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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 한 장에 200원

연일 물가 상승 관련 소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비자물가지수는 가파르게 상승하며 생필품 가격이 두세 배 이상 올랐습니다. 6월과 비교해 양파는 84%나 올랐고, 우럭은 20%, 갈치도 11%나 상승했으며, 특히 상추는 한 장에 200원이라는 소식에 사람들의 우려와 한숨이 커지고 있습니다. 식료품 뿐만 아니라, 공산품 및 서비스 상품 가격도 크게 올랐습니다. 이는 세계적인 기상이변으로 농수산물 생산이 불안정해지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여파가 계속되어 경제적 불안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인데요, 나라와 나라 사이가 긴밀하고 촘촘하게 연결된 시대에 국내외의 여러 사회정치적 요인은 개인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조선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조선 시대 물가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가파르게 올라가는 물가에 탄식하는 모습, 하루하루 식량을 걱정하면서도 어머니를 위한 특별한 밥상을 마련하는 모습 등 조선 시대 ‘소비자 물가’를 다채롭게 담아보았습니다.

정수환 선생님의 〈17세기 어느 선비의 경험, 그건 얼마였을까?〉는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이 쓴 일기를 중심으로 17세기 조선의 물가와 당대 경제 활동의 특징을 담아주셨습니다. 화폐보다는 선물을 통한 생필품 조달이 이루어진 시기, 조극선은 초립을 팔아 감 10첩을 사고 면포나 신발을 팔아서 보리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또, 보리 2되로 오이를 사 먹거나, 쌀 1말로 소고기를 사고, 면포 1필로 도미 20마리를 사기도 했다는 내용은 당시의 생필품의 가치와 물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선물 경제에 익숙한 조선 사회에도 화폐 유통 정책이 시작되고, 조극선은 성균관 사업의 일로 상경하면서 녹봉을 동전으로 받고 많이 당황했다는 내용과 함께 조선의 경제생활이 동전이 중심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흥미롭게 전해주셨습니다.

서은경 작가님의 웹툰 〈밥상 물가〉에서는 1595년 3월 24일 오희문 가족의 아침 밥상에 오른 두 생선, 광어와 도미의 이야기를 다채로운 음식 그림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오희문은 며칠 동안 식사를 못 하는 어머니를 위해 생선 장수가 마을로 들어오자 광어는 쌀 1되를 주고, 생도미 2마리는 벼 2두를 주고 삽니다. 어머니와 두 딸이 맛있게 밥 먹는 모습에 흐뭇했지만, 예전에 비해 비싸진 생선값에 기분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또한, 전란 중에 하루하루 양식이 사라지는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최근 물가가 급속하게 오르면서 서민들의 근심이 커지고 있는데요, 오희문의 생각 많은 아침 밥상 이야기가 잔잔한 위로를 전합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이번 호는 〈정생의 시장일기〉입니다. 정생의 장보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내가 저잣거리에 직접 나서게 됩니다. 정생은 아내의 장단을 맞추며 장 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썩은 소반을 사고, 약재를 잘못 구입해서 아내의 심사를 어지럽힌 죄가 있었던 터라 아내와 동행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동행도 잠시 서로의 목적(?)이 달랐기에 각자 일을 본 후 약재상에서 만나기로 하는데, 아내가 정생을 만난 곳은 시장 외곽의 풀숲이었습니다. 정생은 청나라 상인에게 일명 ‘퍽치기’를 당해 쓰러졌던 것입니다. 눈을 뜬 정생을 보자 아내는 펑펑 울고, 그런 아내에게 정생은 작은 분합을 내밀며 달랬지요. 투박하지만 따뜻한 남자인데, 이문영 작가님이 정생을 너무 괴롭히는 건 아닌지…. 지난달에는 혼절시키더니 이번 호에서는 ‘퍽치기’를 당하고 쓰러뜨리니, 다음 달 정생이 걱정됩니다.

다음으로는 ‘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두 번째 이야기, 〈춘풍은 큰돈을 벌고 싶었다. 일하지 않고〉입니다. 이수진 작가님은 이번 호에서 일확천금을 바라며, 헛된 꿈을 좇아 빚을 내어 투자하는 청년들 일명 ‘빚투 청년’의 문제를 마당놀이 〈춘풍이 온다〉에서의 난봉꾼 이춘풍을 통해 날카롭게 바라봅니다. 최근 ‘빚투’로 내몰린 청년세대의 빚을 세금으로 대신 갚아주는 일이 큰 이슈가 되며, 투기 자금을 ‘왜 세금으로 보전해 주는가’라는 논쟁에 이수진 작가님은 난봉꾼 남편 이춘풍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내 ‘오목’을 그 답으로 말합니다. 남편을 구하기 위해 남장까지 한 아내 ‘오목’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해주셨습니다.

이번 호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은 〈백성의 살림살이를 살피는 수령의 공간, 근민당(近民堂)〉을 소개합니다. ‘근민당’은 경상북도 예안현 관아 동헌의 편액입니다. 최근 도산면 서부리에 선성현문화단지가 조성되면서 근민당을 비롯해 관아 건축물이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조선 시대 왕 대신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지방 수령들을 근민지관(近民之官)이라 칭했는데, 예안현에 부임한 수령에게 마을 사람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를 중히 여겨달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편액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난 100호 특집을 기념해 진행한 〈담談〉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좌담회 일명, ‘談사모’의 마지막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스토리테마파크와 깊이 관계된 다섯 명의 집필자가 스토리테마파크에 구축된 창작 소재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또 활용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들려주셨습니다.

장마가 그치고, 여름이 절정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더위에 지칠 때 〈담談〉의 이야기들이 잠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8월호를 전합니다.




편집자 소개

글 : 김민옥
경성대학교 글로컬문화학부 조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낙안읍성의 역사문화자원과 문화콘텐츠 개발에 관해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역사 공간의 장소성과 스토리텔링, 타문화 이해와 소통을 위한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이다. 공저로 『영화 춘향전과 한옥』, 『정보혁명』 등이 있고, 「아우서호퍼의 전쟁일기 맥락지식 분석과 스토리테마파크에서의 전유 가능성」, 「글로벌 콘텐츠화를 위한 전통의 복원과 시각적 재현: 영화 〔춘향뎐〕을 중심으로」, 「타문화 이해와 소통 과정을 통한 로컬 지식의 상호작용적 확장: 베른슈토르프의 부탄 영상물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썼다.
“승려가 책을 팔러 다니다”

금난수, 성재일기,
1578-02-03 ~ 1578-02-12

금난수의 큰아들 금경과 셋째 아들 금개는 도산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들들도 집에 없고, 눈이 많이 와서 누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어딘가 유람을 가기에도 어려운 무료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반 자(약 15cm)가 넘게 쌓인 눈을 뚫고 누군가가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많은 짐을 지고 온 승려였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서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승려는 금난수의 눈앞에 자신이 지고 온 책을 늘어놓았다. 도산서원에서 오는 길인데, 금난수의 큰아들인 금경이 말하길 아버지가 분명 책을 지고 가면 좋아하실 테니 아버지가 원하는 책이 있으면 팔아드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료한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이 읽어 주어 금난수는 흐뭇한 마음에 승려가 지고 온 책들을 기분 좋게 뒤적거렸다. 금난수가 읽을 만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막내인 금각에게 읽힐 만한 책은 있었다. 금난수는 『당음(唐音)』 9책을 구매하기로 하였다. 『당음』은 서당에서 주로 사용하던 한시 교재인데, 당시가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고 중국어의 4성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 수 있어 유용하였다. 노래하듯 당시를 읽을 귀여운 아들 생각에 금난수는 승려에게 지불한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종이를 내다 판 선비, 비루하다는 비난을 사다”

김령, 계암일록, 1609-10-05 ~

1609년 10월 5일, 추운 날이다.

들으니, 안창(安昶)이 종이를 팔았는데, 탐욕스럽고 비루한 짓을 했다고 하여 논박 당했다고 한다.

“값을 무명 20필로 깎아주시오! - 지팡이 짚고 오가며 밭을 사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2-01-17 ~ 1612-01-30

1612년 1월 17일, 택룡은 아들 대생과 함께 가동(檟洞)에 갔다. 반유실(潘有實)이 밭을 판다고 하기에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가동의 노비 천실(千實)의 집에서 만나기로 해 그 곳으로 갔는데, 천실은 외출하고 없었고 반유실도 오지 않았다. 택룡은 늙은이를 진흙밭에 불러놓고 일부러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택룡은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사흘 뒤, 반유실이 가동의 밭을 팔기 위해 다시 찾아왔다. 밭 면적은 한 섬지기[일석락(一石落)]정도였는데, 반유실이 부른 가격은 무명 50여 필이었다. 택룡은 무명 50여 필을 소 2마리, 옷 2벌, 무명 20여 필로 대체 환산해 지급하고 샀다. 매매문서를 만들고 공증인으로 하여금 문서를 작성하게 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30일 날, 반유실과 임수공(林守工)이 밭을 거래하는 문서 일 때문에 택룡의 집에 찾아왔다.

“당백전으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다”

상평통보당백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박한광(朴漢光), 박득녕(朴得寧), 박주대(朴周大), 박면진(朴冕鎭), 박희수(朴熙洙), 박영래(朴榮來), 저상일월, 미상

1866년 11월, 장령 최익현이 시폐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진사 정학교가 역시 운현궁에 나아가 대원군에게 당백전의 폐단을 극언하였다고 한다. 이 당백전의 발행으로 서울의 인심이 날로 흉흉해지자 정부에서는 10월부터 당백전을 폐지하고 엽전 사용을 허락하였으며, 호적의 인구 수대로 당백전을 환수하게 되자 물가가 조금씩 떨어지고 시장에 물건이 다시 풍성해졌다.

이 당백전이란 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올 초부터였다. 경복궁을 재건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정에서 발행한 것인데, 당백전이 등장하자마자 장안의 쌀값이 너무 뛰어올라 성균관의 밥 한상 값이 몇 배나 뛰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한 냥 이상의 거액은 반드시 당백전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한 냥 이하에 한해서만 엽전을 사용하도록 허가하였다. 그리고 이 분부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먼저 참하고 후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당백전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중앙에서는 지방관서에 더욱 엄하게 사용 명령을 전하였다. 이에 지방관들이 몸소 시장을 돌아보고 흥정하는 현장을 살피는 등 당백전 사용 독려에 진땀을 빼기도 했다. 당백전 통용 이전에 소값은 30-40전이었는데, 당백전 이후에는 60-70전에 이르고 이후에는 수백전으로 폭등하여 시장에서는 소가 팔리지 않는 지경이었다. 또 소금장수들도 시장에 들어서기를 꺼려 하여 올해는 당최 소금을 구할 수가 없었다.

제일 문제는 쌀이었다. 하루라도 없으면 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쌀값이 폭등한데다, 장사치들은 당백전 사용을 꺼려 하여 시장에 나오지 않아 그나마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방관리들이 직접 시전을 돌아다니면서 당백전 사용을 독촉할 뿐 아니라 부민들을 편달하여 쌀을 시장에 내다 팔도록 독촉하고, 심지어는 집집마다 창고를 뒤져서 적발하기에 이르렀다. 창고 열기를 꺼려 하는 집에서는 창고 문을 부수어 쌀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리곤 쌀 1두에 당백전 1푼으로 값을 정해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건값을 나라에서 정하는 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올해는 흉년까지 들어 백성들이 모두 죽어나가게 생긴 판이었다. 이러자 대원군도 할 수 없었는지 정학교의 상소를 받아들여 당백전뿐만 아니라 엽전도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한숨을 쉬며 살 방도가 생겨났다고 기뻐하였다. 무릇 나라의 궁실이 높을수록 백성의 삶이 힘든 법인데, 궁궐을 재건하고자 백성들의 삶을 이토록 피폐하게 해 놓았으니, 과연 대원군의 정치란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사당 공사 석 달, 목수의 품삯 22냥”

미상, 분강서원창원일기,
1699-08-30 ~ 1700-03-30

사당 공사를 시작한 것이 1699년 8월 30일이었고, 사당 공사를 마친 것이 이듬해 3월 30일이다. 겨울에 공사를 중단한 4개월 동안을 제외시키면 대략 3개월만에 사당 공사가 끝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당 공사를 맡았던 목수는 품삯 22냥을 받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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