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이달의 일기(5月) 짝, 결혼

짝을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선인들의 일기에도 결혼에 대한 일화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 중 김택룡의 <조성당 일기>에는 둘째딸 시집보내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담談” 3호 ‘이달의 일기’에서 조선시대 결혼 풍속을 김택룡의 일기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의혼(議婚)

김택룡 “ 둘째 딸의 배필을 찾다”

의혼(議婚)이란 결혼할 나이가 되면 남녀 양쪽 집안에서 중매인을 통해 상대방에게 청혼하는 것을 말한다. 결혼할 자녀가 있는 집에서는 이웃과 친척에게 좋은 배필을 구해줄 것을 털어놓는다. 마땅한 자리가 나서면 중매하는 사람이 양쪽의 사람됨과 집안 형편을 소상히 알려주어 양가의 허락을 받는다. 양가의 뜻에 따라 맞선을 보기도 하고 예비 신랑 신부의 친인척을 만나보기도 한다.

1616년 병진년 새해가 밝자마자 김택룡은 둘째 딸 시집보내기에 나섰다. 시집을 보내기 위해서는 좋은 짝을 찾는 게 우선인데, 다행히 딸의 배필을 알아보던 중 경북 영천에 사는 권준신의 아들과의 혼담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어느새 70세가 된 김택룡은 딸의 혼담에 마음이 분주했다. 1616년 2월 2일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김택룡은 급히 권호신(權虎臣)을 찾았다. 권호신은 둘째 딸의 예비 백부(伯父)로 딸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다.

김택룡은 여섯 명의 딸을 두었다. 여섯 딸은 모두 짝을 만나 혼인을 하였는데, 각각 김각(金?), 김광찬(金光纘), 장세언(張世彦), 권근오(權謹吾), 김일신(金日新), 남효각(南孝殼)에게 시집갔다. 이중 권근오가 둘째 사위다.

원형스토리

납채(納采)

김택룡, “신랑 집에 편지를 보내고 애타게 기다리다”

혼인하기로 결정을 하면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신랑의 관직 및 성명을 적어 정식으로 청혼하는 ‘청혼편지’를 보내고 이를 받은 신부 집에서는 청혼을 허락한다는 ‘허혼서’를 보낸다. 허혼서를 받은 신랑 집에서는 비로소 사당에 고하고 본격적인 혼인 준비에 들어간다. 그 첫 번째가 신랑의 사주단자(四柱單子)와 혼인을 하게 되어 기쁘다는 내용의 ‘납채서(納采書)’를 작성하는 것이다. 납채서는 다섯 번 접어 봉투에 넣어 봉한 뒤에 붉은 보자기로 싸서 신부집으로 보낸다. 신랑의 사주를 받는 것은 곧 약혼을 의미한다. 이를 납채(納采)라 한다.

김택룡의 둘째 딸과 권준신의 아들 권근오의 혼담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신랑집으로부터 이미 ‘납채서’를 받아 양쪽집안의 혼인은 이제 공식화되었다. 이후 혼례와 관련하여 본격적인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는데, 1616년 3월 11일 김택룡은 신랑 집에 혼례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다음날 김택룡은 전날 보낸 편지에 대한 신랑 집의 답변을 아침부터 기다렸다. 김택룡은 외출해야 할 일도 미루고 애태우며 편지를 기다렸다. 결국, 저녁이 되어서야 신랑의 백부 김호신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다행히 혼사는 김택룡의 제의에 따르겠다는 답장이었다.

김택룡은 둘째 딸의 혼사를 앞두고 하루하루 노심초사하였다.

  • 납채서

    납채서

  • 사주단자

    사주단자

원형스토리

연길(涓吉)

김택룡, “점쟁이에게 물어 둘째 딸 혼인 날짜를 확정하다”

신부 집에서 신랑의 사주단자를 받으면 신부 집에서는 혼인하기 좋은날을 받아 택일단자(擇日單子)를 보낸다. 이를 연길(涓吉)이라고 한다. 단자에는 ‘납채서(納采書)를 받아 아주 다행한 일입니다. 혼인날을 받아 보내드리니 옷의 치수를 보내주십시오. 예를 다 갖추지 못하였으니 굽어 살피소서’라는 내용이 담긴다.

신랑의 사주단자를 받은 김택룡은 혼례 날짜를 정하느라 고심했다. 좋은날 혼례를 치르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이기에 혼례 날을 쉽게 정하지 못했다. 김택룡은 딸과 사위의 사주를 따져보고 고르고 골라 날짜를 정하였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김택룡은 혹시라도 더 좋은 날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3월 16일 소경 점쟁이 연수(連守)에게 편지를 썼다. 점쟁이 연수로부터 혼례일은 1616년 3월 27일이 길하다고 답이 왔다. 그 답에 김택룡은 자신이 정했던 날짜와 맞아 떨어져서 매우 기뻐했다. 김택룡은 택일단자를 신랑 집에 보내기에 앞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혼례일을 알려 빠짐없이 참석해 축하하길 바랐다. 부석사에 공부하러 간 아들 김각(金珏)에게 누이가 시집을 가니 그 날은 내려오라고 기별했다.

그러나 그만 가족들에게 기별하느라 혼례일을 정하고 5일이 되도록 신랑 집에 택일단자를 보내지 않았다. 이에 신랑의 백부는 지인을 통해 혼인 날짜가 궁금하다고 전하자 김택룡은 곧장 연길(涓吉)하였고 택일단자를 받은 신랑의 아버지 권준신은 ‘그 날’ 혼례를 치르겠다고 전했다.

  • 연길편지

    연길편지

원형스토리

납폐(納幣)

김택룡, “딸의 혼서(婚書)를 받다”

납패(納幣)는 혼인 전날 신랑의 친구나 혹은 신랑 집의 하인이 신부에게 혼함(婚函)보내는 것을 말한다. 혼함에는 혼인문서인 예장지(禮狀紙)와 신부가 시댁으로 보내야 할 패백(幣帛)을 적은 물목단자를 넣고, 홍색과 청색 옷감을 넣는다. 그리고 이삭이 달린 기장과 조, 누에고치를 삶아 푼 풀솜, 오색실을 넣은 다음 한지를 다시 덮고 싸리나무와 수숫대를 사용하여 혼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붉은 보자기로 감싸고 근봉(謹封)이라고 쓴다.

혼례가 끝나고 신부가 시집으로 갈 때 혼함에 들어 있는 예장지와 준비된 폐백을 가지고 간다.

1616년 3월 27일 둘째 딸이 시집가는 날이다. 보통 납패는 혼례 전날 이루어지는데 김택룡은 혼례가 치러지는 날 신랑이 도착하기 몇 시간 전에 혼서와 혼함을 받았다.

  • 납패서

    납패서

원형스토리

친영(親迎)

김택룡, “혼례비용 마련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

1616년 3월 20일, 둘째 딸의 혼례일이 딱 일주일 남았다. 그런데 김택룡은 아직 혼례 비용을 다 마련하지 못했다. 김택룡은 먼저 쌀을 내다 팔았다. 그리고 예안에 사는 아들 김숙과 영천에 사는 친구에게도 편지를 보내 혼례비용을 부탁했다. 또 청송부사 박이장(朴而章)에게도 편지를 써서 혼인에 쓸 재물을 청했다. 혼례날짜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1616년 3월 24일, 사흘 후면 혼례를 치러야 하는데 여태껏 혼례 비용이 부족하였다. 마음이 불안해진 김택룡은 영천군수와 예안군수에게 편지를 보내 꿩과 재물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군수들이 휴일이라 출근하지 않아 그마저도 구하지 못했다.

  • 합근배

    합근배

김택룡, “드디어 둘째딸의 혼례식을 치르다”

친영(親迎)은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를 맞아 오는 것을 말한다. 친영은 크게 초행(醋行),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합근례(合?禮), 신방(新房), 동방례(東床禮)로 나눈다. 초행은 신랑과 그 일행이 신부집으로 가는 것으로서 초행걸음이라고도 한다. 신랑은 초행에 앞서 아버지와 사당에 가서 고하고 아버지나 백부와 함께 신부 집으로 향한다. 신부집 근처에 도착하면 신부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신부 측에서 제공하는 음식으로 간단히 요기하고 사모관대(紗帽冠帶)를 갖추어 예식을 준비한다. 신랑이 신부 집에 들어가 처음으로 행하는 의례는 전안례로 신부의 혼주에게 기러기를 전한다. 기러기는 부부가 함께 정조를 지키며 해로하는 동물로 부부의 의리를 지키겠다는 서약의 뜻이다. 교배례는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마주 보고 얼굴을 확인하는 의례이다. 신랑은 동편에 신부는 서편에 서고 신부가 먼저 두 번 절하면, 신랑이 한 번 절한다. 다시 신부가 두 번 절하고 신랑이 한 번 절하여 첫인사를 나눈다. 합근례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술잔을 나누는 의식이다. 신부가 입을 댄 술잔을 신랑이 받아서 마시고, 다시 신랑이 입을 댄 술잔을 신부가 받아서 입을 대고 내려놓는다. 이렇게 두 번 반복한 후 세 번 째 잔은 서로 교환하여 마신다. 이는 신랑과 신부가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다. 이로써 혼례식의 중요한 절차는 끝이 난다. 예식을 마치면 신부는 안방으로 신랑은 가족들이 있는 사랑채로 가서 관대를 벗는다. 신랑측 하객들은 신부측에서 제공하는 큰 상을 받지만, 음식에 손을 대고 그대로 물린다. 그 음식은 그대로 광주리에 담아서 신랑집으로 보내진다. 신랑의 가족들은 예식을 마치면 본가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날 밤 신방을 꾸미고 신랑 신부가 한 방에 들어간다. 신랑이 신부의 예복과 족두리를 벗기고, 촛불을 옷자락으로 끄면 모두 물러난다. 이를 ‘신방 엿보기’라고 한다. 첫날밤을 치르고 나면 장인 장모에게 인사한다. 신랑은 신부집에서 사흘 또는 일주일을 머무는데 경우에 따라 몇 달을 머무는 경우도 있다. 둘째 날에는 ‘동상례(東床禮)’를 한다. 신랑 또래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신랑의 지혜와 학식을 떠보기도 하며, 트집을 잡는데 대답을 잘못하면 신랑의 다리를 끈으로 묶어 매달고 방망이나 마른 명태로 발바닥을 때리며 ‘신랑다루기’를 한다.

1616년 3월 27일 김택룡 둘째 딸이 시집가는 날이다. 김택룡은 신랑 맞이할 준비로 아침부터 분주하다. 오후 세시쯤 신랑은 아버지와 백부와 함께 도착했다. 곧 예식이 시작되었다. 김택룡이 온 힘을 다해 정성껏 준비한 혼례청(婚禮廳)을 마주하고 둘째딸과 사위가 마주 섰다. 예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신랑과 신부는 술을 나누어 마시는 합근례까지 마쳤다. 김택룡은 사위와 신랑가족들에게 예를 깆추어 음식을 베풀었다. 저녁이 되어 신랑 집안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김택룡의 가족과 친지들이 모두 남아 밤 늦도록 좋은날을 함께 즐겼다.

  • 목안

    목안

  • 동상례

    동상례

원형스토리1 원형스토리2

신행(新行)

김택룡, “딸 시집으로 보내야 하는데….”

신행(新行)은 신부를 시집으로 맞아오는 의례로 우귀(于歸)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면 혼례 당일에 가기도 하고, 며칠 혹은 몇 달 만에, 때에 따라서는 몇 년 만에 우귀 하는 경우도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 하여 사위가 처가에서 생활하며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신행하였다. 조선시대 주자가례 도입으로 신랑 집에서 예식을 진행하고 신부는 그날부터 시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서류부가혼의 풍속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1616년 3월 29일, 사위 권근오가 본가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그런데 비가 많이 내려 그만두었는데, 저녁에 권근오의 아버지로부터 빨리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는다. 이에 김택룡은 사위를 내일 아침 일찍 갈 것이라고 답신을 보낸다.

사위를 맞은 지 3일 만에 사위는 본가로 돌아갔다. 이제 곧 둘째 딸도 시집으로 보내야 하는데…. 김택룡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서운하였다.

  • 신행

    김홍도<신행>

원형스토리

회혼례(回婚禮)

1581년 1월 25일, 홍직필과 전주이씨 부인의 회혼례

회혼례(回婚禮)는 부부로 60년을 행복하게 살아왔음을 기리며, 남은 삶도 백년해로(百年偕老) 할 것을 염원하는 축하잔치다. 조선시대 평균수명은 44세, 27명의 국왕 평균 수명은 46.1세에 불과했다. 예순을 사는 것만으로도 ‘환갑(還甲)’이라 하여 큰 경사로 여기고 잔치를 벌였던 조선사회에서 반백 년 이상을 해로(偕老) 한 부부를 보기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회혼을 맞이한 부부는 가족과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렀으며 나라로부터 큰 축하를 받았다.

회혼례는 노부부가 혼례의 복장을 갖추고 혼례의식을 다시 하며 자손들로부터 장수를 바라는 절과 술잔을 받는 헌수(獻壽)로 이루어진다. 헌수는 장남부터 올리며 그 다음은 출가한 딸의 내외가 하고, 이어서 친척들이나 하객들이 축배를 올리며 시(詩)를 지어서 바치기도 한다.

1851년 1월 25일 서찬규는 그의 스승 홍직필 선생의 회혼례를 맞아 축하 편지를 올린다. 홍직필 선생은 1790년 16세에 전주이씨 이연(李?)의 딸과 혼인하여 부부의 연을 맺고 60년을 함께했다. 한 달 뒤 1851년 2월 25일 스승은 제자 서찬규의 축하에 감사의 답장과 함께 자신이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며 나라의 큰 공을 세우거나 학덕이 높은 대신에게 하사하는 궤장(의자와 지팡이)을 받았음을 알려왔다.

그러나 회혼례를 치르고 1년 뒤 1852년 7월 17일 홍직필 선생은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 김홍도 <담와 홍계희 평생도(淡窩 洪啓禧 平生圖) /> 병풍 중 회혼식 부분도

    김홍도 <담와 홍계희 평생도(淡窩 洪啓禧 平生圖)> 병풍 중 회혼식 부분도
    김홍도 <담와 홍계희 평생도(淡窩 洪啓禧 平生圖)> 병풍 중 회혼식 비단에 채색 77.0×38.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회혼례도(回婚禮圖) /> 중 헌수(獻壽) 부분도

    <회혼례도(回婚禮圖)> 중 헌수(獻壽) 부분도
    작가 미상 <회혼례도(回婚禮圖)> 비단에 채색 37.9x24.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27년 3월 17일, 김노헌 공과 부인 전주유씨 회혼례

이 사진은 1927년 3월 17일 광산김씨 예안파 15대 종손 김노헌 공과 전주유씨(정재 유치명의 손녀)의 회혼례를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이다. 김노헌 공 부부는 회혼례 당시 80세의 나이로 자손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 1927년 3월 17일, 김노헌 공과 부인 전주유씨 회혼례

김노헌의 맏딸 김금옥은 <회혼경축가>에서 “정묘년 봄에 봉숭아꽃과 난초가 피어 만발하고 나비와 벌들이 꽃을 찾아 어지러이 날아다니고, 봄바람에 버들가지는 흔들리며, 강남 갔던 제비도 옛날 집을 찾아오는, 때 좋은 날”이라고 부모님의 회혼을 축하하였다.

원형스토리1 원형스토리2 [참고] (류세택 부부 회혼례 축사) 1784년 참고자료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