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풍군읍지(延豊郡邑誌)』1899년에 편찬된 충청북도 연풍군의 지도 공정산(公正山), 희양산(曦陽山), 마본산(馬本山), 박달산(朴達山) 등 험난한 산들에 둘러싸인 고을. 푸른 강줄기만이 이 고을을 자유롭게 넘나들 뿐,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요새와 같은 곳. 산허리를 돌아 연풍을 빠져 나온 물줄기를 따라 전해진 괴이한 소문 하나. “혼인을 앞둔 연풍의 신부는 모두 죽는다!”
첩첩 산속 보름달 등불 아래로 사내 하나가 길에 막 모습을 드러냈다. 길의 주인이 산짐승으로 바뀌는 때, 사내의 행동은 아무리 보아도 이곳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지 앞뒤를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듯 덤불을 헤치다가 결국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더 수상쩍은 건 다음이었다. 사내는 한참이 지나도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슨 까닭인지 대자로 누워만 있었다.
‘이번엔… 전하께서 틀리신 듯하옵니다.’
한 나라의 지존인 임금에게 감히 잘못을 따지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지 이십 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야 알았구나…….’
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정개 산속에서 이토록 괴로워하는 이는 바로 닷새 전 위유사로 임명받은 김효문이었다. 임금은 갑작스럽게 규장각에 찾아와 그 자리에서 벼슬을 내렸다.
효문은 한양을 떠나자마자 알게 되었다. 위유사라면 절대 가져서는 안 될 치명적 약점을…….
‘길치에다 방향치라니… 차라리 각신 이병익에게 일을 맡겼다면 출발부터 이리 꼬이진 않았을 텐데… 전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순간 물음에 답이라도 해주듯 효문의 머리 뒤쪽에서 어슴푸레 불빛이 전해졌다. 분명 달빛은 아니었다. 몸을 돌려 앉으니 멀리서 등 하나가 보였다. 희미했지만 등에 적힌 글자는 주(酒)였다. 그제야 효문은 자신이 길을 잃은 까닭을 알았다.
‘길이 아닌 곳에서 길을 찾았으니 헤맬 수밖에…….’
효문에게 길이란 모름지기 널찍하고 정리가 잘된 모양새였다. 산길이 익숙한 보부상이라면 모를까 효문에겐 길이 있어도 그 길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야삼경이 가까워진 시각, 효문이 주막집 방문을 열었다. 아랫목에는 이미 선비 몇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람 들어와유.”
“아이구, 춥어라.”
“뭐 하능교. 싸개싸개 문 안 닫고.”
효문은 선비들 성화에 서둘러 방문을 닫았다. 방은 밖에서 볼 때보다 더 좁았지만 효문에게는 감지덕지였다. 긴장이 풀리자 자기도 모르게 가벼운 신음을 내뱉었다. 효문의 소리를 시작 삼아 방 안 선비들도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이구, 아이구.”
“고마, 콱 죽어삐자.”
“워매, 어째야쓰까.”
보름 전 열린 복시에 낙방한 탓인지 선비들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선비들의 한숨 소리가 문을 타고, 부엌을 건너니, 야박하기로 소문난 꼽쟁이 주모라도 오늘밤은 어쩔 수 없었다. 주모는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며 술상을 들이밀었다.
“거참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네… 적당히 마시고 얼른들 주무쇼. 초 값까지 낼 거 아니믄.”
“아이구, 주모 치마에서 꽁술이 다 나오이 횡재했데이.”
“누가 보면 내가 선비 마누란 줄 알겠네. 암만 오는 손님 가랑이 꽉 잡아 붙잡고, 가는 손님 겨드랑이 쑥 잡아 못 가게 막아도, 이제 우리 그만 좀 보소.”
“여서 먹은 국밥이 몇 그릇인데 그리 서운한 소릴합니꺼? 두고 보이소. 다음 시험에는 꼭 붙어서 주모한테 한 턱 낼 테이까네.”
“말이나 못하믄. 입으로 하는 공부 말고 글공부나 좀 더 하시소.”
방에 누워 있던 선비들이 무겁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막걸리가 들어가고 얼근한 기운이 달아오르자, 하나둘 사연이 풀어졌다.
“걸걸한 주모가 내준 술이라 그런지, 맛도 참 걸쭉허네유. 지는 충청 사는 문가유. 그쪽은 몇 년째슈?”
충청도 문 선비는 넉살 좋게 주모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내는 경상도 안동에서 올라왔심니더. 벌써 십 년이 넘었다카이.”
“아따, 인생 뭐 있능교. 술이나 한 잔 더 들이키시요잉.”
전라도 곡성에 산다는 선비가 애써 분위기를 띄웠다.
“충청에 산다켔능교? 연풍 미인촌인가… 그짝 얘기 들은 적 있다요?”
“아이구, 알다마다유. 그곳에 사는 여인들 미모가 엄청나다지유.”
“내도 들었심니더. 네발 달린 동물도 암컷이라믄 다 예쁘게 생겼다카던데… 소문만 듣고 상사병에 걸린 사내까지 있다 안캅니까?”
“워매, 시험에 떡 하고 붙음시롱 연풍 여인 하나 골라 장가갈랬는디… 물 건너 가부렸당께.”
충청도 선비가 크게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시험에 떨어진 걸 다행으로 아세유.”
“고거이 시방 무슨 소린교? 막걸리 몇 잔 주고받았다고 참말로 말 함부로 하네잉.”
“다른 소문은 못 들었나보구먼유.”
“뭣을요잉?”
“아, 미인촌 여인들이 혼인날 죽는다는 얘기유.”
“옴마… 고거이 무신 숭악한 소리다요?”
충청도 선비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지난 가을이었쥬, 지 사촌에 팔촌의 아들이 미인촌 여인과 혼인을 했는디, 첫날밤 거사도 치르기 전에 신부가 죽었잖유.”
“에이, 사람 놀리지 마쇼잉. 그라고 사촌에 팔촌이믄 모르는 사람 아인교. 어데서 거짓말을…….”
“참말이유. 공짜 술 잘 마시고는 왜 헛말하겄어유?”
경상도 선비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근데 왜 죽었다캅니까?”
“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는구먼유.”
“암만 숨넘어가게 미인이라도 혼인허자마자 홀아비 신세가 되는 거는… 안 되는 일이지요잉.”
“혼례 못 올리고 죽은 손각시 귀신이 깡새라도 부리는 갑소. 그라이 비도 안 내리는 거라카이…….”
“워매, 팔에 소름 돋은 것 좀 보시요잉.”
그때였다. 한쪽 구석에서 기척도 없이 누워 있던 효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미인촌이 여기서 멉니까?”
“아이구, 놀래라. 자는 거 아니었슈?”
“물건 달린 사내 아이랄까 봐, 그짝도 연풍 미인들이 궁금합니꺼?”
“그런 건 아니고…….”
“뭘 부끄러워하능교. 사내 맘은 사내가 아는 것이제.”
전라도 선비는 효문에게도 술잔을 건넸다.
“전 술 못합니다.”
전라도 선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따, 술은 그냥 마시믄 되는 것이제, 잘하고 못하고가 어디 있다요.”
술잔 때문에 실랑이가 일자 충청도 선비가 나섰다.
“딱 한 잔만 마셔유.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디… 마시믄 미인촌이 어딨는지 말해주겄구먼유.”
효문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는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충청도 선비는 효문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준수허구먼. 요즘 여인네들이 좋아하는 꽃도령 상이여. 인기가 많겄어…….’
아니나 다를까, 전라도 선비도 효문의 옆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여리여리한 듯혀도 눈빛이며 입술을 보니 강단이 있겄네잉.’
효문은 부담스러운 눈빛을 느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약속대로 이제 알려주시지요.”
“그래야지유. 말해줘야지유. 연풍 미인촌은 조령관 근처에 있구먼유. 근디 조령엔 가 본 적이 있슈?”
“제가 한양을 떠나는 일이 처음이라…….”
전라도 선비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술잔을 채웠다.
“그라면 찾아가는 일이 허덜시리 힘들텐디… 워째 술 한 잔 더 마시고 가는 길까지 받겠소잉?”
효문의 얼굴이 빨개질수록 방 안 촛불은 꺼질 듯 아슬아슬해졌다.
“주모 잔소리 듣기 전에 고마 슬슬 정리합시다마.”
술잔을 주고받던 선비들은 바닥에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효문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혼인날 신부들이 죽는다니, 괴이하구나. 억울한 사연이 있지 않고서야…….’
효문은 한 번 마주한 문제는 끝까지 잡고 늘어졌다. 학문이 뛰어난 까닭도 엉덩이 힘에 있었다. 서책을 잡으면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까지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캄캄한 방 안, 효문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새벽닭이 울기 전 조용히 주막을 나섰다. 얼마 뒤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왠지… 이번 문제는 쉽지 않을 듯하구나. 어쩌면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도…….’
효문은 봇짐을 고쳐 메고 왼쪽 길로 막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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