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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운명은 맞서도 재액은 피하고 봅시다

혹여 재액(災厄)은 닥쳐온다면, 일단 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늘 뜻하지 않게 일어나니 닥쳐온다고 하겠지요. 액은 모질고 사나운 운수입니다. 액운이란 나쁜 일을 당할 운수입니다. 보면 볼수록 재액은 돌아보기도 싫은 단어입니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폭설이 밤사이에 내리는 것처럼 재액은 불숙 들이닥치는데, 이유도 없지만 피해를 입힙니다. 그저 나쁜 운이기에,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재액을 피하게 해달라고 역시나 보이지 않는 신들에게 빌곤 했습니다. 하지만 불쑥 내리는 눈 덕분에 누군가는 신나게 뛰어나가 오리도 만들고 눈사람도 만들며 갇혀 지내왔던 감정의 묵은 찌꺼기를 날려버리기도 합니다. 선조들이 재액을 쫓으려 했던 나례나 방상씨 등의 다양한 의례에서도 어쩐지 예기치 않은 대설이 내릴 때의 그런 설렘을 조금 느낄 수 있습니다. 재액을 막기 위해 신분도, 나이도, 성별도 없이 모여 한껏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니 어쩌면 액운이란 것은 단순히 즐거움의 반대편 정도에 자리 잡은 어두운 기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20년이 누군가에는 온통 재액으로 기억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길고 어두웠던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그 다음을 기다리며 자신만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겠지요. 내일은 어떤 모양일지 알 수 없지만 홍윤정 선생님의 글처럼 사람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2020년이 재액이었다면 지구의 21세기의 남은 세월의 액땜을 2020년으로 끝냈다고 믿고 싶은 마음입니다.

스토리테마파크 공모전에서 ‘나례’를 테마로 페스티발을 준비했던 ‘나래 팀’의 멘토를 맡으셨던 이영민 선생님께서 ‘나례’에 관해 써주셨습니다. 희미해진 전통이지만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들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나례’라는 섣달그믐의 연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래’팀은 그 중에서도 영조와 사도세자의 끊어질 수 없지만 끊어졌고, 끊어졌지만 이어지는 부자간의 비극을 통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카타르시스에까지 이르는 구성을 선보였습니다. 그럴 수 있는 근간이 되었던 ‘나례’가 무엇이었는지를 써주셨습니다. 그 나례의 구경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괴물 백과>라는, 제목을 보면 안 살 수가 없는 책을 쓰신 곽재식 선생님께서는 재액을 피하는 방법 가운데서 방상씨 이야기를 천년 묵은 여우가 둔갑한 괴물인 ‘매구’로부터 시작해 풀어주셨습니다. 중국에서 전래된 방상씨라는 캐릭터는 눈이 네 개 달린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조선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붉은 두건을 쓰고 행사의 주요인물로 참여하여 신년이 되면 음악으로 액을 쫓아냈다고 하니 갑자기 귀신 쫓는 이 행사가 귀엽게만 느껴집니다.

늘 좋은 글을 주시는 홍윤정 선생님께서는 액도 구원도 사람이라는 뭉클한 이야기를 써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구원이라고 믿던 시기는 지났어도 아직은 사람이 구원이라는 사실만은 철썩같이 믿고 싶습니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지만, 귀신보다 무서운 사람에게서 건져주는 것도 사람이니까요. 또한 나례 의식이 등장했던 다양한 작품들을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말씀하신 드라마를 다시 볼 수 있는 OTT를 검색해 봅니다.

문을 닫았던 국학진흥원의 세계기록유산 전시체험관이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다시 닫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달의 편액은 정월인 만큼 용과 거북이가 지켜준다는 뜻의 ‘쌍암정려(雙巖精廬)’입니다. 국권회복의 길은 오로지 교육에 있음을 직시하여 강습회를 창립했던 국전 강형수 선생이 건립한 정자의 편액이라고 합니다. 나례를 치르고, 방상씨로 재액을 쫓고 용과 거북이 지켜준다면 2021년은 모든 재액이 물러날 것만 같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설날이 늦습니다. 사실은 양력에 익숙한 탓이겠지만, 설날이 늦어진 이유는 지난해의 액운의 그림자가 길었기 때문인 것만 같습니다. 느닷없이 이영민 선생님의 원고 마무리 문장을 빌려봅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람이 가까워지는 2021년을 기원해 봅니다




편집자 소개

글 : 이수진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
<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매해의 마지막을 구나로 장식하며 추억에 젖다”

김령, 계암일록,
1603-12-30~ 1608-12-30

1603년 12월 30일, 한 해가 다 지나갔다. 김령은 어버이가 모두 살아 계실 때를 추억해 보니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 그지없었다. 그는 입으로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다. 내일 제사 때문에 제수 음식을 살펴보고 초저녁에는 구나(驅儺)를 행했다. 자개·이지 등과 옛날에 한 약속이 있어서 후조당(後凋堂)에 모여서 대화했다. 닭이 운 뒤 각자 흩어졌다.
1606년 12월 30일, 김령은 초저녁에 구나(驅儺)를 행했다. 병중에 있다 보니 옛날 어버이 계실 적의 성대했던 일들을 생각하니 김령은 자신도 모르게 느꺼움이 사무쳐 슬퍼졌다.
1607년 12월 27일, 김령은 밥을 먹은 뒤 방잠에 가서 큰 배소(拜掃)를 행했다. 나례(儺禮) 행사의 북소리를 들으니 옛날 일이 생각났다.
1608년 12월 30일, 추위가 심했다. 김령은 저물녘에 설월당에서 외가의 절제(節祭)를 지냈다. 한해가 이미 다 지나갔다.
옛날, 어버이를 모시고 즐겁게 지내던 시절과 아이 적에 장난치며 뛰어놀던 추억이 떠올랐다. 느꺼움에 탄복되고 탄복되었다. 김령은 밤에 구나(驅儺)를 행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년 김령의 소회와 아이들의 구나(驅儺)”



바람이 세차게 부는 162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김령은 여러 어른에게 감사 편지를 써드렸다. 그리고 정오경에 부모님께 절제(節祭)를 올렸다.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한 해의 마무리를 했다.
마을 아이들은 보잘것없으나마 구나(驅儺)를 하였다. 김령은 한 해의 끝을 보내며 점점 노경(老境)으로 접어드는 감회에 젖었다. 옛 추억이 엊그제 일 같아 스스로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상께서 전염병을 막을 제사를 지내라 명하시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6-05-22

1746년 5월 22일, 흐린 날이었다. 요사이 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났는데, 그 때문인지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부 시장에 보낸 종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질 못했다.
요사이 주상께서 민간에 역병이 도는 것을 아시고는 이를 치료할 벽온단을 나누어 하사하셨다고 한다. 또한 낭관과 감사를 파견하여 여귀에게 올리는 제사,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주상의 성은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료들과 백성들은 마땅히 감격하여 은혜를 갚을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고을에서는 세금 거두는 것을 어찌나 화급하게 독촉하는지, 온 고을이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서울에 계신 주상은 백성들이 전염병에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일선 관리들과 향리들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에만 골몰하고 백성들의 삶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어찌 이것이 관리로서 임금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 하겠는가! 최흥원이 보기에 전염병을 일으키는 여귀보다, 세금을 독촉하는 관리들이 백성들에겐 더 무서운 존재 같았다.

“1846년의 설날 - 세배와 차례, 성묘 그리고 한해 운수 점치기”

서찬규, 임재일기,
1846-01-01~ 1849-01-01

오늘은 1846년 1월 1일, 정사(丁巳)년 설날이다. 매해 그러했듯 서찬규는 닭이 울 무렵 할머님과 부모님께 세배하고, 날이 샐 무렵 절 차례를 지냈다. 서실로 나와서 덕우와 함께 시초점을 쳤는데 서지췌(噬之萃) 괘가 나왔다. 오후에는 신제(新堤) 북쪽 산언덕의 선영에 가서 성묘했다. 5대 조비(祖妣) 영양 이씨(永陽李氏), 조비 월성 손씨(月城孫氏), 증조비 동래 정씨(東萊鄭氏), 숙부 등 모두 네 분의 묘소가 여기에 있다. 1849년(헌종15년) 1월 1일에는 감기 때문에 차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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