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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청렴결백을 사모하다, 경렴당(景濂堂)

따가운 햇볕과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좀 더 느긋한 시간을 즐기기 좋은 계절, 가을이 한층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가을은 외출하기 좋은 날씨지만 강한 자외선에 자주 노출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강한 자외선은 피부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자외선을 피할 수 있는 모자가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근래 모자가 넷플릭스 ‘킹덤’을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자, ‘갓’에 매료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갓’은 단순히 패션 소품이 아니라 ‘옷을 바르게 입고 갓을 바르게 쓴다.’는 의관정제(衣冠整齊)로, 행실을 매일 가다듬으려 했던 선비의 정신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갓을 쓴 선비가 가져야 할 정신을 알아보고자, 청렴결백(淸廉潔白)을 본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경렴당(景濂堂)’ 편액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칭찬하는 곽안방(郭安邦)


이양서원(尼陽書院) 전경(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2호)(출처: 한국국학진흥원_한국의 편액)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명환록(名宦錄)」에 적힌 곽안방에 관한 기록입니다. “마음 쓰는 것과 행신하는 것이 뛰어났고, 한 가지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교유하는 벗이 그 당시의 명류들이어서 어진 사대부가 그 집에 많이 모여들었다. 벼슬 할 때는 청백하기가 빙옥같이 깨끗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필마행장(匹馬行裝)으로 돌아올 때는 나는 듯이 가벼웠다”

곽안방의 자는 여주(汝柱), 본관은 현풍(玄風)입니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세종 말엽에 무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해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렴한 관리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1455년(세조 1) 세조가 집권하는데 군공(軍功)이 인정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그 후 세조 연간에 익산 군수로 발령받아 청백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익산 군수를 마지막으로 고향인 솔례마을(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대리)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습니다.

평생 동안 얼음과 옥 같이 처신을 했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한 필의 말로 고요하고 쓸쓸하게 돌아오니, 백성들이 태수의 행차인 줄을 몰랐다고 전합니다. 또 익산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한 노비가 열쇠를 차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것 또한 관공서의 물건이니 어찌 작고 큰 것을 논하겠는가. 나를 더럽힐 수 없다”라며 바로 돌려보내도록 했습니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 “현어(懸魚)를 실천한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현어’란 관공서에서 선물 받은 고기를 창고에 달아 놓고 떠날 때 가져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리들의 청렴에 비유했습니다.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음양지리의 서적에도 능통했던 그는 현풍의 서쪽 솔례마을에 자리 잡아 거주하면서 “산수가 웅장하고 선명하여 맑은 기운이 모이었으니, 영특한 나의 자손이 반드시 많이 태어나리라. 세상을 울릴 자손이 많이 번성하여 뻗어가는 것이 낙동강과 함께 시종(始終)을 함께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청백리’는 모범 관료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현대에서도 깨끗한 공직자의 표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청백리’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고, 올곧고 깨끗한 관리라는 뜻이며 관직수행능력이 뛰어나고, 청렴(淸廉), 근검(勤儉), 경효(敬孝), 인의 등의 덕목을 두루 갖춘 성리학적 면에 모두 부합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으로는 맹사성, 황희, 최만리, 이현보 등 현재까지 217명의 명단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곽안방의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가 실천한 청백정신은 지금까지 공직자들에게 무한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2정려(旌閭)를 배출한 윤리도덕의 최고가문


현풍곽씨 12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
(출처: 문화재청_국가문화유산포털)


솔례마을은 곽안방이 예언했듯이 세상에서 주목받은 이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한 가문에 충신 1명, 효자 8명, 열부(烈婦) 6명을 표창해 기린 12정문(旌門)이 세워져 있는데, 조선시대 유교문화 사회에서 충·효·열·삼강(三綱)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윤리도덕의 최고 가치였습니다.

곽안방의 현손인 충렬공 곽준은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으로, 왜적 주력부대와 맞서 싸우며 황석산성을 수호하다 중과부족으로 마침내 화를 당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큰아들인 곽이상과 둘째 아들 곽이후가 보호하려 하자 “나는 직책이 있으니 사수를 해야 하지만 너희들은 피난하라”고 했으나, 두 아들은 “아버님이 구국을 위해 죽으려 하시는데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죽는 것이 불가하겠습니까”라면서 호위하다가 함께 참해(斬害)를 당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곽이상의 부인 거창 신씨는 남편을 따라 성안에서 자결하였고, 곽준의 딸로 류문호의 부인인 현풍 곽씨는 친정의 변고를 듣고 싸움터로 나갔다가 그의 남편이 전사하자 바로 목매 자결했습니다. 이러한 오중(五重)의 순사(殉死)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는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는 정문(旌門)을 지어 표창할 것을 명했습니다.

또한 곽재훈은 임진왜란 때 병든 몸으로 네 아들과 함께 달성 비슬산 중턱 산성굴에 숨어 있었는데, 왜적들에게 발각당해 그를 살해하려고 하자, 네 아들이 차례로 호위하다 왜적들의 칼에 목이 잘렸습니다. 마지막에 그만 살아남으니, 왜적들도 그 효성에 감동해 석방하면서 그의 등에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는 글자를 쓴 패를 달아 주어 해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후 굴은 ‘사효자굴’로 불리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정문을 지어 표창했습니다.

이밖에 곽주의 아들 의창·유창 형제의 효행, 열부(烈婦) 광릉이씨·밀성박씨·안동권씨·전의이씨, 효자 곽경성이 12정려의 주인공이며, 모두 곽안방의 후손들입니다.

한 문중에 있었던 일이 전국적으로 주목받아 조정에서 표창을 받고 12정려가 나왔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지켜야 될 마땅한 도리를 지켜 조정에서 포상과 정려하였는데, 이러한 정신은 나라 위한 생각이 엷어지고 가족 간의 정(情)이 멀어져가는 오늘날에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청백리(淸白吏) 곽안방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다


이양서원(尼陽書院)(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2호)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한국의 편액)


경렴당(景濂堂) / 현풍곽씨 포산고가(玄風郭氏 苞山古家) / 39.0×112.0 / 해서(楷書)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한국의 편액)


이양서원(尼陽書院)은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곽안방(郭安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입니다. 이곳의 위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대리 907-3 솔례(率禮) 마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원 강당인 경렴당의 ‘경렴’은 청렴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으로, 곽안방의 청렴결백을 사모하고 본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양서원은 정면 7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맞배지붕인 경렴당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인 사당을 비롯해 8동의 건물이 있습니다. 내삼문과 강당을 동일 축선상에 두고 좌우에 동재·서재를 배치하였으며, 강당 우측에 사당인 ‘청백사(淸白祠)’가 있습니다. 대문인 외삼문 위의 읍청루(挹淸樓)와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해주거나 평소 고자(庫子)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사용한 고직사가 있습니다. 서원의 출입문인 ‘준도문(遵道門)’은 도를 따른다는 의미이고, 출입문의 문루인 읍청루와 강당인 경렴당, 그리고 사당인 청백사 모두 곽안방의 청백 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1463년(세조 9) 청백리에 녹선된 7명 중 한 사람인 곽안방을 주향으로 하여 연일당(燕日堂) 곽지운(郭之雲), 만심재(晩尋齋) 곽규(郭赳), 탁청헌(濯淸軒) 곽황(郭趪)의 4위를 매년 봄가을 2회 봉향에 그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선비는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학식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곧 청백리가 가져야 할 공통된 덕목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본인이 지켜야 될 도리를 가정과 교육기관으로부터 교육받고 학습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곽안방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작은 짐과 말 한필을 타고 소문없이 돌아오며 청백리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나아가 그의 청백리 정신은 후손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쳐 12정려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전국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귀감(龜鑑)이 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기본이 바로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장경제에 익숙해진 경쟁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화목을 지키기 어려운 오늘, 이양서원 강당에 걸린 ‘경렴당’은 청렴결백(淸廉潔白)의 의미가 새삼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정      리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아이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다 - 아들의 관례”

김령, 계암일록,
1621-03-19 ~ 1621-03-20

1621년 3월 19일, 김령의 아들이 관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김령은 아들의 관례를 위해 여러 친지들을 불러 모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기를 베껴 쓰고, 오후가 되기 전에 관례가 치러졌다. 배원선(裴元善)이 찬자(賛者)가 되어주었다. 삼가례(三加禮)를 마치고 가묘(家廟, 한 집안의 사당)에 고유하고 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는 손님에게 상을 들이고 술을 돌리며 조용히 술잔을 주고받아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모두 취했다.
다음날에 김령은 아이를 데리고 방잠 가묘에 가서 배알(拜謁)하고,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에 성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벗의 집에 들르니, “한 말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하였다. 동상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빚은 술이었다.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음에도 여러 벗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철쭉이 한창 피어나 즐길 만했다.

“조카의 관례, 빈으로 참석하다”

김령, 계암일록,
1608-02-15 ~ 1611-03-08

1608년 2월 15일, 국상 때문에 천례(薦禮)를 정지했다. 오후에 임 참봉의 아들 임지경(之敬)이 와서 그의 어른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내가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2월 18일, 임 참봉의 아들이 글을 배우러 왔다.
2월 22일, 오시쯤 임 참봉과 누이의 편지를 보았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 때문이었다.
1611년 3월 6일, 임 참봉의 편지를 보니 8일날 아들의 관례에 초청을 하면서 서신의 의범(儀範)을 빈례로써 하였다. 그 내자되시는 누님이 따로 여종을 보내어 편지로 나를 청했는데 지극히 난처해서 감히 답장을 하지 못했다.
3월 7일, 오시에 임지대(任之大) 군이 갑자기 왔다. 다시 임 참봉 내외의 편지를 보니 나를 초청하는 것이 몹시 간절하였다. 임 군은 어제 저녁에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지금 명을 받들고 왔으니 몹시 미안하였다. 부득이 점심을 먹은 후에 임 군·이실과 함께 비를 무릅쓰고 갔다. 지나가는 곳에 진달래와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빛이 무르익어 넘치니 경치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임 참봉댁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서인들이 활개를 치고 지금 주상은 덕을 잃어 어떤 벼슬아치라도 직언을 하면 즉시 퇴출된다고 한다.
3월 8일, 아침에 홀기를 보니 빠진 부분이 많았는데 어제 의논하여 결정한 것을 쓴 것이었다. 그래서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었다. 나는 힘써 빈을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이실을 찬자로 정했다. 밥을 먹고 행례를 마친 후에 법도대로 술 석 잔을 마셨다. 안으로 들어가 누님을 뵈오니, 창녕 누님도 또한 와 계셨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드디어 주인과 작별하고 사안·민보·덕휘를 차례로 들러보고 이지·이실과 함께 돌아오니 이미 밤이 되었다.


“연경에 다녀온 자들의 의관 - 한 벌의 봄옷과 갓과 띠, 세련되고 훌륭하다”

미상, 계산기정, 1804-03-12 ~

연경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모두 옷을 갈아 입는데, 한 벌의 봄옷에다 갓을 쓰고 띠를 띠니 누구나 모두 의관이 매우 훌륭하고 행동이 자연스러워, 다시는 융복(戎服 군복) 차림으로 치달리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신단 일행이 느지막에 진변헌으로 들어가 망신루(望辰樓)에서 투호(投壺) 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마침 부윤(府尹)이 고을 유생(儒生)들에게 순제(旬題)를 내주어 한창 답안[試券]을 받아 평점(評點)하기로 나도 또한 참가하여 증좌하였다.
13일 아침 통군정으로 해서 다시 환학정(喚鶴亭)으로 올라갔다. 정자는 서문 성 모퉁이에 있는데, 자그마하게 지은 단아한 집으로서 겨우 두 서너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서쪽으론 압록강에 임하고 남쪽으로는 학란봉(鶴卵峯)과 마주했는데, 학란봉은 형상이 마치 알을 품은 학과 같아 자세가 안온하게 펼쳐져 있다. 환학정이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환학정’이란 편액(扁額) 석 자 및 서쪽 처마의 편액 ‘편선루(翩躚樓)’라고 한 것은 판서(判書) 윤사국(尹師國)의 글씨이다.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어두워서야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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