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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이저우 이야기 (3) ]

자연과 인문의 일체, 옛 다리

임세권



천년을 버티는 아름다운 다리들

사람들은 다리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가? 어린 시절의 냇물을 건너던 섶다리를 생각하면서 함께 놀던 동무들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멀리 외국 여행에서 만난 멋진 현수교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리는 물을 건너는 것 이외에 다른 기능은 없다.

내가 다리에 대해 물을 건너는 것 이외에 다른 기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20여 년 전 중국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壮族自治區)의 북부 산지의 좡족 마을에 갔을 때였다. 좡족 마을에는 풍우교(風雨橋)라는 독특한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는 다리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다시 그 위에 지붕을 덮어 간단한 목조건물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또 조금 규모가 큰 다리는 교각이 있는 곳에 탑과 같은 형태의 삼층 내외의 고층 누각을 세워서 멀리서 보면 여러 개의 고층 누각이 줄을 지어 서 있는 듯하다. 다리는 그냥 물을 건너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임을 할 수 있고 또 길을 가다가 쉬기도 하고 비를 피할 수 있는 큰 건축물이고 훌륭한 예술품이었다.

한 참 뒤에 후이저우 지역을 다니면서 나는 또 다른 아름다운 다리들을 만나게 되었다. 후이저우 지역은 대체로 툰시를 중심으로 한 황산시의 신안강(新安江)이나 쟝시성 우위엔현을 관통하는 러안강(乐安江) 등 큰 강을 따라 마을들이 분포되어 있다. 강은 폭이 넓은 큰 줄기와 거기서 갈라지는 수많은 지류들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본류와 지류는 모두 마을과 마을의 경계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마을에서 마을로 가려면 대부분 다리를 건너야 한다. 큰 강에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무리 큰 홍수가 들어도 무너지지 않는 크고 튼튼하고 또 아름답기까지 한 석교가 놓이고 작은 지류에는 조그만 석교 또는 널판을 이용한 간단한 다리들도 볼 수 있다.


갈라진 두 세계를 이어주는 무지개

후이저우의 다리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큰 강을 가로지르는 웅장한 느낌을 주는 돌다리들이다. 이 대형 석교들은 대부분 교각과 교각이 아치형을 이루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여러 개의 아치형 수문을 연결시켜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다리를 중국인들은 공교(拱橋)라고 부른다. ‘공(拱)’이란 말은 두 팔을 올려 머리위에서 마주 댄 모양을 말하는데 아치형 또는 무지개 모양을 말한다. ‘공교’를 우리말로 하면 ‘무지개다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공교를 멀리서 보면 아치형 터널이 강물에 반사되어 아래위로 긴 타원의 고리들이 길게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인다. 이 타원형 터널 사이를 이리저리 통과하여 다니는 고깃배들은 무지개다리와 함께 훌륭한 설치미술 작품이 된다.


황산시 툰시 시내에 있는 둔계교 무지개다리. 길게 연결된 타원형 고리가 강 양쪽에 걸려 아름다운 그림을 만든다.


공교는 돌로 쌓아 만든 것이므로 석재가 많은 산지 지역에 많다. 강이 큰 경우 다리가 길어지므로 아치형을 만드는 교각의 수가 많아지며 당연히 아치도 많아진다. 이런 다리를 다공교(多拱橋)라고 한다. 후이저우 지역에서 아치가 가장 많은 것은 셔현(歙縣) 고성(古城)의 서쪽에 있는 태평교(太平橋)다. 이 다리는 모두 17개의 교각이 만든 16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는 장대한 다리다. 17개의 교각이라고 하지만 양쪽 끝의 땅에 설치된 것까지 말하므로 우리가 말하는 교각은 실제 15개라 할 수 있다.

다리를 받치는 교각은 상류쪽을 뱃머리 형태로 만들어 물이 교각에 부딪칠 경우 저항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이 교각들을 옆에서 보면 마치 여러 척의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우위엔현 채홍교의 교각을 위에서 내려다 본 모양.


등봉교로 오르는 계단과 석패방. 가운데 두 줄과 경사면은 수레의 이동을 위한 것이다. 


다리는 교각의 높이가 강의 제방보다 높게 세워져 있으므로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어서 다리를 건너려면 긴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 위에는 다리로 올라가는 대문의 구실을 하는 석패방이 있다. 석패방 위에는 다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살펴보면 다리가 단순히 강을 건너는 시설물을 넘어서서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이며 예술품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건축물은 당연히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따라서 큰 강을 건너는 규모가 큰 다리는 적어도 정부 차원에서 세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후이저우는 중국의 대표적인 상인의 고장이다. 이들 상인들이 자기 고향 마을만을 위해서 또는 자기가 속한 문중만을 위해서 돈을 쓴 것이 아님을 다리의 건립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황산시 슈닝현 치윈산의 등봉교(登封橋)는 1587년 후이저우 정부에서 세운 것이다. 이 다리는 처음 교동교(橋東橋)로 불렸는데 명나라 신종 황제가 치윈산을 성산(聖山)으로 봉하여 등봉교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후 이 다리는 여러 차례의 홍수로 파손되었으며 1788년 홍수때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 여기서 멀리 떨어진 이현에 사는 상인 후셰쯔(胡學梓)가 단독으로 출자하여 중건하였다. 후셰쯔는 다리의 중건공사를 시작한 후 2년 만에 병으로 죽었는데, 공사는 아직 절반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웅장한 모습으로 완공을 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후이저우의 상인들이 자신의 부를 공적인 자산으로서 인식하고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황산시 슈닝현 치윈산 등봉교


물위의 휴식처 랑교(廊橋)

큰 강에서 웅장한 모습의 다공교(多孔橋)를 볼 수 있다면, 마을 안이나 비교적 작은 계류에서는 여러 개의 아치를 가졌으면서도 다리 위에 벽과 지붕을 설치하여 건물 모양을 갖춘 다리를 볼 수 있다. 또 비교적 폭이 넓은 강에 놓인 랑교(廊橋)는 공교 즉 무지개다리가 아니고 교각만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이 있는 건물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은 쟝시성 우위엔현에 있는 채홍교(彩虹橋)다. 이 다리는 후이저우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히는데 ‘채홍’은 무지개라는 뜻이다. 그런데 다리 이름은 무지개지만 이 다리의 교각 부분은 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그리고 있지 않다.

이런 형태의 다리를 랑교(廊橋)라고 부른다. ‘랑(廊)’이란 지붕이 있는 복도를 뜻한다. 여러 개의 연결된 아치가 물에 반영되어 있고 아치 위로 아름다운 기와지붕과 갖가지 모양의 창문을 가진 건축물은 그대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비오는 날의 채홍교


랑교의 위는 일종의 긴 복도다. 어떤 것은 양쪽에 벽체를 가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목조 난간과 기둥으로만 구성된 것도 있다. 채홍교처럼 길이가 긴 것은 중심부에만 사면에 벽체를 가진 건물을 짓기도 했다. 다리 위 긴 복도형 건물 속으로 들어가면 양쪽에 미인고(美人靠)라고 부르는 긴 의자가 있어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채홍교의 교각은 다른 부분보다 양 벽쪽으로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하여 사람들이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눌 수도 있다. 이러한 랑교의 특수한 구조는 다리의 기능을 물을 건너는 단순한 기능에서 마을 사람들의 휴식장소나 회합장소로 이용할 수 있고 또 햇볕과 비를 가릴 수 있는 유용한 기능도 가지고 있다. 또 다리가 강 양쪽의 서로 다른 마을을 연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두 마을 사람들이 다리에서 만나 서로의 갈등을 풀기도 한다. 요컨대 다리는 지금 중국인들이 화두로 내걸고 있는 허시에(和谐) 즉 ‘조화와 융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라 할 만하다.

랑교로서 아름다운 형태를 띤 것들은 대체로 마을 안에 있다. 대표적 랑교는 황산시 셔현 베이안 마을의 북계교(北溪橋)를 들 수 있다. 이 다리는 양쪽에 긴 벽체를 세우고 벽을 따라 미인고를 설치하였다. 다리의 중간에는 부처님을 모셨고 그 맞은 편 벽에 둥근 원형 창을 내서 밖으로 아름다운 강과 강변의 숲을 내다볼 수 있다. 이 원형 창 앞에는 촛불을 켜고 창밖의 경치를 보면서 소원을 빌도록 단을 설치하였는데 타다 남은 붉은 초들이 서 있어서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다리에서는 단순히 휴식하는 것뿐 아니라 찻잎 같은 농산물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창가의 미인고에서는 거래를 마친 상인과 물건을 산 사람들이 물건 값을 주고받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또 하나 이 다리의 아름다움은 창문에서 찾을 수 있다. 동서 양쪽에 설치된 장벽의 동벽에는 나뭇잎, 호리병, 화병 등의 형태로 창을 냈고 서벽에는 다양한 형태의 살창을 단 사각 창을 냈다. 나뭇잎은 낙엽귀근(落葉歸根) 즉 나무에서 떨어진 잎은 썩어서 뿌리로 내려가고 그것이 비료가 되어 다시 나무를 살찌운다는 뜻이다. 집의 재물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집안을 계속 크게 융성시킨다는 의미이다. 호리병은 호로(葫蘆)라고 쓰는데 이때의 ‘로(蘆)’가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는 만사여의(萬事如意)의 ‘여(如)’와 중국어 발음이 같아 둘 다 ‘루’로 읽는다. 그래서 호리병은 ‘뜻대로 된다’는 뜻을 의미하는 상징이 되었다. 꽃을 꽂는 화병(花甁)도 ‘병(甁)’의 발음이 ‘핑’ 즉 평안(平安)의 ‘평(平)’과 같아서 또한 평안의 상징이다. 이러한 도형은 후이저우의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베이안 마을 북계교의 창들은 후이저우 지역의 모든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창의 형태가 망라되어 있어 마치 후이저우 창을 한 군데 모아 놓은 듯하다. 밖에서 다리를 보면 창문들은 다리를 꾸며주는 아름다운 장식품처럼 보이며 안에서 보면 갖가지 형태의 창을 통해 보이는 경치가 치밀하게 계산해서 구성된 화폭처럼 보인다.


베이안 마을의 북계교, 다양한 형태의 창문이 돋보인다.


북계교 내부, 왼쪽에 조금 튀어나온 부분이 부처를 모신 불감이고 오른쪽 둥근 창문 밑에 촛불을 켜는 단이 있다.


북계교의 낙엽과 호리병 모양 창문


북계교 원형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풍경이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북계교 미인고에 앉아 돈을 주고 받는 상인들


랑교의 장랑 속에는 또 이곳 사람들이 믿는 신상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대부분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물의 신으로 신앙되는 우왕(禹王) 또는 용왕(龍王)을 모시거나 다리를 창건한 인물을 모신 경우도 있다. 관음보살이 모셔진 다리로는 셔현 탕모 마을의 고양교(高陽橋)가 있고 우왕을 모신 다리로는 우위엔 쓰시 마을의 통제교(通濟橋)와 칭화진의 채홍교를 들 수 있다. 통제교에는 우왕 외에 여래상을 모셨고 채홍교에는 다리를 창건한 후지셩(胡濟生)을 함께 모시기도 했다.


우왕(禹王)과 다리를 창건한 후지셩(胡濟生)을 모신 채홍교 위의 감실


우위엔현 쓰시 마을 통제교의 여래상 돌기둥


황산시 슈닝현의 공북교(拱北橋)


산간 계곡의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들

하천의 폭이 좁고 비가 많이 올 경우 많은 물이 한꺼번에 내려와 물의 통로를 넓게 확보해야 하는 경우 하천 중간에 교각을 설치하거나 하천 폭을 좁히는 설비를 할 수 없다. 이 경우는 아치를 하천 폭과 같게 하거나 더 넓게 하여 다리가 물이 빠져나가는데 걸림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따라서 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지름이 넓게 하여 하천 양쪽에 다리가 걸리도록 만든다. 이렇게 아치가 하나만 있는 다리를 단공교(單拱橋)라고 한다.

단공교로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우위엔현 홍관(虹關) 마을의 통진교(通津橋)다. 길이 16미터에 이르는 이 다리의 밑에 서면 다리의 무지개 구멍을 통해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계류 넘어로 멀리 마을이 보이는 풍경이 그대로 한 폭의 수채화다. 여름에 이곳을 찾으면 전국에서 몰려든 청년 화가들이 화판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황산시 이현의 홍춘 마을에 가면 마을 남쪽의 난후(南湖) 호수에 놓인 작고 아름다운 돌다리 화교(華橋)를 건너 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영화 와호장룡의 첫 장면에 등장해서 유명해진 이 다리는 호수의 수면 위에서 하늘로 솟구쳐 올라온 작은 무지개 같다.

후이저우에서 만나는 다리는 그냥 다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풍광을 더 돋보이게 하는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고 물을 건너는 단순한 기능이 아닌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만나게 해주고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다. 후이저우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나타나기도 하며 사람과 신을 만나게 해주는 신성한 공간이기도 하다. 후이저우의 다리는 그대로 자연과 인문의 합일된 존재다.


우위엔현 홍관촌의 통진교(通津橋) 무지개다리


영화 와호장룡으로 유명한 홍춘 마을의 화교(華橋)


슈닝현 공북교를 건너는 마을 사람




작가소개

임세권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관장)
임세권
1948년 생.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안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과 동북아시아 선사암각화와 고대 금석문 연구자로 다양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1992년 2월부터 1년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암각화 유적 조사, 이후 2012년까지 러시아 몽골 중국 등 동북아시아 암각화 현장 조사, 1999년 8월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남서부 암각화 유적 조사. 2007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후이저우 지역 전통마을 조사 및 촬영 작업을 진행중이다. 2013년 9월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개관하고,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
<중국 변방을 가다>(신서원), <한국의 암각화>(대원사),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 광개토왕비>(한국국학진흥원) 등이 있다.
“ 폭포수에 술잔을 띄워 보내며, 날이 저물어도 일어날 맘 없네 ”

송병선, 두류산기,
879-08-05 ~
1879년 8월 5일, 지리산 유람 중이던 송병선은 폭포를 구경하였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기도 하고 못을 이루기도 했는데 제각기 형세에 따라 기이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절벽을 부여잡고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몇 리를 올라가니 큰 반석 삼 층이 서로 포개져 누워 있었는데, 색이 모두 희고 깨끗했으며 물이 그 위로 흘러가니 마치 거꾸로 쏟아지는 폭포 같았다. 꼭대기에는 작은 소가 있었는데 맑고 얕아서 좋아할 만하였고 그 옆에는 술잔을 띄어서 놀이를 할 수 있게 바위를 굽이굽이 파 놓았다. 대저 이 골짝의 샘과 바위는 비록 기이하고 장대한 모양은 없지만 매우 으슥한 곳에 있어서 좋아할 만하니, 마치 고고한 사람과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 숲에 숨어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것과 같았다. 여러 날 산행을 하여도 볼만한 수석이 없었는데 여기에 이르니 색다른 의취(意趣)가 생겨났다. 술을 몇 차례 돌려 마시고 소요하니 날이 저물었는데도 오히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 청량산 열 두 봉우리의 이름 - 크고 뛰어난 사람과 그의 세계를 빗대다 ”

김중청, 유청량산기,
1601-11-03 ~
1601년 11월 3일, 청량산 유람중이던 김중청 일행은 청량산 산봉우리들을 둘러보았다. 무릇 청량산 봉우리 가운데는 장인(丈人)이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는 사람에 빗대어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향로(香爐), 연적(硯滴), 탁필(卓筆), 금탑(金塔)이라 한 것들은 장인이 좌우에 늘 두는 물건이고, 자란(紫鸞), 선학(仙鶴), 연화(蓮花)라 한 것들은 장인에게 사랑받는 물건이다. 축융(祝融)은 곧 장인의 손님이요, 자소(紫霄)는 곧 장인의 하늘이며, 경일(擎日)은 곧 장인이 가진 뜻을 말한 것이고 혹은 장인이 하는 일을 말한 것이다. 나누어 이름을 붙인 것이 열두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해도, 통틀어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장인이 있을 뿐이다. ‘장(丈)’이라고 하는 것은 크다는 뜻이다. 사람이 크다는 것은 곧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지극한 경지를 말한다. 사람이 크다는 것을 이 산에 빗대어 말해보면, 이 산의 단정하고 중후하며 맑고 깨끗함이 그 부류들 가운데서 뛰어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이름을 지은 사람이 이 산을 사랑하는 것은, 산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 빗대어서 좋아하였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 탁족, 거문고, 국화잎을 띄운 술잔, 어지러운 춤 - 한창인 가을에 취하다 ”

이정구, 유삼각산기,
1603-09-03 ~ 1603-09-04
1603년 9월 3일, 가을은 한창이고 물소리는 콸콸 흐르며 기암 괴석과 동굴은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큰 소나무가 하늘을 가렸는데, 푸른빛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이정구는 일행과 함께 발을 계곡 물에 담근 채 웃옷을 벗고 돌 위에 앉았다.
취사장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술과 안주를 풍성하게 준비하였다. 어떤 이들은 술잔을 물에 띄워서 마시기 내기를 하고, 어떤 이는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았다. 자제가 단풍나무 가지를 꺾어서 머리에 꽂았다. 이정구도 국화잎을 따서 술잔 위에 띄웠다. 취하니 기분이 좋았다. 박수도 치고 발을 구르기도 하였다.

“ 산길을 걸으며 시를 짓다 - 선비들의 소백산 유람 ”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2-04-21 ~ 1612-04-27
1612년 4월 21일, 김택룡은 아들 대평을 김의성(金義城)에게 보내 안부를 묻고 또 유산(遊山)할 것에 대해 묻도록 했다. 의성은 수령의 발인 때문에 군(郡) 내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는, 택룡을 만나러 그의 집에 들렀다. 그리고 택룡이 권한 술에 취하여 저녁에 돌아갔다.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원장(院長) 안응일(安應一)이 의성에게 편지를 보내 소백산에 놀러가자고 서로 약속했음을 듣고는, 택룡 자신도 함께 등산하여 숙원을 풀자는 내용의 편지를 안응일에게 보냈다. 다음 날 4월 22일, 아침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보낸 안응일의 답장이 택룡에게 도착했다. 상(尙)이 동복(僮僕)과 노새를 구하여 택룡에게 보내주면서, 또 저녁에 서원에 와서 묵을 것이니 내일 함께 등산하자고 기별하였다. 택룡은 상에게 감사하다는 답장을 보냈다. 저녁에 백운동서원에서 사람과 말을 택룡에게 보내와서, 택룡은 아들 대생 · 대평과 함께 갔다. 그리고 바로 의성의 집으로 가서 그와 함께 서원으로 갔다. 서원에는 안응일과 곽률(郭㟳) ·감관(監官) 김섭(金涉)이 와 있었다. 모두 저녁을 먹고 곁방에 모여 묵었다.

“ 죽은 소나무 앞에서, 그 길을 함께 했던 망자들을 떠올리고 슬퍼하다 ”

송상기, 유북한기,
1717-09-01
정유년(1717년, 숙종 43) 9월 1일 송상기는 창의문을 나섰다. 탕춘대를 지나면서 지난 정묘년(1687년, 숙종 13년) 봄에 김사긍(金土肯, 김구)과 벗 이중강(李仲剛, 이건명)이 함께 이곳에 유람 왔던 일이 생각났다. 손꼽아 세어보니 30년 전 일로서 김 공은 세상을 떠났다. 옛일을 생각하니 감회를 누를 길이 없다.
무계동의 많은 소나무가 모두 사라졌다. 임술년(1682년, 숙종 8년) 초여름에도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님(송규렴)과 퇴우(退憂, 김수흥)·문곡(文谷, 김수항) 두 외숙을 모시고 농암(農嚴)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이곳을 유람하였다. 지금 나 혼자만 살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소나무도 모두 벌레 때문에 죽었다. 산천도 옛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이 죽은 것만 슬픈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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