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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내 손에 쥔 것이
의외로 휴지가 아닐지 몰라

요즘 콘텐츠 제작자들의 꿈은 넷플릭스?!


지난 추석연휴 즈음, 장안의 화제는 온통 ‘오징어 게임’이었다. 전에 〈겨울연가〉와 〈엽기적인 그녀〉, 〈허준〉이나 〈주몽〉 같은 영화, 드라마가 인기 있다는 뉴스는 들은 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서적 공감대가 많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가 진출한 83개 국가에서 모두 1위를 달성하자 ‘어, 이건 뭔가 다른데…’ 싶었던 게 사실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2021. (출처: 넷플릭스)


추석연휴 마지막 날, 남편과 〈오징어 게임〉을 보았다. 1부부터 9부까지, 중간의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한 번에 다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보았던 데스게임 형식에, 우리에겐 익숙한 신파, 그리고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담아 잘 버무려놓은 드라마였다. 여기에 수준 높은 미술과 음악이 가세하니, 시간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한 훌륭한 오락콘텐츠가 탄생했다.

요즘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넷플릭스는 하나의 꿈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보여지듯 글로벌 OTT 플랫폼이라는 장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엄청난 제작비 덕분이다. 저작권 일체를 넘겨주는 (창작자 입장에선) 다소 불공정한 계약이란 점을 상쇄시킬 만큼, 충분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얘기다. 제작비가 여유로우니 억지스런 간접광고를 넣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다. 그리고 무슨무슨 심의위원회의 제재에서 벗어나, 소재와 표현에 있어 좀 더 자유로운 것도 사실이다.

〈오징어 게임〉의 경우, 각본과 연출을 맡은 황동혁 감독이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기획하고 제작하려 애썼지만, 국내 방송사나 제작사들로부터,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 것 같다’라든지, ‘너무 잔인하다’ 혹은 ‘지금 먹힐 것 같지 않은 기획이다’ 등등, 이유는 많고도 널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발전시켜 기어이 세계적인 콘텐츠로 만든 감독과 제작자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영화 〈수상한 그녀〉 2014, 포스터


영화 '수상한 그녀' 美 본토 상륙… '세계 최초' 8개국 제작
(2016.11.07. 출처: 스포츠월드)


내가 원작, 각본을 쓴 영화 〈수상한 그녀〉 역시 2004년에 영화사와 계약하고 원고 집필을 시작한 이후 영화관에서 개봉한 때가 2014년이니,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무려 10년이나 걸렸다. 그 사이 제작사 사정이 어려워지고, 내 기획이 좋다며 계약을 적극 추진했던 프로듀서는 건강이 악화되(어 끝내 돌아가시)고, 투자자들 쪽에선 주인공을 ‘미스코리아’로 바꾸라 요구하는 등,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투자가 좌절되자 제작사 쪽에선 손을 놓았다. 원고료 잔금조차 받지 못하고 거의 포기하고 있던 때, 우연히 원고를 좋게 본 또 다른 제작자 덕분에 비로소 다시 살아난 것이다. 제작과 배급에 CJ라는 대기업이 참여하면서 영화는 갑자기 글로벌 프로젝트가 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누군가 내게 유튜브 링크를 보내왔다. 〈수상한 그녀〉가 8개 국가에서 영화화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일본, 인도, 베트남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사이 또 늘어난 모양이다. (첨언하자면, 링크를 보내온 지인은 이렇게 여러 곳에서 영화화되면 내게 인센티브가 있는 줄 알지만 전혀 아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시나리오 계약은 저작권 일체를 제작사에서 가져가는 형태다. 그러고 보면 넷플릭스와 다를 바 없다.)


드라마 〈지옥〉, 2021. (출처: 넷플릭스)


사실 〈수상한 그녀〉도 그렇지만, 〈오징어 게임〉이나,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는 〈지옥〉 등이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생각해보았음직한 소재를, 익숙한 방식으로 풀어내되, 한국적 특수성, 다시 말해, ‘나, 지금, 여기’의 상황으로 조금 비틀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겐 신물 나는 신파일 수 있고, 흔하디흔한 클리셰일 수도 있지만 그것에서 뭔가 남다른 미덕을 찾아 발전시키는 힘이야말로,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결정적인 능력이 아닐까 싶다.


중국의 종이 값이 허난설헌의 책 때문에 높아진다.


K-콘텐츠, K-컬처가 세계를 사로잡은 건 근래의 일이지만, 오래 전에도 그런 일들은 종종 있어왔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일본의 열광적인 환대와 동경은 흡사 ‘욘사마’에 대한 1차 한류 팬들의 반응과도 같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오늘 한 걸출한 여성 시인에 대해 말하고 싶다. 바로 허난설헌이다.

허난설헌은 종종 사임당과 비교되곤 하지만, 사임당이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모성(한국인들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해 마지않는)의 영역까지 압도하며 5만 원 권에 등장한 데 비해, 유명세나 상징성에 있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영화나 드라마에 있어서도, 사임당이 한국의 현모양처로 수없이 재조명된 데 비해, 허난설헌을 다룬 콘텐츠는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강사 S씨 말처럼 ‘직계 자손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허난설헌의 자녀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곡자(哭子)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소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서럽고도 서러운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솟았구려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백양나무 가지 위 바람 쓸쓸히 불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도깨비 불빛만 무덤 위에 번뜩인다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지전을 살라 너희 혼백 부르고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무덤 앞에 물 부어 제사 지내네
應知第兄魂(응지제형혼)가엾은 남매의 외로운 영혼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밤마다 서로 어울려 노닐겠구려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배 속에는 어린애 들었지만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어떻게 무사히 기를 수 있을까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하염없이 황대사를 읊조리다 보니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통곡과 피눈물로 목이 메이네



〈선을 넘는 녀석들_아이엠샘〉, 2020.11.08 (출처: MBC TVPP)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사임당과 마찬가지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許曄), 오빠인 허성과 허봉, 동생인 허균까지, 허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타고난 문사의 재질을 보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한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알파걸’이라는 단어가 있다. 다방면에 남학생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여학생을 일컫는 ‘알파걸’을 길러내는 데에,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소위 알파걸 4명 가운데 3명은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말했다는 것.

당시로서는 드물게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글을 가르치고, 독선생을 두어 시를 가르친 아버지 허엽이야말로, 알파걸을 길러내기에 적합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난설헌의 오빠들 역시 마찬가지로 여동생을 존중하고 그녀의 글재주를 귀하게 여겼다. 본명이 초희인 그녀가 ‘난설헌’이라는 호와 ‘경번(景樊)’이라는 자를 갖게 된 것도 이러한 집안 분위기 덕분이었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발휘하고 재기발랄하던 난설헌의 인생이 달라진 것은 결혼 이후다.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과거시험엔 번번이 낙방했을 뿐 아니라, 자신보다 학문이 높은 아내가 부담스러웠던지, 날마다 기생집을 전전했다. 소박이나 다름없는 나날이었지만, 어렵게 가진 딸과 아들을 위로 삼아 다시 행복을 꿈꾸던 그녀에게 또 다시 불행이 닥쳐왔다. 딸과 아들이 차례차례 명을 달리한 것이다. 아버지와 오빠 허봉까지 객사하자 난설헌은 더욱 삶의 의욕을 잃었다.

당시 난설헌이 노래한 ‘삼한(三恨)’, 곧 ‘세 가지 한탄’이 있는데,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 금슬이 좋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지내던 난설헌은 결국 스물일곱의 나이에 삶을 마감하고, 동생 허균에게 자신의 시를 모두 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차마 누이의 인생이나 마찬가지였던 시를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던 허균은, 자신의 손으로, 외우고 있던 누이의 시를 다시 베껴 써 ‘난설헌집’이란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는다. 허균은 이 책을 중국 사신인 주지번에게 주었고, 그녀의 시는 명나라에까지 알려졌다.


〈선을 넘는 녀석들_아이엠샘〉, 2020.11.08 (출처: MBC TVPP)


난설헌집의 인기가 어찌나 높았던지, 당시 중국의 종이 값이 그녀의 책 때문에 높아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일본에서 역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인용되었다. 이런 그녀가 한류스타가 아니면, 누가 한류스타란 말인가!

후대에 연암 박지원은 연경에 갔을 때, 청나라 사람들이 아직도 그녀의 시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 열하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대체로 규중에 있는 여성이 시를 읊조린다는 것이 본시 아름다운 일도 아니긴 하지만, 외국의 여자로서 아름다운 이름이 중국에 퍼졌다는 것은 가히 명예롭다고 말할 만하다.

『열하일기』「피서록」 중에서


칭찬을 안 할 수도, 대놓고 할 수도 없는 사뭇 묘한 소회가 아닌가. 당시로서는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연암조차 이렇게 말했음은, 난설헌이 살던 시기엔 얼마나 많은 억압과 고충이 있었을까를 가늠케 한다.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난다. 〈오징어 게임〉이 미주지역에서 시청률 1위를 달성하지 않았다면, 나는 남편과 나란히 앉아 〈오징어 게임〉을 시청했을까? 만약 중국과 일본에서 난설헌집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면, 현대의 우리는 난설헌을 지금만큼이라도 생각하고 있을까 말이다.

한류는 외부의 누구로부터 평가받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의 역량을 믿고,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만들어 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건 먼 데 있지 않고, 어쩌면 내 손 안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손을 펴 보자. 이제껏 내 손에 쥐고 있던 것이 휴지가 아니라, 보석일지 모르니.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조선시대 군인들의 강무”

마상재(馬上才)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람이 행하는 갖가지 재주로, 농마(弄馬), 희마(戱馬), 마희(馬戱), 곡마(曲馬), 원기(猿騎), 무마(舞馬), 표기희(驃騎戱), 마기(馬技), 마기(馬伎), 입마기(立馬技), 마술(馬術) 또는 말광대, 말놀음 같이 다양한 용어로 불린다. 이들 용어 가운데 훈련된 말에게 여러 기예를 익히게 하는 무마(舞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용어는 기수가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여 재주를 부리는 기예를 뜻하는 말이다. 특히 마상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붙여진 명칭으로 민간에서는 주로 마기(馬伎)라 불렀다. 하지만 마기가 아니라 희마(戱馬)가 옳다는 주장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희마가 옳은 표현으로 보인다.
마상재는 기마술의 일종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별도로 때를 가리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후기에 들어와 마상재가 관무재라는 무예 시험의 종목으로 시행되면서 봄과 가을에 주로 많이 행해졌다.
마상재에는 키가 크고 빛깔이 좋으며 훈련이 잘된 말을 골라서 썼으며, 암말보다도 수말이 적당하다고 했다. 특히 부루말(흰말)을 높이 쳤으며, 가라말(검정말) 중에도 네 발굽이 흰 것은 무방하게 여겼다. 이러한 말에 온갖 치레를 갖추었으며 마상재를 하는 사람은 전립 또는 투구를 썼다. 옷은 민소매로 만들어진 붉고 노란 호의(더그레)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었으며 목화나 짚신을 신지 않고 버선발로 말을 탔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소?”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 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한 조선의 인삼”

인삼은 5~6세기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에 사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이 1,000근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 초기에 조선은 금과 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나, 세종대에 금과 은의 조공을 중단하고 그 대신 인삼을 조공하기도 했다. 명 말기부터 중국인들의 인삼수요는 더욱 커졌다. 조선은 사신단의 조공품목 뿐만 아니라 무역품목으로도 인삼을 가지고 갔는데, 경비가 떨어지면 인삼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인삼은 귀한 물품이었고, 명나라 사행단이 지나가는 곳의 중국 관리들은 의례히 예단을 받았는데 요동 도사 왕소훈이 예단을 돌려보낸 이유를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한 것이라고 짐작할 만큼 중국에선 조선의 인삼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인삼의 수요가 또 다시 급증한 것은 청조 말기인데, 당시 아편중독에 인삼이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841년 조선에서 수입하는 홍삼의 수출량은 2만 근이었는데, 1847년엔 2배인 4만 근까지 급증하기도 했다.

“포로 쇄환”

조선은 일본에 3차례의 회답 겸쇄환사를 파견하였다. 1607년 외교가 재개된 첫 번째 사절에게 일본은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쓰시마와 막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이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많은 피로인들이 사신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미 귀국을 거부하고 일본에 정착하려는 포로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1617년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사신들에게는 막부나 쓰시마와의 교섭 외에 피로인에게 귀국의 정당성을 알리며 설득하는 과제가 늘어난 것이다. 쇄환을 위해 데려온 포로가 다시 돌아가 버리거나 따라왔다가도 마음이 변해 가버리는 일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피로인은 설득의 대상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할 조선인이었다. 1624년 회답 겸쇄환사에게는 자발적으로 돌아가겠다고 찾아오는 피로인들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 이미 세대가 바뀌어 완전히 일본 습성에 젖은 포로들이 등장했다. 1636년과 1634년에도 극소수의 쇄환이 있기는 하였으나 본격적인 포로의 쇄환은 1624년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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