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관리는 현재의 공무원이다. 조선시대 관리라 하면 임금의 뜻이 사람들에게 고루 미치도록 애쓰는 대가로 나라의 녹을 받고 시키는 대로만 했을 듯하지만, 우리는 조선시대에 얼마나 많은 상소가 임금의 뜻을 꺾고 또 꺾었는지 알고 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대사가 없는 사극이 있던가. 그리고 통촉해 달라는 말에는 대부분 그러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왕이 세상의 꼭대기에 있던 시절에도 대쪽같이 임금의 잘못을 혹은 틀림을 지적하고 하지 말라 호소하는 공무원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때로는 귀양을 가기도 하고 세를 불려 뜻을 이루기도 했다.
지금은 나랏일을 할 사람들을 직접 뽑는다. 이 사람들은 공무원과는 조금 다르다. 공무원은 누가 나라를 끌어가든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고용이 보장되지만, 선출직은 자신을 선출한 사람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러라고 뽑아놓은 사람들이 꼭 사람들의 뜻을 따르지는 않는다. 이래저래 사람이란 동물은 문제가 많다.
〈『별주부전』을 묘사한 민화〉 (출처 : 온양민속박물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대 위의 공무원 가운데 가장 큰 고난을 겪는 인물은 단연 ‘별주부’라고 할 수 있다. 수궁가의 기원은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훗날 신라 29대 왕이 되는 김춘추가 아직 왕이 되기 전, 굽히기보다는 부러지는 쪽이었던, 좋게 말하면 강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 조금 모자랐던 시절의 이야기다. 백제군에 대패한 뒤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가 고구려 보장왕이 신라의 영토 일부를 내놓으라 요구하자 김춘추는 단박에 거절을 한 뒤 옥에 갇힌다. 이때 김춘추를 찾아온 고구려 공무원인 선도해가 김춘추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구토지설”이다.
선도해가 술을 따라주며 해준 이야기의 숨은 뜻을 알아먹은 김춘추는 왕에게 허락을 받아오겠노라 약속하고 목숨을 건져 신라로 돌아온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공무원이 공연히 책임을 지려하지 말 것과, 공무원에게 중요한 것은 인맥이라는 사실이다. 선도해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착하자마자 뇌물을 거하게 찔러준 사람으로 자신이 받은 돈값을 토끼 이야기로 넘치게 갚았다.
〈고대부터 거북이는 장수·예지력·지혜로움을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졌다.
강서대묘 북벽에 그려진 《현무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애당초는 부처님의 전생을 이야기하는 내용이었으나 이 이야기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주인공은 악어와 원숭이 등 다양한 동물, 다양한 상황으로 변한다. 조선에 당도하자 일단 자라와 토끼 외에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용왕이라는 절대권력이 등장한다. 용왕은 몸에 좋다는 걸 먹다 탈이 나서 드러눕더니 바다에서 좋다는 건 다 주워 먹는데, 그게 바로 자신의 신하인 어패류라는 사실부터 이미 폭군의 자격을 넘치도록 갖추었다. 자기 한 몸 낫자고 어족회의를 소집하는데 이 어족들은 자신만 아니면 누가 먹혀도 상관없는 무능하고 치졸한 모습을 보여준다. 용왕은 그 꼴을 보고도 생각하는 꼴이라고는 “양기가 부족헌가, 해구신도 권해보고”라고 하는 등 가관이다. 결국, 해산물들은 용왕의 병을 낫게 할 약으로 자신들이 아닌 땅 위의 동물을 선택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달리기로는 당할 자가 없다는 재빠른 ‘토끼의 간’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진짜 토끼 간이 절실해진 용왕은 신하들에게 어서 가서 토끼란 놈을 잡아 오라는 데 일단 토끼에게 책임을 미루는 데 성공한 해산물 신하들이 내가 가겠다고 나설 리가 없다. 이때 척 나서는 인물이 별주부다. 별주부는 아무래도 해산물들 사이에서 좀 치이다 보니 용궁에서 출세할 길이 막힌 인물이었다. 별주부가 공무원 생활로 갈고 닦은 아부력을 단전으로부터 끌어올려 아부인 듯 아부 아닌, 아부 같은 아부의 정신없는 폭격으로 토끼를 낚아 용궁으로 가는 장면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실제 그보다 별주부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끌어올려 쓰는 장면은 ‘토 선생’을 잘못 말해 ‘호 선생’을 부르는 바람에 호랑이의 별미가 될 뻔했다가 살아나는 장면이다.
〈이날치 밴드의 정규 1집 《수궁가》〉 (출처 : 하이크)
이날치 밴드의 ‘범내려온다’로도 유명해진 바로 그 대목이다. 호랑이와 자라는 뻔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정체를 바꿔가며 누구인지 맞춰보기를 하는데 호랑이가 보여주는 행태는 용왕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 바다든 육지든 권력자들의 욕망은 그저 일차원적이고 이기적임을 직설적이면서도 세상 우습게 보여준다. 이런 와중에도 별주부는 공무원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어진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마침내 토끼를 놓치고서는 토끼 똥을 명약이라고 가져가 용왕에게 먹이는 사이다 결말을 관객에게 선사하기도 하니 그야말로 너무나 바쁜 전천후 공무원의 전형이다. 어딘가 애잔함을 자아내는 것은 덤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역대 자베르 6인이 부르는 ‘Star’〉
조선에 이런 애잔함의 끝판왕, 사람에게 충성하는 공무원인 별주부가 있다면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공무원 ‘자베르’는 법에 자신을 헌신하는 그야말로 법에 살고 법에 죽는 인물을 보여준다. 제목인 ‘비참한 사람들’ 안에 자베르는 우선순위로 올라갈 법한 인물이다. 법 밖에 사는 집시의 사생아로 감옥 안에서 태어나 법 집행관이 된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법과 싸우는 삶을 살거나, 법을 위해 싸우는 삶을 살거나. 그는 자신의 피에 흐르는 집시와 범죄자의 피를 자신의 행적으로 씻어내기라고 할 듯이 범죄자들 체포에 열을 올리는 냉혈한이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흑과 백뿐이며 그는 항상 빛나는 별처럼 밝은 법의 세계에 존재했다. 도무지 잡히지 않는 ‘장발장’이라는 죄수를 만나기 전에는. 그에게 있어서 범법자들은 ‘악’ 그 자체이건만 장발장은 모든 사람을 ‘선’으로 대하는 인물이다.
자베르는 혁명군에 스파이로 잠입했다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들킨다. 혁명군은 이제 막 가입한 장발장에게 그의 처형을 맡긴다. 일종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자베르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건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악인인 장발장이 자신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소까지 알려주며 나중에 찾아오라니 이 인물은 악인인가 아닌가. 자베르의 별에는 구름이 낀다. 결국, 그는 다친 마리우스를 업고 돌아오는 장발장을 살려 보내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죽음을 선택한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오로지 법에 충성했건만 법은 그의 등불이 되어주지 못했다.
별주부도, 자베르도 주어진 일에 충실했던 공무원들. 얼마 전, 그렇게 주어진 일에 충실했던 공무원이 자베르처럼 세상을 등졌다. 공무원을 자신의 밑에 두고 종이라고 여겼던 인간의 민원 갑질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구 너머에 사람 있고, 글 너머에 사람 있음을, 나처럼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그곳에 있음을, 선출되는 사람도, 선출하는 사람도, 그리고 묵묵히 일하는 공무원을 대하는 사람들도 부디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법도 체제도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잊지 않기를. 지나치지 않기를. 누구 하나의 욕망에 충실하지 않기를 바란다.
〈국립극장에서 진행하는 《완창 판소리》〉 (출처 : 국립극장)
선거가 다 끝난 후 남산의 국립극장에서는 《완창 판소리》 6월의 공연으로 수궁가를 볼 수 있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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