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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문제는 귀신이 아니야!

여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어미의 목숨과 맞바꾸어 이 땅에 태어났다. 누군가가 그랬다. 아이가 어미를 잡아먹을 사주를 타고 난 거라고. 아이는 사실 왕의 씨였다. 왕은 자신이 사랑하던 후궁이 아이를 낳다 죽자, 미움 반 두려움 반으로, 태어난 옹주를 궐 밖에서 키우도록 했다. 차라리 밖에서 뛰놀던 삶이 아이에겐 좋았으리라. 그러나 몇 년 뒤 아이는 급한 부름을 받고 다시 궁으로 들어가야 했다. 잔병이 끊이지 않는 임금을 위해 사주에 ‘쇠(金)’의 기운이 많은 옹주를 다시 들인 것이다. 사주로 인해 쫓겨났던 옹주가 다시 사주로 불러들여진 셈. 거짓말처럼 왕의 건강이 좋아지자 이제 소녀는 다시는 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래도 재수 없는 사주를 타고났다는 천형과도 같은 딱지는 뗄 수 없었기에, 아이는 사흘에 한번 꼴로 은행과 팥즙을 짜낸 물로 목욕을 했다. 그 냄새 나고 붉은 물이 아이의 액운을 씻어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 〈궁합〉, 2018


“내 몸에선 항상 똥냄새가 나.” 아이가 울면서 말하면 나인들은 박하사탕을 주며 달랬다.

어느 해, 나라에 가뭄이 들고, 이것저것 다 해봐도 비 내릴 기미가 없자, 대신들은 또 다시 열아홉 살이 된 미혼의 옹주로 인해 음양의 조화가 막혀 그렇다며, 옹주의 혼사를 서두르라 채근한다. 왕이 부마간택을 선언하고, 네 명의 사주단자가 올라온다. 이제껏 사주가 어떻고, 재수가 어떻고 하며 동네북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옹주는, 난생 처음 자신의 남편후보를 ‘사주’가 아닌 ‘인간’으로 만나보기 위해 궁을 나간다.

2018년 영화 〈궁합〉의 주인공 송화옹주의 이야기다. 영화는 가볍게 흘러가다 해피엔딩으로 귀결되지만, 인간 ‘액막이’로 궁에 들어온 어린 송화가 붉은 물속에 강제로 담겨져 목욕을 하며 울던 장면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이렇게 인간 액막이가 되었던 또 다른 여인이 있다. 이 작품 속에선 ‘액막이’가 아닌 ‘액받이’라는 좀 더 살벌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바로 2012년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던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속 무녀 ‘월’이다. 세자빈으로 간택될만큼 곱고 높은 신분이었던 ‘연우’가 사람들의 음모에 의해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기억을 잃은 채 무녀로 살아가다, 다시 왕을 만난다는 드라마틱한 로맨스 소설이 원작인 이 드라마에서, 세자 훤이 해라면 연우는 달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몇 몇 인상 깊은 장면 중에서도, 그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은 결정적인 장면이 있다. 바로 궁중나례 장면.


드라마 〈해를 품은 달〉, 2012


나례진연이 벌어져 어지러운 궁에서 어린 연우가 헤매고 있을 때, 무서운 처용 가면을 쓴 사람이 나타나 연우의 손을 잡아끈다. 정신없이 처용의 손에 끌려 어디론가 가던 연우 앞에서 비로소 가면을 벗은 이는 바로 세자 훤. ‘잊으려 하였으나 너를 잊지 못하였다.’는 유명한 대사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훤과 설레는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는 연우 두 사람의 모습이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펼쳐진다.


대신들도 하늘을 핑계 삼고, 임금 역시 하늘을 핑계 삼다



나례는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꽤 중요하게 쓰이는 장면 중 하나다. 액막이 행사인 나례에서 처용 가면을 쓴 훤이 연우에게 고백하는 모습이 마치 해가 다치지 않도록 품고 오랜 세월 아파해야 하는 달의 앞날을 예언하기라도 한 것처럼.


드라마 〈이산〉, 2007~2008



드라마 〈이산〉, 2007~2008


드라마 〈이산〉에서 나례진연은 정조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세력들이 폭약을 설치해 테러를 감행하는 기회다. 불꽃놀이가 먼저 시작되고, 궐 밖에 있던 백성들도 그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친다. 뒤 이어 폭약이 터지고, 이를 막으러 달려오는 군사들과 반란군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는 궐 내. 그런데 내가 이 장면에서 궁금했던 것은, 과연 드라마처럼 정말 나례진연에서 불꽃놀이를 했는가 하는 점이다. 실록을 찾아보니 이런 기록이 보인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집(李諿)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요즈음 성문(星文)의 변이(變異)로 인하여 허물을 반성하고 몸을 닦으며, 감선(減膳)하고 구언(求言)하셨으니,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심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화산대(火山臺)를 설치함은 유희(遊戲)에서 나온 것이고, 나례(儺禮)는 비록 옛제도이기는 합니다만, 역시 유희에 가까운 것이므로, 옛날에는 방상씨(方相氏) 가 담당하여 역귀(役鬼)를 쫓는 것뿐이었고, 임금이 나례로 인하여 잡희(雜戲)를 구경하였다는 것을 예전에 듣지 못하였습니다. 유사(有司)들은 전례(前例)를 그대로 답습하고자 하는데, 전하께서는 이를 따르시니, 하늘의 경계를 삼가야 할 때에 즐기기 위한 놀이 준비를 하는 것이 어찌 하늘을 경계하는 성의하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듣자니, 이달 17일에 충청도(忠淸道) 직산(稷山)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사람에게 벼락이 떨어진 이변(異變)이 있었다 하니, 천둥도 칠 때가 아닌데도 사람에게 벼락을 친 것은 심한 것입니다. 재앙은 헛되이 응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불러들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더 삼가도록 하소서. 나례와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과 회례연(會禮宴) 등의 일은 모두 중지하시고 재앙을 만나 하늘의 경계에 대응하는 실재의 뜻을 다해 주시면 더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화산대를 설치한 것은 비록 유희에 가깝다. 그러나 역시 군대와 나라의 중대한 일이며, 나례를 구경하고 역귀를 쫓는 것이 비록 유희의 일이라고 하나 모두 재앙을 없애고 사귀(邪鬼)를 물리치기 위한 것들인데, 비록 성변(星變)이나 천둥 번개가 있었다고 한들 어찌 그로 말미암은 것이겠는가? 회례연(會禮宴)은 나 한 몸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위로 두 대비(大妃)가 계시기 때문에 축수(祝壽)하는 술잔을 올리고자 함이다."

성종 21년 12월 24일


대신들도 하늘을 핑계 삼고, 임금 역시 하늘을 핑계 삼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그러나 성종이 누군가. 전에 살펴보았듯 신하들이 매를 키우지 말라하면 원숭이를 키우고, 원숭이를 키우지 말라 하면 낙타를 키우겠다던 ‘덕질의 제왕’이 아닌가. 결국 이 해의 실록 마지막 기사는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집요한 성종의 완승.


사람이 사람의 액을 막아준다면,
사람이 사람의 복이 되는 것도 가능할 터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고려 때의 나례의식을 볼 수 있다. 남녀 주인공은 궐 안의 나례희를 뒤로 하고 궐 밖으로 나온다. 탈을 쓰고 흥겹게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백성들 모습이 흡사 할로윈을 즐기는 요즘 사람들 같다. 주인공들도 빠질 수 없다. 탈을 하나씩 쓴 두 남녀 주인공은 손을 잡고 사람들 틈에 끼어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궐 밖에도 정월을 맞는 나례희는 흥겹기만 했다.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2016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2016


요즘 직장인들이 들으면 부러워하겠지만, 옛 사람들은 나례희를 필두로, 정월 대보름가지 무려 보름 가까이 휴일을 보냈다고 한다. 케이팝으로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춤과 노래라면 어디서 빠지지 않는 한국인들이니, 귀신 쫓는다는 핑계로 춤추고 노래 부르며 요란하게 놀았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궁중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실록마다 ‘나례희’가 지나치게 유희로 빠지고 있다며 절제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신하들의 목소리가 기록된 것이 아닐지....

전교하기를,
"《주례(周禮)》에 방상씨(方相氏)가 나례를 맡아 역질을 쫓았다면 역질 쫓는 것과 나례가 진실로 두 가지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 풍속이 이미 역질은 쫓았는데 또 나례를 하여 역질을 쫓는 것은, 묵은 재앙을 쫓아버리고 새로운 경사를 맞아들이려는 것이니, 비록 풍속을 따라 행하더라도 오히려 가하거니와, 본디 나례(儺禮)는 배우의 장난으로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으며, 또 배우들이 서울에 떼를 지어 모이면 표절(剽竊)하는 도둑이 되니, 앞으로는 나례를 베풀지 말아 옛날 폐단을 고치게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배우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아뢰기를,
"전하는 요(堯)·순(舜) 같은 임금이요, 나는 고요(皐陶)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은 어느 때나 있는 것이 아니나 고요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논어(論語)》를 외어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流配)하였다.

연산11년 12월29일


영화 〈왕의 남자〉에 여자보다 더 예쁜 모습으로 등장했던 공길과 실록의 공길은 다르겠지만, 나례를 핑계로 배우들을 불러 여염의 이야기를 듣고 즐기고자 했던 연산과, 역시 나례를 핑계로 지존한 임금을 향한 풍자의 칼날도 마다하지 않았던 광대들의 치열한 부딪힘이 역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문제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의 액을 막아준다면, 사람이 사람의 복이 되는 것도 가능할 터. 액막이 무녀가 중전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사랑이었다. 무서운 처용가면을 벗기는 것도, 재수 없는 송화옹주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도 모두 사랑이었다면, 새해엔 진하게 사랑하고, 액을 복으로 바꿔봄이 어떨까.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매해의 마지막을 구나로 장식하며 추억에 젖다”

김령, 계암일록,
1603-12-30~ 1608-12-30

1603년 12월 30일, 한 해가 다 지나갔다. 김령은 어버이가 모두 살아 계실 때를 추억해 보니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 그지없었다. 그는 입으로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다. 내일 제사 때문에 제수 음식을 살펴보고 초저녁에는 구나(驅儺)를 행했다. 자개·이지 등과 옛날에 한 약속이 있어서 후조당(後凋堂)에 모여서 대화했다. 닭이 운 뒤 각자 흩어졌다.
1606년 12월 30일, 김령은 초저녁에 구나(驅儺)를 행했다. 병중에 있다 보니 옛날 어버이 계실 적의 성대했던 일들을 생각하니 김령은 자신도 모르게 느꺼움이 사무쳐 슬퍼졌다.
1607년 12월 27일, 김령은 밥을 먹은 뒤 방잠에 가서 큰 배소(拜掃)를 행했다. 나례(儺禮) 행사의 북소리를 들으니 옛날 일이 생각났다.
1608년 12월 30일, 추위가 심했다. 김령은 저물녘에 설월당에서 외가의 절제(節祭)를 지냈다. 한해가 이미 다 지나갔다.
옛날, 어버이를 모시고 즐겁게 지내던 시절과 아이 적에 장난치며 뛰어놀던 추억이 떠올랐다. 느꺼움에 탄복되고 탄복되었다. 김령은 밤에 구나(驅儺)를 행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년 김령의 소회와 아이들의 구나(驅儺)”



바람이 세차게 부는 162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김령은 여러 어른에게 감사 편지를 써드렸다. 그리고 정오경에 부모님께 절제(節祭)를 올렸다.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한 해의 마무리를 했다.
마을 아이들은 보잘것없으나마 구나(驅儺)를 하였다. 김령은 한 해의 끝을 보내며 점점 노경(老境)으로 접어드는 감회에 젖었다. 옛 추억이 엊그제 일 같아 스스로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상께서 전염병을 막을 제사를 지내라 명하시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6-05-22

1746년 5월 22일, 흐린 날이었다. 요사이 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났는데, 그 때문인지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부 시장에 보낸 종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질 못했다.
요사이 주상께서 민간에 역병이 도는 것을 아시고는 이를 치료할 벽온단을 나누어 하사하셨다고 한다. 또한 낭관과 감사를 파견하여 여귀에게 올리는 제사,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주상의 성은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료들과 백성들은 마땅히 감격하여 은혜를 갚을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고을에서는 세금 거두는 것을 어찌나 화급하게 독촉하는지, 온 고을이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서울에 계신 주상은 백성들이 전염병에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일선 관리들과 향리들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에만 골몰하고 백성들의 삶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어찌 이것이 관리로서 임금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 하겠는가! 최흥원이 보기에 전염병을 일으키는 여귀보다, 세금을 독촉하는 관리들이 백성들에겐 더 무서운 존재 같았다.

“1846년의 설날 - 세배와 차례, 성묘 그리고 한해 운수 점치기”

서찬규, 임재일기,
1846-01-01~ 1849-01-01

오늘은 1846년 1월 1일, 정사(丁巳)년 설날이다. 매해 그러했듯 서찬규는 닭이 울 무렵 할머님과 부모님께 세배하고, 날이 샐 무렵 절 차례를 지냈다. 서실로 나와서 덕우와 함께 시초점을 쳤는데 서지췌(噬之萃) 괘가 나왔다. 오후에는 신제(新堤) 북쪽 산언덕의 선영에 가서 성묘했다. 5대 조비(祖妣) 영양 이씨(永陽李氏), 조비 월성 손씨(月城孫氏), 증조비 동래 정씨(東萊鄭氏), 숙부 등 모두 네 분의 묘소가 여기에 있다. 1849년(헌종15년) 1월 1일에는 감기 때문에 차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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