도리어 손해가 되었다. 대체로 사람의 빈부는 운명에 달려있어 어찌 감히 그사이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면포(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일생 학문에 정진하는 학자를 지향한 조극선 그였지만 현실과 떨어져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기에 솔직하게 그가 경제적 이익을 도모했던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익을 찾아간다고, 욕심을 부린다고 부가 달성되지 않는 이치를 마침내 받아들이고 있다.




동전을 경험하고 가격을 알다.


조극선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생필품을 팔았고, 또 곡물을 팔아서 생선이나 고기 그리고 말 등의 물품을 확보했다. 사고파는 행위에서 그 수단, 즉 화폐는 곡물과 옷감(면포)였다. 이러한 경제생활은 법전에 정한 화폐가 작동한 결과이면서 17세기까지 사람들의 경제생활이었다. 그런데,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조극선이 살았던 17세기 전반이었다. 그 원인은 동전, 즉 조선통보의 유통이었고, 실제는 조극선이 일기에 남긴 동전 사용 경험이었다. 1678년(숙종 4) 상평통보의 전국 유통이 있기 전, 광해군과 인조 때에도 계속해서 동전을 주조하고 시장에 유통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광해군 때 국가의 동전 유통 정책은 한양에 집중되었기에 주로 고향에서 생활했던 조극선은 이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조 재위 시기 성균관 사업으로 상경하면서 비로소 동전을 처음 접했다. 1634년(인조 12) 2월 15일 그의 나이 40세 때, 녹봉을 수령하고 일기를 적었다.


백미 5석, 대두 1석 대두는 미 1석으로 대신했다. 전문 30문을 주었는데 ‘문’은 1개로 석전과 동전이 각각 반씩이다. 돈을 사용하는 방법은 석전 1문은 쌀 1승이며 동전은 2문이 1승이다.


조선통보(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조극선은 녹봉을 생소한 동전으로 받고 당황했다. 쌀, 보리, 콩 그리고 면포로 지급하던 녹봉 내용이 쌀, 콩 그리고 전문 즉 동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쌀과 콩의 규모가 줄어든 데 이어 생소한 동전으로 녹봉을 받고 고민했을 것이다. 동전으로 받은 녹봉 중 돈 30문은 재질에 따라 동전과 석전으로 구성되고 가치에도 차이가 있었으며, 쌀을 기준으로 한 교환가도 정해져 있었다. 모두가 국가의 동전 사용 정책의 일환이었다. 동전은 관리들이 도성의 점포에서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변호길이 석전과 동전을 각기 10문(文)씩 가지고 있어, 술을 사서 제천정(濟川亭)에서 마시려 했다. 그런데 강가에 상점이 설치되어 있어 모두 함께 그곳에 가서 마셨다. (다음날) 한번 포자에 출입하는 것은 진실로 큰 해로움은 없겠다. 최근 돈을 가져가서 마시고 술판을 벌인다. 거기에 가지 않는 것만큼 잘하는 것이 없는데 아주 후회된다.


직장 동료 변호길과 강남으로 출장을 다녀오는 날 저녁, 오늘날 한남동 인근의 제천정(濟川亭)에 이르러 동전 사용을 경험하고 남긴 후회의 일기이다. 국가의 정책에 부응하는 차원에서 동전 20문으로 강가 상점에서 술을 사 마셨다. 그런데, 술집에서 벌어지는 술판은 인의를 존중하며 문질이 빈빈한 삶을 추구하는 성리학자 조극선과는 맞지 않았다.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양 생활에서 매매에 면포를 기본으로 사용하고 동전은 이용하지 않았다. 조극선의 이러한 인식과 자세는 인조 때 동전 유통 정책이 실패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17세기 일기에서 조극선은 곡물과 면포를 활용하여 생필품을 구매하는 화폐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동전은 관료로서 국가정책에 부응해야 하는 의무감에 따라 화폐로 인정이 되었지만, 국가에서 정한 교환가에 의해 가격이 정해지는 반시장적인 화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조극선이 일기에 적었듯이 동전에 따라 쌀의 교환가가 정해지고, 국가에서 정한 상점에서만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태평성시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에는 경제생활이 확연히 달라졌다. 17세기 동전 유통 노력의 지속과 시장의 발달에 따라 숙종 때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결과였다. 18세기 전반 경상도 상주 일대에 세거했던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은 시장 상인의 동향과 물가의 추이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일기에 적었다. 동전 기준의 물가와 시장의 발달은 동전 유통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 전라도 흥덕에서 생활했던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주변의 소소한 물건의 가격은 말할 것도 없이 상경 길에 주막 사용한 금액을 일기에 꼼꼼히 적고 있어 전면적인 동전 중심의 가격 결정과 경제생활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 이후의 경제생활 일상은 동전이 중심이었으며, 그에 따라 값과 물가는 동전을 기준으로 정해지고 있었다.




집필자 소개

정수환
정수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사학 전공 통합과정으로 문학박사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고문서연구실 실장이다. 홍익대학교, 경기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경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는 『조선후기 화폐유통과 경제생활』, 『조선왕실의 의례와 재원』, 『한국 농촌개발과 국제개발』, 『호남 고문서 연구』(공저) 등이 있다. 조선시대 고문서와 일기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일상을 연구하면서 농촌을 주제로 조선시대에서 현대 새마을 운동을 추적하고 있다.
“승려가 책을 팔러 다니다”

금난수, 성재일기,
1578-02-03 ~ 1578-02-12

금난수의 큰아들 금경과 셋째 아들 금개는 도산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들들도 집에 없고, 눈이 많이 와서 누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어딘가 유람을 가기에도 어려운 무료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반 자(약 15cm)가 넘게 쌓인 눈을 뚫고 누군가가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많은 짐을 지고 온 승려였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서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승려는 금난수의 눈앞에 자신이 지고 온 책을 늘어놓았다. 도산서원에서 오는 길인데, 금난수의 큰아들인 금경이 말하길 아버지가 분명 책을 지고 가면 좋아하실 테니 아버지가 원하는 책이 있으면 팔아드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료한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이 읽어 주어 금난수는 흐뭇한 마음에 승려가 지고 온 책들을 기분 좋게 뒤적거렸다. 금난수가 읽을 만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막내인 금각에게 읽힐 만한 책은 있었다. 금난수는 『당음(唐音)』 9책을 구매하기로 하였다. 『당음』은 서당에서 주로 사용하던 한시 교재인데, 당시가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고 중국어의 4성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 수 있어 유용하였다. 노래하듯 당시를 읽을 귀여운 아들 생각에 금난수는 승려에게 지불한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종이를 내다 판 선비, 비루하다는 비난을 사다”

김령, 계암일록, 1609-10-05 ~

1609년 10월 5일, 추운 날이다.

들으니, 안창(安昶)이 종이를 팔았는데, 탐욕스럽고 비루한 짓을 했다고 하여 논박 당했다고 한다.

“값을 무명 20필로 깎아주시오! - 지팡이 짚고 오가며 밭을 사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2-01-17 ~ 1612-01-30

1612년 1월 17일, 택룡은 아들 대생과 함께 가동(檟洞)에 갔다. 반유실(潘有實)이 밭을 판다고 하기에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가동의 노비 천실(千實)의 집에서 만나기로 해 그 곳으로 갔는데, 천실은 외출하고 없었고 반유실도 오지 않았다. 택룡은 늙은이를 진흙밭에 불러놓고 일부러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택룡은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사흘 뒤, 반유실이 가동의 밭을 팔기 위해 다시 찾아왔다. 밭 면적은 한 섬지기[일석락(一石落)]정도였는데, 반유실이 부른 가격은 무명 50여 필이었다. 택룡은 무명 50여 필을 소 2마리, 옷 2벌, 무명 20여 필로 대체 환산해 지급하고 샀다. 매매문서를 만들고 공증인으로 하여금 문서를 작성하게 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30일 날, 반유실과 임수공(林守工)이 밭을 거래하는 문서 일 때문에 택룡의 집에 찾아왔다.

“당백전으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다”

상평통보당백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박한광(朴漢光), 박득녕(朴得寧), 박주대(朴周大), 박면진(朴冕鎭), 박희수(朴熙洙), 박영래(朴榮來), 저상일월, 미상

1866년 11월, 장령 최익현이 시폐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진사 정학교가 역시 운현궁에 나아가 대원군에게 당백전의 폐단을 극언하였다고 한다. 이 당백전의 발행으로 서울의 인심이 날로 흉흉해지자 정부에서는 10월부터 당백전을 폐지하고 엽전 사용을 허락하였으며, 호적의 인구 수대로 당백전을 환수하게 되자 물가가 조금씩 떨어지고 시장에 물건이 다시 풍성해졌다.

이 당백전이란 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올 초부터였다. 경복궁을 재건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정에서 발행한 것인데, 당백전이 등장하자마자 장안의 쌀값이 너무 뛰어올라 성균관의 밥 한상 값이 몇 배나 뛰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한 냥 이상의 거액은 반드시 당백전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한 냥 이하에 한해서만 엽전을 사용하도록 허가하였다. 그리고 이 분부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먼저 참하고 후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당백전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중앙에서는 지방관서에 더욱 엄하게 사용 명령을 전하였다. 이에 지방관들이 몸소 시장을 돌아보고 흥정하는 현장을 살피는 등 당백전 사용 독려에 진땀을 빼기도 했다. 당백전 통용 이전에 소값은 30-40전이었는데, 당백전 이후에는 60-70전에 이르고 이후에는 수백전으로 폭등하여 시장에서는 소가 팔리지 않는 지경이었다. 또 소금장수들도 시장에 들어서기를 꺼려 하여 올해는 당최 소금을 구할 수가 없었다.

제일 문제는 쌀이었다. 하루라도 없으면 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쌀값이 폭등한데다, 장사치들은 당백전 사용을 꺼려 하여 시장에 나오지 않아 그나마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방관리들이 직접 시전을 돌아다니면서 당백전 사용을 독촉할 뿐 아니라 부민들을 편달하여 쌀을 시장에 내다 팔도록 독촉하고, 심지어는 집집마다 창고를 뒤져서 적발하기에 이르렀다. 창고 열기를 꺼려 하는 집에서는 창고 문을 부수어 쌀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리곤 쌀 1두에 당백전 1푼으로 값을 정해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건값을 나라에서 정하는 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올해는 흉년까지 들어 백성들이 모두 죽어나가게 생긴 판이었다. 이러자 대원군도 할 수 없었는지 정학교의 상소를 받아들여 당백전뿐만 아니라 엽전도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한숨을 쉬며 살 방도가 생겨났다고 기뻐하였다. 무릇 나라의 궁실이 높을수록 백성의 삶이 힘든 법인데, 궁궐을 재건하고자 백성들의 삶을 이토록 피폐하게 해 놓았으니, 과연 대원군의 정치란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사당 공사 석 달, 목수의 품삯 22냥”

미상, 분강서원창원일기,
1699-08-30 ~ 1700-03-30

사당 공사를 시작한 것이 1699년 8월 30일이었고, 사당 공사를 마친 것이 이듬해 3월 30일이다. 겨울에 공사를 중단한 4개월 동안을 제외시키면 대략 3개월만에 사당 공사가 끝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당 공사를 맡았던 목수는 품삯 22냥을 받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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