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역사콘텐츠 제작의 비하인드 스토리 下 談사모(웹진 담談을 사랑하는 사람들) 좌담회




조경란 : 역사전문가.
100호의 편집위원장
(2019~2022년 편집위원 역임)


하원준 : 영화감독.
〈선인의 일기, 한편의 영화를 만나다(1호~20호) 〉, 45호, 97호 집필


조정미 : 콘텐츠 전문가.
10호, 32호, 38호, 45호, 57
75호 집필


정용연 : 만화작가.
〈화백의 담화(13호~24호) 〉
〈이달의 일기(51~76호)〉집필


강선주 : 시나리오 작가.
46호, 70호, 78호 집필
〈(1회)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정재석 : 한국국학진흥원 콘텐츠정보팀. 웹진 담談 총괄


임근실 : 한국국학진흥원 콘텐츠정보팀. 웹진 담談 기획


박나연 : 한국국학진흥원 콘텐츠정보팀. 웹진 담談 기획






스토리테마파크 이용 꿀팁!


박나연

조정미 선생님에게 질문 드리겠습니다. 2014년 12월에 발간된 웹진 10호, 콘퍼런스를 리뷰해 주신 글에서, 선생님의 소개를 역사콘텐츠 전공하는 연구자이자, 작가, 그리고 출판인이라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콘텐츠 전공자, 그리고 창작자라는 여러 위치에서 웹진을 바라보는 감회가 더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역사콘텐츠 전공자로서, 많은 연구를 진행 중에 계신데요. 저희 스토리테마파크를 역사아카이브를 대표하는 사례로 선정하여 웹사이트 활성화 방안에 대해 연구해주셨습니다. 저희가 갖고 있는 자료와 이에 대한 활용방안에 관심을 많이 주신 만큼,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고 계십니다.

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해 스토리테마파크를 이용하실 때, 나름의 꿀팁이 있을까요?



웹진 담談 10호 〈옛 기록, 이야기로 피다〉(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조정미

숨겨져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아서 검색을 잘 하면 좋은 소스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집필하신 분들이 원문에 창작요소를 추가한 경우도 많아요. 아무리 창작소재라고 해도 이미 집필자들이 창작을 해버리면, 다소 혼동을 주기도 합니다. 그럴 때 저는 꼭 원문정보를 읽어봅니다. 원문정보를 읽어야 정확한 의미를 전달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나연

웹진 담談은 현재 언론 홍보와 SNS를 중심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논문에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웹진의 기사를 카드뉴스 형태로 제작하여 SNS에 업로드하면서 홍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SNS 홍보 방법 외에 앞으로 웹진 담談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조언 부탁드립니다.

조정미

웹진 담談의 소재를 갖고 글을 쓰거나 콘텐츠를 창작하신 분들이 스스로 알아서 그 결과물을 제보할 수 있는 코너가 있었으면 합니다. 담당자에게 직접 알리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되니 답답한 부분이 있습니다.

창작 소재를 공유하려고 해도 소셜미디어에 공유하기가 원활하지 않고 모바일 화면을 제공하지 않아서 접근성이 떨어집니다. 이 부분부터 꼭 먼저 해결해야 홍보활성화가 될 것 같습니다.

역사콘텐츠 창작자들이나 지망생의 창작관련 자문을 받아주는 공식적인 창구도 상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커뮤니티 공간이 꼭 스토리테마파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분들이 모여 있는 창작커뮤니티에서 스토리테마파크 운영자가 게시판 활동을 직접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계정을 스토리테마파크라고 이름을 붙인 채로 활동하고, 질문에 답변을 달아주고, 스토리테마파크의 창작소재를 링크를 공유하는 등의 활동이 가능할 것입니다. 행사 안내도 해주고요. 우리 쪽으로 와서 놀아라가 아닌, 당신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토론하고 이야기해요 라는 자세가 커뮤니티 운영에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최애 캐릭터


임근실

웹진 담談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서 글을 집필해주셨는데요. 앞으로 담談에 집필을 해주실 때, 다룰 예정의 인물이 있으실까요? 혹은 역사 인물 중에 최애의 캐릭터가 있으신지,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강선주

〈수운서생〉 작업을 하며 ‘김유’를 중심으로 광산 김씨 집안에 대해 많은 자료를 보았는데요, 그러면서 많은 재밌는 이야기를 알게 되고, 또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둘째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혜택(?)과 가족력에서 오는 과학과 의학의 콜라보 등. 그래서 『수운잡방』을 집필한 김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정용연

딱하니 떠오르진 않네요. 그래도 굳이 쓰라고 하면 『표해록』을 쓴 장한철을 들겠어요.

최부의 『표해록』이나 정약전이 쓴 문순득의 『표해일지』처럼 스케일이 큰 것은 아니지만 장한철이란 캐릭터가 재밌어요. 사대부이면서도 뱃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고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지요. 운명처럼 만난 무녀와의 러브스토리도 재밌습니다.



조선명필 창암 이삼만(출처: 정용연)


조선명필 석로심창(石老深蒼)(출처: 정용연)



또 한사람은 조선말 행운유수체란 독특한 글씨로 호남에서 이름을 날렸던 창암 이삼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에 대한 박사논문을 읽고 그의 묘를 찾아 인사를 드렸었는데 한번 쯤 만화로 그려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또 한사람은 조선과의 선린관계를 위해 애쓴 일본인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입니다. 신유한이 쓴 『해유록』에도 나오죠. 2018년 그에 대한 전기를 읽은 뒤 일본 시가현에 있는 아메노모리 호슈 기념관에 가 많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기념관엔 신유한이 호슈에게 선물한 모자가 아직까지 남아있지요.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2019



조경란

K-컬쳐의 힘은 우리말과 우리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저의 최애캐릭터는 세종대왕이십니다. 스토리테마파크 기록에는 안 계신 분이라 웹진에서 언급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99호에 내방가사에 관한 글을 게재했던 것처럼, 웹진에 선인들의 한글 기록 자료들도 다룰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미 세종대왕에 대한 작품들이 꽤 많습니다만, 이 시대 과학기술고전 국역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세종대왕과 기술 관료들과의 관계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미 작품화된 장영실 외에도 이천, 이순지, 전순의, 박연 등등, 다른 시절이라면 기록에 남지 못했을지도 모를 이들이 자신이 가치를 발견해 준 군주와 뜻이 맞아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는 게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조정미

일기의 집필자가 아닌 일기에 나오는 주변인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이번에 전통문화연구회 회보에 쓴 글은 백불암 최흥원의 일기에 나오는 배상적이라는 의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역병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역병에 걸린 백불암의 자녀들과 동생을 헌신적으로 치료해준 참된 의원이었습니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백불암은 나중에 배상적이 곡식을 청할 때나 어머니에게 효도하고자 미관말직인 군관 자리를 구할 때에도 힘을 써줍니다. 이런 주변인들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역사콘텐츠 창작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외에도 일기에 등장하는 재미있는 주변인들이 참 많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런 인물들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창작하고 싶네요.

하원준

최근에 조선의 3대 기인이라고 할 수 있는 매월당 김시습과 정북창, 그리고 이지함에 대해 탐색 중입니다. 굳이 세 사람이 아니더라도, 조선시대의 셀러브리티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시대를 풍미한 인물은 결국 매력적인 인물이니까요.



보물 제1497호 〈김시습 초상〉(출처: 문화재청)



웹진 담談의 비전과 바라는 점


박나연

마지막으론 웹진 담談의 방향성인데요. 조정미 선생님께서 역사콘텐츠 전공자로서, 웹진 담談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비전에 대해 한 말씀해주세요.

조정미

스토리테마파크는 오프라인 기반의 전문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여기까지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온라인 기반의 네트워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VR과 메타버스가 새로운 온라인 소통방법으로 등장한 이 시점에, 어떤 방향성을 가질지, 스토리테마파크 아카이브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서 교육형 공모전을 메타버스에서 실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현재 스토리테마파크 아카이브 사이트를 HTML5로 웹표준화하고, 반응형 웹을 지원하는 등의 표준화 작업부터 시행해야 합니다. 기술의 발전을 항상 빨리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큰 그림에서의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나연

조정미 선생님께서 웹진의 홍보와 방향성에 대해서 좋은 의견을 제시해주셨는데요. 이왕 콘텐츠를 제작하시는 여러 전문가분들을 모신 만큼 스토리테마파크에 대한 개선점도 여쭙고 싶습니다..

조정미

스토리테마파크에도 의견 소통 통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독자들 스스로 이야기 소재나 번역, 원문 등에서 잘못된 점을 알리는 코너가 있으면 보다 쉽게 오류를 검증하고 줄여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대중 콘텐츠의 비주얼(시각화)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림과 삽화가 많은 콘텐츠가 좀 더 재미있고 다가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고프로 등 360도 촬영이 가능한 장비를 이용해 현장감 있는 이미지도 필요해요.

조경란

그림, 이미지 자료도 중요합니다. 소품이나 배경에 사용하기 위한 이미지 자료도 고증된 자료가 부족한 현실입니다. 작가님들께서 작품을 그리거나 영상화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정용연

맞습니다. 저도 여러 작품의 배경(침류정) 등을 고증하기 위해 이미지 자료를 확인하는데 해상도가 떨어져 잘 안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존 자료도 해상도가 높은 이미지 자료로 고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원준

예전의 기관에서 제공하는 이미지 자료들은 사진 1장의 데이터 값이 적어 문제입니다. 크기 가늠을 위해 드론으로 전체 사진을 찍어 제공할 필요도 있습니다. 현장 취재형 기획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현장 르포처럼 이야기소재에 나오는 곳을 실제 탐방하여 그 곳의 현재 모습을 알릴 수 있는 코너가 필요합니다.

강선주

불천위 제사, 세자 책봉식, 전통 혼례, 성인식, 궁중풍속, 민간풍속 등 과거에 했던 행사의 구체적인 진행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그 속에 등장하는 우리가 모르는 용어를 설명해주고 해석해주는 코너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궁궐 내에서 사용하는 단어 모음, 궁궐 내 장소 소개, 조선시대 직급과 현대의 직급 대조, 당시의 화폐 가치와 현재의 화폐 가치 등의 정보가 있다면 창작자들이 시나리오를 쓸 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임근실

이미지 자료와 현장 르포, 단어 설명 등 모두 독자들이 함께 소통하는 코너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저희 기관에서 내년부터 역사자문 플랫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부분에 저작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원준

기관의 ‘자문의 마케팅’도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연출가나 작가들과 자문하는 사람과 극의 디자인을 같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록 밑에 한줄 정도 어떤 스토리로 만들면 좋겠다고 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하는 씨앗스토리를 제공하면 베이직한 저작권을 주는 거죠. 일기의 뒤집어 보기도 새로운 접근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조정미

스토리테마크의 이야기소재를 그래도 사용해도 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걸 활용해서 콘텐츠를 만들게 되면, 그 부분 창작에 대해서 NFT를 발행하면 어떨까요? 검증할 수 있는 기술을 도입하여 창작의 선순환을 하면 좋겠네요.



대체 불가능한 토큰(블록체인의 토큰을 다른 토큰으로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한 암호 화폐)_NFT(출처: 픽사베이)



정재석

웹진 담談을 위해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웹진 담談이 이렇게 긴 시간동안 연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 모이신 작가님들을 비롯하여 기꺼이 글을 허락해주신 여러 선생님들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현장의 제작자 분들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스러운 자리였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웹진에 대한 관심을 부탁드리며, 이상 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승려가 책을 팔러 다니다”

금난수, 성재일기,
1578-02-03 ~ 1578-02-12

금난수의 큰아들 금경과 셋째 아들 금개는 도산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들들도 집에 없고, 눈이 많이 와서 누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어딘가 유람을 가기에도 어려운 무료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반 자(약 15cm)가 넘게 쌓인 눈을 뚫고 누군가가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많은 짐을 지고 온 승려였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서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승려는 금난수의 눈앞에 자신이 지고 온 책을 늘어놓았다. 도산서원에서 오는 길인데, 금난수의 큰아들인 금경이 말하길 아버지가 분명 책을 지고 가면 좋아하실 테니 아버지가 원하는 책이 있으면 팔아드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료한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이 읽어 주어 금난수는 흐뭇한 마음에 승려가 지고 온 책들을 기분 좋게 뒤적거렸다. 금난수가 읽을 만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막내인 금각에게 읽힐 만한 책은 있었다. 금난수는 『당음(唐音)』 9책을 구매하기로 하였다. 『당음』은 서당에서 주로 사용하던 한시 교재인데, 당시가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고 중국어의 4성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 수 있어 유용하였다. 노래하듯 당시를 읽을 귀여운 아들 생각에 금난수는 승려에게 지불한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종이를 내다 판 선비, 비루하다는 비난을 사다”

김령, 계암일록, 1609-10-05 ~

1609년 10월 5일, 추운 날이다.

들으니, 안창(安昶)이 종이를 팔았는데, 탐욕스럽고 비루한 짓을 했다고 하여 논박 당했다고 한다.

“값을 무명 20필로 깎아주시오! - 지팡이 짚고 오가며 밭을 사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2-01-17 ~ 1612-01-30

1612년 1월 17일, 택룡은 아들 대생과 함께 가동(檟洞)에 갔다. 반유실(潘有實)이 밭을 판다고 하기에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가동의 노비 천실(千實)의 집에서 만나기로 해 그 곳으로 갔는데, 천실은 외출하고 없었고 반유실도 오지 않았다. 택룡은 늙은이를 진흙밭에 불러놓고 일부러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택룡은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사흘 뒤, 반유실이 가동의 밭을 팔기 위해 다시 찾아왔다. 밭 면적은 한 섬지기[일석락(一石落)]정도였는데, 반유실이 부른 가격은 무명 50여 필이었다. 택룡은 무명 50여 필을 소 2마리, 옷 2벌, 무명 20여 필로 대체 환산해 지급하고 샀다. 매매문서를 만들고 공증인으로 하여금 문서를 작성하게 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30일 날, 반유실과 임수공(林守工)이 밭을 거래하는 문서 일 때문에 택룡의 집에 찾아왔다.

“당백전으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다”

상평통보당백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박한광(朴漢光), 박득녕(朴得寧), 박주대(朴周大), 박면진(朴冕鎭), 박희수(朴熙洙), 박영래(朴榮來), 저상일월, 미상

1866년 11월, 장령 최익현이 시폐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진사 정학교가 역시 운현궁에 나아가 대원군에게 당백전의 폐단을 극언하였다고 한다. 이 당백전의 발행으로 서울의 인심이 날로 흉흉해지자 정부에서는 10월부터 당백전을 폐지하고 엽전 사용을 허락하였으며, 호적의 인구 수대로 당백전을 환수하게 되자 물가가 조금씩 떨어지고 시장에 물건이 다시 풍성해졌다.

이 당백전이란 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올 초부터였다. 경복궁을 재건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정에서 발행한 것인데, 당백전이 등장하자마자 장안의 쌀값이 너무 뛰어올라 성균관의 밥 한상 값이 몇 배나 뛰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한 냥 이상의 거액은 반드시 당백전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한 냥 이하에 한해서만 엽전을 사용하도록 허가하였다. 그리고 이 분부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먼저 참하고 후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당백전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중앙에서는 지방관서에 더욱 엄하게 사용 명령을 전하였다. 이에 지방관들이 몸소 시장을 돌아보고 흥정하는 현장을 살피는 등 당백전 사용 독려에 진땀을 빼기도 했다. 당백전 통용 이전에 소값은 30-40전이었는데, 당백전 이후에는 60-70전에 이르고 이후에는 수백전으로 폭등하여 시장에서는 소가 팔리지 않는 지경이었다. 또 소금장수들도 시장에 들어서기를 꺼려 하여 올해는 당최 소금을 구할 수가 없었다.

제일 문제는 쌀이었다. 하루라도 없으면 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쌀값이 폭등한데다, 장사치들은 당백전 사용을 꺼려 하여 시장에 나오지 않아 그나마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방관리들이 직접 시전을 돌아다니면서 당백전 사용을 독촉할 뿐 아니라 부민들을 편달하여 쌀을 시장에 내다 팔도록 독촉하고, 심지어는 집집마다 창고를 뒤져서 적발하기에 이르렀다. 창고 열기를 꺼려 하는 집에서는 창고 문을 부수어 쌀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리곤 쌀 1두에 당백전 1푼으로 값을 정해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건값을 나라에서 정하는 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올해는 흉년까지 들어 백성들이 모두 죽어나가게 생긴 판이었다. 이러자 대원군도 할 수 없었는지 정학교의 상소를 받아들여 당백전뿐만 아니라 엽전도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한숨을 쉬며 살 방도가 생겨났다고 기뻐하였다. 무릇 나라의 궁실이 높을수록 백성의 삶이 힘든 법인데, 궁궐을 재건하고자 백성들의 삶을 이토록 피폐하게 해 놓았으니, 과연 대원군의 정치란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사당 공사 석 달, 목수의 품삯 22냥”

미상, 분강서원창원일기,
1699-08-30 ~ 1700-03-30

사당 공사를 시작한 것이 1699년 8월 30일이었고, 사당 공사를 마친 것이 이듬해 3월 30일이다. 겨울에 공사를 중단한 4개월 동안을 제외시키면 대략 3개월만에 사당 공사가 끝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당 공사를 맡았던 목수는 품삯 22냥을 받고 돌아갔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