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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권력에 충실해도, 법에 충실해도

조선시대의 관리는 현재의 공무원이다. 조선시대 관리라 하면 임금의 뜻이 사람들에게 고루 미치도록 애쓰는 대가로 나라의 녹을 받고 시키는 대로만 했을 듯하지만, 우리는 조선시대에 얼마나 많은 상소가 임금의 뜻을 꺾고 또 꺾었는지 알고 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대사가 없는 사극이 있던가. 그리고 통촉해 달라는 말에는 대부분 그러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왕이 세상의 꼭대기에 있던 시절에도 대쪽같이 임금의 잘못을 혹은 틀림을 지적하고 하지 말라 호소하는 공무원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때로는 귀양을 가기도 하고 세를 불려 뜻을 이루기도 했다.

지금은 나랏일을 할 사람들을 직접 뽑는다. 이 사람들은 공무원과는 조금 다르다. 공무원은 누가 나라를 끌어가든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고용이 보장되지만, 선출직은 자신을 선출한 사람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러라고 뽑아놓은 사람들이 꼭 사람들의 뜻을 따르지는 않는다. 이래저래 사람이란 동물은 문제가 많다.


〈『별주부전』을 묘사한 민화〉 (출처 : 온양민속박물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대 위의 공무원 가운데 가장 큰 고난을 겪는 인물은 단연 ‘별주부’라고 할 수 있다. 수궁가의 기원은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훗날 신라 29대 왕이 되는 김춘추가 아직 왕이 되기 전, 굽히기보다는 부러지는 쪽이었던, 좋게 말하면 강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 조금 모자랐던 시절의 이야기다. 백제군에 대패한 뒤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가 고구려 보장왕이 신라의 영토 일부를 내놓으라 요구하자 김춘추는 단박에 거절을 한 뒤 옥에 갇힌다. 이때 김춘추를 찾아온 고구려 공무원인 선도해가 김춘추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구토지설”이다.

옛날 동해 용왕 딸이 병이 들자 토끼 간이 약이라 하여 거북이가 육지로 나아가 토끼를 꾀어 용궁으로 가던 중 바다 중간에서 사실을 말해주자 토끼가 “마침 간을 씻어 말리려고 바위에 널어두었으니 용궁에 가도 소용없다” 한다. 하는 수 없이 간을 가지러 육지로 돌아오자 토끼는 거북이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며 달아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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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해가 술을 따라주며 해준 이야기의 숨은 뜻을 알아먹은 김춘추는 왕에게 허락을 받아오겠노라 약속하고 목숨을 건져 신라로 돌아온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공무원이 공연히 책임을 지려하지 말 것과, 공무원에게 중요한 것은 인맥이라는 사실이다. 선도해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착하자마자 뇌물을 거하게 찔러준 사람으로 자신이 받은 돈값을 토끼 이야기로 넘치게 갚았다.


〈고대부터 거북이는 장수·예지력·지혜로움을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졌다.
강서대묘 북벽에 그려진 《현무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애당초는 부처님의 전생을 이야기하는 내용이었으나 이 이야기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주인공은 악어와 원숭이 등 다양한 동물, 다양한 상황으로 변한다. 조선에 당도하자 일단 자라와 토끼 외에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용왕이라는 절대권력이 등장한다. 용왕은 몸에 좋다는 걸 먹다 탈이 나서 드러눕더니 바다에서 좋다는 건 다 주워 먹는데, 그게 바로 자신의 신하인 어패류라는 사실부터 이미 폭군의 자격을 넘치도록 갖추었다. 자기 한 몸 낫자고 어족회의를 소집하는데 이 어족들은 자신만 아니면 누가 먹혀도 상관없는 무능하고 치졸한 모습을 보여준다. 용왕은 그 꼴을 보고도 생각하는 꼴이라고는 “양기가 부족헌가, 해구신도 권해보고”라고 하는 등 가관이다. 결국, 해산물들은 용왕의 병을 낫게 할 약으로 자신들이 아닌 땅 위의 동물을 선택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달리기로는 당할 자가 없다는 재빠른 ‘토끼의 간’이다.

〈‘수궁가’ 중 범내려오는 대목〉   더보기

일이 이렇게 되니 진짜 토끼 간이 절실해진 용왕은 신하들에게 어서 가서 토끼란 놈을 잡아 오라는 데 일단 토끼에게 책임을 미루는 데 성공한 해산물 신하들이 내가 가겠다고 나설 리가 없다. 이때 척 나서는 인물이 별주부다. 별주부는 아무래도 해산물들 사이에서 좀 치이다 보니 용궁에서 출세할 길이 막힌 인물이었다. 별주부가 공무원 생활로 갈고 닦은 아부력을 단전으로부터 끌어올려 아부인 듯 아부 아닌, 아부 같은 아부의 정신없는 폭격으로 토끼를 낚아 용궁으로 가는 장면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실제 그보다 별주부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끌어올려 쓰는 장면은 ‘토 선생’을 잘못 말해 ‘호 선생’을 부르는 바람에 호랑이의 별미가 될 뻔했다가 살아나는 장면이다.


〈이날치 밴드의 정규 1집 《수궁가》〉 (출처 : 하이크)


이날치 밴드의 ‘범내려온다’로도 유명해진 바로 그 대목이다. 호랑이와 자라는 뻔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정체를 바꿔가며 누구인지 맞춰보기를 하는데 호랑이가 보여주는 행태는 용왕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 바다든 육지든 권력자들의 욕망은 그저 일차원적이고 이기적임을 직설적이면서도 세상 우습게 보여준다. 이런 와중에도 별주부는 공무원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어진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마침내 토끼를 놓치고서는 토끼 똥을 명약이라고 가져가 용왕에게 먹이는 사이다 결말을 관객에게 선사하기도 하니 그야말로 너무나 바쁜 전천후 공무원의 전형이다. 어딘가 애잔함을 자아내는 것은 덤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역대 자베르 6인이 부르는 ‘Star’〉   더보기

조선에 이런 애잔함의 끝판왕, 사람에게 충성하는 공무원인 별주부가 있다면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공무원 ‘자베르’는 법에 자신을 헌신하는 그야말로 법에 살고 법에 죽는 인물을 보여준다. 제목인 ‘비참한 사람들’ 안에 자베르는 우선순위로 올라갈 법한 인물이다. 법 밖에 사는 집시의 사생아로 감옥 안에서 태어나 법 집행관이 된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법과 싸우는 삶을 살거나, 법을 위해 싸우는 삶을 살거나. 그는 자신의 피에 흐르는 집시와 범죄자의 피를 자신의 행적으로 씻어내기라고 할 듯이 범죄자들 체포에 열을 올리는 냉혈한이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흑과 백뿐이며 그는 항상 빛나는 별처럼 밝은 법의 세계에 존재했다. 도무지 잡히지 않는 ‘장발장’이라는 죄수를 만나기 전에는. 그에게 있어서 범법자들은 ‘악’ 그 자체이건만 장발장은 모든 사람을 ‘선’으로 대하는 인물이다.

자베르는 혁명군에 스파이로 잠입했다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들킨다. 혁명군은 이제 막 가입한 장발장에게 그의 처형을 맡긴다. 일종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자베르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건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악인인 장발장이 자신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소까지 알려주며 나중에 찾아오라니 이 인물은 악인인가 아닌가. 자베르의 별에는 구름이 낀다. 결국, 그는 다친 마리우스를 업고 돌아오는 장발장을 살려 보내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죽음을 선택한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오로지 법에 충성했건만 법은 그의 등불이 되어주지 못했다.

별주부도, 자베르도 주어진 일에 충실했던 공무원들. 얼마 전, 그렇게 주어진 일에 충실했던 공무원이 자베르처럼 세상을 등졌다. 공무원을 자신의 밑에 두고 종이라고 여겼던 인간의 민원 갑질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구 너머에 사람 있고, 글 너머에 사람 있음을, 나처럼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그곳에 있음을, 선출되는 사람도, 선출하는 사람도, 그리고 묵묵히 일하는 공무원을 대하는 사람들도 부디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법도 체제도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잊지 않기를. 지나치지 않기를. 누구 하나의 욕망에 충실하지 않기를 바란다.


〈국립극장에서 진행하는 《완창 판소리》〉 (출처 : 국립극장)


선거가 다 끝난 후 남산의 국립극장에서는 《완창 판소리》 6월의 공연으로 수궁가를 볼 수 있다.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다른 이의 공을 빼앗으려던 감사 심돈, 톡톡히 망신당하다”

김령, 계암일록, 1615-07-11 ~

전 감사 심돈(沈惇). 그는 기생에 빠져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또 1615년 1월에는 동래부사 박경업(朴慶業)과 공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일화가 전해진다.

일찍이 박경업이 엉뚱한 사람을 잡아 역적 박치의(朴致義)라고 하였다. 이 자를 데리고, 바로 계를 올려 보내느라 영천[榮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심돈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과 말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그 장계를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급하게 치계(馳啓)하고, 스스로 자신의 공으로 삼아 말하기를 “신은 성상 앞에서 명을 받은 이후로 역적을 포획하는 것을 일삼아 항상 군현 내를 경계하였더니 지금 바로 동래에서 잡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는 박경업의 공이 자신보다 앞서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경업이 잡혀가게 되자 심돈이 점차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에 감사로 온 자는 거의 20여 명이 되었다. 혹자는 재간이 있으나 청렴하지 않았고, 혹자는 청렴하였으나 재주와 기량이 부족하였다. 형편없는 탐관오리가 있었으며 광포하고 패악한 자도 있었다. 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평가와 승진”

조선시대 지방관의 인사고과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고려시대인 989년(성종 8) 처음 실시해 6품 이하 관리들의 인사에 반영되었고 1018년(현종 9) 연말종합평정제도인 연종도력법(年終都歷法)이 시행되었고, 1105년(예종 즉위년) 지방관 평가제도인 수령전최법(守令殿最法)이 수립되었다. 또, 공민왕 때 근무일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도숙법(到宿法)이 마련되었고, 공양왕 때 근무월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개월법(箇月法)이 신설되었다.

고려시대의 고과법에서는 특히 지방관의 평정업무가 강조, 강화되었다. 그 기준은 이른바 수령5사(守令五事), 즉 농지의 개척, 호구(戶口)의 증식, 부역의 균등, 소송의 신속처리, 도둑의 단속능력 및 업적이었다. 이러한 업무는 이부(吏部)에 소속된 고공사(考功司)에서 주로 관장하였다.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 바로 고과법을 시행하였다. 수령5사에 학교의 진흥과 예속의 보급 두 종목을 추가해 수령칠사(守令七事)로 하였다. 또 새로운 공직자 윤리규범 4조, 즉 덕의(德義)·공정(公正)·청근(淸謹)·근면(勤勉)을 강조해 이들 조항의 실천여부를 점수화하였다. 그 뒤 세종·세조대를 지나면서 고과에 관한 규정들이 제정, 보완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에는 고과와 포폄의 두 조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과는 관리들의 일반근무동향 기록제도와 같은 것으로, 이조의 고공사에서 주관해 기록·관리하였다. 포폄은 정기근무성적 평정제도와 같은 것으로, 경관(京官, 중앙의 여러 부서관리)들은 소속관아의 책임자에 의해서, 지방관들은 관찰사에 의해서 매년 2회씩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포폄 역시 개별적으로 평가된 성적은 이조에 통보되어 인사에 반영되거나 참고자료로 기록, 보존되었다.

『경국대전』 고과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근무일수[仕數]와 근태상황을 엄격히 기록, 관리하였다. 이는 당상관을 제외한 모든 관리가 날짜로 계산되는 소정의 임기를 마쳐야 전보[遷官]와 진급[加階]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근무시간도 하절기에는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 동절기에는 진시(辰時)에서 신시(申時)로 규정하였다. 둘째, 업무실적을 점검하였다. 특히, 형조·한성부·개성부·장례원(掌隷院) 등의 사법기관에서는 당하관들의 재판처리건수를 보고하도록 하고, 기준에 미달되는 자는 징계하였다. 셋째, 매년 말에 경관들은 이조에서 실제 근무일수와 기타 사항들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고, 지방관들은 관찰사가 수령7사(農桑·學校·詞訟·奸猾·軍政·戶口·賦役)의 실적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였다. 넷째, 질병으로 인한 장기결근자(연간 30일 이상)·범법자(특히 왕족이나 공신)·집회불참자 및 근무성적평정에서 하등급을 받은 자, 사소한 죄로 파직된 자 등을 보고, 징계, 기록하고 일정기간에 재임용되지 않도록 하였다. 다섯째, 녹사(錄事)와 서리(書吏)의 근태상황을 점검하고 불량시에 징계하였다. 특히 서리들은 명부를 따로 비치해 관리함으로써 그들의 부정과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일기에서 보이는 오모의 승진을 위한 부임은 아마도 근무일수를 모두 채우지 못하여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수령칠사(守令七事)”

수령(守令)은 고려·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임명하고,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의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의 정원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후기로 올수록 수령의 정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도호부사의 정원이 늘어났다.

수령에 임용되려면 문과·무과·음과 중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급수령에는 문과가 많고, 연변(沿邊) 군현에는 무과가 많으며, 중소 군현에는 음과가 절대 다수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가 말해 주듯이 권농(勸農)·호구 증식·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 간평(訴訟簡平)·풍속 교정이었으며,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또한 감사와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은 그 도의 수령이 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다.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오사, 즉 전야벽(田野闢 : 전지를 개척함)·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盜賊息 : 도적을 그치게 함)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수령 고적(考績)의 법으로 삼았다.

양자를 비교하면 오사의 전야벽·도적식과 칠사의 농상성·간활식은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칠사는 오사에 학교흥·군정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오사는 조선 초기에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어오다가 태종 6년(1406) 12월의 기록에 처음 칠사가 등장하였다.

이 때 칠사를 존심인서(存心仁恕 : 마음은 仁과 恕에 둠)·행기염근(行己廉謹 :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함)·봉행조령(奉行條令 :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함)·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상을 권장해 맡김)·수명학교(修明學校 :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함)·부역균평(賦役均平 :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함)·결송명윤(決訟明允 : 소송에 대한 판결은 공명하고 진실되게 함)을 들고 있다.

이 일곱가지 중 권과농상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 수명학교는 셋째인 학교흥, 부역균평은 다섯째인 부역균, 결송명윤은 같은 여섯째인 사송간과 문자는 약간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존심인서·행기염근·봉행조령의 세 가지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내용도 ≪경국대전≫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수령오사 중 호구증과 도적식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 태종 때 이러한 칠사지목(七事之目)이 어떤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406년(태종 6) 이후에도 칠사란 말이 실록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또 태종 11년(1411) 윤12월의 기사에 보이는 칠최지목(七最之目) 중에 호구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령칠사는 고려적인 제도가 조선적인 제도로 전환하는 태종·세종대에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슷한 원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가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4년(1483) 9월의 기사이다. 즉 성종이 평택현감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일곱가지를 암송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진 것은 ≪경국대전≫ 편찬 때로 보인다.

수령칠사는 그 뒤 조선 중·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737년(영조 13)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권문해,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

권문해, 초간일기,
1590-01-01 ~ 1590-02-02

1590년 1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갔다. 권문해는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도울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결국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나누어 구휼하기 시작했다. 대구 달성지역의 하빈(河濱)의 동면, 북면, 서면의 각 마을로 향하여 분진(分賑)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구휼은 밤이 깊어가도록 이어졌다. 권문해는 밤이 깊어지자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윤효언(尹孝彦)의 집을 찾았다. 다음날도 분진은 계속되었다. 하빈현의 동면과 북면 서면에 이어 남면의 구휼이 시작되었다. 남면의 사람들도 굶주린 이들이 마을의 정자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분진은 오후 1시 되어서 끝이 났다. 이어 신서촌(身西村) 성당리(聖堂里)로 향하였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구휼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1월 9일, 마지막으로 임암현(立岩縣), 내역리(內驛里), 검정리(檢丁里), 해안현(解顔縣)의 동촌리, 상향리, 서부리의 마을까지 모두 분진을 하였다.

사흘간 계속되는 분진이지만 여전히 굶주린 백성들이 이어졌다. 권문해는 한 달이 지난 2월 2일에도 읍내의 마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간장을 나누어 주었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담배를 피우며 강연하는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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