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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위임받은 자, 관리

출근길에 보니 어느새 산수유, 매화들이 피어 있습니다. 아침저녁과 달리 낮에는 꽤 포근해서 나들이 갈 생각이 들어 달력을 보니, 4월 10일이 빨간색 글자로 적혀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이번 호에는 관리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왕조국가의 관리와 민주공화국의 관리는 다릅니다만 국회의원에게 요구되는 자질이나 의무를 보면 전통시대 관리들에게 요구되는 그것들과 전혀 무관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관리는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임받았다는 것은 위임한 이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으니, 위임받은 권력은 결코 남용할 수 없고 부패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권력을 위임받은 자에게는 그것을 받을 만한 자질과 그것으로 해내어야 하는 일들이 요구되고, 감시와 견제가 따라붙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관리를 충신(忠臣) 등의 바른 여섯 신하[六正]와 간신(姦臣) 등의 여섯 그릇된 신하[六邪]로 나누어 살폈고, 외관에게는 암행어사를 보내는 등 관리들을 감찰하였습니다. 관리들은 수령이 해야 할 7가지 일[守令七事]과 관리로서의 청렴(淸廉)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민주공화국에서는 그 권력을 위임하는 주체는 당연히 ‘국민’입니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그들이 행사했던 권력을 누구에게서 위임받았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품은 포부와 관직 생활에서 보이는 노고를 돌이켜보면 비단 왕에게서 받았다고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근호 교수님의 글 「청대 권상일의 관직 생활」을 통해서 권상일(權相一) 선생의 관직 생활을 따라가 봅니다. 선생은 학문뿐만 아니라 인품도 갈고 닦아 관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함양했습니다. 그리고 막 출사해서는 “붕새의 깃을 치며 날아오르리”라고 하면서 당신의 큰 포부를 보이도 했습니다. 관리로서는 “밤에 쓰러져도 낮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고단한 관직 생활을 했습니다만, 포부를 접지 않았습니다. 외직으로 나가서는 환란을 대비하고 수령으로서 맡은 바를 다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습니다. 치사(致仕) 후에 나라에서는 그를 “원로(元老)”로 삼아 선생의 50년 가까운 관직 생활에 대해 보답하였습니다. 선생의 노고는 왕 너머에 있는 백성을 바라보았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권력 앞에 자질과 의무를 요구받은 이는 관리에 한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강조되는 이가 있었으니, 하늘로부터 천명(天命)을 받은 조선의 왕이었습니다. 음악극 ≪세자전≫에서 왕(이홍)은 서열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 왕위계승자를 정하겠다고 하여, 권력을 이어받을 자질이 있는지를 증명하라고 왕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왕자들은 각자 다른 자질들을 내어 보이는데, 이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권력이 요구하는 자질들이었습니다. 그럼 왕(이홍)이 요구하는 자질은 어떤 것이었고, 왕의 권력은 어떤 권력이었을까요?

음악극 ≪세자전≫의 무대디자인에는 이 질문과 답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관객과의 대화는 여타 장르와는 다른 무대 예술만의 특징이 아닐까 합니다. 이엄지 무대디자이너님은 「무대가 그리는 과거의 흔적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권력 : 음악극 《세자전》」에서 이 극의 메시지를 무대디자인에 어떻게 담아서 관객에게 전달하려 했는지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이 무대에는 대칭인 듯하지만 틀어져 있는 공간의 중앙에 비스듬하게 어좌(御座)가 놓여 있습니다. 거기에 이르는 길과 계단 또한 반듯한 듯하지만 어긋나고 삐뚤어져 있는데, 이는 극 속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비스듬하게 놓인 어좌를 통해 극 중 왕의 권력이, 어긋나고 삐뚤어진 길과 계단을 보며 그 권력에 닿는 길 또한 바르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왕은 계승자를 정하면서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하지만, 뒤틀린 것을 다시 뒤틀어서는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음을 뒤틀린 무대가 보여줄 뿐이라고 합니다.

왕이 돌려놓으려 했지만 돌려놓지 못한 제자리는, 왕에게 권력을 부여했던 하늘의 자리, 백성의 자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뒤틀린 무대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권력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집니다. 진평군은 하늘(백성)에게서 권력을 받았음을 자각했을지, 그리고 그 권력을 관리들에게 어떻게 맡겼을지 궁금해집니다.

이수진 작기님의 「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권력에 충실해도 법에 충실해도」에서는 용왕의 권력에 충실했던 ≪수궁가≫의 별주부와 법에 충실했던 ≪레미제라블≫의 자베르를 이야기합니다. 이 글을 통해 별주부를 용궁의 관리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니,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입니다.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용왕”, “무능하고 치졸한 어족”에서는 사회 풍자극인 수궁가를 만나게 됩니다. 소임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한 끝에 사이다 결말을 내는 별주부를 보면, 그는 권력이 어디서부터 나와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만 같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법에 충성했던” 자베르가 관리로서 위임받은 권력이 법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 줄 알았더라면 그의 선택은 달라졌을까요?

관리의 안타까운 죽음이 옛이야기에도 보입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백이와 목금 4화-억울한 죽음 고하기」에서는 ≪장화홍련전≫에 등장하는 고을 사또의 역할을 재구성하여 담았습니다. 백이와 목금은 연속되는 고을 사또들의 급사(急死)에 의문을 품고 조사를 진행하다가 장화와 홍련의 혼령을 만나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됩니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도 당시 관리들의 소임이지만, 부임한 사또마다 급사를 하니, 새로 부임할 사또에게 고하고 억울함을 풀 길은 요원해 보입니다.

서은경 작가님의 「독선생전 4화-금동이에 향기로운 술은 일천 백성의 피요」에서는 웹툰 제목과 같은 글귀로 시작하는 글로 부패한 지방관들을 꾸짖으셨던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선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춘향전≫에서 볼 수 있으니, 독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성이성 선생은 암행어사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선생께서 이리 날 선 시로 부패한 관리를 꾸짖고, 암행어사로 이들을 엄중하게 처벌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언관(言官)으로도 목민관(牧民官)으로도 소임을 다하셨고 일평생 청렴(淸廉)하셨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성이성 선생에 대한 소개는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청백을 전수받다, 전백당(傳白堂)」에서도 계속됩니다. 전백당은 성이성 선생의 계서당(溪西堂) 측면에 걸려 있는 편액입니다. 계서 선생의 관직 생활은 행장 속 표현처럼 “충직으로 임금을 섬기고, 지혜로움으로 백성을 섬기고, 청백(淸白)하였”던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합니다. 선생께서 내내 청백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가족들도 함께 청렴하였을 것이고, 그 후손들도 선조의 청렴함을 본받으려 애썼을 것입니다. 전백당은 계서 선생의 청백 정신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한 후손들의 마음이 담긴 편액이라고 합니다.

이번 선거의 이슈들을 살펴보면, 지난 세월 한국 정치에서 사라져 버린 것들, 예의, 염치, 청렴, 책임, 용기라는 말들과 그 말들 앞에 있어야 할 “국민(사람)”이 생각납니다.
4월 10일 투표합시다!!!




편집자 소개

글 : 조경란
조경란
재밌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서강대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과정(한국사전공)을 수료한 후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들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아까워서 드라마 역사 자문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참여했던 작품이 “세작-매혹된 자들”, “붉은 단심”, “옷소매 붉은 끝동”, “녹두꽃”, “장영실”, “징비록”, “정도전” 등 20여 편 정도 됩니다
“다른 이의 공을 빼앗으려던 감사 심돈, 톡톡히 망신당하다”

김령, 계암일록, 1615-07-11 ~

전 감사 심돈(沈惇). 그는 기생에 빠져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또 1615년 1월에는 동래부사 박경업(朴慶業)과 공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일화가 전해진다.

일찍이 박경업이 엉뚱한 사람을 잡아 역적 박치의(朴致義)라고 하였다. 이 자를 데리고, 바로 계를 올려 보내느라 영천[榮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심돈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과 말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그 장계를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급하게 치계(馳啓)하고, 스스로 자신의 공으로 삼아 말하기를 “신은 성상 앞에서 명을 받은 이후로 역적을 포획하는 것을 일삼아 항상 군현 내를 경계하였더니 지금 바로 동래에서 잡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는 박경업의 공이 자신보다 앞서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경업이 잡혀가게 되자 심돈이 점차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에 감사로 온 자는 거의 20여 명이 되었다. 혹자는 재간이 있으나 청렴하지 않았고, 혹자는 청렴하였으나 재주와 기량이 부족하였다. 형편없는 탐관오리가 있었으며 광포하고 패악한 자도 있었다. 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평가와 승진”

조선시대 지방관의 인사고과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고려시대인 989년(성종 8) 처음 실시해 6품 이하 관리들의 인사에 반영되었고 1018년(현종 9) 연말종합평정제도인 연종도력법(年終都歷法)이 시행되었고, 1105년(예종 즉위년) 지방관 평가제도인 수령전최법(守令殿最法)이 수립되었다. 또, 공민왕 때 근무일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도숙법(到宿法)이 마련되었고, 공양왕 때 근무월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개월법(箇月法)이 신설되었다.

고려시대의 고과법에서는 특히 지방관의 평정업무가 강조, 강화되었다. 그 기준은 이른바 수령5사(守令五事), 즉 농지의 개척, 호구(戶口)의 증식, 부역의 균등, 소송의 신속처리, 도둑의 단속능력 및 업적이었다. 이러한 업무는 이부(吏部)에 소속된 고공사(考功司)에서 주로 관장하였다.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 바로 고과법을 시행하였다. 수령5사에 학교의 진흥과 예속의 보급 두 종목을 추가해 수령칠사(守令七事)로 하였다. 또 새로운 공직자 윤리규범 4조, 즉 덕의(德義)·공정(公正)·청근(淸謹)·근면(勤勉)을 강조해 이들 조항의 실천여부를 점수화하였다. 그 뒤 세종·세조대를 지나면서 고과에 관한 규정들이 제정, 보완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에는 고과와 포폄의 두 조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과는 관리들의 일반근무동향 기록제도와 같은 것으로, 이조의 고공사에서 주관해 기록·관리하였다. 포폄은 정기근무성적 평정제도와 같은 것으로, 경관(京官, 중앙의 여러 부서관리)들은 소속관아의 책임자에 의해서, 지방관들은 관찰사에 의해서 매년 2회씩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포폄 역시 개별적으로 평가된 성적은 이조에 통보되어 인사에 반영되거나 참고자료로 기록, 보존되었다.

『경국대전』 고과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근무일수[仕數]와 근태상황을 엄격히 기록, 관리하였다. 이는 당상관을 제외한 모든 관리가 날짜로 계산되는 소정의 임기를 마쳐야 전보[遷官]와 진급[加階]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근무시간도 하절기에는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 동절기에는 진시(辰時)에서 신시(申時)로 규정하였다. 둘째, 업무실적을 점검하였다. 특히, 형조·한성부·개성부·장례원(掌隷院) 등의 사법기관에서는 당하관들의 재판처리건수를 보고하도록 하고, 기준에 미달되는 자는 징계하였다. 셋째, 매년 말에 경관들은 이조에서 실제 근무일수와 기타 사항들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고, 지방관들은 관찰사가 수령7사(農桑·學校·詞訟·奸猾·軍政·戶口·賦役)의 실적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였다. 넷째, 질병으로 인한 장기결근자(연간 30일 이상)·범법자(특히 왕족이나 공신)·집회불참자 및 근무성적평정에서 하등급을 받은 자, 사소한 죄로 파직된 자 등을 보고, 징계, 기록하고 일정기간에 재임용되지 않도록 하였다. 다섯째, 녹사(錄事)와 서리(書吏)의 근태상황을 점검하고 불량시에 징계하였다. 특히 서리들은 명부를 따로 비치해 관리함으로써 그들의 부정과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일기에서 보이는 오모의 승진을 위한 부임은 아마도 근무일수를 모두 채우지 못하여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수령칠사(守令七事)”

수령(守令)은 고려·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임명하고,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의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의 정원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후기로 올수록 수령의 정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도호부사의 정원이 늘어났다.

수령에 임용되려면 문과·무과·음과 중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급수령에는 문과가 많고, 연변(沿邊) 군현에는 무과가 많으며, 중소 군현에는 음과가 절대 다수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가 말해 주듯이 권농(勸農)·호구 증식·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 간평(訴訟簡平)·풍속 교정이었으며,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또한 감사와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은 그 도의 수령이 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다.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오사, 즉 전야벽(田野闢 : 전지를 개척함)·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盜賊息 : 도적을 그치게 함)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수령 고적(考績)의 법으로 삼았다.

양자를 비교하면 오사의 전야벽·도적식과 칠사의 농상성·간활식은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칠사는 오사에 학교흥·군정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오사는 조선 초기에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어오다가 태종 6년(1406) 12월의 기록에 처음 칠사가 등장하였다.

이 때 칠사를 존심인서(存心仁恕 : 마음은 仁과 恕에 둠)·행기염근(行己廉謹 :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함)·봉행조령(奉行條令 :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함)·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상을 권장해 맡김)·수명학교(修明學校 :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함)·부역균평(賦役均平 :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함)·결송명윤(決訟明允 : 소송에 대한 판결은 공명하고 진실되게 함)을 들고 있다.

이 일곱가지 중 권과농상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 수명학교는 셋째인 학교흥, 부역균평은 다섯째인 부역균, 결송명윤은 같은 여섯째인 사송간과 문자는 약간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존심인서·행기염근·봉행조령의 세 가지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내용도 ≪경국대전≫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수령오사 중 호구증과 도적식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 태종 때 이러한 칠사지목(七事之目)이 어떤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406년(태종 6) 이후에도 칠사란 말이 실록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또 태종 11년(1411) 윤12월의 기사에 보이는 칠최지목(七最之目) 중에 호구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령칠사는 고려적인 제도가 조선적인 제도로 전환하는 태종·세종대에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슷한 원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가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4년(1483) 9월의 기사이다. 즉 성종이 평택현감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일곱가지를 암송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진 것은 ≪경국대전≫ 편찬 때로 보인다.

수령칠사는 그 뒤 조선 중·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737년(영조 13)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권문해,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

권문해, 초간일기,
1590-01-01 ~ 1590-02-02

1590년 1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갔다. 권문해는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도울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결국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나누어 구휼하기 시작했다. 대구 달성지역의 하빈(河濱)의 동면, 북면, 서면의 각 마을로 향하여 분진(分賑)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구휼은 밤이 깊어가도록 이어졌다. 권문해는 밤이 깊어지자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윤효언(尹孝彦)의 집을 찾았다. 다음날도 분진은 계속되었다. 하빈현의 동면과 북면 서면에 이어 남면의 구휼이 시작되었다. 남면의 사람들도 굶주린 이들이 마을의 정자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분진은 오후 1시 되어서 끝이 났다. 이어 신서촌(身西村) 성당리(聖堂里)로 향하였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구휼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1월 9일, 마지막으로 임암현(立岩縣), 내역리(內驛里), 검정리(檢丁里), 해안현(解顔縣)의 동촌리, 상향리, 서부리의 마을까지 모두 분진을 하였다.

사흘간 계속되는 분진이지만 여전히 굶주린 백성들이 이어졌다. 권문해는 한 달이 지난 2월 2일에도 읍내의 마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간장을 나누어 주었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담배를 피우며 강연하는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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