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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노랫말과 슬픈 과거를 지닌 여인, 시희(詩姬) 얼현을 만나다


1625년 1월, 추운 겨울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된 나그네 신세의 김령에게 아침 일찍 지인들이 찾아왔다. 김령은 놀랍고 기쁜 마음으로 회포를 풀고, 날이 저물 때까지 그들과 함께 했는데, 무리 중에는 김령을 찾아온 시희(詩姬) 얼현(乻玄)이 있었다.

그녀는 천성(川城)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여종이었다. 20년 전에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서울에 들어와서 어떤 자의 첩이 되었는데, 미모가 시들자 이별을 당했다. 이때 와서 시권(詩卷)을 가지고 김령을 찾아왔는데, 그 시어(詩語)가 매우 맑고 아름다웠다. 창석(蒼石) 이준(李埈) 어른이 때마침 왔다가 그 시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것을 소매 속에 넣어서 돌아갔다.

저녁 때 손님들과 작별하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지만, 김령은 며칠 후 남쪽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향인 예안에서 진봉리(進奉吏) 조경택(曺景澤)이 서울에 올라오게 되어, 그 편에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본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안현이 요역과 초군(抄軍) 문제로 꽤나 소란스러운 것이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 출전 : 연행일기계본(燕行日記啓本)
  • 저자 : 이기헌(李基憲)
  • 주제 : 외국관료와의 만남
  • 시기 : 1801-12-29~
  • 장소 : 중국 하북성
  • 일기분류 : 사행일기
  • 인물 : 이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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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권숯돌
권숯돌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방송작가 일을 하다가
이십대 후반에 심리학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와서는 지금까지 눌러살고 있다.
글과 그림으로 소통하는 일을 좋아한다.
2019년 다음웹툰에 연재된 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의 일대기 <희순할미> 스토리를 썼다.
“아름다운 노랫말과 슬픈 과거를 지닌 여인, 시희(詩姬) 얼현을 만나다”

김령, 계암일록, 1625-01-03

1625년 1월, 추운 겨울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된 나그네 신세의 김령에게 아침 일찍 지인들이 찾아왔다. 김령은 놀랍고 기쁜 마음으로 회포를 풀고, 날이 저물 때까지 그들과 함께 했는데, 무리 중에는 김령을 찾아온 시희(詩姬) 얼현(乻玄)이 있었다.
그녀는 천성(川城)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여종이었다. 20년 전에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서울에 들어와서 어떤 자의 첩이 되었는데, 미모가 시들자 이별을 당했다. 이때 와서 시권(詩卷)을 가지고 김령을 찾아왔는데, 그 시어(詩語)가 매우 맑고 아름다웠다. 창석(蒼石) 이준(李埈) 어른이 때마침 왔다가 그 시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것을 소매 속에 넣어서 돌아갔다.
저녁 때 손님들과 작별하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지만, 김령은 며칠 후 남쪽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향인 예안에서 진봉리(進奉吏) 조경택(曺景澤)이 서울에 올라오게 되어, 그 편에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본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안현이 요역과 초군(抄軍) 문제로 꽤나 소란스러운 것이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딸을 위해 모인 일곱 명의 의녀들”

금난수, 성재일기, 1588-03-01

엿새 전, 궁에서 왕자 의안군(義安君)이 역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왕의 총애를 한 몸에 입는 왕자였으나 노약자에게 더욱 치명적인 역병에 걸린 이상 왕의 총애도 병마를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여염에서는 아직 병이 유행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점차 병마는 도성을 조용히 휩쓸었다. 금난수의 서울 집에도 막내딸 종향(從香)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종향 역시도 이번 역병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왕자의 사망 때문에 왕도 창경궁으로 이어한 상황에서, 금난수의 힘으로 딸을 살려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왕자도 살려내지 못한 터였다.
하지만 금난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금난수는 의녀 일곱 명을 불러 딸아이를 위해 모든 조치를 다 취해달라고 청하였다. 의녀들은 종향의 맥을 짚어보고 나서, 자신들끼리 의논하였다. 당장에 뜸을 뜨거나 하는 직접적인 조치보다는 일단 약을 먹으면서 몸의 기를 보하는 것이 역병을 이겨내는 최선의 방법이라 결론이 지어졌다. 의녀들은 여러 약재를 사용하여 여러 날 동안 종향에게 먹일 환약을 지어주었다.
약 덕분인지 종향은 이레 만에 집 밖 출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하지만 금난수는 마음을 놓지 않고 딸과 아들들을 인구밀집도가 높아 위험한 도성에서 먼 곳으로 옮겨가도록 하였다. 금난수는 딸과 네 아들들을 모두 데리고 두모포(豆毛浦, 현 성동구 옥수동 근처)로 갔다. 두모포 강변에는 김 사포(司圃)의 정자가 있었다. 금난수는 아이들을 일단 이곳에 맡겨두었다. 사흘 뒤, 금난수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는지 정자로 와서, 아들들에게 여동생을 예안에 있는 집으로 데려다 주라고 하였다. 몸이 약해서 먼 길을 가기 힘든 막내아들 금각만 빼고, 위의 세 아들은 종향을 데리고 예안으로 내려가는 배를 탔다.

“옛 기생 조씨의 시 두루마리에 쓰인 유명 시인의 시를 읽다”

박권, 북정일기, 1712-04-05

1712년 4월 5일, 박권(朴權)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함관령을 넘었다. 그런데 고갯길이 높고 가파른 것이 철령보다 훨씬 더했다. 도중에 교체되어 이동하는 길주부사 박내경(朴來卿)을 만나 매우 기뻤다. 함원참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은 홍원현에서 유숙하였다. 이 날은 70리를 갔다. 객사의 벽에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과 택당(澤堂) 이식(李植) 등 여러 사람의 천도(穿島)를 읊은 시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천도는 홍원에서 동쪽으로 5리쯤 가면 있다고 하여 즉시 가마를 타고 갔다.
이른바 천도는 포구 가에 긴 둑이 있어 가로로 길게 뻗어 있었다. 그런데 둑 가운데 굴이 하나 있었으며, 그 굴은 사방이 다 암석이었다. 한편으로 맷돌에 구멍이 패인 듯하여 대문과 같았으며, 높이는 30자, 폭은 40자 정도였다. 바닷물이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이 참으로 특이한 구경거리였다. 조금 남쪽으로 대가 하나 있는데 평평하고 넓어서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다. 앞으로는 큰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는 12개의 섬들이 고리처럼 둘러있다. 그 중에 가장 기이하게 생긴 섬이 주도(珠島)라고 하였다. 시를 읊으며 오래 즐기고 돌아와서 지천 황정욱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어떤 기생이 시 두루마리[詩輔] 4권을 올리면서 자기는 옛 기생 조씨의 손녀라고 하였다. 대개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광해군 때 상소로 인해 북쪽에 유배되었는데, 기생 조씨가 술을 갖고 와서 위로하여, 이때 말하고 침묵하는 사이에 시대를 비난하는 뜻이 있으니, 윤선도가 5언시 1절을 지어 주었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에 또한 7언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사람이 그 시에 화답하였다. 박권도 재주 없음을 잊고 그 시 두루마리 끝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조선시대의 여악(女樂)”

허난설헌 <작약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여악은 고려 때부터 그 제도가 정비되어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 춤을 하는 역을 지는 존재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관에 소속된 공천(公賤)으로서, 기역(妓役)에 종사하다가 50세가 되어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간혹 그 공을 인정받아 천인 신분이 면제되는 사례도 있었다. 이들은 서울의 관과 외방에 소속되어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여기 150인, 연화대 10인, 여의(女醫) 70인을 3년마다 여러 읍의 연소한 비자(婢子)에서 뽑아 올린다. 라고 하여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서울의 관에 소속된 여악은 경기(京妓)라고 하여, 외방에 소속된 여기들 중 재능과 기예가 뛰어난 자들 중 선발된 자들로서 태평관 근처에 거주하며 장악원에서 악기와 가무를 익혔다. 국가에서는 봉족(俸足)을 대어 생활을 지원하였다. 여악은 여름과 겨울 중 6개월을 제외하고 2월~4월, 8월~10월까지 윤일제로 교육을 받았으며, 악기로는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장구, 아쟁, 해금, 피리, 대금, 소금 등을 익혔는데, 이 중 한 가지를 전공으로 택하여 장악원의 악사들에게 배우게 하고 이 중 우수한 사람은 다른 악기를 한 가지 더 배우게 하였다. 그러나 가곡과 당비파는 필수적으로 이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배움이 늦거나 태만한 자는 벌을 주거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여악들이 부역한 행사는 회례연, 양로연, 사신연 등의 공식적 연향과 왕실의 일상적 연향, 변방지역에서의 연향, 궁중하례 및 어가를 환영하는 노상의 교방가요 등 다양하였다. 그 외에도 군주가 신하를 위해 여는 연향 등에도 봉사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1623) 이후에는 여악을 더 이상 장악원에 소속하게 하지 않고, 외방 여기만 존속시켜 필요할 때마다 지방 감영에서 불러 올려 썼다. 이를 선상기라고 하였는데, 평안도와 경상도 감영에서 가장 많이 선발되었다. 또한 궁중 연향에서는 선상기와 함께 의녀, 침선비도 함께 봉사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 이후에는 감영에 소속된 여악을 사적인 연향에 동원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양반이 여악이 거주하는 기방에 찾아가는 일은 원칙적으로 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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