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마음속 깊이 새겨 잊지 아니하다

나례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악한 기운과 잡귀를 떨쳐내며 밝은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닌 의식



축제는 매년 특정 기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집단으로 행해지는 비일상적인 행위로 인간을 본원으로 회귀시키는 진정한 의미의 쉼을 제공하는 문화양식이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제의에서 신의 존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공간을 표상하고 신의 뜻을 듣는 행위인 탁선(託宣)을 당연시했다.

이처럼 ‘탁선(託宣)’을 얻기 위해서는 “신들림의 본령인 무당(巫者)과 ‘사령자(司靈者)’를 필요로 했고 이는 특정 샤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보편적 현상으로 일상에서의 탈출, 의식의 상실 등과 닮아있다.” (남성호, 국립극장 공연예술자료관 팀장)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 할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축제는 축(祝)과 제(祭)가 포괄적으로 표현되는 문화 현상으로 인류가 탄생한 고대 원시사회부터 존재해 왔다.

“시베리아 소수민족인 에벤족의 축제에서 성(聖)의 가치는 샤머니즘으로 발현되고 속(俗)의 가치는 공동체 구성원의 만남, 회합, 놀이 등으로 발현됨을 알 수 있다.”(문준일, 경상대학교 러시아학과)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집단의 축제 현장에서는 진정한 신들림보다는 신들림의 표상화가 가속되면서 예능과 오락적인 요소가 확대되어 공연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에벤족의 ‘헤브데넥’ 축제는 순록들이 새끼를 낳고 난 직후인 6월 초에 행하는 새해맞이 축제로 옛 태양을 보내고 새로운 태양을 맞이하는 의식이다. 고대 에벤족 달력으로 하지인 6월 21일~24일은 새해에 해당한다.


태국의 ‘송크란’ (출처: 『세계의 명소』)


세계적인 물 축제인 ‘송크란’ 역시 태국의 새해맞이 축제로 매년 4월 중순에 열린다. ‘송크란’이 존재하는 태국, 미얀마,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에서 4월 13일~15일은 설날인 것이다. 이 축제 내내 서로에게 물세례를 퍼부으며 축복을 기원하는 행위는 묵은 때를 벗기고 정화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을 축하하는 행위는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도 오랫동안 행해져 오는 전통이다. 횃불 행진과 불을 뛰어넘는 행위는 불을 숭상했던 종교의식에서 유래했으며, 불꽃놀이의 폭음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17세기 말 바이킹 해적들은 1년 중 가장 많은 포획을 한 배를 에든버러 ‘칼튼힐’에 가지고 와서 불로 태우면서 횃불 행진을 벌이며 축제를 했다. 이 ‘호그마니’ 축제 역시 매년 12월 29일부터 1월 1일까지 계속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묵은해를 보내고 신년을 맞이하는 축(祝)과 제(祭)가 존재할까? 우리나라의 중세사회(고려)를 대표하는 축제로 팔관회, 연등회, 나례의 ‘가무백희(歌舞百戱)’가 있다. 이중 나례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악한 기운과 잡귀를 떨쳐내며 밝은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닌 의식이며, 궁궐과 민간에서 동시에 즐겼던 우리 민족 모두의 새해맞이 송년 축제였다.

하지만 ‘나례’는 ‘헤브데넥’이나 ‘송크란’ 그리고 ‘호그마니’처럼 현재에도 즐길 수 있는 우리의 주요 축제로 계승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지역축제는 전국에 약 800여 개에 이른다. 그중 문체부는 2020년 문화관광축제 35개를 지정하고 지원 정책을 통해 지속 가능한 축제, 지역에 도움이 되는 축제로 성장 발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라고 했다. 지정된 35개 축제 중 전통과 역사를 소재로 한 축제는 수원 화성문화제, 정선 아리랑제, 광안리 어방축제, 통영 한산대첩축제, 영암 왕인문화축제 등 9개에 그치고 있으며, 그나마 모두 전통문화나 역사를 소재로 녹여냈을 뿐 과거부터 전승되어 오는 형태라고 할 수 없다.

문화관광축제 제도는 지방정부 출범과 발맞추어 시작해 지난 25년 동안 양적 성장은 물론 축제를 관광산업으로 정착시키고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마케팅의 수단으로 발전시키는 성과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천편일률적인 붕어빵 축제라는 오명을 쓰면서 성장이 한계에 봉착하였다. 관광 산업적인 측면으로 기울어진 축제 기획이 비슷한 콘텐츠와 형식을 가진 특색 없는 축제를 즐비하게 양산하면서 창의성과 상상력의 빈곤을 초래한 때문이다.

이에 중앙정부를 비롯한 축제 전문가들이 축제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새로운 개념에 고심하던 와중에 지난 2020년의 시작과 맞물려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이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의 축제를 멈춰서게 했다.

필자 역시 줄줄이 취소되던 아사 직전의 축제판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아마 그 시기일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요청으로 ‘스토리 테마파크 창작콘텐츠 공모전’에서 ‘나례’ 축제를 만나게 되었다. 본선 진출팀인 ‘나래 팀’의 멘토가 되어 처음 그들의 기획서 초안을 읽고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례 페스티벌 : 명심불망(銘心不忘)


오랫동안 국내의 전문가들이 축제의 근원을 찾아 해외를 수행할 때, 나의 멘티들은 원형 탐구를 위해 우리 전통과 역사에 집중했다



순간 21세기 축제의 위기와 20세기 세계연극의 무(無) 가치성이 중첩되면서 “현재 서양연극의 형태로는 더 이상 관객을 감동시킬 수 없다. 연극은 단순히 행하고 즐기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보다 깊게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 마치 종교처럼”이라고 표현한 프랑스의 연극연출가 ‘아리안 므누슈킨’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20세기 서양의 사실주의 연극에 반기를 들며 거친 연극, 신성한 연극, 즉시 적 연극을 구분하고 아방가르드 연극의 흐름을 이끌던 연출가들로 인해 세계연극은 본격적으로 ‘원형으로의 회귀’라는 독자적인 예술형태로 재탄생했다. 이때부터 연극은 훨씬 풍부한 역사적인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고 예술형식으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김균형, 호남대학교 다매체영상학과)


오랫동안 국내의 전문가들이 축제의 근원을 찾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 각 나라로 여행을 수행할 때, 나의 멘티들은 원형 탐구를 위해 우리 전통과 역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중세를 비롯한 조선 시대에도 전염병이 존재했다. 기록에 의하면 600건이 넘게 발생했고 현세와 같이 많은 사람과 가축이 죽어 나갔다. 지금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 시대에는 역병이 돌면 귀신, 즉 역신(疫神)의 짓이라고 여겼고, 이를 쫓는 ‘구나(驅儺)’ 의식을 통해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정신적인 위로를 주기 위해 공식적으로 여제(厲祭)를 지냈다.

‘구나(驅儺)’는 음력 섣달 그믐날에 민가와 궁중에서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벌이던 의식으로 ‘나례(儺禮)·대나(大儺)·나희(儺戱)’라고도 한다. (중략) 섣달 세밑(歲末)의 바쁜 와중에도 각 가정에서는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돈을 한다. 또한. 자정에는 마당에 불을 피우고 폭죽을 터뜨린다. 집안에 잡귀를 모조리 몰아내고 정(淨)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다. 궁중에서는 대궐 안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한편, 벽사를 위하여 나례 의식을 거행하였다. 궁(宮)이 정(淨)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정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스토리 테마파크에서 발췌)


고려 시대 불교 문화가 궁중과 사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에 반해, 조선 시대 불교는 대중화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팔관회의 의례는 폐지되었고, 연등회의 ‘가무백희’는 축소되었으며, 괄목하게도 나례는 조선 시대에 들어 크게 성행하였다. 사신 영접, 왕의 행차, 신(新) 감사와 개선장군 환영 등 각종 행사 때 ‘나희(儺戱)’가 빈번하게 연희 되었다.

나례를 관장하기 위해 ‘나례도감(儺禮都監)’, ‘관상감(觀象監)’ 등 기관이 그 업무를 맡도록 할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 시대 ‘나희’는 고려보다 의례성과 축역적 성향이 현저히 줄어들고, 오락성과 놀이성이 확대되어 조선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처럼 ‘나례’의 전통적인 특성을 반영하여 ‘구나 의식’과 ‘가무백희’를 현대적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연희의 즐거운 분위기를 축제 형식으로 구현한 송년 축제 ‘나례’는 제(祭)를 제대로 승계하고 축(祝)도 즐기기에 충분한 창작콘텐츠로 대단히 의미 있는 발견이다.

예능과 오락, 관광과 산업이라는 현실에 떠밀려 고대 축제에 등장했던 수많은 ‘신(神)’적 존재들이 사라지고 지금은 일상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축제’ 아닌 ‘행사’들만 난무하는 시대다.

명심불망(銘心不忘) 마음속 깊이 새겨 잊지 아니하다



멘티들의 발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필자가 주목하는 그들의 발견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코드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단절된 전통의 기억을 잇는 ‘창작 소재’의 발견
과거에 존재했지만,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새해맞이 ‘우리 축제’ 문화의 복원으로 ‘역귀’를 쫓는 ‘구나 의식’과 ‘연희’의 즐거운 분위기를 현대적으로 구현하여, 코로나 19로 지친 국민에게 위로와 안식을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표현방법으로 시의적절한 코드의 발견이다.

둘째, 탈 현실을 위한 ‘특별한 공간’의 발견
‘나례’는 중세 궁중 연희문화의 응축으로 우리나라 연극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궁(宮)은 궁성, 황성, 나성의 3단 구조로 축조되었다.

“나례는 주로 궁성에서 행해졌으며, 궁성과 황성 사이에 사원(寺院)이 ‘가무백희’의 공간으로 활용되어 졌고, 나성 안팎의 산(山)과 같은 자연공간이 무대 배경과 공간으로 사용되었다.”(최윤영, 대진대학교)

정형화된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새롭게 건축된 공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성립하기 위하여 선택한 장소로써 ‘부안영상테마파크’는 특별한 공간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철저한 고증을 거쳐 조선 시대 궁성을 복원한 사극 세트장으로, 궁성과 황성 그리고 나성, 사원, 저잣거리와 산을 비롯한 자연경관이 몰입도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특수하게 코드화된 공간의 발견이다.

셋째, 풀리지 않는 부자(父子) 관계 ‘위무(慰撫)와 치유 서사’의 발견
부모와 자식처럼 가까운 사이는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하다. 동서를 막론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세대 간, 계급과 권력적 갈등의 경계에서 대립한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정의하며 아들은 아버지를 잠재적 경쟁자로 여기고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아버지와 충돌한다고 했다.


영화 〈사도〉, 2015


‘나례’는 위기의 부자(父子) 관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버지를 시해하려는 아들과 결국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아비의 대립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애정과 증오의 복합적 역사로 우리 의식을 억눌러 왔다.

“명심불망(銘心不忘) 마음속 깊이 새겨 잊지 아니하다”

그런데 멘티들은 위무(慰撫)와 치유의 서사를 발견하고 우리를 ‘용서와 화해’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축제에는 많은 관객이 모이지만, 연극과는 다르게 행위자와 관람자의 구분이 선명하지 않다. ‘나례’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관객이면서 동시에 군중이 되는 것이다.

궁중 나례에 ‘방상시(方相氏)’ 탈을 쓰고 악귀로 나타난 사도의 원혼(寃魂)이 아버지 영조를 다시 해하려 들 때 관객(백성)들이 풍등을 밝힌다. 백성들이 진심을 써서 풍등을 밝히는 모습을 보고 영조 또한 풍등에 진심을 적어 사도에게 건넨다. 세자의 시호이다.
〈‘사도(思悼)’ 다시 생각하니 하염없이 슬프다.〉

이 절정의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솟구치며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의 주인공 ‘영조와 사도세자’의 소환이야말로 이 ‘나례’ 축제 최고의 방점이다.

관객은 단순히 구경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건에 참여하는 군중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치유로 공감을 넘어서는 서사적 코드의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넷째, 관객과의 의사소통 확립을 위한 ‘공연양식’의 발견
‘나례’ 축제는 조선 시대로의 시간여행을 컨셉으로 연극개념을 도입한 관객참여형, 장소 특정 형 거대한 몰입 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관객들은 도성 문을 통과하는 순간 1768년 영조가 다스리던 조선의 백성으로 역할을 부여받고, 평민 가(家)와 양반 가(家), 궁(宮)을 넘나들며 그 시대의 일상에서 동시에 탈 일상을 경험하게 된다.

도성 곳곳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며, 사도의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설(說) ‘역모설, 광증설, 당쟁희생설’을 뼈대로 ‘이머시브’ 공연양식으로 구현된다.

이머시브 공연(Immersive Theatre)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장르로 전통적인 공연방식과 공연장을 탈피해 새로운 공간에서 관객과 배우가 직접 소통하며 현장성과 즉흥성을 추구하는 관객 참여형 공연이다.

나례에는 사각의 프로시니엄 무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이 돌아다니는 도성 전체가 무대가 된다. 궁성과 황성, 나성의 안팎에서 각기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디로 갈지? 어떤 이야기를 따라갈 것인지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관객은 도성 입구에서 조선 시대 의상으로 환복하고 시간 이동을 통해서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관찰자로 거듭나며 ‘나례’의 주체가 된다. 관찰자는 궁궐에서 영조의 시선을 따라갈 수도, 진자(侲子) 행렬 속의 사도세자 아니면 세도가의 양반이나 저잣거리 광대의 시선을 따라갈 수도 있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모두 다른 공연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스토리의 맥락을 일시에 파악하는 계기를 맞기도 한다.

‘나례’는 축제이면서 연극이고 여행이다. 그리고 언제든 여행의 경로를 관객이 바꾸고 결정할 수 있다.

축제와 연극 사이에는 동일한 DNA가 존재한다. 그러나 ‘나례’는 연극과는 다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코드로서 ‘공연양식’을 발견하고 있다.

이렇듯 멘티들은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그들만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였다. 과거를 지금 시대와 연결 짓는가 하면, 특별한 공간을 탐구하며, 치유적 서사를 발견하고, 관객을 축제의 주체로 참여시키기 위해 새로운 개념의 공연양식을 도입하였다.

지금 세계는 역사상 최악의 팬데믹 상황에 직면해 있고 세상은 멈추었다. 그렇다고 ‘나례’ 축제가 21세기 인류에게 ‘역귀’를 내쫓기 위해 ‘구나 의식’을 재현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묵은해의 액운과 코로나 19로 인한 우울을 ‘나례’를 통해 털어 내고, ‘소중한 이에게 진심을 전하며 평안한 새해를 맞이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멘티들에 의해 ‘나례’는 중세시대 종교축제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범주로 되살아났다.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 융복합 장르의 공연과 체험 등 현대적 문화예술콘텐츠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거쳐 탄생한 부안영상테마파크는 수많은 사극의 촬영지로 영화 ‘사도’ 외에도 ‘명량’, ‘광해’, ‘왕이 된 남자’, ‘관상’을 비롯해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킹덤’ 등이 촬영된 곳으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축제를 진행하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지속적인 축제를 목표로 ‘시리즈’화가 가능하며, 역사 소재 이야기의 활용과 변주를 통해 확장성을 높일 수 있다. 왕궁에서 평민 가(家)까지 다양한 공간이 존재하므로 신분과 상관없이 궁중과 민간에서 행해졌던 ‘나례’의 형태를 다채롭게 구현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번 ‘나례’를 계기로 우리 축제가 관광이라는 명목으로 파괴와 개발을 당연시해 왔던 관성에서 벗어나 인간의 몸짓과 자연과의 조우를 통해 공진화(共進化)를 추구하는 축제원형으로의 회귀에 기폭제가 될 수 있기를 염원한다.

끝으로 ‘스토리 테마파크 창작콘텐츠 공모전’으로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우리 축제원형인 ‘나례’가 단순히 과거를 답습하지 않고, 현대적인 해석과 세련된 접목을 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인류에게 희망과 위무(慰撫)가 되는 축제로 복원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제 몇 주 뒤면 세밑이다. 멘티들의 희망대로 묵은해의 액운과 코로나 19로 인한 우울을 ‘나례’를 통해 털어 내고 ‘소중한 이에게 진심을 전하며 평안한 새해를 맞이하는’ 그런 새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집필자 소개

이영민
이영민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이자 연극연출가이다. 문화공방DKB(주)의 대표이사로서 다양한 축제, 전시, 박람회, 콘서트, 문화제 등의 문화행사를 기획 및 제작·배급하였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주관한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의 축제분야 멘토로 활동하며 대학생들의 문화콘텐츠 교육프로그램을 담당하였다.
“매해의 마지막을 구나로 장식하며 추억에 젖다”

김령, 계암일록,
1603-12-30~ 1608-12-30

1603년 12월 30일, 한 해가 다 지나갔다. 김령은 어버이가 모두 살아 계실 때를 추억해 보니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 그지없었다. 그는 입으로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다. 내일 제사 때문에 제수 음식을 살펴보고 초저녁에는 구나(驅儺)를 행했다. 자개·이지 등과 옛날에 한 약속이 있어서 후조당(後凋堂)에 모여서 대화했다. 닭이 운 뒤 각자 흩어졌다.
1606년 12월 30일, 김령은 초저녁에 구나(驅儺)를 행했다. 병중에 있다 보니 옛날 어버이 계실 적의 성대했던 일들을 생각하니 김령은 자신도 모르게 느꺼움이 사무쳐 슬퍼졌다.
1607년 12월 27일, 김령은 밥을 먹은 뒤 방잠에 가서 큰 배소(拜掃)를 행했다. 나례(儺禮) 행사의 북소리를 들으니 옛날 일이 생각났다.
1608년 12월 30일, 추위가 심했다. 김령은 저물녘에 설월당에서 외가의 절제(節祭)를 지냈다. 한해가 이미 다 지나갔다.
옛날, 어버이를 모시고 즐겁게 지내던 시절과 아이 적에 장난치며 뛰어놀던 추억이 떠올랐다. 느꺼움에 탄복되고 탄복되었다. 김령은 밤에 구나(驅儺)를 행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년 김령의 소회와 아이들의 구나(驅儺)”



바람이 세차게 부는 162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김령은 여러 어른에게 감사 편지를 써드렸다. 그리고 정오경에 부모님께 절제(節祭)를 올렸다.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한 해의 마무리를 했다.
마을 아이들은 보잘것없으나마 구나(驅儺)를 하였다. 김령은 한 해의 끝을 보내며 점점 노경(老境)으로 접어드는 감회에 젖었다. 옛 추억이 엊그제 일 같아 스스로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상께서 전염병을 막을 제사를 지내라 명하시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6-05-22

1746년 5월 22일, 흐린 날이었다. 요사이 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났는데, 그 때문인지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부 시장에 보낸 종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질 못했다.
요사이 주상께서 민간에 역병이 도는 것을 아시고는 이를 치료할 벽온단을 나누어 하사하셨다고 한다. 또한 낭관과 감사를 파견하여 여귀에게 올리는 제사,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주상의 성은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료들과 백성들은 마땅히 감격하여 은혜를 갚을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고을에서는 세금 거두는 것을 어찌나 화급하게 독촉하는지, 온 고을이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서울에 계신 주상은 백성들이 전염병에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일선 관리들과 향리들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에만 골몰하고 백성들의 삶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어찌 이것이 관리로서 임금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 하겠는가! 최흥원이 보기에 전염병을 일으키는 여귀보다, 세금을 독촉하는 관리들이 백성들에겐 더 무서운 존재 같았다.

“1846년의 설날 - 세배와 차례, 성묘 그리고 한해 운수 점치기”

서찬규, 임재일기,
1846-01-01~ 1849-01-01

오늘은 1846년 1월 1일, 정사(丁巳)년 설날이다. 매해 그러했듯 서찬규는 닭이 울 무렵 할머님과 부모님께 세배하고, 날이 샐 무렵 절 차례를 지냈다. 서실로 나와서 덕우와 함께 시초점을 쳤는데 서지췌(噬之萃) 괘가 나왔다. 오후에는 신제(新堤) 북쪽 산언덕의 선영에 가서 성묘했다. 5대 조비(祖妣) 영양 이씨(永陽李氏), 조비 월성 손씨(月城孫氏), 증조비 동래 정씨(東萊鄭氏), 숙부 등 모두 네 분의 묘소가 여기에 있다. 1849년(헌종15년) 1월 1일에는 감기 때문에 차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