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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권상일의 관직 생활

양반은 무위도식하는 존재?


하느님이 백성 내니, 그 백성은 넷이로다. 네 백성 가운데는 선비 가장 귀하다. 양반으로 불려지면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 장사 아니하고, 문사(文史) 대강 섭렵하면, 크게 되면 문과(文科) 급제, 작게 되면 진사(進士)로다. 문과 급제 홍패(紅牌)라면 두 자 길이 못 넘는데, 온갖 물건 구비되니, 이게 바로 돈 전대(纏帶)요.(박지원, 『연암집』 「양반전」)

위는 박지원이 지은 「양반전」의 내용 일부이다. 양반은 대충 문사(文史)만 익혀 문과 급제해서 홍패를 갖게 되면, 두 자 길이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온갖 특혜를 받으며 마치 전대와 같이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허위의식에 젖어 있는 양반을 고발한 것인데, 현재 우리도 이 작품 수준에서 조선 후기 양반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지원이 지은 「양반전」의 일부〉 (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대부(士大夫)라는 표현은 학자적 관료를 의미한다. 사대부는 평상시에 ‘사(士)’로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대부(大夫)’가 되어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구현하려는 존재이다.

사대부의 이상적인 삶을 대변하는 표현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다. 수신(修身)의 전 단계로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뜻을 성실하게 하며[誠意正心] 만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지극하게 이루어야 한다는[格物致知] 단계가 있다. 끊임없는 수신을 통해 도덕적 인간으로 완성될 때 치인(治人)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치인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문과에 도전하였고, 이 관문을 통과하면서 문신으로 나아간다. 물론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은 문과 이외에도 무과나 음서, 그리고 천거 등의 방법이 있었으나, 문과는 다른 경로에 비해 가장 영예로운 방법이었다. 관직에 진출한 뒤에는 관료로서 소명의식(召命意識)을 가지고 국정에 참여하였다. 일례로 사관(史官)에 추천되었을 때 분향(焚香)하면서, 기록 임무를 맡은 관원으로서 하늘에 맹세하는 것은 겉치레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아래에서 조선 후기 경상도 상주 출신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 관직 생활을 살펴보자.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출간한 국역 『청대일기』〉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출간한 전통생활사총서 5 『조선 후기 문신 권상일의 관직 생활』〉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붕새의 깃을 치며 날아오르리!
과거 급제와 출사


권상일은 어려서 가학(家學)을 습득하였는데, 대개 상주 지역 학풍을 주도한 서애학단의 학문적 풍토 속에서 성장하였다. 권상일은 성장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서원이나 산사에서 거접(居接) 생활을 하며 학문을 성숙시켰다. 그 과정에서 강회(講會)나 백일장(白日場)을 비롯해 각종 과거에 응시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성과를 점검하였다.


〈권상일의 문집 『청대집(淸臺集)』〉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권상일의 과거 도전은 1702년(숙종 28) 2월 문과 초시 단계인 향시로부터 시작되었다. 권상일은 해당 과거 시험에서 불합격한 뒤 몇 차례 더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시다가 1710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권상일에게는 참으로 영광된 순간인데, 그 순간 권상일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공부 과정이나 경비 마련에 노심초사하였던 지난날의 자신이 떠올라 회한에 잠겼다. 권상일은 과거 급제 후 한동안 고향에 머물렀는데, 한 번은 친구들과 문회계(文會契)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권상일은 시(詩)를 통해 포부를 표현하기를,

만 리 큰 바다 내가 먼저 길을 나서니              滄溟萬里吾先路
차례대로 여러 붕새 깃을 치며 날아오르리       次第群鵬振羽毛

라 하였다. 여기서 붕새(鵬)는 원대한 꿈을 말하는데, 친구들에 대한 바람의 표시이자,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1710년(숙종 36), 권상일이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받은 홍패〉 (출처 : 문경시)


권상일은 과거에 급제한 뒤 5개월여가 지난 시점에서 승문원으로 분관(分館)되었다. 분관으로 고대하던 관직에 나갈 수 있었으나, 권상일은 생각이 많아졌다. 악명이 높은 면신례(免新禮)와 허참례(許參禮)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을 거쳐야 승문원 동료로 인정받게 된다. 권상일은 약 5일 정도를 전임 승문원 관직을 지낸 선배 관원 약 40집 이상을 돌며 면신례를 행하고, 이어 허참례를 하였다. 승문원 관원으로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지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승문원 생활이 고역이기는 하였지만 권상일은 “내가 감당해야 할 직무이다. 신하 된 자로서 단지 마음을 다하여 봉사할 뿐이지 털끝만큼이라도 모면하려는 생각은 있을 수 없었다.”라며 감당하겠음을 다짐하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밤에 지쳐 쓰러져도 낮에는 분주하게!
고단한 관직 생활


권상일은 승문원에서 관료로서 분주한 생활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여름을 지나며 몸이 여위고 병치레하면서 근력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권상일은 낙향하기로 마음을 먹고 1711년 6월 18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고향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상급자에게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어 고향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서울로 왔다. 서울로 다시 들어온 뒤 권상일은 “낮에는 종일 분주하게 바쁘고 밤에는 지쳐 쓰러지는” 일상을 보냈다.

권상일은 관직에 나온 지 약 7년여를 지난 뒤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며 승륙(陞六)하였다. 이어 성균관 직강을 거쳐 1719년(숙종 45) 수령직인 강진현감의 말망(末望)에 올랐다. 말망이지만 권상일은 강진현감을 상당히 고대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해 지방의 수령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는 걸군(乞郡)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권상일의 기대는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권상일은 예조정랑으로 임명된 뒤, 예조의 현안이었던 장생전(長生殿: 국상 때 사용하는 재궁(梓宮)을 마련하여 보관하던 곳)의 수리를 마쳤고, 온 힘을 다해 숙종의 국상을 치렀다.


〈『숙종국장도감의궤(肅宗國葬都監儀軌)』〉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1720년 가을, 권상일은 근친(覲親)을 명분으로 낙향하였다. 맡은 직무를 이미 마쳤기에 어버이를 만나러 가는 근친으로 낙향한 것이다. 한 차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낙향했고, 이후 상당 기간을 고향에서 시간을 보냈다. 권상일이 낙향해서 생활하던 시기, 중앙의 정치는 격랑의 시간이었다. 신임옥사(辛壬獄事)로 노론에서 소론으로 정국 주도 세력이 바뀌고,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을사환국으로 노론이 다시 집권하여 소론에 대한 토역(討逆)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권상일은 고향에서 생활하면서 정국을 관찰하였다.

권상일은 1727년(영조 3) 3월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제수되었다가, 같은 해 7월 만경현령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외직을 나아갔다. 외직을 받은 권상일은 “가친(家親)을 봉양하기에 충분하다”라며 만족을 표시하였다. 권상일이 만경현령에 재임하던 1728년(영조 4)에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전라도에서도 태인의 박필현(朴弼顯)과 담양의 심유현(沈維賢) 등이 반란에 가담하였고, 여기에 변산적(邊山賊)도 가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변란이 일어나자, 일부에서는 권상일에게 가친을 모시고 피난을 가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권상일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장정을 모아 반란 세력에 대비하였다. 후일 만경현 사람들은 그 공적을 기려 구리로 만든 비석을 세워서 칭송하였다.


〈『만경현읍지(萬頃縣邑誌)』, 「명환(名宦)」 마지막 부분에 정미년[1727년, 영조 3]에 부임한
‘권상일’의 이름이 보인다.〉 (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만경현령 이후 권상일은 사헌부 장령과 양산군수, 군자감정 등에 제수되었다. 대부분은 출사하지 않고 고향에 있었다. 권상일은 고향에서 자신의 학문적 기반의 종사(宗師)인 퇴계 이황이나 서애 류성룡 등을 만나는 시간을 보냈다. 예산-풍산-예안 등을 다니며 병산서원과 이황이 태어난 고택 등을 돌아보았다.




“원로로 삼은 뜻을 보이라”
기로소 입소와 치사


1735년(영조 11) 3월, 권상일은 57살의 나이로 울산부사에 부임하였다. 울산부사로 부임한 권상일은 지방관으로서 동분서주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이런 점은 이 시기 권상일의 일기 기록이 이전과 다르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울산부사로 부임한 권상일의 일기에는 월별로 절기를 기록하였는데, 2월의 청명이나 3월의 곡우, 입하 등이다. 이는 수령칠사(守令七事) 중 하나인 농상을 성하게 할[農桑盛] 책임을 맡은 수령으로써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울산부사로서 권상일은 부역을 균등하게 하거나 관내 유생의 교육을 위해 구강서원의 동재(東齋)를 세우고 『퇴계집』을 비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울산의 구강서원(鷗江書院), 권상일이 울산부사로 서원의 동재를 세웠다〉 (출처 : (사)한국서원연합회)


울산부사를 마친 권상일은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친 뒤 1747년(영조 23) 9월 국왕의 비서실격인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 형조참의를 거쳐 다시 승지직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승지 자리에 있으면서 권상일은 궁궐에서 직숙(直宿)하기도 하였는데, 불시에 국왕의 부름에 응해 입시해서는 지역 사정이나 당대 현안 등에 대한 의견을 국왕에게 전달하였다.

1748년 1월, 권상일은 승지의 자리에 있으면서 치사(致仕)를 요청하는 상소를 제출하였다. 이때 권상일의 나이가 70세에 이르렀다. 치사 상소에 대해 국왕은, 권상일을 승지직에 둔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며 기각하였다. 권상일을 발탁한 영조의 의도를 짐작게 한다. 얼마 후 다시 낙향했다가 1749년 8월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권상일은 “매우 떨리고 두려우면서도 꿈 밖”이라며 의외의 조치로 생각했는데, 이는 영조가 추진하던 탕평의 성과였다. 그러나 권상일의 이조참의 제수에 대해 당시 집권 세력 내에서 견제가 있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체차(遞差)되었다.


〈1790년(정조 14), 권상일에게 ‘희정공(僖靖公)’의 시호를 내린 교지〉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후에도 여러 관직이 계속해서 내려왔으나, 권상일은 나아가지 않았는데, 80세가 되는 1758년(영조 34) 권상일에게 명예로운 특전이 주어졌다.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되어 지중추부사로 임명되면서 동시에 기로소에 들어갔다. 영조는 승지를 통해 “나이를 존중하여 원로로 삼는 뜻”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간 권상일에게 국왕은 정기적으로 물품을 보냈다. 권상일이 문과 급제 후 약 50년 가까이 관직에 있었던 노고에 대한 보답이었다.




집필자 소개

이근호
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와 함께 지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 대표 논저로는 『조선후기 탕평파와 국정운영』, 『경기도의 세거성씨』, 『조선 후기 문신 권상일의 관직 생활』 등이 있다.
“다른 이의 공을 빼앗으려던 감사 심돈, 톡톡히 망신당하다”

김령, 계암일록, 1615-07-11 ~

전 감사 심돈(沈惇). 그는 기생에 빠져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또 1615년 1월에는 동래부사 박경업(朴慶業)과 공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일화가 전해진다.

일찍이 박경업이 엉뚱한 사람을 잡아 역적 박치의(朴致義)라고 하였다. 이 자를 데리고, 바로 계를 올려 보내느라 영천[榮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심돈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과 말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그 장계를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급하게 치계(馳啓)하고, 스스로 자신의 공으로 삼아 말하기를 “신은 성상 앞에서 명을 받은 이후로 역적을 포획하는 것을 일삼아 항상 군현 내를 경계하였더니 지금 바로 동래에서 잡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는 박경업의 공이 자신보다 앞서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경업이 잡혀가게 되자 심돈이 점차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에 감사로 온 자는 거의 20여 명이 되었다. 혹자는 재간이 있으나 청렴하지 않았고, 혹자는 청렴하였으나 재주와 기량이 부족하였다. 형편없는 탐관오리가 있었으며 광포하고 패악한 자도 있었다. 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평가와 승진”

조선시대 지방관의 인사고과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고려시대인 989년(성종 8) 처음 실시해 6품 이하 관리들의 인사에 반영되었고 1018년(현종 9) 연말종합평정제도인 연종도력법(年終都歷法)이 시행되었고, 1105년(예종 즉위년) 지방관 평가제도인 수령전최법(守令殿最法)이 수립되었다. 또, 공민왕 때 근무일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도숙법(到宿法)이 마련되었고, 공양왕 때 근무월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개월법(箇月法)이 신설되었다.

고려시대의 고과법에서는 특히 지방관의 평정업무가 강조, 강화되었다. 그 기준은 이른바 수령5사(守令五事), 즉 농지의 개척, 호구(戶口)의 증식, 부역의 균등, 소송의 신속처리, 도둑의 단속능력 및 업적이었다. 이러한 업무는 이부(吏部)에 소속된 고공사(考功司)에서 주로 관장하였다.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 바로 고과법을 시행하였다. 수령5사에 학교의 진흥과 예속의 보급 두 종목을 추가해 수령칠사(守令七事)로 하였다. 또 새로운 공직자 윤리규범 4조, 즉 덕의(德義)·공정(公正)·청근(淸謹)·근면(勤勉)을 강조해 이들 조항의 실천여부를 점수화하였다. 그 뒤 세종·세조대를 지나면서 고과에 관한 규정들이 제정, 보완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에는 고과와 포폄의 두 조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과는 관리들의 일반근무동향 기록제도와 같은 것으로, 이조의 고공사에서 주관해 기록·관리하였다. 포폄은 정기근무성적 평정제도와 같은 것으로, 경관(京官, 중앙의 여러 부서관리)들은 소속관아의 책임자에 의해서, 지방관들은 관찰사에 의해서 매년 2회씩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포폄 역시 개별적으로 평가된 성적은 이조에 통보되어 인사에 반영되거나 참고자료로 기록, 보존되었다.

『경국대전』 고과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근무일수[仕數]와 근태상황을 엄격히 기록, 관리하였다. 이는 당상관을 제외한 모든 관리가 날짜로 계산되는 소정의 임기를 마쳐야 전보[遷官]와 진급[加階]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근무시간도 하절기에는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 동절기에는 진시(辰時)에서 신시(申時)로 규정하였다. 둘째, 업무실적을 점검하였다. 특히, 형조·한성부·개성부·장례원(掌隷院) 등의 사법기관에서는 당하관들의 재판처리건수를 보고하도록 하고, 기준에 미달되는 자는 징계하였다. 셋째, 매년 말에 경관들은 이조에서 실제 근무일수와 기타 사항들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고, 지방관들은 관찰사가 수령7사(農桑·學校·詞訟·奸猾·軍政·戶口·賦役)의 실적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였다. 넷째, 질병으로 인한 장기결근자(연간 30일 이상)·범법자(특히 왕족이나 공신)·집회불참자 및 근무성적평정에서 하등급을 받은 자, 사소한 죄로 파직된 자 등을 보고, 징계, 기록하고 일정기간에 재임용되지 않도록 하였다. 다섯째, 녹사(錄事)와 서리(書吏)의 근태상황을 점검하고 불량시에 징계하였다. 특히 서리들은 명부를 따로 비치해 관리함으로써 그들의 부정과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일기에서 보이는 오모의 승진을 위한 부임은 아마도 근무일수를 모두 채우지 못하여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수령칠사(守令七事)”

수령(守令)은 고려·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임명하고,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의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의 정원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후기로 올수록 수령의 정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도호부사의 정원이 늘어났다.

수령에 임용되려면 문과·무과·음과 중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급수령에는 문과가 많고, 연변(沿邊) 군현에는 무과가 많으며, 중소 군현에는 음과가 절대 다수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가 말해 주듯이 권농(勸農)·호구 증식·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 간평(訴訟簡平)·풍속 교정이었으며,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또한 감사와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은 그 도의 수령이 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다.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오사, 즉 전야벽(田野闢 : 전지를 개척함)·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盜賊息 : 도적을 그치게 함)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수령 고적(考績)의 법으로 삼았다.

양자를 비교하면 오사의 전야벽·도적식과 칠사의 농상성·간활식은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칠사는 오사에 학교흥·군정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오사는 조선 초기에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어오다가 태종 6년(1406) 12월의 기록에 처음 칠사가 등장하였다.

이 때 칠사를 존심인서(存心仁恕 : 마음은 仁과 恕에 둠)·행기염근(行己廉謹 :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함)·봉행조령(奉行條令 :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함)·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상을 권장해 맡김)·수명학교(修明學校 :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함)·부역균평(賦役均平 :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함)·결송명윤(決訟明允 : 소송에 대한 판결은 공명하고 진실되게 함)을 들고 있다.

이 일곱가지 중 권과농상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 수명학교는 셋째인 학교흥, 부역균평은 다섯째인 부역균, 결송명윤은 같은 여섯째인 사송간과 문자는 약간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존심인서·행기염근·봉행조령의 세 가지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내용도 ≪경국대전≫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수령오사 중 호구증과 도적식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 태종 때 이러한 칠사지목(七事之目)이 어떤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406년(태종 6) 이후에도 칠사란 말이 실록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또 태종 11년(1411) 윤12월의 기사에 보이는 칠최지목(七最之目) 중에 호구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령칠사는 고려적인 제도가 조선적인 제도로 전환하는 태종·세종대에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슷한 원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가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4년(1483) 9월의 기사이다. 즉 성종이 평택현감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일곱가지를 암송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진 것은 ≪경국대전≫ 편찬 때로 보인다.

수령칠사는 그 뒤 조선 중·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737년(영조 13)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권문해,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

권문해, 초간일기,
1590-01-01 ~ 1590-02-02

1590년 1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갔다. 권문해는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도울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결국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나누어 구휼하기 시작했다. 대구 달성지역의 하빈(河濱)의 동면, 북면, 서면의 각 마을로 향하여 분진(分賑)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구휼은 밤이 깊어가도록 이어졌다. 권문해는 밤이 깊어지자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윤효언(尹孝彦)의 집을 찾았다. 다음날도 분진은 계속되었다. 하빈현의 동면과 북면 서면에 이어 남면의 구휼이 시작되었다. 남면의 사람들도 굶주린 이들이 마을의 정자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분진은 오후 1시 되어서 끝이 났다. 이어 신서촌(身西村) 성당리(聖堂里)로 향하였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구휼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1월 9일, 마지막으로 임암현(立岩縣), 내역리(內驛里), 검정리(檢丁里), 해안현(解顔縣)의 동촌리, 상향리, 서부리의 마을까지 모두 분진을 하였다.

사흘간 계속되는 분진이지만 여전히 굶주린 백성들이 이어졌다. 권문해는 한 달이 지난 2월 2일에도 읍내의 마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간장을 나누어 주었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담배를 피우며 강연하는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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